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3월 26일 대구에서 (부) 조민제 (모) 이남필 사이 3남4녀 가운데 맏아들로 출생
[함안 조씨] 조영래.
1953(6세) 대구 초등학교 입학
1957(10세) 5학년서울 수송 국민 학교로 전학
1959(12세) 수송 초등 학교를 졸업, 경기 중학교에 입학.
학교에 갔다오면 바로 밑 동생 성래와 함께 대원암이 있는 동네 뒷산에 올라가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함.
1962(15세) 경기 중학교를 졸업[전교 3등] , 경기 고등 학교에 입학. 고등학교 때에는 한문을 비롯해서 어학 과목에 특기.
웅변반과 농촌 연구반 등에서 활동을 하며 경기 고등 학생의 한일 회담 반대 시위를 주도 (경기고 시절 정학처분)
1965(18세) 경기 고등학교 졸업. 서울대 법대 수석입학. [서울대 전체 수석] 수석 합격자였지만 책상머리에 앚아 공부를 위한 공부만 하기보다 살아 있는 지식을 갖추기 위해 애를 썼으며, 대학 시절 내내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관심
1969년(22세) 서울 대학교 법과 대학 졸업 , 서울대 법과 대학원에 진학
1970(23세)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 전태일 분신 사건이 발생하자, 장기표 등과 장례식을 준비하며 전태일 정신 계승 사업에 힘을 쏟음
1971(24세) 사법 시험에 합격, 사법 연수원에 입소했으나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으로 구속
1973(26세)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으로 1년 6개월간에 걸친 감옥생활
군법무관
1974년(27세)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이 때부터 6년 가까이 숨어다니며
전태일 평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집필하며 민주화를 위해 노력함
1976(29세) 맏아들 조일평 출생
1980(33세) 유신체제가 무너지며 수배가 풀리며 복권, 사법연수원에 재입소,
홍성우 변호사의 주례로 아내 이옥경과 결혼식
1981(34세) 둘째 조무현 출생
1982(35세) 사법 연수원을 수료
1983(37세) '망원동 수재 사건' 소송을 담당
1985(38세) '대우 어패럴 사건'등 각종 노동 사건의 변론을 맏아 노동자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노력
1986(39세) '부천서 성고문 사건'으로 5공화국의 부도덕성을 알림, 이후 시국사건은 물론 공해, 노동, 여성 문제등 인권과 관련된 많은 사건의 변론을 맏고, 신문에 논설등을 씀
1990(43세) 폐암 3기로 진단, 12월 12일 사망
세법 전문 변호사 노무현을 인권변호사로 거듭나게 해 준 조영래 변호사
그를 좋아했던 노무현은 인권변호사로 거듭나 전두환 청문회 스타로
정치인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노무현과 조영래가 꿈꾼 세상.....
세상사람들은 조영래 변호사가 대통령이 되길 바랬지만 그는 너무 일찍 죽고 말았다.
그가 이루지 못한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바램은 친구 노무현이 이룬 셈이다.
지금 저 하늘 저 세상 어딘가에서
조영래와 친구 노무현은 다시 만나서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을까?
첫댓글 자랑스러운 불자! 조영래氏의 삶은 인도 헌법의 아버지 '암베드까르 보살'의 삶과 아주 닮았습니다. 둘다 어려운 형편을 극복하고 한 분은 한국 최고의 수재로 다른 한 분은 인도 최고의 학력을 이룬 수재가 되셨고 두 분 다 <인권변호사>셨죠. 그리고 두분 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회에 구현하고자 치열하게 파사현정의 삶을 사신 우리 시대가 만난 불교의 귀감이 아닐수 없습니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도 물론 좋지만 우리가 사는 <시대귀감>도 꼭 우리가 읽고 존경하고 닮아야 할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조영래! 암베드까르! 우리 시대 재가불자들의 영웅이자! 불교의 자존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