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우리집 뜨락에 피는 꽃들입니다.


오지랖이 넓은 건지? 성미가 급한 건지?
수냐 / 이선자
지난 3월 중순, 2박 3일로 함부르크에 가서 뮤지컬 공연 보고 돌아오면서,
문득 14년 전의 일이 주마등 처럼 떠 올랐다.
위암 말기 수술을 받은 환자로, 살짝 바람만 불어도 금방 쓰러질 것 같은 아주 작고
왜소한 체구의 자매님이었는데,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우리 한독가정의 구역예배에 나타났다.
조금이라도 음식물을 삼키면 금방 토해 버리기 때문에 피골이 상접한 모습은,
보는 모든 이를 안스럽게 했다.
구역의 모든 자매님들 14 명이 눈물로 ‘임숙‘ 자매님을 위해 합심으로 기도했다.
같은 한인으로서, 이렇게 이국땅까지 와서 젊을때는 고생고생하며 살았는데,
이제 자식들 다 키워 놓고 편할 만 하니까, 저렇게 육신에 병이 들다니....
남의 일 처럼 여겨지지 않아서 모두 눈물을 훔쳤다.
그 후, 우리집에서 예배드릴 때와 또 인근의 동네에 사는, 내 여동생네 집에서 구역모임이
있을때도 한번 왔었던 것 같다.
그 후론 친한 친구와 여행을 떠난다고 했고, 다시 임숙자매의 소식을 들었을 땐,
이미 벌써 노이비드(Neuwied)라는 강 건너편 도시의 암 병동에 입원해서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그 당시, 구역식구 중, 한 두 사람은 40대 였지만, 파독 간호사로 독일 온지 30여 년이
지난 우린 모두 50대였다. 타국에 와서 이방인의 설움을 안고 살아가는 것도 억울한데,
육신 마져 병들어 아직도 한창일 50대의 젊은 나이에 시한부 인생을 살고있다니....
‘도움 증후군’ 이 있는 내 여동생이, 당장 임숙자매를 병문안하곤 내게 전화를 했다.
환자가 자주 혼수 상태에 빠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 밤을 더 버티지 못할 것 같다고....
우리 목사님께 연락해서 임종예배를 드려주는것이 인간의 도리 아니냐고?
이유는, 병상을 지키는 임숙자매의 남편에게 종교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예전엔 캐톨릭이었지만, 교회에서 출교한지가 오래고 또 자기 고향이 함부르크인지라,
이곳에 이사 온지도 얼마 되지 않아서 아는 신부님이나 목사님도 없다고 했다.
“그럼 이곳 병원에도 신부님, 목사님이 계시는데 부르시는 게 어때요!“ 했더니,
“내 아내가 한국사람이니, 한국목사님을 부르면 좋을텐데, 아는 분이 없으니..“ 라고 해서
한번도 만난적이 없지만, 아무래도 우리목사님이 와 주셔야 겠다는 동생의 견해였다.
그날이 금요일이고 철야기도가 있어서,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들이 모두 Bonn(본)교회에
몰려 있을 것을 참작하고 우리 둘은 저녁 11시 쯤에 본에 갔다.
깜짝 놀라는 목사님과 성도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임숙자매가 한번도 교회에 나온적이 없어서
대부분은 누군지도 잘 모르기에)지금 시간이 급하니 빨리 준비하시고 함께 가 주실 것을 간청드렸다.
목사님과 사모님, 동생과 나, 이렇게 넷이서 '노이비드' 병동에 도착 했을때는 시간이 벌써 자정을 넘었고,
임숙자매님의 남편과 두 아들도 병상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 모두 다 초면인지라 수 인사를 끝낸 후, 목사님께서 환자를 위한 마지막 기도와
찬양 한곡(내 영혼이 은총 입어)을 그것도 한 밤중에 모두 나지막한 음성으로 불렀다.
환자는 이미 혼수 상태에 들었지만, 그 영혼은 듣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찬양을 부르는 내내
목젖이 댕기고 눈물이 나서 애를 먹었다.
슬픔에 젖은 마음으로 집에오니, 새벽 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날 새벽 4시 30분 경, 임숙자매님의 남편의 전화를 받았다.
자기 아내가, 우리 일행이 떠나고 난 후, 새벽 2시 쯤에 임종했노라고....
금방 전화하기가 좀 뭣해서 기다렸다가 전화한다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장례식을 일주일 후, 함부르크에서 치를 예정인데, 혹 우리
목사님께서 장례예배를 맡아 주실 수 있는지를? 나더러 여쭤보라는 것이었다.
“네, 그러지요. 그런데 헤닝씨께서 이번 주일날 교회에 한번 참석해서 본인이 직접
부탁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라고 말했다.
주일 날, 헤닝씨는 약속대로 교회에 왔고, 목사님 또한 흔쾌히 가 주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문제는 성도들 중, 누가 동행할 것인가? 하고 물었다.
예배는 유족들을 위해서 독일어로 할 것이지만, 고인을 위해선 한국어로 찬양을 해야할 것이라고.....
우리가 사는 곳에서 함부르크까지는 500Km가 넘는 곳이고 급행열차를 타도 5시간이 더 소요되는
북쪽의 먼 곳이기 때문이었다.
또 그당시엔 우리 모두 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인지라, 장례식이 있는날, 금요일 날엔
휴가신청 내서 허락 받고 간다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헬프 신드롬(Help Syndrome)이 있는 내 여동생이 선듯 나섰고, 오지랖 넓은 나도,
또 항상 용감한 김집사, 이렇게 세 사람이 동행하기로 했다.
여 선교회장도, 구역장도 너무 먼 곳이라 당일에 갔다가 올 수도 없는 곳이기에, 엄두를 못 냈는데.......
오지랖 넓고, 성미 급하고 용감한 우리 셋이, 목사님과 동행, 그 다음 주 금요일,
이른새벽 기차를 타고 함부르크까지 1박 2 일, 장례식 예배에 참석한다고 갔었으니......
지금 생각하니, 아마도 그땐 젊어서였던가?

첫댓글 수냐의 방에 들어가보니 벌써 700여명이 방문했더군요
댓글도 많이달아 쓰는 글마다 인기가 있어 좋았니다.
앞으로도 계속하여 좋은글 많이써 주시길..
저도 어려서 잘 기억이나지 않지만~~ 우리 아버지가 온동네, 이웃동네 방앗간 고쳐준다고
몇일간씩 집에도 안오셔서~ 엄마가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종종들었습니다.
안나님도 남의일은 내일처럼 생각하는분이고,
또한
산오님도 발벗고 나서는 성격인걸 잘압니다,
저도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듣곤합니다
참 오지랖이 넓다고~!!ㅎ.ㅎ
울 아버지가 그러셨고
안나님, 산오님이 그렇듯
저 또한 그렇습니다만, 저는 두분을 못 따라가겠네요
두분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갈수록 척박해져가는 시대에
모른척하고 지내도 되는일에
오지랖 넓게(?) 온정을 베푼 이야기에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낌니다.
오지랖 넓고 마음 여리기는 우리 형제들 모두가 다 그렇지요.
우리 모두에게 '도움 증후군'이 있다는것은 아마도 부모님에게 물려받은듯 싶습니다.
아버지 뿐만 아니라, 어머니께서도 동네에 방물장수가 오면 꼭 우리집에서 식사를 하는게
당연하다고 여길 만큼 마음씀이 넉넉한것을 우리가 보고 자랐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그때, 자주 다니던 여자 비단장수가 오면 아예 우리집에서 자고 가는걸로 생각했고요.
현강님이 수년 전에 총무과 사회계장을 하실때도 영세민들을 위한 마음씀이 남달라서,
'성직자의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힘들다고 했으며, 플폭님 또한 경찰관으로 일 할때, 오갈데 없다는
처녀의 말을 곧이 듣고..
외갓집에다 도움이 일을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지요.
그런데 세상에는 이 쪽의 진심을 배신하는 일이 일어나 실망하지만..
그 처녀는 외갓집에서 패물과 통장을 거머쥐고 도망을 가 버렸으니,
참 안타까운 에피소드였지만...
그래도 남을 도와주고 싶은 그 마음은 아무나 가질 수 없다고 봅니다.
언제였던가, 이생기심님 또한 지하철에서 나이드신 노인분이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가는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어머니 생각난다며 도와 드리는 우리 형제들, 그래서 아직도 이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다고...
또한 이런 선한 사람들이 곳곳에도 심겨져 있기에, 아직도 살 맛 나는 세상이 아닌가? 생각해 보네요.
모두의 평강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마도 도움이 증후군은 이생기심이 제일 심할걸요.ㅎㅎㅎ
수냐님의 기억력은 👍👍👍대박.
우린 까마득히 잊어버린 이야기들이라 새삼 새롭게 느껴지네요. 아님 그때 우린 너무 어려서 기억을 다 못하구요.
ㅎㅎㅎ
오지랍넓은 사람많아 있습합니다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