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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스크랩 해동잡록 사육신유성원 전기
김종호 추천 0 조회 11 19.07.25 12: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해동잡록 4 본조(本朝)

유성원(柳誠源)



본관은 문화로 자는 태초(太初)요, 고려 대승(大丞)인 유연달(柳連達)의 후손이다. 세종 때에 급제하였다. 임금께서 처음으로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장과 학문이 있는 선비들을 맞아들였을 때 유성원이 참가하여,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과 함께 당시에 이름이 높았다. 세조가 왕위를 물려받을 때 성균관 사예가 되었다. 병자년 변고가 일어났을 때 유성원이 성균관에 있다가 성삼문 등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집에 돌아와 처와 결별하고 사당에 올라가 스스로 목찔러 죽었다.

 

○ 계유년에 세조가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영의정 이조 판서 병조 판서 겸 내외병마사(兼內外兵馬使)가 되니 백관이 단종(端宗)에게 청하여, “세조(世祖)의 공을 주공(周公 주(周) 나라 무왕(武王)의 동생. 어린 성왕(成王)을 도와 왕실을 안정시켰다)에게 비견되니 포상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여, 집현전에 명령하니, 모든 관원들이 다 도망쳤는데, 유성원이 홀로 남아 협박을 받고 글을 초고(草稿)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나와 집에 가서 통곡하며 슬퍼하니 집안사람들은 그 이유를 몰랐다. 단종이 상왕이 되자, 유성원은 성균관 사예(司藝)로서 마음속으로 불평을 품었다. 병자년의 변고에 참여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성삼문이 잡혀가니, 유성원이 그때 성균관에 있었는데 유생들이 성삼문이 감옥에 잡혀간 것을 알리자 즉시 수레를 돌리게 하여 집에 돌아가 여종을 불러 그릇을 내어오라고 하고 처와 술잔을 나누며, 결별하고 사당으로 올라갔다. 처가 오래 기다려도 내려오지 않는 것을 수상하게 여겨 가 보니, 관(冠)과 띠도 풀지 않고 사당 앞에 반듯이 누워서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목에 대고 토막을 가지고 칼자루를 치고 있었다. 구하려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는데 조금 있으니 아전들이 와 시체를 가지고 가서 찢었다. 〈육신유사(六臣遺事)〉

 

○ 세조 때에 《송사(宋史)》가 아직 우리 나라에 오지 않았을 때 하루는 집현전에 여러 선생들이 모여 송(宋) 나라 인물을 논평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송사》를 만드는데 왕안석(王安石)이 어느 전에 있어야 마땅한가?” 하였다. 여러 선생들이 모두, “〈간신전(姦臣傳)〉에 있어야 옳습니다.” 하였다. 한두 사람이 반박하여 말하기를, “왕안석이 신법을 만들어 천하를 어지럽게 하였으니 정말 소인이다. 그러나 왕안석의 문장은 칭찬할 만한 것이 많으며, 그 마음의 근본을 보면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걱정하지 않았던 것이 없다. 천하를 그르친 것은 바로 일에 너무 어두웠고 고집이 센 때문이니, 진회(秦檜)나 채경(蔡京)과 같이 나열할 수 없고 열전에 두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유성원이 힘써 이 말을 주장하였다. 머지않아 《송사》가 왔는데 왕안석이 과연 열전에 들어 있었다. 유성원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옛날 주자(朱子)의 강목(綱目)이 아직 우리 나라에 오지 않았을 때 이익재(李益齋) 선생이 《자치통감(資治通鑑)》〈무후기(武后紀)〉를 읽다가, 길게 탄식하고 시 한 연구(聯句)를 짓기를,


어찌하면 주 나라 나머지를 얻어다가 / 那得周餘分

당 나라 일월에 이어지게 할까 / 續我唐日月


하였더니, 후에 주자의 《강목(綱目)》을 얻어 보니 주자가 과연 주(周)를 물리치고 당 나라를 높였으니 익재가 퍽 자부하였다. 유성원이 감히 익재선생에게 비견할 수는 없지만 마땅히 제군들의 항복은 받아야 하겠다.” 하였다. 《필원잡기》

 

○ 국가 초기에 집현전 남쪽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다. 세종 말년에 흰 까치가 와서 집을 지으니 그 새끼들이 또한 모두 흰 까치였다. 그 후 수년 간은 높은 벼슬자리는 모두 집현전 출신이었다. 그러다가 단종 초에 버드나무가 다 말라버리니 어떤 사람이, “화는 반드시 유(柳)씨로 시작될 것이다.” 하더니 그 말이 과연 증험이 있었다. 유(柳)란 유성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상동

 

○ 홍일휴(洪日休)가 시 짓기를 즐겨하니 유태초(柳太初)가, “그대는 어디서 지은 것이 가장 좋은가?” 물었더니, 홍일휴가, “옛날 사람이 말한 대로 삼상(三上)이다.” 하니, 유성원이, “그대가 말하는 삼상(三上)을 내가 하나하나 알아 맞히겠다. 시 안에 재잘거리는 여자들 말투가 있는 것은 잠자리[枕上]에서 지은 것이고, 몹시 말라 비틀어진 것은 바로 말 위[馬上]에서 지은 것이고, 구린내가 풍기며 사람으로 하여금 코를 가리게 하는 것은 변소[厠上]에서 지은 것이다.” 하니, 홍일휴(洪日休)가 크게 웃었다. 《골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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