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은 여백의 문학이란 말이 그럴싸하다. 간결한 구도를 연상케 하는 수필에서 미학을 느낄 때가 그렇다. 그런 수필에 자연스레 겨울나무가 떠올랐다. 나무를 배우자고 이따금 숲을 찾아 나섰다. 그때 나무는 뭐라고 타이르고 있었지 싶다. 너덜거리는 잎과 가지를 떨구라고 눈치도 없는 나에게 애를 태웠을 것이다. 바람을 이기는 곧은 정신을 익혀야 한다고도 애써 말한듯하다. 그런 처지인데 수필에 턱없이 많은 가지와 잎을 달았다. 그래야만 되는 줄 알았다. 수필가란 호칭에 홀려 뭘 아는 척 글에 떠벌렸다. 수필의 반열에는 이름이 호화스런 명사들이 많아 그 자리에라도 오른듯한 착각을 했다. 수필은 지성의 문학이라는 말을 하니 지성인이 된듯한 혼자만의 설렘으로 우쭐거렸다. 언어 의식이 투철해야하고, 사물관찰에 매운 눈이 있어야 하고, 역사의식이 뚜렷해야 하는 건 뒷전이었다. 대상을 보는 남다른 감각 운운하면서 멋으로만 떠벌렸다. 수필을 따분하게 만든 장본인이 나 자신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볼품도 없는 목에 공연히 힘을 주었다. 수필은 어쩌다 현실 인식에 투철하지 못한 점도 없지 않았다. 선비의 문학이라는 자칫 안일한 가르침에 그런 방향으로 떠밀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면 수필은 현실과 등을 돌리는 현실 도피주의나 다름없는 청맹과니 장르라는 지탄을 받게 된다. 관념이라는 책 속에 파묻힌 현실 도피, 만약 그런 길이 수필이라면 수필을 공부하는 자세를 다시 짚어 보아야 했다. 수필정신 운운은 수필의 문학성을 보다 더 치열하고 응집력 있게 파고드는 올곧은 정진이다. 문학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선구자며 진보주의에 무게를 둔다. 그런데 품격을 고집하는 수필은 품격에 묻힌 안일한 인상만 남긴다. 보다 더 과감하게 꿰뚫고 나가야 하는데 실제 사정은 무르다. 간혹 전위파를 능가하는 칼을 뽑은 수필도 없지 않다. 그게 힘이 되었는지 설익은 문장을 들고 나오는 억지 춘향 같은 수필도 어쩌다 볼 수 있다. 수필을 표현주의에 잣대를 둘 때 그 잣대와는 거리가 멀다. 상상력이며 비유와 상징은 수필의 수필다움을 위한 기본적인 과제며 노력임을 알아야 했다. 수필의 바닥에 깔고 있어야 할 미학을 간파해야 했었다. 수필은 단순한 진술이 아닌 대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창조하는 절실한 표현에 있다. 그런데 상투적이고 식은 내용이나 다름없는 진술로 수필의 박스를 채운다면 그것은 앞서는 수필의 몫은 전혀 아니다. 수필은 대상을 보고 느낀 나름대로의 구문에 의한 새 수필 문법을 구축하자는 몸짓이다. 버릇된 시각에 꾸물대고 있는 천편일률에서 벗어날 때 수필은 보다 새롭게 꽃필 것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수필은 대상과 나 사이를 전파처럼 잇는 눈에 띄지 않는 무수한 이미지의 빛깔에 있다. 수필가는 그 이미지를 찾아 안테나의 귀와 눈을 돌리는 이동무선국이다. 그 작업을 통해서 부지불식간에 이미지 저쪽의 세상을 나름대로 포착하여 읽을 수 있다. 나무는 겨울과 공존할 줄을 안다. 어둠을 극복할 줄도 안다. 나무를 찾아가는 길은 나무에게서 눈에 띄지 않는 이미지를 찾아 수필가의 정신을 한천에 솟은 적막한 나무의 사상으로 채우는 일이다. 그 때 수필은 보다 새로운 빛깔로 눈뜨게 될 것이다. 나무의 인고를 배우고 익히는 일이 수필 작법임을 우선 깨달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수필가는 나무의 감각에 한없이 빚지고 있는 셈이다. 하기에 수필을 하는 일은 나무에게 빚을 갚는 부단한 노력이라고 하겠다. 이 당연한 이치가 수필의 빛이 될 것이다. 함부로 떠벌릴 수 없는 언어 이상의 언어임을 나무가 매섭게 가르쳐 준다. 수필을 위해서는 나무 아래에서 나무와의 부단한 대화를 나누어야 했었다. 겨울 나무는 그 뼈대만으로도 한 편의 당당한 수필이다. 가볍게 수필에 덤벼들어 쉽게 절망하는 인간의 모습을 나무는 바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