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롭게 결단하라 >
요한복음 9장에는 한 소경이 나온다. 그 소경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멸시의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것이 보통 사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위로를 받겠다고 혹은 상담을 받겠다고 사람에게 쉽게 자기의 약점을 털어놓지 말라. 그렇게 털어놓고 오히려 상처 받고 후회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사람한테 구걸하러 쪽박 차고 가면 대개 가진 쪽박마저 깨진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일뿐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는 사람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때 제자들이 조롱과 멸시의 눈길로 소경을 보며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 이 소경은 무슨 죄를 지어 소경이 되었습니까? 자기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 죄입니까?” 그처럼 사람은 잘못된 것의 원인을 찾아 과거로 향한다. 심지어는 부모와 조상의 죄까지 들먹인다. 그때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그의 소경됨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그 말씀은 과거의 문제보다 미래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사람은 과거지향형이지만 예수님은 미래지향형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과거가 아닌 오늘 이후의 삶에 관심을 가지신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사람들은 돌로 치려고 할 때 예수님은 그녀의 과거를 묻지 않았다. 그처럼 과거를 묻지 말고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 과거에 집착하면 하나님이 새로운 멋진 일을 행하지 않는다.
본문 1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했다. 그런데 전제조건이 있다. 그것은 본문 18절 말씀처럼 이전 일을 기억하지 않고 옛적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새로운 역사를 원하면 자신도 과거의 일들을 털어버리라는 것이다. 본문 19절 하반부 말씀에 나오는 광야에 길이 생기고 사막에 강이 생기는 기적도 그냥 생기지 않는다. 자신이 거룩한 비전을 따라 새롭게 결단해야 한다.
오늘 새롭게 결단하라. “이제 내 가정, 직장, 사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보다 많이 선교하며 살리라!” 인생은 선택이고 결단이다. 결단을 내리면 결딴나지 않고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결딴난다. “언젠가 하나님이 나를 쓰시겠지.”라고 생각하지 말라. 결단할 때는 내일이나 언젠가 하지 말고 오늘 해야 인물이 된다. 살면서 환경을 탓하지 말라. 진짜 탓해야 할 것은 결단이 없는 것이다. 인생의 역풍을 순풍으로 만드는 첫 발걸음이 무엇인가? 바로 결단이다.
밤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오르면 아래에 아름다운 불빛들이 보인다. 그 아름다운 불빛들 속에 삶의 고통과 슬픔이 얼마나 많이 섞여 있겠는가? 그래도 높이 올라가 보면 삶의 고통과 슬픔조차도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소품임을 깨닫는다. 그처럼 높이 보고 멀리 보라. 그것도 일종의 영안이다. 그런 영안이 있으면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세상은 달라지지 않아도 인생은 달라진다.
가끔 전도하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목사님! 나중에 형편이 풀리면 나갈게요.” 그러나 형편이 풀리면 오히려 교회에 못 나간다. 먼저 결단하고 교회에 나가야 형편이 풀린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목사님! 건강하면 하나님의 일을 할게요.” 그러나 병약할 때도 먼저 결단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이 건강도 주신다. 세상이 변화되면 내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어야 세상이 변화된다.
< 역전 인생을 만드는 길 >
이제 남이 변화되고 환경이 변화되길 바라기 전에 자신이 먼저 변화의 길을 모색하고 새롭게 출발하라. 그러면 어떤 환경도 극복하고 멋진 역전 인생을 만들어낼 수 있다. 역전 인생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정체성을 확립하라
역전 인생을 원하면 “내가 누구인가?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에 대한 뚜렷한 정체의식이 있어야 한다. 왜 시련이 생기는가? 우유부단을 버리라는 신호이다. 우유부단은 축복의 제일 적이다. 우유부단은 죄가 아닌 것 같은 죄이다. 왜냐하면 자기 가능성을 크게 사장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련 중에도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않으면 시련은 계속되고, 정체성이 없는 매력 없는 인생에게는 축복과 성공도 찾아오지 않는다.
우리 교회는 2008년 초, 센터 공사가 막 끝날 무렵에 큰 시련을 당했다. 그때 단체로 등록했던 사람이 단체로 나가면서 기존 교인들도 휩쓸려 나갔다. 그래서 출석 교인과 재정이 3분의 1로 줄었다. 그때 연로하신 권사님들을 중심으로 소수의 사람만 앉은 썰렁한 재단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하나님! 이제 연로하신 권사님들 중심으로 다시 제단을 일으켜보겠습니다. 사막에 샘이 흐르는 역전의 기적을 이루게 하소서!” 그때 신기하게도 마음의 불안은 하나도 없었다. 그 이유는 첫째, 거대한 온라인 사역과 기도후원자들이 있었고, 둘째, 큰 비전 때문에 낙심할 시간조차 없었고, 셋째, 그 시련이 목적 있는 시련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때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나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세요.” 그런데 “하나님 뜻대로 하세요!”라는 말은 사실상 “될 대로 되라!”는 말입니다. 오래 전에 유명한 “케세라 세라!”란 팝송이 있었다. 그 뜻은 “될 대로 되라!”는 뜻이다.
하나님 뜻 안에 있으면서 “케세라 세라!” 하고 나가면 누가 질리는가? 사단이 질린다. 하나님만 믿고 "될 대로 되라!“고 나가는데 사단이 어떻게 질리지 않겠는가? 결국 그 풍파가 지나고 금방 문제가 잠잠해졌다. 그 다음부터는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바로 썰렁한 분위기와의 싸움이었다. 그 썰렁한 분위기에 질식해 사람들이 계속 빠졌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될 대로 되라!“ 하고 나갔다.
그 분위기가 극적으로 반전된 때가 있었다. 작년 초에 한 성도님이 꼭 이사 가야 할 형편인데 이사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목회 감각적으로 느꼈다. “이제부터 부흥의 기운이 싹트겠구나!” 그때 부흥의 기운을 느끼면서 한 가지 결심을 했다. 그것은 정체성을 분명히 하자는 결심이었다.
나는 그 동안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The 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 출신 목사이면서도 장로교 목사처럼 목회했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복음주의 선교교단이고 3만 5천 교회를 가진 대 교단을 한국에서 모른다는 이유로 숨길 이유가 없었다. 장로교는 전 세계에서 한국과 스코틀랜드 두 나라에서만 가장 큰 교단이지만 기독교 선교연맹은 홍콩, 필리핀, 베트남, 캐나다, 그리고 남미의 여러 나라에서는 가장 큰 건전한 복음주의 교단이다. 그런 세계적인 교단을 감출 이유가 없었다.
그때부터 교단의 정체성을 확실히 드러내기로 결심하고 “우리 교회는 한국 최초의 기독교 선교연맹 교단 교회다!”라는 사실을 예배 때와 성경공부 시간 때마다 수시로 드러냈다. 그 동안의 우유부단과 어정쩡한 자세를 떨쳐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교회의 비전에 동감한 성도들이 하나둘 늘어났고 하나님이 새로운 좋은 일꾼을 더해주셨다. 그루터기에서 새 싹이 나고 교회가 이전보다 훨씬 건강해지고 강건해지는 것을 보면서 인생에서 정체성 문제가 그토록 중요한 문제인지를 나이 50이 되고 목회 20년이 되어야 깨달았다.
살면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세우라. 나는 2008년의 시련을 통해 얻은 경험으로 2가지를 수시로 성경공부 때마다 강조했다. “첫째, 우리 교회는 신천지와 같은 이단은 절대 사절한다. 둘째, 우리 교회는 교회에서 장사하거나 계를 하거나 돈놀이를 하거나 다단계를 하는 것도 절대 사절한다.“ 그 말에 다단계 하는 사람들이 상처 입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뜻 안에서 교회를 지키는 것이 더 소중했다.
사랑과 우유부단은 다른 것이다. 이제 우유부단을 버리고 “내가 왜 이곳에 있을까? 여기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고 믿고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라. 본문 21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찬송을 받으시려고 이 땅에 우리를 보내셨다. 그런 분명한 사명의식과 정체성이 있어야 그때부터 인생은 오르막길이 된다. 사람은 정체성이 분명한 만큼 강해지고, 담대해지고, 넉넉해지고, 복된 인생이 된다.
2. 자기의 소유를 알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