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구한 파멸
윤의섭
너는 달릴 수 있다
그러나 도망치지 못한다
너는 울 수 있다
그러나 눈물이 남아 있지 않다
전해 오는 연원은 사라진 악보에서 찢어 낸 한 소절처럼
너를 이야기한다
너는 문득 흔들리는 달을 바라본다
에서 끝나 버리는 구절이다
산책길에는 꽃잎이 흩날린다
뉴스에선 월진이 관측되었다고 한다
멀리 운구차가 지나간다
가로등이 켜진다
유리창 너머로 차를 마시는 남녀는
지직거리며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한다
불빛에 번득이는 빗줄기 사이
너는 지금까지도 오래 걸렸고 마지막은 멀었다는 것 잘 아는
앞뒤 잘려 나간 장면
영문을 모르는 표정
너는 너를 구원할 수 없는 구원자
너는 죽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을 뿐이다
곡예
날씨가 추울수록 이 계절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오늘 하천에 비친 도시에서 솟아오르던 눈송이는 끝내 수면을 넘지 못했다
그런 끝도 끝나지 않는다
동네 분들은 지금도 어머니를 내 이름으로 부르신다
끈질기게 남아 있는 유년의 흔적 나 어른이지만 다 핀 것은 아니다
불의 고리를 통과하듯 하루하루를 지나왔지만
다음번에는 공중그네를 건너뛰어야 하는 날개 없는 비상의 날들
그러므로 봄이면 꽃을 피우는 나뭇가지의 손길은 공양의 자세다
이쯤에서 멈출 수 있기를
나는 폐선로를 따라 걷는 중이다
운행의 멈춤과 부질없음의 영원이 공존하는 길을 감상에 젖은 채
유령 같은 기차가 달려올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공포를 떨쳐 내지 못한 채
나는 한없이 걸었고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시간은 이미 먼 미래까지 가닿아 있다는 이론에는 비장한 허무가 깃들어 있다
저 앞에서 나는 또 어떤 쇼를 벌이고 있길래 이 계절을 망치고 있는 걸까
여행을 떠나지 못할 사람
꿈을 이루지 못할 사람
사랑에 실패할 사람
길들여진 짐승처럼 무언가를 조금씩 포기하는 데에 익숙해진 사람들
날씨가 추울수록 나는 가까스로 겸허해진다
다음 계절에 꽃이 피지 않아서 오늘 벚나무 가지 하나가 부러졌다
― 윤의섭 시집, 『장구한 파멸』(민음사 / 2026)
윤의섭
1994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 시집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 『천국의 난민』,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마계』, 『묵시록』,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 애지문학상 수상.
출판사 제공
책소개
기계적 신성의 시대를 비추는 실존의 파열음
안전한 행복 너머 불완전한 불행에의 고요한 사투
윤의섭의 여덟 번째 시집 『장구한 파멸』이 민음의 시 341번으로 출간되었다. 1994년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생의 본질로서의 죽음을 꾸준히 묘파해 온 윤의섭의 시적 세계는 특유의 심미적 언어로 불안과 소멸의 미학을 생성해 왔다. 이번 시집에서 윤의섭은 현대적 삶의 조건이 된 인간성의 파멸을 그려 낸다. 문학이 인간 삶의 총체성을 구현한다는 오랜 믿음은 알고리즘이라는 세속적 신성에 정복된 듯하다. 스마트폰이 신체의 일부가 된 현대에 이르러, 알고리즘은 인간이 가진 모든 데이터를 분절시키고 탈맥락화하며 인간으로부터 역사성을 박탈한다. 시집의 첫 장이 ‘종말 중’에서 시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윤의섭이 그리는 종말은 일상의 얼굴을 하고 있다. 영원한 현재에 머물게 된 인간은 언제나 파멸 중인 것이다.
무엇을 잊었는지도 잊은 ‘슬픈 영원의 시작’을 그리는 이 시집은, 그러나 온전히 파멸의 그물에 갇히지만은 않는다. 윤의섭은 알고리즘이 카운트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공상’을 시적 세계 한 켠에 심어 둠으로써 인간성 회복의 계기를 마련한다. 효율, 성장, 수익 등의 키워드에 침식되지 않는 잔여의 대표물로서의 공상은, 바닥에 누워서도 스스로를 별자리로 만드는 폐타이어의 모습으로, ‘불행해야 행복해진다’는 믿기 힘든 결말에 투신하기 위해 탈출선을 탄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처럼 『장구한 파멸』은 기계적 신성에 지배된 현시대의 인간이 겪는 실존적 고투에 관한 비망록이자, ‘인간다움’의 보존 방법을 제안하는 희망의 노래이기도 하다.
■ 구원 없는 세계를 응시하는 힘
너는 지금까지도 오래 걸렸고 마지막은 멀었다는 것을 잘 아는
앞뒤 잘려 나간 장면
영문을 모르는 표정
너는 너를 구원할 수 없는 구원자
너는 죽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을 뿐이다
―「장구한 파멸」에서
기계적 신성에 지배당한 시대에는 숏폼처럼 ‘앞뒤 잘려 나간 장면’만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그 안에서 ‘나’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겨우 존재한다. 인간이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행하는 최후의 저항인 죽음마저 알고리즘 안에서는 더 이상 전복의 힘을 갖지 못한다. 인간의 주체성은 변혁의 능력을 잃은 채로 보존됨으로써 폐쇄된다. 희박해진 주체에게 신화는 ‘겨우 조각만 남은 이야기’일 뿐이고 ‘유통기한이 지난 신’은 휴지통에 버려진다.(「카르만 라인」) 현 시대를 향한 윤의섭의 냉정한 시선은 그러나 냉소주의나 패배주의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쉽사리 끝나지 않을 듯한 ‘장구한 파멸’의 시대에 주체의 유통기한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윤의섭은 기능의 회복이 아닌 노이즈 되기를 제안한다.
■ 측정 불가능한 것이 되기
결말을 말해 줄게 나는 멸망한 지구로 돌아가 내가 항해일지를 조작한 거였지
(……)
산다는 건 긴 복선이다 어떤 떡밥은 끝내 회수되지 못한다
산다는 건 그러니까 긴 예언이다 불행해야 행복해진다는 믿기 힘든 결말도 있다
―「서바이벌」에서
알고리즘은 ‘나’의 선택을 반영하여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재편하는 듯하지만, 구성 원리로부터 주체를 배제함으로써 사실상 주권 박탈의 기제가 된다. 인간의 욕망을 데이터화하고 예측 가능한 것으로 환원하려는 알고리즘의 눈을 피해 ‘멸망한 지구’로 돌아가는 움직임은 알고리즘의 사각지대를 찾아가는 일이다. 알고리즘의 궤도를 벗어난 곳에는 ‘멸망한 지구’뿐 아니라 ‘어머니의 목소리’, ‘늙은 나무에서 물 흐르는 소리’, ‘구름끼리 부딪치는 소리’와 같은 ‘환청’이 있다.(「음속」) 윤의섭의 시편은 기계적 신성이 포착할 수 없는 잔여를 조금씩 만들어 감으로써 “인간적 주파수”를 보존한다. 이렇듯 『장구한 파멸』은 시라는 형식 속에서 인간의 유통기한을 조금씩 연장하는 조용한 저항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