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천 목씨 상징 조형물. 대전 효문화 뿌리공원에 있는 성씨별 조형물 중 하나다.
사천목씨는 성씨별 인구분포에서 몇 번째일까?
김해 김씨가 412만명으로 1위, 밀양 박씨가 303만명으로 2위, 전주 이씨 260만명으로 3위,
경주 김씨 173만명으로 4위, 그리고 경주 이씨가 142만명으로 5위입니다.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풍산 류씨가 1만3341명으로 269위니 사천 목씨는
300위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사천목씨 집안의 장수비결
집안에 내려오는 가풍과 생활습관이 좋았을 것으로 여겨지고 청백하게 살며
절제하는 것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기록을 보면 목첨 공은
효도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공이 젊어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부친을 아침저녁으로 곁에서 모시기를 엄중한
스승처럼 하였습니다.
항상 효도하려 해도 어버이가 기다려 주지 않음을 가슴 아프게 여긴 나머지
그 당(堂)의 편액을 머무를 두(逗)자를 써서 ‘두일(逗日)’이라고 하고 호로도 삼았는데,
대체로 날을 아끼는 뜻을 취하여 종신토록 사모하는 뜻을 붙인 것이었죠.
목첨 공은 학식과 인품이 뛰어났기에 벼슬이 종2품(從二品)이었지만 신하들의
주청에 의해 선조 임금이 격식을 깨뜨리고 기로소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 원래는 반드시 정2품(正二品)이라야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었죠.
이 집안에 또 어떤 비결이 있었나?
목첨 공은 성품은 검소하고 간략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루는 손님이 왔는데 당하(堂下)에 있는 동자(童子)의 입은 옷이 수수하고
거칠므로 손님이 노복인가 의심스러워 물었더니, 공이 웃으면서 “나의 손자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집은 청파(靑坡)의 후미진 곳에 있었는데, 문에서 수응하는 하인이
겨우 한두 명이었고 문밖에는 거마(車馬)가 없었다고 합니다.
목첨 공이 78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워낙 연로하여 의주로 피난 가는 임금을
호종하지는 못했지만 강화도로 들어가 의병을 규합하였는데, 그 군사의 명칭을
‘일의군(一義軍)’이라 하였답니다. 다음 해 병이 들어 왕릉이 파헤쳐진 것을
보살피라는 명을 받고 출발하려 할 때 병이 위독하여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 나이에도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마음을 가졌으니 건강하게 장수했던 것이죠.
기가 강해야 건강장수에 유리
78세의 나이에 의병을 일으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이렇게 불굴의 정신력을 가진 선비 집안이나 대대로 장수하는 집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기(氣)’가 강하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중봉 조헌, 동계 정온, 미수 허목, 우암 송시열, 고산 윤선도 등을 비롯하여
백사이항복,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선생 등이 보여준 대단한 정신력과 집념의
원천도 역시 샘솟듯 솟아나는 ‘기’에서 나왔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힘든 귀양살이를 오래 하면서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 역시
그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사천 목씨 집안은 당파로는 남인에 속했는데, 목래선이 벼슬에 있을 때 노론과의
당쟁이 매우 심했습니다. 그 때가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두고 노론과 남인이 치열하게
정쟁을 벌이던 시기였죠. 목래선은 좌의정으로 있다가 당쟁에서 패하여 무려 78세의
나이로 완도에 딸린 섬 신지도에 위리안치되어 5년을 가시나무로 둘러싸인
집안에서 귀양살이했습니다. 문헌에 의하면 신지도 최초의 유배인이라고 하는데,
그러고도 5년을 더 살아 88세까지 장수했습니다.
늙은 나이에 귀양지에서 건강을 지키려면
늙은 나이에 귀양지에서 정신력만으로는 건강을 지킬 수 없죠.
대부분의 선비들은 오래 공부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건강을 돌볼 수 있었고
자신의 질병이나 가족들의 질병을 직접 치료하고 예방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유학을 공부한 선비들 대부분이 기본적으로 ‘의학입문(醫學入門)’이라는
한의서를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의학입문’은 명나라의 ‘이천(李梴)’이라는 유학자이자 한의사인 분이 저술했는데,
단순히 입문서가 아닙니다. 기초 이론과 생리, 병리, 진단, 약물을 비롯하여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 피부과 등의 각종 질병의 원인과 치료법이 있는
종합 임상의서입니다. 특히 선비들이 공부하기에 편리하도록 한시체(漢詩體)로 되어 있지요.
의학에 관심이 많아 의서를 깨우쳐 의술에 조예가 깊었던 분들이 더러 있는데,
그런 분들을 ‘유의(儒醫)’라고 합니다. 유학자이면서 의사인 것이죠.
중산층 이상의 선비 집안에서는 약장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동네마다 의원이 귀해서 갑자기 환자가 생기면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유의 집안에선 중병이 아닌 경우에 집안 어른이 한약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한약재를 상비해 둬야 했기에 약장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죠.
특히 허준 선생의 <동의보감>이 편찬되어 나오면서 약장은 선비 집안의
필수 목가구가 되었습니다
. 선비들이 당쟁으로 유배를 떠날 때도 반드시 지참해 갔던 물건이
바로 약장이었다고 합니다.
- 동의보감
선비들의 건강을 지킨 다른 비결
의학입문에는 유학적인 수양론(修養論)과 양성론(養性論)이 많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을 닦았기에 정신건강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죠.
원래 양생법의 으뜸은 정신수양입니다. 그리고 도인법(導引法)인 호흡법, 체조법을 했습니다
. 물론 꾸준히 운동도 했는데, 그것은 공자님 때부터의 전통입니다.
사군자와 선비의 건강
매화는 한겨울 추위를 견디고 이른 봄 먼저 꽃을 피워 진한 향을 전하고,
난초는 때 묻지 않아 고결청초하면서 은은한 향을 내고, 국화는 서리 내리는
늦가을에 가장 늦게 고고하게 꽃을 피우고, 대나무는 사시사철 푸른 데다
곧게 뻗어 강인한 기상을 지녔습니다. 이
처럼 사계절과 때를 같이하는 매난국죽은 각각의 특성이 덕과 학식을
겸비한 군자의 인품에 비유되고 있어 선비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선비들의 스트레스 해소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퇴계 선생은 매화를 지극히 사랑하였기에 평소 매화를 주제로 시를 즐겨 써서
104수로 된 ‘매화시첩(梅花詩帖)’도 남겼습니다.
추사는 스스로 ‘매화구주(梅花舊主)’라고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항상 매화를 좋아하였습니다
. 자신이 그린 매화병풍을 서재에 둘러치고 매화의 시경(詩境) 속에서
매화차를 마시며 매화 백영시(百詠詩)를 지었고, 자신이 있는 곳을 매화
백영루(百詠樓)라고 하였습니다.
부채도 매화가 그려져 있는 매화선(梅花扇)을 즐겨 사용하였으니 얼마나 매화를
사랑하였고 매화 속에서 청고한 경지를 찾고 느끼고 하였는지를 알 수 있지요.
또, 다산 정약용도 매조도(梅鳥圖)를 그렸고, 미수 허목도 묵매도(墨梅圖)를 그렸습니다.
이 분들은 모두 70세 혹은 80세 넘게 장수하신 분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