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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문학] 운명과 선택의 길/ 이가림
시에 눈뜸에서 〈빙하기〉까지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빙하기〉는 ‘내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게 한’ 새로운 분수령이 되었다. 그때 이 시가 뽑히지 않았다면, 나는 어쩌면 다른 운명의 실에 이끌리어 또 하나의 낯선 삶의 오솔길로 접어들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김수영 같은 예리한 비평적 촉수를 지닌 시인에 의해 “1960년대 후반에서 이가림이 나온 근처가 새로운 변모의 하나의 분수령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라는 고무적인 평가를 받음으로써 나로서는 상당한 의욕과 생기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이가림 시인(1943.11. 9 ~ 2015. 7. 14)
●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등단. ● 프랑스 루앙대 불문학 박사. ● 주요 시집 《빙하기》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순간의 거울》 《내 마음의 협궤열차》 《바람개비 별》 등과 산문집 《사랑, 삶의 다른 이름》 《미술과 문학의 만남》 《흰 비너스 검은 비너스》 등 상재.
● 역서로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 《물과 꿈》 등 다수. ●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유심작품상, 펜번역문학상, 영랑시문학상, 우현(又玄)예술상 등 수상. ● 파리7대학 객원교수, 인하대 문과대학장, 한국불어불문학회장, 인하대 프랑스문화학과 명예교수 역임
운명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다 그렇듯이, 자신의 뜻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이 지상에 내던져진다. 그리하여 태어나고 싶다고 해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죽고 싶다고 해서 죽을 수 있는 것도 아닌, 기적 같은 신비한 운명의 생명체로 지구라는 떠돌이별에서 살아가게 된다. 나는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豫定調和說)’을 믿지 않지만, 어떤 특정한 시대의 인간 조건, 즉 집단적 운명과 개인적 운명을 짊어지고 태어난다는 점에서, 인간은 운명적 존재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손금에 파인 예정된 운명선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고, 매 순간 자신의 의지적 선택에 의해 ‘되어가는 생성으로서의 존재’이기에, 오히려 주어진 운명에 대항함으로써 팽팽한 실존적 삶을 살 수 있다.
앙드레 말로가 ‘반(反)운명(anti-destin)’이라고 말했을 때의 그 행동의지와 저항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의 궤적을 힘차게 그리는 자기점화(自己點化)의 불꽃이라 할 수 있다.
밋밋하게 흘러간 지리멸렬한 과거의 흔적들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해보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일까. 참다운 의미의 문학적 삶에 대한 기록이 되려면, 자기점화 불꽃의 기록, 치열한 운명과의 싸움의 기록, 즉 ‘반(反)회고록(anti-m?moire)’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의 문학적 출발점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도정 속에서 뚜렷한 ‘반운명’의 순간으로 더듬어볼 만한 일들을 회상해 보려 하니, 빛바랜 회색빛 판화 같은 몇몇 장면들이 떠오를 뿐이다.
그렇지만 나의 작은 회상록이 집단적 운명의 조건을 헤쳐온 개인적 운명의 기록으로서 한 시대 벽화의 세부를 보여줄 수도 있다고 여기면서 감히 ‘나의 삶 나의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내 가난한 문학적 생애의 이야기를 남기고자 한다.
만주 아이의 소년 시절
시간의 굴렁쇠를 굴려 과거로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가노라면, 강보(襁褓)에 싸여 응아 응아 울고 있는 만주 아이의 탯줄로 이어진다. ‘대륙’이라든가 ‘흥아’라든가 하는 이름의 기차로 사흘 밤 나흘 낮을 꼬박 달려가서야 닿는다는 만주 열하(熱河)라는 곳이 내가 태어난 곳이다.
일제 치하의 암울하기 짝이 없던 시절, 아버지께서 선대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전북 정읍을 떠나 만주땅에 가게 되어 엉뚱하게 거기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서울, 평양,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봉천을 지나서 닿게 되는, 현재의 중국 하북성(河北省) 동북부(북경에서 약 250km 떨어져 있음)에 위치해 있는 그곳에 대해 나의 기억으로는 아무것도 떠올릴 수가 없다.
더위에 약한 만주족 출신인 청나라의 강희제(康熙帝)가 즉위 42년(1703)에 짓기 시작, 80여 년의 역사 끝에 완성한 피서산장인 열하행궁(熱河行宮)이 있으며,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로 유명한 그곳을, 나는 언젠가 한 번쯤 찾아가 확인해 보아야 할 출생 현장으로 지금껏 아껴두고 있다.
1943년 겨울에 태어나 8·15해방을 맞아 서울로 옮겨왔다고 하니, 겨우 세 살 된 어린 아기였던 나로서는 기억나는 게 아무것도 없다. 나중에 조금 커서야 어머니나 아버지, 큰집 삼촌 등 집안 어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나의 출생지가 만주라는 걸 알게 되었을 뿐이다.
봄이 오면 소를 옆으로 걸터타고 피리를 불며 밭갈이하러 나가는 농부, 사람의 키보다 더 높이 자란 호밀밭의 물결, 송전선 전주가 늘어서서 바람결에 귀신처럼 울어대는 둑길의 모습들…….
가을걷이가 끝난 뒤 논두렁에 들쥐들이 물어다 놓은 벼 이삭만 주워다 모아도 몇 가마니가 되고, 지독한 추위를 막기 위해 포대기로 동굴 모양을 만들어 그 속에 애기를 눕혀 놓곤 했다는 등 만주에 얽힌 이야기를 들을 때면, 마치 먼 나라의 동화 속에 나오는 꿈같은 풍경처럼 아련하기만 하다.
첫 시집 《빙하기》에 수록돼 있는 〈북(北)〉이라는 작품은 집안 어른들에게서 들은 내 유년의 삽화들을 바탕으로 해서 ‘유추적 상상력’의 힘을 빌려 쓴 만주 아이의 초상이다.
사철 석탄가루를 싣고 오는
열하 승덕(熱河 承德)의 바람 속에 서서 엄마는
홍건적(紅巾賊)같이 무섭기만 한 호밀들의 허리를
쓰러넘기며 쓰러넘기며
부끄러운 달을 마중하였다 멀리
보일 듯 말 듯 움직이는 외길 따라
눈물 나는 행주치마로 가고 있었다
마른 말똥거름 따위 검불 따위
꺼멓게 널린 모닥불의 방천 둑을 지날 때마다
어찌나 키 큰 송전선주가 잉잉 울었던지
귀신처럼 무서웠다 지연(紙鳶)이 목매달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이던가 애견(愛犬) 쫑이 죽고
빨간 새끼들만 남아 기어다니는 헛간
나도 한 마리 강아지 되어 바자니던 것을
오줌싸개의 나라에서는 자주 폭군이 되어
활 쏘는 이순신의 손자의 손자
한 웃음소리에도 어둠이 무너지고
한 돌팔매에도 참새떼들은 떨어졌다
노을 속 참깨를 뿌린듯이
—〈북(北)〉 전문
나는 소년 시절을 줄곤 전주에서 보냈다. 전주중앙초등학교와 전주서중학교를 거쳐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주를 떠난 적이 없었다. 따라서 나의 실제적인 고향은 전주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 집은 지금은 전북대학교 농과대학 건물이 들어서서 그 자취조차 없어져 버렸지만, 앞쪽으로는 덕진호수가 내려다보이며 뒤편 멀리 이씨 왕릉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둘러쳐진 금암동에 있었다.
그런데 나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금암동의 우리 집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고 주로 전동 성당 바로 앞에 있는 외가에서 다녔다. 금암동이 외곽에 있는 데다가 학교가 다소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외할아버지와 어머니가 시내 중심가인 전동에서 중앙초등학교에 다니도록 했다. 내 밑으로 두 동생이 있었는데, 나만 외가에서 학교에 다니도록 한 것은 아마도 장손에 대한 암암리의 배려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외할아버지는 전북 정읍군 옹동면 면장을 하시다가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전주로 본거지를 옮기셨다. 전동 성당 앞에 있는 꽤 큰 일본식 집에 사셨는데, 별채로 있는 방 하나를 내게 주시고 거기서 공부하도록 했다. 나는 방학 때를 제외하곤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 방에서 지냈다.
오십여 발자국 정도만 떼어 놓으면 성당 문앞에 닿게 되어 있는 외가에서 살았던 나는 동네 개구쟁이 녀석들과 ‘빵울치기(헝겊으로 동그랗게 만든 공을 사용해서 하는 일종의 야구놀이)’를 하거나 딱지치기, 탄피 따먹기 놀이를 할 때, 늘 이 성당 앞마당이나 뒤뜰에서 놀았다. 마땅한 공터가 없었던 우리에게 성당은 놀이터로 아주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얌전하게 학교 공부를 잘해서 사범학교를 나와 장차 교사가 되기를 바라셨던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의 뜻과는 달리, 나는 꽤나 개구쟁이로 거칠게 놀았던 것 같다.
여름날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는 철길을 시오리나 걸어서 전주천 상류인 각시바위나 서방바위까지 가서 은피라미 새끼들처럼 즐거이 헤엄치며 놀았다. 그런가 하면 겨울철 눈이 무릎까지 쌓이는 날 꿩, 토끼를 잡는답시고 기린봉까지 올라가 뒤지기도 했다.
과수원의 가시 울타리 밑으로 스며들어 복숭아를 훔쳐 먹기도 하고, ‘왕눈깔’이라는 소매치기의 꼬임에 빠져 남문시장 바닥을 슬슬 배회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기억을 바탕으로 해서 연작시 〈물총새잡이의 기억〉을 훗날 쓰게 된다.
황토 비탈에
복숭아 과수원이 있었다
거기 보숭보숭한 백도(白桃)빛 얼굴의
낙구네 누나가 살고 있었는데
그 누나의 뺨이 유난히 고운 것은
머잖아 죽게 될
폐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방 바위 지나
각시 바위에 다다르자마자
우리 개구쟁이 녀석들은
헐떡이는 개구리마냥
첨벙첨벙 냅다 냇물에 뛰어들어
서리해 온 풋복숭아를
주둥이가 찢어지게 물어뜯었다
살갗이 수밀도 껍질처럼
아프게 벗겨지던 여름
오줌 멀리 싸기에서 이긴 날의
낄낄대던 참외배꼽이여!
—〈물총새잡이의 기억·2〉 전문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면서부터는 전동 외갓집과 금암동 집을 필요에 따라 왔다갔다했다. 약간 높은 언덕바지에 있었던 금암동 집 마루에서 까치발로 서서 바라보면 일천여 년 전 후백제를 건국하고 전주에 도읍을 정한 견훤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덕진호수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나의 고교 시절 은사이며 처음 시에 눈을 뜨게 한 신석정 선생의 시비와 동학 농민운동을 주도한 전봉준 선생의 흉상이 세워져 있는 덕진호수는 어쩌면 내 소년 시절의 꿈을 키워준 운명의 장소인지도 모른다. 그 호수에 노을이 촛불처럼 피어오를 때, 과수원 사이로 난 탱자나무 울타리 길로 자전거를 타고 마구 달리던 고교 시절의 모습이 떠오른다. 특히 단오절 무렵 활짝 핀 연꽃 향기가 우리 집에까지 풍겨올 때, 취향정의 높다란 소나무 가지에 그네를 매어놓고 노는 처녀애들의 모습을 얼마나 눈 시리게 바라보았던가. 여드름 꽃 피는 사춘기의 소년에게 호수와 연꽃과 노을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장엄한 슬픔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시에 눈뜸
사실 나는 소년 시절에 ‘시인’이나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중·고등학교 때에도 특별활동 시간에 미술반을 택할 정도로 그림에 취미가 있었다. 그런 취향으로 인해, 나는 한때 화가의 꿈을 키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의 은밀한 꿈이었을 뿐, 내가 다니던 전주고교의 명문대 진학을 위한 입시 위주의 공부 분위기나 지향점에는 전혀 어긋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감히 미술대학에 들어가고 싶다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마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나(생텍쥐페리 자신)’가 어른들의 충고에 따라 “보아뱀 그림을 집어치우고 지리, 역사, 산수, 문법에 취미를” 붙일 수밖에 없었듯이, 나 또한 하는 수 없이 화가로서의 길을 일찌감치 접었어야 했다고나 할까. 그래도 내게 있어 “그림은 그리움”이어서 《미술과 문학의 만남》(2000) 같은 책을 펴내게 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나의 전주고교 은사들 중에 ‘촛불’의 시인으로 이름이 나 있던 신석정 선생을 비롯해서 김해강 선생, 백양촌 신근 선생, 독일어를 가르치던 차재철 선생 등이 계셨다. 이분들에게서 은연중 받은 감화 탓으로, 나는 1학년 무렵부터 시집, 소설, 에세이, 사상서 등을 닥치는 대로 읽게 되었다. 그 두서없는 독서 경험이 어떤 어렴풋한 문학에 눈뜸으로 이끄는 첫 촉매제가 됐지 않았나 생각된다. 어쩌면 그때의 순정한 가슴에 박힌 감동적 독서의 파편 혹은 사금파리들이 지금도 나의 문학적 레미니상스(r?miniscence, 무의식적 차용)로 부지불식간에 나타나는지도 모를 일이다.
1961년 가을, 그러니까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무렵이라고 기억된다. 그때 전북대학교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전국남녀 고교문예콩쿠르가 있었는데, 나는 문예반 같은 데 기웃거린 적이 없었음에도 남몰래 시를 써서 응모했다.
허풍선이 같은 나의 고교 시절이지만 그래도 기념할 만한 무엇인가를 흔적으로 남겨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제법 의젓한 속셈에서였다. 그런데 이러한 사제(私製) 기념첩에 보탬이라도 되라는 듯이 다행히 당선되었다.
양철지붕이 널려 있는 소도시의
철로 부근
꽁초를 윽깨리며
이제는 훌훌히 흩어졌다 모인 생활의
퀴퀴한 에트랑제.
잃어진 시간의 주변에서
어둠이 내리는 지역.
여름,
가을,
겨울이 지쳐서 가고
어쩌면 북녀(北女)가 돌아간 후조(候鳥)의 기록.
고달픈
간밤의 꿈을 새우기도 전에
기관차는
기적(汽笛)을 먹고 살아가는 끄름의 수난(受難)이여.
녹슨 기중기의 날개에 할딱이는
철로부근의 계절
해가 지고,
나와 나의 이웃들이
밤에는 더 슬픈 태양을 지고 가는
멍들은 주막의 향수……
머리를 떨어뜨린 채
어느 건널목
가래침을 꽁초에 뭉개고는
또
그는 웃었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
해가 지고 또 달이 찼다……
—〈철로 부근(鐵路附近)〉 전문
이 시는 내가 간직하고 있는 소년기의 유일한 작품으로, 어떤 문학적 가능성의 맹아(萌芽)를 엿볼 수 있는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그래서 지난해에 내놓은 나의 활판인쇄 시선집 《지금, 언제나 지금》(시월, 2011)에도 100편 가운데 최초의 시로 수록했던 것이다.
그때 심사를 맡으셨던 신석정 선생께서 어느 날인가 교무실로 나를 불러 대뜸 하신다는 말씀이 “이것 너 누구 꺼 표절한 거 아냐?” 하시는 것이었다. “아아…… 아니에요. 제가 얼마나 끙끙 앓으면서 썼는데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랬더니 석정 선생께서 “내가 요새 《자유문학》지에 추천한 니 선배들 것보다 니께 더 좋아야.” 하시며 몹시 기뻐하셨다. 그 후 전주 노송동, 신우대가 심어져 있는 석정 선생 댁에 자주 놀러가 선생을 뵐 수 있었다.
앞으로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재주를 타고난 것 같다는 말씀에 다소 우쭐해져서 시가 몇 편 쓰이면 찾아가 보여 드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 큰 손으로 내 오른쪽 귀를 아프게 잡아당기며 “짜아식, 제법이야.” 하시며 시원스레 웃으시던 모습이 마치 어제 일인 것만 같다.
프랑스 문학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품은 채 나는 1962년 봄 성균관대 문리대 불문과에 입학했다. ‘해외문학파’의 한 분이며 《몽테뉴 수상록》과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번역자로 그 이름을 막연히 알고 있던 손우성 교수의 강의는 늘 열정적이어서 무엇인가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장익봉 교수의 ‘영시 강독’ 월탄 박종화 교수의 ‘소설론’ 이가원 교수의 ‘한문강독’ 김구용 교수의 ‘시론’ 등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빈 시간을 이용하여 가까운 동숭동의 서울 문리대에 가서 박종홍 교수의 ‘인식론’과 젊은 강사로 인기가 있던 이어령 교수의 ‘문학연구방법론’ 등도 몰래 도강했다. 그러나 내가 꿈꾸고 기대했던 대학 생활과는 동떨어진 것이어서 허탈하기만 했다.
500년 묵은 은행나무가 서 있는 명륜당에서 서투른 발음으로나마 불어를 소리 내어 읽어보기도 했지만, 원전의 즐거움 속으로 빠져들어 가기에는 나 자신 너무나 기초적인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그래도 기질이 엇비슷한 몇몇 친구들, 장성중(전 충북대 문과대학장), 한무(전 배재대 대학원장), 오수연(재불 사업가) 등과 어울려 일 년쯤 지내다 보니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정도는 더듬더듬 읽어내게끔 되었다.
2학년에 올라갔을 때, 국문과에 다니던 주문돈, 강우식, 김준식 등을 만나게 되었다. 강우식은 움푹 파인 눈매에다 질질 끄는 주문진 말투로 다짜고짜 다가와 사귀자고 덤비는 듯한 괴짜였는데, 몇 차례 막걸리 술판을 벌인 뒤 아주 가깝게 지냈다. 그 역시 아직 시단에 정식으로 데뷔한 상태는 아니었으나, 동인지 《지하(地下)》 같은 데 발표한 시들이 이미 상당 수준의 개성적인 목소리를 내보이고 있었다. 뒷골목 술집을 누비는 데는 우리 불문과 친구들보다 발이 넓었으므로 그가 이끄는 대로 명륜시장 골목, 청계천의 값싼 술집에 스며들어 가 밤새껏 마신 일도 있다.
당시 학생기자였던 김용(전 안동문화방송 사장) 선배의 권유로 나는 대학신문의 삽화를 맡아 그렸는데, 상당한 고료를 받아 그 무렵 막 출간된 《이상 전집》도 사고 불문과 친구들에게 막걸리를 사준 기억이 난다.
신춘문예 도전―〈돌의 언어〉
1963년 10월 초 각 일간지에 발표된 신춘문예 현상모집 사고(社告)를 보자, 나는 물에 젖은 손으로 전기를 만진 듯한 뜨거운 전율이 내 몸속을 휘돌아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날부터 신춘문예라는 열병에 걸려, 로댕의 조각에서 영감을 얻은 돌의 주제를 한 편의 시로 만들기 위해 거의 한 달가량 무병(巫病)을 앓다시피 했다.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가작 입선한 〈돌의 언어〉라는 시는 21세의 나이에 쓴 투박하지만 야심에 찬 작품으로, 나로 하여금 시인의 길로 걸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1
그들은 웅크린 채 울고 있었다.
2
무서운 폭풍 속에 던져진 스스로의 무게를 미칠 듯이, 괴로운 극광(極光)을 향하여 소리치다 소리치다 굳어간 형자(形姿). 어느 날엔가 숨 가쁜 노여움을 잔인하게 모으고 핏멍울 엉긴 자기를 참으로 응시(凝視)해 보려는가. 학살(虐殺)하려는가. 아아 도망(逃亡)을 치려는가.
3
어쩌다가 흐느적이는 용암의 검은 파열(破裂)이 솟구쳐 소리 없이 울음을 깨무는 표정으로 뜨겁게 피어오른 죽음의 돌, 젊은 날개가 새로이 퍼덕이려는 라자루스의 찬란한 내부(內部)여.
피를 쏟아라, 비상(飛翔)하라, 선고(宣告)당한 수인(囚人)의 정물(靜物)같은 동작(動作)을 깨뜨리기 위하여.
어쩌다가 징그러운 대륙(大陸)의 물어뜯는 몸부림이 뒤채어 황홀하게 생명을 불사르는 욕정으로 순간 치켜오른 번뇌의 돌, 피투성이 꽃들이 순순히 터져 나려는 라자루스의 처절한 심장이여.
강물 넘쳐라, 균열(龜裂)져라, 통곡하라, 선고(宣告)당한 수인(囚人)의 기도(祈禱)같은 중심을 확인하기 위하여.
4
지금 숨막히는 중량(重量)의 손은 무수히 그 황토흙 밭허리를 뒤덮어 상흔(傷痕)이 흐르던 가시철망의 흩어진 탄피(彈皮)와 어둔 바람 속에 쓰러져 누운 주검들의 하얀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몸 저리는 표효의 손은 지금 수없이 그 황량한 벌판을 찢어져 깃발이 나부끼던 토치카의 아련한 육성과 피보라 안개 속에 까무러져 잠든 초병(哨兵)들의 캄캄한 참호를 생각하고 있다.
5
돌.
6
……해맑은 대낮이 주린 배때기 속에 괴어 부글부글 몸 둘레로 넘치거나, 말 못할 피곤의 달밤 조개 껍데기들이 죽어 널려있는 오지(奧地)의 자갈밭을 헤매거나, 나는 이 절대(絶對)한 두 개의 침몰(沈沒)해가는 운명 곁에 돌아와 대리석처럼 야윈 나의 두 손을 받쳐 든 채, 아아, 나는 어둠 안에 일그러진 얼굴을 파묻었다.
7
한 덩이 운석의 내부로부터 차고 쓰린 질식(室息)이 공간 속을 휘몰아, 왁자하게 제왕(帝王)의 목울음을 태우며 녹아 빚어진 바다.
위대한 적멸(寂滅) 속 들끓는 바다의 처참한 고함(高喊) 소리는 이미 그 누구의 귓가에도 들리지 않는 들리지 않는 물결.
—〈돌의 언어(言語)〉 전문
당시 선자였던 조지훈 선생은 심사평에서 〈돌의 언어〉가 주제의 깊이와 언어의 심중미(深重味)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했다. “선자들이 마지막 뽑아든 작품은 세 편, 이가림의 〈돌의 언어〉와 조태일의 〈아침 선박〉과 김준식의 〈가을 뜨락에서〉였다. 이 세 편은 주제와 언어가 각기 특색이 있는 별반(別般)의 작품 세계에서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다. 주제의 깊이와 언어의 심중미는 〈돌의 언어〉가 낫고, 건실한 시상과 신선미는 〈아침 선박〉이 더 좋았으며, 서정의 심서(心緖)와 감각미는 〈가을 뜨락에서〉가 뛰어났다.
그러나 〈돌의 언어〉는 언어가 정련(精練)되지 못했고, 〈가을 뜨락에서〉는 솜씨가 매혹적이긴 해도 시 세계가 아무래도 가벼운 느낌이어서 이 두 가지 면의 지양과 균형을 성취한 점에서나 파탄 없이 끌고 가는 조사(措辭)의 호흡에 있어 〈아침 선박〉이 솟아난 게 사실이다. 그래서 선자는 〈아침 선박〉을 당선작으로 하고 〈아침 뜨락에서〉와 〈돌의 언어〉를 가작으로 결정할 것에 합의하였다.”
시상식 날 만나게 된 조태일은 허름한 워커를 신은 꺼벙한 차림의 대학생이었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희대 국문과에 다니고 있다는 그와 나는 어색하게 악수를 나누며 처음으로 인사를 했다.
평론 부문에 〈에고의 자기점화〉라는 글로 당선한 염무웅과도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 〈경향신문〉의 특집부장으로 일하고 있던 〈풍선기(風船期)〉의 시인 신동문 선생께서 로댕의 작품 〈손〉 사진과 함께 투고한 내 원고가 퍽 인상적이었다며 가작에 머무르고 만 것을 아깝게 생각한다고 격려해 주었다.
젊은 날의 분수령―〈빙하기〉
그해 나는 하숙을 했다가 자취를 했다가 또 매식을 했다가 하는 서울 생활이 고달프기도 하고 학교의 공부도 시들해져, 일단 병역 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책과 이불 보따리를 전주로 부치고 얼마간 빈둥거리다가 6월의 햇살이 따갑게 퍼부어 내리는 논산훈련소로 자원입대해 들어갔다. 군대 생활 중에는 거의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시니, 프랑스 문학이니, 낭만이니, 지성이니, 우정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가루가 되어 흩어져 버리고 어처구니없는 명령과 복종만 있었다.
강원도 화천에서의 일등병 생활에 이어, 카투사로 넘어오게 된 나는 덤프트럭 운전병이 되었다. 제대 날짜가 가까워져 고참 병장이 되었을 때야 외출도 자주 할 수 있었고 어느 정도 나만의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의정부 가까운 미군부대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던 나는 거의 매일 저녁 외출증을 받아서 시내로 나갔다. 당일 자정까지만 귀대하면 되는 것이어서 찻집이며 영화관이며 술집 등을 어슬렁거리다가 돌아오는 것이었다. 겨울밤 차가운 탐조등이 비치는 철조망을 따라 걸어 들어올 때마다 한번 활짝 피어 보지 못한 내 젊음이 ‘이름도 없이’ 스러져가는 것만 같은 비애를 느꼈다.
그러던 중, 1965년 10월 무렵 나는 다시 신춘문예 병에 걸렸다. 어느 날 일간지에 난 신춘문예 사고(社告)들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보자마자 열병 환자처럼 들뜨기 시작했다. 입대하기 전, 그러니까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서 가작에 머물렀던 아쉬움이 내 가슴을 사정없이 방망이질 쳤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신춘문예 도전은 매일 밤 의정부의 한 허름한 찻집 삐걱대는 의자와 자정이 넘은 막사의 한 모퉁이에서 은밀히 불을 뿜게 되었다. 내 젊은 날의 사랑과 고뇌와 꿈의 이야기를 원고지에 조각해 보려고 외롭게 외롭게 싸웠다. 마침내 나는 〈빙하기〉를 비롯한 몇 편의 작품을 〈동아일보〉에 보냈는데, 운 좋게 크리스마스 전날 당선 통지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조지훈, 김현승 선생 두 분의 심사 후기를 읽다가 공교롭게도 전주고교 동기 동창인 강인한의 작품 〈1965〉와 나의 작품 〈빙하기〉가 최후 경쟁 작품으로 끝까지 다투었음을 알게 되었다. 강인한과 나는 성격과 기질이 판이하였음에도, 한때는 도저히 남에게 발설할 수 없는 충격적인 비밀까지도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사이기도 했기에, 나는 다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오직 한 작품만을 뽑도록 되어 있는 신춘문예의 제도를 탓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 헐벗은 비행장 옆
낡은 예레미야 병원 가까이
스물아홉 살의 강한 그대가 죽어 있었지.
장 바띠스트 클라망스
스토브조차 꺼진 다락방안 추운 빙벽(氷壁) 밑에서
검은 목탄(木炭)으로 뎃상한 그대 어둔 얼굴을 보고 있으면
킬리만자로의 눈 속에 묻혀 있는 표범 이마,
빛나는 대리석 토르소의 흰 손이 떠오르지.
지금 낡은 예례미아 병원 가까이의 지붕에도
눈은 내리고
겨울이 빈 나무허리를 쓸며 있는 때.
캄캄한 안개 속
침몰하여 가는 내 선박(船泊)은
이제 고달픈 닻을 내리어 정박하고서
축축히 꿈의 이슬에 잠자는 영원(永遠)인 것을.
짙은 밤 부둣가 한 모퉁이로
내 아무렇게나 혼자서 떠나보네.
갈색 머리 흑인 여자의 서러운 이빨같이
서걱이는 먼 겨울 밤바다 살갗은
유리의 달에 부딪쳐 바스러지고
죽음보다 고적한 외투 속의
내 사랑은
두 주일이나 그냥 있는 젖빛 엽서
나목(裸木) 끝에 마지막 한 장 가랑잎새로 지는 것을
씁쓸히 웃으며 있네.
지난 쌩 마르땡의 여름 밤주막에서
빨갛게 등불을 켜 달고
여린 별빛들이 우리 잔등에 떨어져 와닿는,
들끓는 소주(燒酒)를 독하게 마시며 울었지.
장 바띠스트 클라망스
그대 건강한 의사가 되겠다고 여름내 엄청난 야망은 살아
자기 안의 한 무더기 폭약에 방화(放火)도 했지만
참혹하게 파손되어 간 내실이었음을.
어느 저녁 식탁에선가, 눈물 글썽이게 하는
그대 슬픈 소식을 건네 들었지.
지금은
옷고름처럼 나부끼는 달빛에 젖어
마른 갯벌 바닥으로 배회하다
무릎까지 빠지는 맨발의, 괴로운 밤 게(蟹)가 되어서 돌아오는
조금씩 미쳐가며 나는 무서운 취안(醉眼)인 채
황폐한 자갈밭을 건너
흐린 가스등 그늘이 우울한 시장가에서
눈은 내리고
하얀 수의(囚衣) 입은 천사처럼 잠시 죽어봤으면 생각하다가
포효(咆哮)의 거대한 불꽃으로나 멸망하기를 소망하다가,
아아 자꾸만 목이 메이고 싶어지는
내 고단한 목관(木管)의 노래는 떨려
오뇌의 회오리바람에 은빛 음계(音階)들이 머리칼마다
흩날리며 있네.
그 드뷔시 찻집 유리속의 금발이 출렁이는 인형은
젖은 눈이 성에 낀 창밖을 보고
수런대는 목소리들 잔(盞)둘레로 넘쳐나
비듬처럼 쌓여가는데
잊히인 의자 아래 이랑져오는 음악의 꽃빛 눈부시는
바람결 소리여.
이 침전(沈澱)하는 장송(葬送의 파도가에 앉아서 단 한번
고운 색깔이 아롱진 어안(魚眼)의 나는
뜨거운 두 손으로 피곤한 이마를 묻어보네.
—〈빙하기(氷河期) ―장 바띠스트 클라망스에게〉 전문
어찌했거나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빙하기〉는 ‘내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게 한’ 새로운 분수령이 되었다. 그때 이 시가 뽑히지 않았다면, 나는 어쩌면 다른 운명의 실에 이끌리어 또 하나의 낯선 삶의 오솔길로 접어들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김수영 같은 예리한 비평적 촉수를 지닌 시인에 의해 “1960년대 후반에서 이가림이 나온 근처가 새로운 변모의 하나의 분수령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라는 고무적인 평가를 받음으로써 나로서는 상당한 의욕과 생기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등단한 지 7년이 지난 1973년 첫 시집 《빙하기(氷河期)》를 출간했다. 요즘의 출판 사정과는 달리, 시집 한 권 내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에 호화롭다고 할 수 있는 하드커버 장정의 ‘처녀시집’을 간행한 것인지라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당시 대전 MBC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었던 시절이라 대전권의 박용래, 한성기, 임강빈, 정훈, 최원규, 조남익, 홍희표 시인 등과 신춘시 동인이었던 이근배, 조태일 시인 등 서울의 여러 문우들이 참석했다. 특히 〈동아일보〉 신춘문예 심사를 맡아 문단 데뷔의 대부가 되셨던 다형(茶兄) 김현승 선생께서 영하 10도가 넘는 매서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대전까지 내려오셔서 따스한 격려를 해주신 기억이 한 장의 뚜렷한 판화로 새겨져 있다.
김현승 선생과의 인연에 대해 조금 더 예기하자면, 저 1960년대 말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68년 겨울이던가 69년 겨울이던가 박봉우, 이동주, 강인섭, 이근배, 이성부, 조태일, 권오운, 하근찬 등의 시인, 소설가들이 어울려 서울의 변두리 수색동 ‘커피’ 향기로 찌들은 선생 댁에 놀러 가면 그야말로 향기로운 진짜 커피를 한 사발씩 내놓으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겨울 까마귀같이 외롭게 서실에 앉아서 조용조용 시에 대해 말씀해 주시던 카랑카랑한 ‘대쪽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다. 그 무렵 다형 선생은 답답하고 한심한 시대를 잠시 잊어보시려는 듯 우리가 가르쳐준 ‘섰다’라는 화투놀이에 재미를 붙여 종종 밤을 새우시기도 했다.
그런 다형 선생을 보다 가까이 만나 뵐 수 있게 된 것은, 내가 TV프로듀서 일을 하면서 숭전대 강사로 강단에 서게 된 1974년부터였다. 마침 선생께서 숭전대 교수로 재직하고 계셨는데, 서울캠퍼스에는 국문과가 개설되어 있지 않은 탓에 매주 대전캠퍼스로 내려오셔서 ‘시론’ 등의 전공 강의를 하셨다. 그래서 자연스레 다형 선생과 자주 저녁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영화도 여러 번 보게 되었다. 한번은 파란만장한 귀향 이야기를 그린 외국영화(〈25시〉와 유사한 내용의 영화였는데 제목은 기억나지 않음)를 상영 중간쯤부터 보게 되었는데, 한참 영화를 보시던 선생께서 손수건을 꺼내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영화관을 나와서 내가 무심코 “영화가 상당히 감동적이었나 봐요?” 하고 말하자 선생은 “나이가 드니까, 조금만 슬픈 걸 봐도 눈물이 잘 나와.” 하고 약간 계면쩍은 듯 웃으셨다. 평소 헤프게 눈물 짜는 감상적 허무주의를 극도로 경계해 온 선생의 시적 지향과는 전혀 다른 인간적 면모를 그때 언뜻 엿본 듯했다.
1975년 다형 선생께서 대학 채플의 기도 중에 쓰러지신 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아, 기독교적 상상력의 시인다운 행복한 하늘의 부름을 받으셨구나.’ 하고 나직이 혼잣말을 했다.
당시 한 신문에 황급히 쓴 〈사랑과 고통의 대리인―김현승 선생을 추억하여〉라는 추도의 글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선생의 인간과 신에 대한 공공적 연대감을 노래한 많은 시편들은 우리 시대를 넘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조용한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게 할 것이며 앞으로 올 시인들에게 높은 예술성과 탁월한 상상력을 이월가치(移越價値)로 넘겨주게 될 것이다.”
⸺월간《유심》201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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