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秋史)와 완당(阮堂)(1) 빈섬 이상국(秋史에 미치다 著者)
추사는 언제부터 추사였을까. 그리고 언제까지 추사였을까. 스물 네 살에 연경에 다녀온 뒤 완원을 사모하여 완당이라는 호를 썼고, 옹방강을 기려 보담재(‘담계(옹방강의 호)를 보배롭게 여기는 집)라는 별칭을 쓰기도 했고 둘을 합쳐 담연재(’담계‘와, 연경실이라는 호를 쓴 완원의 결합이다)라고도 자칭했다. 그 외에도 추사는 100여개의 닉네임을 만들어 그때그때의 자신을 표현했다. 그의 관인이나 관서로 채택된 수많은 호(號)들은 지식인의 허영을 일견 비치기도 하지만, 그의 내면 깊숙이 잠재하는 자아에 대한 고민을 엿보게도 해준다. 호를 여러 개 쓰는 것이 당시의 유행이었다고는 하지만, 자기에 관한 호명을 자주 바꾼 것은 정체성에 관한 번민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굴절로 점철된 그의 삶의 상황들을 드러내는 긴급한 표현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추사와 완당은 그의 대표적인 호라고 할 만하다.
후세 사람들은 대개 그를 완당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추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완당선생전집이나 국역완당전집, 혹은 유홍준의 완당평전 등은 완당을 취했고, 간송미술관의 최완수가 펴낸 ‘한국의 미’ 시리즈에선 ‘추사 김정희’라고 쓰고 있다. 최완수의 문하에서 그의 회갑을 기념하여 낸 책 이름은 ‘추사와 그의 시대’이다. 후지츠카의 글을 번역해서 낸 책은 ‘추사 김정희 또다른 얼굴’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예산의 옛집은 ‘추사고택’이고, 그의 사당에 걸린 친구 권돈인의 글씨는 ‘추사영실(秋史影室)’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의 글씨를 부를 때엔 ‘완당체’라고 부르지 않고 ‘추사체’라고만 부른다. 완당과 추사에는 미묘한 구분이 있는 것일까.
(과천 주암동 과지초당의 전시물 세한도)
그의 스승 박제가는 연경에 갔을 때 담계 옹방강의 서재에서 강덕량(江德量)이라는 사람을 만난다. 덕량은 옹방강에게 화도사 사리탑 글씨의 탁본의 진본을 준, 유명한 수집가였다. 박제가와 강덕량은 서로 마음이 통하여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덕량의 자(字)가 추사(秋史)였다. 연경서 돌아온 박제가는 16세 소년인 김정희에게 아마도 입이 닳도록 강추사 이야기를 했을 것이며 저 화도사 탁본이야기도 했을 것이다. 강추사는 비판(碑板)과 서화, 그리고 고전(古錢)을 모으는 취미가 남달랐다. 조선의 선비는 강추사가 보여주는 금석 속의 옛글씨들에 깊이 매료되었을 것이다. 박제가의 ‘연경잡절(燕京雜絶)’에 있는 시들은 강추사에게 사로잡힌 영혼의 노래들이다.
복애강추사 명현수적향(復愛江秋史 名賢手蹟香) 다시 강추사가 그립네, 유명한 사람들이 쓴 글씨의 향기가 나네
자신흉중고고도(自信胸中考古圖) 수간응첩편가구(愁看膺帖遍街衢) 정녕기어강추사(丁寧寄語江秋史) 원우인서재구무(元祐人書再?無) 스스로 믿기를 가슴 속에서 옛 그림을 생각하네 길거리에서 늘 근심스러이 가슴 속의 글씨첩을 보네 정녕 강추사에게 말을 붙인다면 다시 볼 수 없는 소동파 글씨일세(원우는 송나라 철종 때의 연호이다)
석여강추사(昔與江秋史) 수오담계실(數晤覃溪室) 기문여벽사(奇文與僻事) 십징불일실(十徵不一失) 지난날 강추사를 몇 번 옹방강의 서재에서 만났네 희한한 글과 이상한 이야기 열 개를 불러 하나도 안 잊었네
김정희가 추사라는 호를 쓰게 된 것과 그의 스승 박제가가 강추사를 그리워한 것은 우연의 일치일지 모른다. 하지만, 박제가가 이 소년에게 호를 지어준 것이라면, 강추사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정희를 추사라고 호칭하는 것이 보이는 건 조강(曹江, 자는 옥수(玉水)이며 호는 석계(石谿))이라는 사람의 글에서이다. 조강은 추사보다 다섯 살이 더 많은 사람이었는데, 박제가를 비롯한 조선 사람들의 입을 통해 추사를 알고 있었다.
“조선에 자를 추사(秋史)라고 쓰는 김정희선생이 있는데, 나이는 스물 네 살이며 세상을 향한 뜻이 결연하다고 한다.”
조강은 이렇게 말한 뒤에 김정희가 읊은 ‘개연기별상(慨然起別想)’이란 시를 소개한다. 제자의 이 시를 중국 사람들에게 자랑한 사람은 박제가이므로 조강이 김정희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박제가가 사망하는 해인 1805년 이전일 것이다. 그때 추사 나이는 19세였다. 조강은 김정희의 호(號)를 자(字)로 잘못 알고 있긴 했지만, 김정희가 10대 때부터 중국에 추사라는 호칭으로 소개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09년 추사가 입연을 했을 때는 중국의 강추사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추사라는 호는 박제가가 붙였을 가능성이 있다. 강추사를 그리워했던 그가 제자에게 같은 호를 붙여주는 건 부자연스럽지 않다. 자신이 지어준 그 호를 중국에 소개하며 조선에도 고증에 눈밝은 젊은 인재가 있음을 강조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만난 청나라 학자들은 모두 그를 추사로 불렀다. 1810년 1월 옹방강이 써준 ‘유당(酉堂)’(추사 부친 김노경의 호이다)이란 대자(大字) 글씨에는 ‘추사 진사’라는 쓴 협서가 보이고 이 해 2월1일 북경 법원사에서 열린 추사 송별연을 그린 화가 주학년(朱鶴年)의 그림에도 ‘김추사 선생’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연경에서 돌아온 뒤에도 줄곧 추사로 불렸던 듯 하다. 1812년 옹방강이 추사에게 보내준 현판글씨 ‘시암(詩盦)’에도 ‘추사진사를 위하여’라고 쓰고 있다. 옹방강의 아들 옹수곤이 보낸 ‘홍두산장(紅豆山莊)’에서도 그를 가리켜 추사라고 하고 있다. 연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친구처럼 지냈던 황산 김유근이 선물한 ‘괴석도(怪石圖)’에도 추사인형(仁兄)이라고 말하고 있다. 1820년(추사 35세)에 쓴 행서대련인 ‘직성유궐하(直聲留闕下)’에도 추사 김정희라고 관기하고 있다. 김정희가 연경에 가기 이전부터 이미 '추사'로 불렸고 연행 이후에도 그 호칭이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호가 다른 것과는 달리 평생을 관통하는 정체성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었다는 점을 웅변한다.
추사(秋史)와 완당(阮堂)(2) 빈섬 이상국(秋史에 미치다 著者)
추사가 메인브랜드를 완당으로 바꾸는 것은 제주 유배 시절부터가 아닐까 한다. 완당이란 호를 지은 것은 완원을 만난 직후였지만, 그것을 자신의 ‘아이디’로 굳힌 것은 30년이 지나서인듯 하다. 물론 그 중간에 완당이라는 호칭을 쓰기도 했겠지만 그것은 다양한 멀티아이디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데 제주 시절에 그렸던 ‘세한도(歲寒圖)’는 그의 국제적 명성을 드높인 계기가 되었다. 제자인 이상적이 그 그림을 들고 연경에 들어가 청나라의 지식인 16명에게 제(題)와 찬(贊)을 받는다. 1845년 1월 20일의 일이다. 이 세한도의 관서에는 ‘완당(阮堂)’이라고 쓰고 있다. 제와 찬을 쓴 청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김추사선생으로 부르고 있지만 말이다. 세한도는 중국사람들에게 그를 추사가 아닌 완당으로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제자 화가인 허유가 그린 ‘해천일립상(海天一笠像)’에도 완당선생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그림은 제주도에 유배 중인 스승을 위로하기 위해 추사가 좋아했던 ‘동파입극도’(소동파가 나막신 신은 그림, 송나라 이용면이 그렸다)를 살짝 바꿔 그린 그림이다.
추사는 유배에서 돌아온 뒤에는 완당노인, 혹은 노완(老阮) 등으로 자신을 표현하기도 한다. 말년에는 그것조차 무겁게 느껴졌는지, 그냥 과천노인이나 노과(老果), 청관산인(靑冠山人, 청계산과 관악산 사이에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과칠십(果七十), 칠십일과(七十一果) 등으로 허허로운 분위기를 띤다.
추사와 완당 그리고 과천노인에 이르는 그의 호들은, 그의 삶과 꿈을 드러내는 비밀스러운 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추사는 어떤 의미로 지어진 것일까. 가을 추(秋)와 역사 사(史), 두 글자는 서로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우선 온도가 같다. 가을은 서늘하며 역사 또한 냉철하게 기술되어야 하는 글이다. 추상같은 엄격함이 그 두 글자에선 함께 배어나온다. 이런 점에서 등석여의 글씨를 보고 추사가 다시 쓴 ‘춘풍추수’의 뒷문장은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추수문장불염진(秋水文章不染塵). 역사를 기록한 글은 가을물과 같아서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
박제가는 이 뛰어난 귀족천재가 세상의 어리석음을 바로잡아주기를 원했을 것이다. 자신이 신분의 질곡에 묶여 감히 하지 못했던 것들까지도 이 제자는 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추사의 어린 시절 이름은 원춘(元春)이었다. 이 ‘봄의 첫날’을 ‘가을의 역사’로 보완한 셈이다. 봄날에서 가을로의 이동은 추사의 삶의 풍경을 그림같이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과천시 주암동 과지초당(瓜地草堂)
‘사야(史野)’라는 말은 ‘史’의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케 한다. ‘사’는 잘 정리된 것이며 ‘야’는 자연 그대로의 것이다. 추사는 세상의 기준을 바꿨고 틀린 것들을 바로잡았다. 너무 ‘서늘한 가을’이었기에 시대와 세상은 그를 품지 못했다. 그가 불편했다. 그를 예찬하면서도 어딘가에 가둬놓아야만 안심을 했다. 예산에 있는 그의 집안 원찰(願刹)인 화암사에는 ‘추수루(秋水樓)’가 있고, 서울 통의동의 집 근처에는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迎秋門)’이 있다.
그의 글씨가 ‘추사체’로 통했던 것은, 그 호가 20대때 이미 국제적인 브랜드였기 때문일 것이다. 24세 때의 연경 체류는 ‘추사’ 김정희를 국제적으로 각인시키는 계기였을 것이다. 완당이라는 호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제주 유배 시절이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치고 추사 글씨 한점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왕까지도 나서서 글씨를 요구할 정도로 ‘추사 붐’이 일었다. 중국의 수집가와 학자들도 추사체 글씨를 얻고 싶어서 목을 쭉 빼서 조선을 바라보던 때였다. 그런데 추사가 중국과 조선의 고금(古今)을 넘나들며 전예해행을 섭렵하고 마침내 일가(一家)를 이루는 때는 그 무렵이었다. 스스로를 완당이라고 적극적으로 칭하기 시작한 그때, 추사체는 피어난다. 그러니 ‘완당체’로 부름직한데, 추사의 기억이 워낙 강렬했던 ‘팬’들이 그 글씨를 계속 추사체로 불렀던 듯 하다.
추사가 완당으로 바뀌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추사는 웃고 있을 때는 인자해보였지만, 틀린 것을 바로잡거나 논박을 펼칠 때는 가을 논바닥을 얼려버리는 무서리같아서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고 한다. ‘추사’라는 말에는 그런 기운이 들어있다. 그 사나움과 타협할 줄 모르는 엄격주의가 그를 제주도의 벼랑까지 오게 만들었다는 인식이, 그에게 없었을까. 완당은 중국 학자를 사모하는 의미를 담은지라 모화(慕華)의 기미가 있긴 하다. 사실 그의 중국 숭배는 평생을 관통하는 신념이었기에 ‘국가 주체성’이라는 지금 관점으로 매도하는 건 적절치 않을지도 모른다. 추사에서 완당으로 옮겨오는 그의 정체성은, 겸허와 부드러움이 아닐까. 완당은 어감도 동글동글하다. 역사라는 거대한 건물에서 ‘당(堂)’이라는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도 있다. 무엇보다도 삼십년전 스승 완원에게서 보았던 끝없는 공부의 열정을 다시 환기하는 의미가 크지 않았을까. 기본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듯 공부를 하자. 제주 시절 그가 책을 보내달라고 사람들을 붙잡고 얼마나 부탁을 많이 하던가? 바로 저 ‘완당 정신’이 그의 글씨와 학문과 관점을 난숙(爛熟)하게 하는 힘이 아니었을까.
제주에서 돌아온 뒤 추사는 ‘늙은 완당(老阮)’이 되었다. 64세 때 서울로 돌아왔지만 2년 뒤엔 다시 북청으로 내쫓긴다. 당시의 권력 쪽에서는 추사가 너무 유명해서 위험한 인물이었다. 노완 시절의 그는, 정치적 절망을 내면의 허허로움으로 이겨내고 있지 않았나 싶다. 그의 글씨는 이미 법식의 경계를 툭 틔워, 괴(怪)를 느끼게 할 만큼 자유롭고 질박하게 내달리고 있었다. 유학자로서 평생 동안 관심을 지녔던 불교의 경계 속으로 마침내 들어앉는 것도 이 무렵이다. 입으로 지어지는 온갖 변설들의 허망함을 깨닫고 유마거사처럼 입을 닫는 시절이다. 물론 뜻은 그렇지만 어찌 괴롭고 답답하지 않았으랴. 추사, 완당이라는 호의 무게조차도 버겁게 느껴졌던 그의 어깨에 내렸을 쓸쓸한 햇살을 상상해본다. 청계산과 관악산 자락에 숨은 이름없는 노인의 어깨 위에 '가을의 역사(秋史)'는 때마침 짙어가는 가을에 기울어간다. 1856년 10월10일 71세 추사 졸(卒)(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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