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한다는 건 지겨운 일일 수 밖에 없다. 왠지 일하는 게 좋아서 미친듯이 찾아다니며 죽을 때까지 일하는 변태가 아니라면 모두가 똑같이 지겹다는 사실에 공감할 것이다. 태초에 신이 아담에게 내린 ‘형벌’이었으니 이것은 당근 지겨울 수 밖에. 우리는 런던 생활을 통해 한국에서는 하지 않던 이상얄딱꾸리 허접한 일까지도 돈만 준다면 마다하지 않고 척척 해내고 있다. 여기서 그런식으로 고생하며 인생의 경험과 자립심을 함양해나가기도 하지만(오오, 경험, 자립심, 함양….정말 싫어하는 단어다..오오 이런 단어를 쓰게 되다니 일을 너무 많이 했나보다 -_-;;) 일이란 확실히 이 동네 가을의 폭죽소리처럼 지겨운 게 사실이다.
우리들은 물가가 비싼 딴 나라에서 공부한다는 죄목(?) 때문에 그런, 꽤나 지겹고 가혹한 형벌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일을 할 때만, 느끼는 재미같은 게 반드시 있다. 이건 놀면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재미다.
자, 일을 할 때의 지겨움이라면 말해봐야 똥만 마렵고
오늘은 일을 할 때만 느끼는 좋은 측면들, 혹은 보람들에 대해서만 나열해 보겠다.
나는 늘 같은 시간에 버스를 타니까 마주치는 사람들도 거의 비슷하고 심지어 일주일 내내 똑같은 차장을 만날 때도 있다. 이런 건 그래서 뭐 어쨌다고?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 묘하고 흐뭇한 일상성의 쾌락을 선사해 준다. 일상이란 단조롭고 반복되고 지겨운 것이기는 하지만 런던, 이 빌어먹을 낯선 땅에 와서 이런 식으로 일상성을 찾아서 느낀다는 건 잘 짜여진, 안정된 구성의 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런던을 이루는 구성원중에 나도 하나라는 느낌이 드는 것. 거기에 개뿔 보람 비슷한 게 있다.
자주 마주치는 차장의 스타일, 혹은 타입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도 재미다.
내 쪽은, 흰 수염이 난 흑인 아저씨인데 이제 일을 시작한지 한 달이 넘어가자, 그 흑인 아저씨와 내가 만난지도 한달이 넘어가서 그 아저씨의 스타일을 안다.
2층 버스를 타면 나는 항상 2층에 올라가는데 그 아저씨는 리버풀을 지나 뱅크 역을 지난 다음 항상 2층에 표를 검사하러 올라온다. 이상한 블루스 음악 같은 걸 휘파람으로 불면서 말이다.
나는 보통 버스를 타면 책을 읽는데, 책에, 전자사전에, 가방에, 다 들고 버스패스까지 꺼내려면 항상 손이 모자라기 망정이다. 그러나 그 아저씨의 스타일을 아니까 이젠 뱅크 역을 지날 때까지는 책에만 집중하고 뱅크역이 나오면 표를 꺼내 무릎에 올려놓는다.
그러면 어김없이 흰수염이 난 흑인 아저씨가 지나간다.
그는 내 무릎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cheers라고 발음한다. 그의 cheers 발음은 s- 를 길게 끄는 게 특징이다. 바람 새는 소리처럼.
나의 Thanks 발음도 s- 를 길게 끄는 게 특징이다.
치얼스으으으 ... 땡스으으으.. 매일아침 반복되는 바람새는 소리는 흥미롭다. 그렇지 않은가? (헉, 내가 뭘 믿고 반문하는거지?)
자, 다른 얘기다. 모든 스토오리, 특히 연애사란 대개 자주 만나고 자주 보고 자주 부딪히다가 사랑이 싹트고 꽃피고 지랄발광을 하는게 아니었던가?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왠만하면 또다른 연애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일을 하다보면 항상 규칙적으로 마주쳐야 하는 사람들이 있게 되기 마련이라서 가끔 사랑을 모락모락 재배하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우리 가게와 계약된 인쇄, 복사, 프린트 가게가 있는데 거기엔 굉장히 아름답고 예쁜 백인 브리티쉬가 근무한다.
나는 가끔식 거기 빌 용지나, 홍보물을 찾으러 간다. 그 곳에 갈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행복하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예쁜 백인 브리티쉬이기 때문이다. 백인 인종에 대한 경외심 같은 건 있을리가 없지만, 어쨌든 그 인종이 아무래도 다른 인종에 비해 디자인이 좀 낫기 때문에 나는 백인을 좋아하는 편이다.
오늘은 찾아와야 할 물건이 박스로 된 무거운 것이었다. 그녀는 무거워서 자기가 들지 못하니 같이 지하에 내려가자고 했다. 지하는 좁았고 인쇄기들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인쇄기들의 요란한 소리와 함께 좁아터진 지하의 좁아터진 박스 보관소에서 그녀와 단 둘이 서 있자니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보다 심장 뛰는 소리가 더 커 애매한 심정이 되었다.
그녀와 나는 지하에 나란히 서서 박스를 찾았다. 그리고 아주 긴시간이 지나간 듯한 짧은 시간이 지난 후 박스를 찾아냈고 내가 꺼내 들었다. 그런데 지하는 좁았으므로 그녀가 먼저 나가야 했는데 내가 뒤쪽에 있어서 잠깐 마주본 상태로 어깨가 닿을 듯 부딪히려는 자세가 되었다.
그녀와 나는 서로 웃었다. 그런 종류의 웃음은 500파운드 짜리다.
한국이라면 혹시 애인 있어요? 로 시작해서 몇 가지 질문들을 던져 전화번호를 따내고 저녁식사를 같이한다던가 하는 약속을 잡아버리는 ‘작업’을 하기 좋은 상태가 되는 웃음이기 때문이다. (근데 500파운드로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뭐 좀 썰고 와인이나 뭐 한잔 하고 호텔이나 뭐 그런 델 갈 돈이 되나? – 아, 호텔은 그냥 호텔 바나 커피숍 같은 걸 말하는 것이다.-_-)
그러나 아직 ‘작업’을 걸 만큼의 영어 실력이 안된다는 점이 애석하다. 어쩌면 작업들어갔다가 개무시를 당하느니 말 못해서 개무시 안 당하는 게 건강에 좋을 수도 있다.
꼭 여자가 아니더라도 일하면서는 이래저래 여러가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키워가는 인맥의 든든함도 일하면서 느끼는 보람이 아닐까 한다.
게다가 일을 너무 열심히 하면 학원 같은 델 땡땡이 쳐도 왠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그런 보람은 굉장히 짭짤한 것이다. (단, 다음 연장 때 출석률 따위는 알게뭐야, 라고 생각한다면)
아, 글이 턱없이 길어지는데다가 배도 고프고 졸립다. 내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말을 꺼냈더라,,,,
아, 보람에 대한 이야기였지. 흠, 흠.
마지막으로 일하면서 느끼는 보람 중 1등은 역시나 ‘돈’의 뿌듯함이 아닐 수 없다.
통장에 들어오는 페이는 뭐 방값에 식비에 교통비에 쥐어 뜯기고 뭐 남는 것도 없지만 그래도 조금 남는 걸 모으는 재미라거나 그걸로 자신을 위해 근사한 PUB의 맥주를 선사한다거나 하면 그 보람은 가공할 위력을 지닌다.
나는 남는 돈으로 이번에 브레인트리 프리포트 아울렛가서 아버지에게 선물할 버버리 모자를 하나 샀다.
내 평생에 내가 아버지의 선물을 사게 되는 장면이 끼워지게 될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내 삶의 각본, 연출을 담당한 신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거참 죽어라 싸우기만 하고 살아왔던 아버지인데도(나와 아부지는 심지어 치고받고 싸우기도 여러 번이었다..-_-…싸우면서 정들었나 보다.)선물이란 걸 사고나자 몹시 보람스러웠다. 사람들이 가족안에서 느끼는 행복이란게 이런 보람 비슷한 뭉탱이들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어쨌든 일하다보니 피곤해서 공부도 게을러지고 몸도 피곤에 찌들고 스트레스성 변비도 생기고 비염과 무좀도 악화됐지만 <보람>이라는 게 반드시 있다. 앞서 말한 인생의 경험이니 자립심이니 그런 것도 생기고, 뭔가 한국사회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이곳만의 사회성을 온몸으로 체감한다는 꽤 쓸만한 소득도 챙기는 셈이다.
예를들면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있지 않은가? 여기선 정말 귀천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지 않다고 본다. 자기보다 못한 직업을 가진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습관이 하루빨리 우리들 몸에 배어서 한국사회에 포자처럼 뿌려 날려지게 된다면 좋겠다.
아무리 찾아도 ‘귀천’ 이란 직업은 없으니 말이다.
하여간 일하면서는 뭔가 느끼는 게 많다. 돈 많아서 일 안해도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일단 그 사람들이 나쁘다는 건 아닌데 그런 사람들은 이런 보람을 모를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결코 나쁘다는 건 아니다… 보람이 밥을 먹여주진 않으니까.
아 오늘은, 한국에서 발행되는 잡지 중, 방송국 스크립터들만 읽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이상한 잡지, <보람은 여기에> 같은 글을 쓰게 되어서 부끄럽다.
자, 일자리 없는 분들은 하루빨리 좋은 자리들 잘 찾아서 많은 보람을 느끼시고 일하는 사람들은 힘들다고 쫄지말고 그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런던생활을 성공 쪽으로 잘 콘트롤 해 나가시길 빌며. 끝.
첫댓글 ^^.... 저도 어서 보람을 찾고 귀천은 버렸으면 좋겠어요~아름다운 영국생활 되길 바라며..-LoVeLy~♡
글 재미있으세여... (님은 재미 없겠지만ㅡㅡ) 와~ 멋져요.. 영국 가보고 싶네요 우선 고등학교나 졸업해야겠지요! ㅡㅡ 건강하게 생활하십시요...
15번 진짜로 안오나요? ㅋㅋ 닉네임을 바꾸셨네요...
'15번 진짜 안와'님 저 왕 팬이예요..^^ 제가 하루키를 정말 좋아하는데요..님의 글 읽으면 -기분 나쁘다면 죄송한 말씀이지만..-30년 정도 젊어진 하루키의 글을 읽는 것 같아요. 그래서 글 읽는 제 표정이 ^__________^ 이렇게 된답니다.
감사.^^...요새 하루끼 책 영문버전을 번역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졸라 멋진 4월아침 100% 짱 기집애 만나기> 이 짧은 단편 한편도 지금 일주일 째 번역하고 있답니다. 태어나서 한번도 스파게티를 먹어보지 않았으면서 까르보나라를 만들고 있는듯한 기분입니다.
"졸라 멋진 4월아침 100% 짱 기집애 만나기" 정말 웃겨죽는 줄 알았습니다..푸하하하 정말 표현력 좋으십니다요..님이 번역한 '졸라 멋진..'단편을 꼭 읽어보고 싶어요!!
저도 언젠가 영국에가서 님처럼 보람을 느껴보고 싶네요^^꿈을 심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님처럼 항상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야 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