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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봉에서 빌자 황 장 진 싱싱한 솔 수천수만 그루가 어깨동무하고 모여 살던 평화스러운 동산이었다. 시가지 가까이 이리도 탐스런 솔 동산이 있으니 얼마나 복 받은 사람들이 살까 부러웠다. 일터 찾아 기웃거리던 나이에서 이게 필요 없는 나이가 되다 보니 소나무들도 내 키 몇 질의 키다리가 되었다. 그땐 소나무 가족만 모여 사는 줄 알았는데 지금 와보니 곁에다 참꽃나무 벚나무 참나무 등 갖가지 나무들을 품고 있다. 키 203m의 춘천 퇴계동의 국사봉(國士 峰)이다. 일본 강점기에 이곳 선비들이 1919년 고종께서 승하하자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여기다 태극 단을 만들어 놓고 서쪽 하늘을 향해 망제를 올리며 나라 잃은 슬픔과 울분을 달래던 곳이다. 망제 탑은 그때 망제를 주도했던 이준용 선생과 한용섭 선생의 얼을 기리고, 선조들이 보여준 애국 혼을 본받기 위해 1990년에 세워졌다. 이곳에 높다란 국기게양대를 세우고 365일 대형태극기가 펄럭이게 하면 어떠리. 새해인사회, 3• 1절, 광복절 기념식 같은 것을 가끔 예서 하면 어떨지? 같은 이름의 국사봉은 임실에도 있다. 국사봉 아래 잿말에서 지사를 12명이나 배출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거제 국사봉은 장가를 들기 위해 상관의 관례를 하고 사모를 쓴 신랑이 서울의 국왕에게 국궁을 들고 절을 하려는 모습이라서 선비들이 많이 오갔다고 한다. 횡성 옥동리와 갑천 중금리에 걸쳐있는 국사봉(國師 峰)이 있다. 키 499m로 산꼭대기에 오르면 원주는 물론 4방 100여 리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다. 일찍이 도선 국사가 산세를 보고 “가히 명산이로다!”를 연발하였다 한다. 이 산 밑에 옥녀 산발형국의 명당이 숨어있으나 아직도 찾지 못했다. 도선 국사가 밟은 봉우리라 해서 국사봉이 되었다고도 한다. 옛날 사령들이 나랏일을 가지고 이 고개를 넘어서 한양 원주 춘천 쪽으로 넘나들었다 해서 국사봉이라 이름을 붙였다고도 한다. 이봉우리 꼭대기에는 높이 60cm, 넓이 1평 정도의 자연석이 있다. 횡성에 부임하는 골 원이 국태민안을 빌고 풍년 기원과 백성들이 병 없이 잘 살게 해달라고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올렸던 바위라 한다. 매주 화, 토요일 ‘아름다운 우리길 함께 걷기’ 모임인 ‘춘천 길사랑’에서 배 타고 떠나는 서해 섬 걷기여행의 명소 인천광역시 옹진의 장봉도 섬 걷기여행에 끼였다. 여객선이 만들어 내는 용솟음치는 후류, 갈매기들의 먹이 받아먹는 모습, 용유도 인천국제공항에서 뜨고 내리는 비행기들의 늠름한 광경에 혼을 놓다 보니 어느새 장봉선착장에 다다랐다. 1차선 좁은 길을 곡예를 하듯 달리는 마을버스에 올라서서 장봉도 사람들의 생활터전을 넋 놓아 바라보며 어릴 적 뛰어 놀던 제2고향 화구마을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장봉3리 들판을 뒤로 하고 2.2km의 야산 길을 정담 버무려 즐기다 보니 봉우리 하나 우뚝 서서 반긴다. 높이 151m의 국사봉(國史 峰)이다. 가져 온 온갖 먹거리로 입과 배를 호사시킨다. 유인도 25개 무인도 75개의 아름다운 섬으로 이루어진 옹진은 예부터 좋은 피난 곳이었겠다. 뭍과 이곳을 황해의 깊은 물결이 출렁대며 가로막고 있으니…. 가까이 영흥도는 고려 말 공민왕이 이성계에 몰락 당한 후 그 왕족들이 이곳으로 피난한 곳이다. 250m의 제1높은 산봉우리에 올라가 한양을 바라보며 나라를 걱정하였다하여 국사봉이 되었단다. 자월도에도 높이 160m의 국사봉이 있다. 덕적도에도 해발 312.7m의 국사봉이 우뚝하다. 코앞의 북한 젊은이들은 충성 다지기에 혈안인데, 한국은 국론분열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나라 앞길만 막고 있다. 위태롭지 않을까? 나라 곳곳 국사봉마다 국태민안(國泰民安)과 국리민복(國利民福)을 빌어보자는 알림판을 세우자. 다들 두 손을 모으자. “천지신명이시여, 한국이 평화 속에 번영하고, 온 국민이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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