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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10. 15. 큐티
누가복음 6:12 ~ 19
열두 제자를 세우심
관찰 :
1) 기도하시고 사도를 세우시다
- 12절.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a. "이 때에“는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갈릴리에서 전도하시는 동안, 특히 5장과 6장 11절까지의 사건들이 있은 후를 가리킵니다.
b. 11절과 관련하여 마태는 예수께서 무리들의 음모를 깨달았을 때에 이 지방을 떠나셨다고 기록하는데(마 12:15), 그렇다면 “이 때”는 예수께서 그 지방을 떠나신 직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정확히 어느 때 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c.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밤이 새도록, 완전 철야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있어서 기도하시며 하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특별히 중요한 일들에 대해서는 밤을 새는 기도를 더욱 자주하셨습니다.
d. “밤이 새도록”(διανυκτερεύω, 디아뉘크테류오)은 ‘밤을 새다’의 미완료 능동태 분사로서 오랜 지속을 강조하는 용법입니다. 원래 이 단어는 의학적 용어입니다. 70인경에서는 가끔 사용되지만, 신약에는 이 구절에서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밤을 새워 병간호를 하는 경우에 사용하던 단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밤을 새워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 13절.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a. 예수님은 열둘로 충분하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그 무지렁이 같은 부족한 이들을 데리고 모든 인류의 구원을 꿈꾸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b. 열둘은 구약의 지파의 수가 열둘인 것을 통해서도 암시되듯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완전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의 출현을 상징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c. 이들이 주님께 찾아와서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들을 “택하신” 것입니다. “사도”(ἀπόστολος, 아포스톨로스)는 ‘아포스텔로’(ἀποστέλλω, 보내다)에서 나온 말로 문자적으로는 특별한 명령과 권세를 받아 보냄을 받은 이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 가운데 열둘을 택하셔서 다른 무리들과 구별하시고자 ‘사도’라고 칭하신 것입니다.
2) 열두 제자의 소개
- 14절.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a. “베드로”. 비록 맨 처음으로 예수께 부름 받은 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열 두 사도의 목록 중에서 항상 맨 앞에 나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사도들 중에서 인정된 수제자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이름인 시몬은 그의 본명으로서 '듣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그를 제자로 삼으신 후 붙여주신 이름으로, 헬라어로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요 1:42에서 그에게 붙여진 '게바'라는 이름은 아람어로서 역시 '베드로'라는 이름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b.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 갈릴리 바닷가의 벳새다 출신의 어부로서 세레 요한의 제자가 되었다가(요 1:35, 40),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즉시 그를 따르게 된 사람입니다(마 4:19, 20). 그는 그의 형제 베드로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 후 그 형 베드로를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요 12:20 ~ 22). 성경에서 안드레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주님의 제자로서 보이지 않게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요 6:8, 9; 12:20 ~ 22; 행 1:13, 14). ”안드레“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남자'라는 뜻입니다. 형 베드로와 같이 상남자가 아니었겠는가 짐작해 봅니다.
c. “야고보와 요한”. 이들은 예수의 가장 사랑받던 세 제자 중의 두 명입니다. 마가는 이들에게 더 자세한 말을 덧붙여서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들'이라는 이름을 더했습니다(막 3:17). 그러나 누가는 아무런 수식이 없이 이들을 소개하는데 그것은 이미 5:10에서 그들을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로 언급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고보”는 '발꿈치를 잡음'이란 뜻이고 “요한”은 '여호와는 자비하시다'는 뜻입니다.
d. “빌립”. 안드레나 시몬의 고향과 같은 벳새다 출신입니다. 주를 처음 만난후 친구 나다나엘을 주님께 인도했습니다(요 1:45,46).
e. “바돌로매”. 히브리식으로는 '바르-탈마이'(תַּלמַי - בַּר)인데 이는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바돌로매는 요 1:46의 '나다나엘'과 동일 인물로 봅니다.
f. “마태”. 마가와 누가에 의하면 그는 '레위'로 소개되는데(눅 5:27-29; 막 2:13, 14) 그 의미는 '연합하다'입니다.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고 난 후에 히브리식 이름인 '레위'에서 헬라식 이름인 '마태'로 바꾼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마태는 자신을 구원하시고 사도로 택하신 예수의 은혜에 감사하고픈 심정에서자신을 '세리 마태'라고 숨김없이 표현했습니다(마 9:9,10).
g. “도마”. 세 번에 걸쳐 이 이름 다음에 '디두모'라는 헬라식의 이름이 따라 나옵니다(6:14 ~ 16; 마 10:2 ~ 4; 막 3:16 ~ 19). 이것은 당시에 헬라어를 사용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가 바로 이 '디두모'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마'는 히브리명으로 '쌍동이'라는 뜻입니다.
h.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여 '작은 야고보'로도 불리웠습니다. 이 야고보에 대해서는 신약에서 이름만 나오고 있습니다(10:3; 막 3:18). 다만 전설에 의하면 그가 페르시아에서 선교했다는 것과 십자가 순교의 죽음을 당했다는 것만 전해집니다.
i. “셀롯이라 하는 시몬”.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구별하기 위하여 '가나안 사람 시몬'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를 '셀롯이라 하는 시몬'이라고 했습니다. 마태와 마가가 호칭한 '가나안 사람'이란 가나안 지방 출신의 시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인'이란 뜻의 히브리어 '카나'(קַנָּא)에서 유래한 형용사입니다. 따라서 누가가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셀롯'이라는 헬라 명칭은 '열심당원'(Zealot)을 뜻하는데 시몬이 열심당원들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셀롯'이라는 이 한마디 속에서 열심으로 불타는 열광적인 한 유대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열심당은 유대의 반로마적 애국 집단으로서 유대의 독립을 위해 폭력적인 반정부 활동을 감행 했던 무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살인과 방화를 일삼는가 하면 심지어는 약탈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셀롯이라 하는 시몬’은 바로 이러한 무리들 가운데 속해 있었던 사람입니다.
j. “야고보의 아들 유다”. 마태와 마가는 '다대오'라고 부릅니다. RSV에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Judas the son of James), KJV에는 야고보의 형제 유다(Judas the brother of James)라고 되어 있습니다. 공관복음에는 그의 말이나 활동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요한복음의 최후의 만찬석에서 가룟인 아닌 유다가 예수께 질문한 적이 있는데(요 14:22) 이 제자가 야고보의 아들 유다, 곧 다대오일 가능성이 있을 뿐입니다.
k.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 가룟은 그가 태어난 마을 그리욧의 헬라어 형태로서 '그리욧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 가룟이란 이름은 그의 아버지 시몬에게도 붙여졌습니다(요 6:71; 13:2, 26). 그리욧은 '기럇'과 똑같은 말로서 기럇여아림에 있는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그중 하나가 모압에 있고(암 2:2) 다른 하나는 에돔 가까이 남동쪽 해변에 위치한 유다에 있습니다(수 15:25). ‘가룟 유다’가 언제 어떻게 하여 제자가 되었는가는 성경 어디에서도 언급이 없습니다. 그는 공관복음의 열 두 사도의 명단에 맨 나중에 돈궤를 맡은 자로서(요 12:6) 신뢰와 신망을 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그의 마음에 들어가 예수님을 팔 생각을 갖도록 유혹했습니다(요 13:2). 결국 그는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향유를 낭비한다고 항의(요 12:5)한 정의감을 내팽개친 채 겨우 은 삼십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을 팔아넘겼습니다. 당시에 유다가 받은 은 삼십이란 기껏해야 짐승에게 받혀 죽은 노예의 몸 값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출 21:32).
3) 이어지는 예수님의 치유사역
- 17절.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a.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매우 많게 되었습니다. 먼 지방에서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고자 모여들었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b. “평지에 서시니” 여기서의 평지는 마 5:1의 “산 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평지”(ἐπί τόπου πεδινόυ, 에피 토투 페디누)'는 반드시 산 아랫 곳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산 중턱에 형성된 평지를 뜻하기도 합니다. 누가의 기록은 예수께서 산 위의 높은 곳에서 기도하시고 12제자를 선택하신 뒤 산 아래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 오신 사실을 언급한 것입니다.
c. 그리고 마태의 기록은 사방 각지에서 몰려든 군중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산 위를 향하여 올라간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단의 두 일행이 산언저리의 어느 한 평평한 곳에서 만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이 두 복음서 간의 모순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 18절.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a. 육신의 질병 뿐만이 아니라 귀신에게 고난 받는 영적 질병도 고침을 베푸셨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뿐이십니다.
- 19절.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a. 예수님을 만짐으로 병을 고치는 기사는 8:43 ~ 46에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자체에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과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하나가 되어 빚어진 결과가 된 것입니다.
b.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께 몰려온 병자들의 무리 개개인이 예수를 통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준비되어 있었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만진 모든 병자들이 나음을 얻은 것은 그들을 불쌍히 보신 예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르침 :
1) 열 두 제자를 부르시는 과정에서 주님은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셔서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밤이 맞도록 고민하시며 하나님과 기도하며 상의하신 것입니다. 아마도 주님은 ‘이 사람이 좋을까요? 저 사람이 필요한가요? 이 사람은 이래서 좋고, 저 사람은 저런 가능성이 있습니다.’이렇게 상의를 하시면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멘토링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멘티가 멘토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멘토가 멘티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2) 열 두 제자 시몬(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시몬(셀롯), 야고보의 아들 유다, 가룟 유다. 더 많은 제자들이 있었으나 주님은 열둘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숫자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열둘의 모든 성품과 성향을 파악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심지어 그 중에는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이해 할 수 없는 예수님의 제자를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하나님의 선하신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했기에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서 십자가에 달리는 일에 쓰임받은 유다를 재평가하고 존경해야 한다고 말하는 우스꽝스러운 사람도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인 것이고, 가룟 유다가 하나님의 허락이 아닌, 허용 속에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죄와 자살하는 죄악을 더한 것일 뿐입니다. 가룟 유다가 없어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자신의 죄악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그 일에 사탄으로 말미암아 사용당한 것입니다.
3) 예수님은 그 후에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서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유대 사방, 예루살렘, 두로,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많은 백성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 모든 병자들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다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더러운 귀신들과 질병들이 지금은 없어졌습니까? 지금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더러운 귀신들과 질병들이 떠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렇게 더러운 귀신을 내쫓으시고 질병을 치유하시는 능력을 베푸시는 이유는 단지 귀신들린 인생을 잠시 치유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어짜피 죽는 인생의 수명을 수년 혹은 십 수년 더 연장해 주시기 위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뒤에 이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곧, 능력의 드러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말씀이 바르게 증거됨으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적용 :
1) 기도하시는 예수님은 내가 가장 본받아야 하는 영역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역자가 얼마나 저주스러운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기도의 본을 보이셨고, 주님의 제자들이 그것을 따를 것을 원하셨습니다. 오죽하면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주기도문)마져 있겠습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2) 열두 제자의 면면은 참으로 갑갑합니다. 그들을 통하여 인류의 구원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들을 기초로 세우시고, 심지어 배반하는 자가 있었을 지라도, 그 모든 것들을 통하여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주님의 제자들이 세워 가셨습니다. 성령의 은혜로 부족한 이들이 세워져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영광을 드러내시게 되었다. 나 같은 부족한 자를 들어서 일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워지는 모습을 통하여 새삼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찬양합니다.
3) 산 중턱에서 만난 무리들을 치유해 주시는 주님의 은혜. 모든 일들에게 주님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진짜 복인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 역시 주님의 은혜로 치유받아야 할 많은 영역이 있습니다. 육체의 가시 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도 있고, 기질적인 부족함도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전인격적으로 구원하셨기에 그 모든 것들을 다 다루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아닌 주님이 나를 다루실 때, 나의 모든 연약함은 회복되어지게 됩니다. 내가 온전히 회복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나를 내어드림이 언제나 중요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