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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녹수는 누구인가?
조선시대에 " 예무이적 (禮無二嫡) "의 논리가 있다. 한 남편에게
두 사람의 정실(正室) 아내는 있을 수 없다 ...는 의미이다. 겉으로는
그럴듯 해보이지만 이같은 논리 때문에 첩(妾)에게서 난 자식은 모두
> 천인(賤人)이 되어야 했다.
연산군의 9번째 여자인 장녹수(張綠水. ? ~ 1506)는 천인(賤人) 출신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첩이었고, 이 때문에 장녹수는 제안대군(齊安大君 ..
成宗의 친형)의 가노(家奴)에게 시집을 가야 했다. 장녹수는 의외로
미모는 빼어날 정도로 뛰어나지 않았으나, 노래를 무척 잘 했던 것으로
사료(史料)는 적고 있다. 그녀는 "노비의 아내"이었던
시절에 노래를 배운 것으로 보인다.
비록 천인의 신분이었지만 장녹수에게는 양반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장한필(張漢弼)이라는 인물로 당당히 문과에 합격한
양반이었다. 사료(史料)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문과에 급제한
사람들의 인명록)을 보면 그는 예종 1년에 시행한 과거시험에서 병과
4위로 합격하였다. 그후 성종 19년에 그가 발령을 받은 곳이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현(文義縣)이다. 당시 문의(文義)는 종5품 현령이 관할하였다.
장한필의 생몰연대(生歿年代)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만약 그가
문의현령(文義縣令) 시절에 집의 노비를 첩으로 삼았다면, 그의 딸 장녹수의
출생지가 충북 청원군 문의(文義)라는 추정도 가능할 것이다.
연산군과 장녹수 사이에 연분(戀分)이 싹트도록 한 사람은 삼촌
제안대군(齊安大君)이었다. 이미 폭정기에 접어든 연산군이 어느날
미복(微覆) 차림으로 한 잔 걸칠 요량으로 삼촌집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만난 것이 장녹수이다. 이때부터 연산군은 장녹수의 치마폭에 묻혔고,
폭정의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연산군과 장녹수의 만남
장녹수가 제안대군(齊安大君)의 노비와 결혼하고, 제안대군의 여종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모친도 제안대군의 종이 아니었나 싶다.
어린 시절 장녹수는 매우 곤궁하게 지냈는데, 가난하고 신분도 천한 여인이라
몸을 팔아서 생활하였고 결혼도 여러 번 하였다. 가난에서 벗어나려 여러
남자들에게 몸을 의탁하였고, 여러 자식까지 두었다.
그러던 중 제안대군의 가노(家奴)와 혼인을 하여 제안대군의 여종으로 살다가
아들 하나까지 낳았는데, 이 가정도 힘들었는지 다시 생활전선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닥에서 몸을 파는 수준에서 벗어나 노래와
춤을 배워 정식으로 기녀(妓女)생활을 하였다.
제안대군은 장안에서 이름난 풍류한량이었는데, 조정에는 욕심이 없고 오로지
기생들을 초대하여 자신의 집에서 가무(歌舞)를 즐기면서 자신 역시도 기생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지라, 일설에는 제안대군이 개인적으로
기르는 기생들이 여럿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마도 장녹수는 제안대군의
집에 소속된 기생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산군은 자주 미복(微服)차림을 하고 밖으로 돌아다는 것을 즐겼는데, 장녹수가
총애를 받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루는 연산군이 숙부인 제안대군의
집으로 행차하여 술을 마시던 도중 제안대군이 자신이 기르는 아이 중에서 아주
괜찮은 아이가 있다며 장녹수를 친히 불러 가무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연산군이
한 눈에 반하여 장녹수를 친히 데리고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고 하였고, 제안대군
역시도 그것을 흔쾌히 승낙하였다.
오로지 풍류만을 즐기는 사람이라, 여색(女色)과 권력욕이 없었는데, 그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제안대군이 사내구실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여기고 있었다.
장녹수와 하룻밤을 보내고, 연산군은 그녀를 잊지못해 친히 궁궐로 불러들였다.
세상 사람들은 천기(賤妓)를 궁굴로 불러들여 후궁을 삼았다고 비난하였고,
왕실에서도 이 문제를 거론하여 연산군에게 장녹수는 천기이며 이미 시집을
여러번 가서 가정이 있는 여자라고 후궁(後宮)을 삼는 것을 반대하였지만,
연산군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장녹수를 종4품 숙원(淑媛)의 지위를 내렸다.
이때 장녹수의 나이가 연산군보다 10살 위였다.장녹수는 유일무이하게
연산군을 잘 다룰 줄 아는 여인이었다. 천하의 요부(妖婦)라도 그런 요부가 없을
지경이었다. 연산군의 아명(兒名)이 "백돌"인데, 녹수는 연산군을 " 전하 "라고
부르는 대신 " 백돌아 "라고 부르고 다녔으며, 연산군은 후궁이 함부로 자신의
아명(兒名)을 부르는 것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뚜쟁이, 장녹수
장녹수는 연산군의 환심을 얻기 위하여 뚜쟁이 역할도 서슴치 않았으니,
중종 원년(1506년) 9월2일의 실록이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
대궐 안에서의 연회에 사대부 아내로 들어가 참여하는 자는 모두
그 남편의 성명을 써서 옷깃에 붙이게 하고, 미모가 뛰어난 이는
장녹수를 시켜 머리 단장이 잘 안 되었다고 핑계대고 그윽한 방에
끌어들여 간통하였는데, 혹 하루를 지난 뒤에 나오기도 하고 혹은
다시 불러 궁(宮)에 유숙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월산대군의 부인은
세자의 양모(養母)라는 핑계로 항상 궁에 머물게 하였고, 성종의
후궁 남씨도 대비(大妃)와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총애를
입어 추한 소문이 바깥까지 퍼졌다.
연산군 11년 4월12일 실록은 연산군과 장녹수의 결탁에 의한 음행(淫行)으로
4~5일이 되도록 궁중에 유숙(留宿)한 사람의 명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사신은 논한다. 왕의 음탕이 날로 심해 족친(族親)과 선왕(先王)의 후궁을
모아 왕이 친히 잔을 들어서 마시게 하였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장녹수와 궁인을 시켜 누구의 아내인지 비밀히 알아보게 하여 외워두었다가
궁중에 묵게 하여 밤에 강제로 간음(姦淫)하며 낮에도 그리하였다.
혹 4~5일이 되도록 나가지 못한 사람으로는 좌의정 박승질의 아내,
남천군 이쟁의 아내, 변성의 아내, 총곡수의 아내, 권인손의 아내,
승지 유순의 아내, 생원 권필의 아내, 중추 홍백경의 아내 같은 이들이
있었다. 홍백경은 왕에게 고종 사촌형이 되는데, 홍백경이 죽고 부인이
과부로 살자 왕이 그의 아름다움을 듣고 드디어 간통하였다.
전향과 수근비(田香과 水斤非)
연산군에게는 장녹수 이전에 승은(承恩)을 입은 궁녀가 두 명 있었는데,
바로 희대의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 최전향(崔田香)과 수근비(水斤非)이다.
최전향(崔田香)은 궁녀출신으로 연산군에게 승은을 입은 궁녀이고,
수근비(水斤非)는 원래 관노(官奴)이었다가 자색이 곱다는 이유만으로
연산군의 눈에 들어 연산군이 옥금이라는 여자를 대신 관노로 내리고
수근비를 궁궐로 불러들여 승은(承恩)을 입힌 여인이다.
당시 장녹수는 이 두 여인을 질투하고 있었는데, 질투하기로는 이 두
여인들도 마찬가지이었다. 그러다 희대의 사건이 터져 버렸다.
1504년(연산군 10) 장녹수의 집에 연산군(燕山君)을 비난(非難)하는
괴서(怪書)가 붙었는데, 이때 온성(穩城)으로 귀양가 있던 궁녀
수근비(水斤非)와 함께 주모자로 지목되었다. 그후 부모형제와 친척들이
모두 잡혀와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도 자백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귀향지에 있던 최전향과 수근비를 능지처참하고 머리를 외딴 섬에 묻게 하였다.
또한 가족들은 죽이고 가까운 친척은 모두 멀리 귀양 보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10년 6월9일의 기록에서, 사관(史官)은
" 이는 장녹수가 참소(讒訴)하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모습이 고와서
장녹수가 마음으로 시기하여 밤낮으로 왕을 부추겨서, 두 사람의
부자형제를 하루아침에 다 죽였다"고 적고 있다.
치마를 밟았다고 목이 잘리다.
연산군 11년(1505년) 11월 7일,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장녹수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연산군의 유흥을 위하여 동원된 기생 중에
하급 기생인 옥지화(玉池花)라는 기생이 후궁 장녹수의 치마를 밟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장녹수가 연산군에게 알렸는지, 왕이 신하를 불러
모아 옥지화를 처벌하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영의정, 좌의정, 좌찬성, 우찬성 그리고
각조(各曺) 판서와 대사헌까지 나서서 옥지화의 죄가
참으로 크니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진언하였다.
이 말은 들은 연산군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는데,
연산군일기의 기록을 적어보면...
운평(雲平) 옥지화(玉池花)가 숙용(淑容)의 치마를 밟았다 하니, 이는
만상불경(慢上不敬)에 해당하므로 무거운 벌을 주고자 하니, 승지 강혼(姜渾)은
밀위청(密威廳)에 데려가 형신(刑訊)하라. 또 이 뜻으로서 의정부, 육조,
한성부, 대간(大諫)에게 수의하라" 하니 영의정 유순(柳洵), 좌의정 박숭질(朴崇質),
좌찬성 김감(金勘), 우찬성 김수동(金壽童), 좌참찬 신준(申浚), 호조판서
이계남(李季男), 공조판서 한사문(韓斯文), 한성부 판윤 민효증(閔孝曾),
대사헌 반우형(潘佑亨), 호조참판 박열(朴說), 예조참판 안윤량(安允良),
공조참판 정광세(鄭光世), 한성부 부윤 김무(金珷)가 의계(議啓)하기를
"옥지화의 죄는 지극히 만홀(慢忽)하오니, 위의 분부가 지당합니다.
명하여 참(斬)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옛말에 그릇때문에 쥐에게 돌을 못 던진다..고 하였으니 아주 천한 것이
질그릇이나 이것으로 요강을 만든다면 진실로 천하지만, 만약 어전에서
쓸 물건을 만든다면 천하게 여길 수 없다. 옥지화와 같은 운평(運平 ..
하급 궁중기생)이 숙용(淑容 ..종3품 후궁)이나 숙원(淑媛 ..종4품 후궁)에
대하여 감히 저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해 조금이라도 능멸함이 있다면
불경하기가 그지 없으니, 이런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벌로 다스려야 한다.
노비 출신이었던 장녹수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
옥지화는 장녹수의 치마를 한번 밟았다는 죄로 결국 목이 베어졌다.
연산군과 장녹수는 왜?
장녹수에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매혹된 연산군은 장녹수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었고, 영수(靈水)라는 딸도 하나 두었다.
" 장녹수는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 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왕이 노했다 하더라도 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여
웃었으므로, 상 주고 벌 받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렸다 "는 실록의 기록을
통해 연산군과 장녹수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알 수 있는데, 그토록 가까웠던
이유는 먼저 두 사람 사이에 얼굴이나 나이를 초월한 예술적 교감이 가능하였기 때문.
춤과 노래에 뛰어난 장녹수와 그러한 예술(藝術)을 이해했던 왕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누나와 남동생 같은 친근감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어려서 아버지 없이 자란 장녹수와 어머니 없이 자란 연산군은 본능적으로
부성애(父性愛)와 모성애(母性愛)를 갈망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장녹수는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생긴 권력을 함부로 남용하기 시작했다.
장녹수의 최후
1506년, 연산군 12년 9월2일... 연산군이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하여
쫒겨난 날, 실록(實錄)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권력을 휘두르던 전비
(田非 .. 田香과 水斤非)와 장녹수의 행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임금이 전비와 장녹수의 말을 따르지 않음이 없고, 하려는 것을 해 주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들은 옥사(獄事)를 농간하고 벼슬을 팔며 남의
재물과 집을 빼앗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거슬리면 반드시 화로 갚으므로 왕실 가족이나 사대부 중 침해와
모욕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주인을 배반하고 이익을 노리는 무뢰배들이 전비와 장녹수의 일가라 주장하며
못된 짓을 하는 자가 셀 수 없었다.
두 집의 책이나 서찰을 가진 자가 사방에 널려 이르는 곳마다
소란을 피우며 수령을 업신여기고, 백성을 못살게 굴어 기세가
넘쳤으나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고 움츠려 피할 뿐 이었다.
이들이 부모를 뵈러 출입 할 때면 승지와 재상들이 앞에서 인도하고
뒤를 감싸 마치 왕비의 행차와 같았다.
연산군이 실각(失脚)한 후 전비와 장녹수에게 찾아온 것은 참혹한
죽음이었다. 실록은 그녀들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비와 장녹수를 군기시(軍器寺 .. 병기 등을 만들던 관청 .. 현재의
서울시청과 서울신문사 사이) 앞에서 목을 베니 장안 사람들이 다투어
기왓장과 돌맹이를 그들의 국부(局部)에 던지며 " 나라의 고혈이 여기서
탕진되었다 "고 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돌무더기를 이루었다.
연산군이 강화도(江華島)의 교동으로 위리안치되었고, 왕비 신씨(愼씨)는
폐하여 친정으로 보냈으며, 세자 이황을 비롯한 왕자들은 각 고을에
안치시켰다. 연산군이 교동으로 쫒겨갈 때 백성들이 그를 뒤쫒아
원망하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충성이란 사모요 / 거동은 교동일세 /
일만 흥청 어디 두고 / 석양 하늘에 위를 좆아 가는고 /
두어라 예 또한 가시의 집이니 / 날새우기에는 무방하고 또 조용하지요
연산군이 즉위와 더불어 백관에게 충(忠)자와 성(省)자를
새겨 사모(紗帽)의 앞뒤에 붙이도록 하였고, 흥청이란 기생을 뽑아
1만 명을 채우려 했다. 백성들이 이를 빗대어 사모(紗帽)와 사모(詐謨),
거동과 교동은 음(音)이 비슷하고, 방언에 각시(婦)와 가시는 발음이
유사하기 때문에 이런 노래를 지어 부른 것이다.
연산군의 正妃 (폐비 신씨)
그러나 연산군을 쥐고 흔들었던 전향, 수근비 그리고 장녹수 ... 그들의
그늘에 가려진 한 여인의 아름다운 사연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주인공은 연산군의 부인(婦人)이었던 폐비(廢妃) 신씨(愼氏)이다.
전향, 수근비 그리고 장녹수의 전횡 속에서 숨죽이며 남편 연산군의
사랑을 갈구하고, 연산군의 횡포를 간청하던 신씨에 대하여 연산군
12년 9월2일, 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폐비 신씨는 어진 덕이 있어 화평하고 중후하고 온순하여 아랫사람들을
은혜로 어루만졌다. 왕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왕비가 더 후하게
대하므로 왕은 비록 미치고 포악하였지만 매우 소중한 대접을 받았다.
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란,방종함이 한 없을 때마다 밤낮으로
근심하였다. 때로는 울며 간하되 지극히 간곡하고 절실하였는데 왕이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을 내지는 않았다. 또 빈번히 대군,
공주, 노복 들을 엄하게 타일러 함부로 방자한 짓을 못하게 하였는데,
연산군이 교동으로 쫒겨갈 때 울부짖으며 기필코 왕을
따라가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장녹수와 장희빈, 같은 점, 다른 점
사랑을 이용하여 조선을 자신의 치마폭 속에 놀렸던 장녹수와 장희빈 중
누가 더 권력의 중심에서 조정을 좌우하였을까 ? 여러가지 정황을 살펴
볼 때 질문에 대한 정답은 아마 '장녹수'일 것이다. 장녹수는 혼군(渾君)인
연산군을 이용, 임사홍과 결탁하여 사화(史禍)를 일으키고 인수대비를
결국 죽음으로 이끌었던 그 당시 최고의 실권자이었다. 다만 장녹수가
그렇게 정권을 뒤흔들 수 있었던 것도 대궐의 큰 어른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걸(女傑) 인수대비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도, 모두 연산군이
폭군이자 광인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부귀영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장희빈은 숙종(淑宗)을 통해 신분을 초월하고 왕비의 자리에
올라갔지만, 장녹수와는 달리 도리어 막판에는 숙종에게 이용(利用)
당하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장희빈은 남인(南人)의 거두(巨頭)를
자처하며 정권에 큰 영향력을 미치기는 했지만, 훗날 날이 갈수록
숙종에게 역이용(逆利用) 당해 환국(換局)의 구실로 가차없이 버려졌다.
다만 장희빈 역시 요화(妖花)인지라 숙종(淑宗)의 총애가 하늘을 찌를 때의
그 부귀와 영화는 장녹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장녹수가 그저
연산군의 애첩(愛妾)이었다면, 장희빈은 한 나라의 국모(國母)이요,
국왕의 지어미요, 훗날 임금의 어머니로써 위세 또한 누려 보았으니
궁궐에서의 위세가 권력에 비례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 ;논어 위정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