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은 문화자산을 지키는 창고로 작가의 생명 사상이 숨쉰다
당신 안에서 생활하고 사색한다
문학관은 삶의 이야기가 넘친다
“순이여, 당신 이외의 여자 앞에서는 전나체가 되어도 부끄럽지 않소이다.
그들은 나에게도 무의미한 존재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단지 사랑하는 상대 그 한 사람으로 충분하고 완전무결합니다.
그는 그의 전세계, 전생활, 전활동, 그리고 그 자신입니다.
나는 당신 안에서 생활하고 사색합니다.”
‘맹진사댁 경사’를 쓴 극작가 오영진(1916∼1974)이 사랑하는 여인
‘순이’에게 쓴 연애편지의 한 대목이다.
누렇게 바랜 원고지 위로 이렇듯 절절하게
“한강문학관은 아직 부적절”
‘당신의 가장 충복한 종 영진’으로 끝나는 이 편지는 지난해 12월 수신인
‘순이’의 외손녀 장수경씨가 영인문학관에 기증했다.
시인이었던 순이를 향한 오영진의 구애는 결혼까지 이어지진 못했다.
하지만 편지는 버려지지 않았고,
할머니·어머니에 이어 3대째 간직하고 있던 장씨는 다음 소장자로 영인문학관을 골랐다.
영인문학관은 고 이어령(1933~2022) 선생과 강인숙(90) 관장 부부가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 2001년 개관한 문학박물관이다.
3만여점의 소장품 중에는 작가들의 육필 원고와 편지·서화·초상화뿐 아니라
김훈의 몽당연필, 박경리의 재떨이, 김동리의 열쇠꾸러미 등 일상용품도 많다.
이곳에 갖다 준 자료는 사장(死藏)되지 않는다는 입소문 덕에
‘오영진 연애편지’처럼 제 발로 찾아온 기증품도 제법 된다.
24년 10월 22일 영인문학관에서 만난 강 관장에게 문인들의 삶의 흔적이
우리 문학사에서 의미 있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작가의 육향이 묻어있기 때문”이라며
“이런 물건들이 작가를 아는 데 도움이 되고,
작가를 아는 것은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것과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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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객관화해도 작품 속엔 작가 자신이 나타난다.
그 사람이 고르고 사용한 물건에는 그의 안목과 취향·습성이 들어가 있다.
이를테면 우둘두둘한 흙으로 만든 박경리 선생의 재떨이는
그분의 생명 사상과 이어진다. 물건 속에서 그 사람과 문학이 보인다.”
육필 자료에서 읽어낼 수 있는 정보는 특히 많다.
연필로 단정하게 쓴 이상의 육필원고 ‘오감도’ ‘건축무한 육면각체’ 등에선
희대의 괴짜로 꼽혔는 그의 이성적인 내면이 보인다.
깨알같이 빽빽하게 쓴 소설가 이균영의 초고 원고는 종이 한장도 귀했던
1970년대 한국 사회의 가난을 드러내고,
정갈하게 정리한 조정래의 취재 노트는 자료 조사에 철저했던
작가의 작업 과정을 알려준다.
오영진의 편지는 처음으로 연애란 개념이 생겨난
1920∼30년대 시대상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다.
건국대 국문학과 교수를 지낸 강 관장이 1999년 정년으로 퇴임하면서 받은
퇴직금을 털어 문학관 설립에 나선 것은 이런 자료들을 어떻게든 지켜야겠다는
사명감과 부담감에 이끌려서다.
당시 그의 집에는 이어령 선생이 1972∼85년 ‘문학사상’을 운영하며
수집한 자료들이 방마다 쌓여있었다.
출판사마다 작가의 육필원고를 받았던 시절,
책을 내고 나면 원고는 내다 버리는 게 자연스러웠던 시절이었지만 부부는 버리지 않았다.
도리어 작고 문인들의 유작과 원고 발굴을 위해 청계천 헌책방까지 뒤졌다.
“몇 조각의 원고라도 지키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애국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문학박물관을 시작한 이유였다.
영인문학관이 들어설 때만 해도 서울에 있는 문학관은
수필가 전숙희 선생이 세운 한국현대문학관밖에 없었다.
“문학관은 문화자산을 지키는 창고”이다.
요즘 문학관과 관련해 가장 자주 언급되는 작가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이다.
몇몇 지자체와 학교 등에서‘한강문학관’을 만들겠다고 나서자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문학관 건립에 반대한다는 뜻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강 관장은
“젊은 생존 작가의 기념관 형식 문학관이 적절하지 않은 건 사실”이라고
조심스레 의견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