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벗과 '영매'를 보았습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화해'라는 부제가 붙은 영화지요.
영화관을 나서니, 둘 다 눈이 벌겋게 부었더군요.
그 눈을 해가지고도 속상합니다.
좀 더 울었어야 했는데....
채 울지 못한 울음을 뒤로 하고 나서는데, 두고온 꾸러미라도 있는 양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대신 울어주는 노비, 곡비.
영화, 영매를 보고, 곡비를 떠올렸습니다.
그들이 대신 울었을 그 수많은 울음들 때문에, 우리들의 몫이 아니었던 울음들 때문에 이제 와 목이 아픕니다.
언젠가 보았던 고은의 시를 애써 찾아보았습니다.
시인인 자신을 곡비로 내놓았던 결연한 의지에 고개가 숙여졌던 시.
하지만, 지금.
'픔이 본질적인 것이 되지 않을 때
울음이 말단이나 노동자에게만 머물 때
그런 것들이 다만 천박한 것으로만 보일 때'
여전히 곡비를 천대하고 동시에 양산하는 이 시대를 지나간다는 일이 고되게 느껴집니다.
곡비(哭婢)
고 은
조선시대 양반 녀석들 딱한 것들
폼잡기로는 따를 자 없었다
그것들 우는 일조차 천한 일로 여겼것다
슬픔조차도 뒤에 감추고 에헴에헴 했것다
그래서 제 애비 죽은 마당에도
아이 아이 곡이나 한두 번 하는둥마는둥
하루내내 슬피 우는 건 그 대신 우는 노비였것다
오늘의 지배층 소위 오적 육적 칠적 역시
슬픔도 뭣도 모르고 살면서 분부를 내리것다
울음 따위는 개에게도 주지 말아라
그런 건 이른바 민중에게나 던져주어라
그 민중이나 울고불고 아이고 대고 할 일이다
그런 천박한 일 귀찮은 일은 내 알 바 아니야
하기야 슬픔이 본질적인 것이 되지 않을 때
울음이 말단이나 노동자에게만 머물 때
그런 것들이 다만 천박한 것으로만 보일 때
시인아 너야말로 그 민중과 함께
민중의 울음을 우는 천한 곡비이거라 곡비이거라
감옥의 무기수가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내 인생을 노래해 주시오
그 말씀 잊어버릴 때
나는 시인이 아니다 시인이 아니다
하이퍼텍 나다 (혜화동 동숭아트센타)
조조는 11시, 1시, 3시, 5시, 7시, 9시에 있네요.
25일까지 한다는데, 사람이 별로 없어 일찍 내릴 수도...
첫댓글 수혀니님 글 보구나니 꼭 보고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