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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오복음 13,18-23
지난 연중 제15주일에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으며,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의 네 가지 모습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같은 비유를 다시 들려줍니다. 같은 말씀이라도 다시 들을 때는 또 다른 빛을 비춥니다.
지난번에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을 바라보며 좋은 마음밭을 가꾸어 가야 함을 묵상했다면, 오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이의 자세도 함께 바라보려고 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처음 이 비유를 들려주셨을 때에는, 먼저 말씀을 듣는 사람보다 말씀을 전하는 제자들을 격려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고 이해합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어느 땅이 좋은지 미리 가려내지 않습니다. 길에도, 돌밭에도, 가시덤불에도 아낌없이 씨를 뿌립니다. 지금은 많은 씨앗이 헛되이 버려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는 결코 헛된 씨앗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씨를 뿌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씨를 뿌리는 사람은 결과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마음이 언제 좋은 땅이 될지는 우리에게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사제나 설교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씨를 뿌리는 사람입니다. 가정에서는 사랑과 용서의 말로, 공동체에서는 격려와 섬김으로, 일터에서는 정직과 성실함으로 우리는 날마다 복음의 씨앗을 뿌리며 살아갑니다.
씨를 뿌리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그 씨앗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를 쉽게 단정하거나 포기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저 사람은 안 될 거야."라고 판단하는 순간,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이 아니라 심판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심판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마태오는 이 비유를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다시 읽으며, 이제 말씀을 듣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있는가?"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당신 말씀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열매를 맺고, 어떤 이는 그렇지 못합니다. 마태오는 그 이유를 하느님의 선택에서 찾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바라봅니다. 내 마음이 굳어 있는 것은 아닌지, 시련 앞에서 쉽게 포기하는 것은 아닌지, 세상의 걱정과 재물에 대한 욕심이 말씀을 질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합니다.
좋은 땅은 처음부터 좋은 땅이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날마다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돌을 골라내고, 가시를 뽑으며 말씀이 머물 자리를 마련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씀은 우리 안에서 자라 삼십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함께 가르쳐 줍니다. 말씀을 듣는 제자가 되라는 것과, 말씀을 뿌리는 제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는 말씀이 깊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마음을 가꾸고, 내 밖으로는 결과를 계산하지 않고 사랑과 희망의 씨앗을 아낌없이 뿌리는 삶. 이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제자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에는 당신 말씀의 씨앗을, 우리 손에는 세상을 향해 뿌릴 사랑의 씨앗을 맡기십니다.
그 씨앗을 정성껏 품고 또 기쁘게 뿌려 나갈 때, 열매는 우리의 계산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풍성히 맺어질 것입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7월24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예레미야 3,14-17 마태오 13,18-23
메뚜기가 될 것인가, 청개구리가 될 것인가?
오늘 복음은 다시 ‘씨 뿌리는 농부’의 이야기입니다.
길과 돌밭과 가시밭에 뿌려진 씨들은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좋은 밭에 뿌려진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그 열매는 ‘행복’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부모님은 자녀의 행복을 위해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뿌려주시는 말씀도 또한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씨앗 안에 행복의 열매가 있음을 믿지 못하고 허튼 데에 정신을 쓰는 데 있습니다.
벼가 익어갈 무렵 한 시골 중고등부 주일학교 수업 때의 일입니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은 3명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아이들에게 고등학교에 가더라도 주일학교를 계속 나올 것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아이들은 솔직하게 나오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공부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공부는 왜 하려고?”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공부 열심히 해서 유명한 사람 되려고요.”,
“어느 대학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애인 얼굴이 바뀌어요.”,
“돈 많이 벌어 부모님 호강시켜드리려고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신부님은 “만약 그렇게 되면 행복할 것 같니?”라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존심이 상한 듯, “성당은 따분해요. 어렸을 때부터 성당 다녀도 전해 행복하지 않아요.
아버지는 ‘성당 다닌다고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라고 말해요.
맞는 말 같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신부님은 비장의 카드를 꺼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부님은 “오늘은 용을 만드는 작업을 할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은 창호지로 멋진 용을 만드는 작업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철사로 틀을 만들고 창호지를 조심스럽게 붙이고 그림을 그려서 멋진 용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부님이 메뚜기를 각자 한 마리씩 잡아 오라고 시켰습니다.
메뚜기를 잡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용의 배 부분에 구멍을 뚫고 아이들의 메뚜기를 그 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꼬리 부분에 메뚜기가 빠져나오기에 충분할 만큼의 구멍을 뚫었습니다.
신부님은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메뚜기들이 이 종이 용을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니?”
아이들은 한결같이 그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메뚜기들은 그 강한 발과 턱으로 종이를 뚫기 위해 사정없이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자 그것들은 지쳐 쓰러져 죽어버렸습니다.
아이들은 메뚜기들을 무식하다고 놀렸습니다.
신부님은 미리 잡아두었던 청개구리 몇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용의 배 밑으로 그 청개구리를 넣고 막았습니다.
청개구리들은 뛸 생각도 안 하고 엉금엉금 기어 입과 꼬리 부분으로 다 빠져나왔습니다.
신부님은 다시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유명해지면, 예쁜 여자와 결혼하면,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 것이라 믿지?
이것이 메뚜기와 같은 생각이란다.
너희 힘을 너무 믿는 나머지 뚫을 수 없는 창호지를 머리로 계속 들이박는 거야.
그런 것이 행복이라는 믿음은 너희 안에 있는 탐욕이라는 것이 만들어낸 것이란다.
너희가 아는 명예를 얻어 유명해진 사람 중에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있지?
결혼한 사람은 다 행복해 보이니? 또한, 부자라고 다 행복한 것도 아니란다.
너희들은 청개구리가 될 필요가 있어. 그런 잘못된 믿음에서 벗어나야 해.
우리나라에서는 청개구리는 시키는 것과 반대로 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하지.
너희들이 메뚜기처럼 사는 대부분 친구와는 다른 청개구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성당 다닌다고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야.
그러나 너희를 메뚜기로 만드는 세상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는 있지.
성당은 청개구리가 되는 지혜를 주는 곳이란다.
너희에게 행복의 열매가 열리는 결과는 너희가 메뚜기와 청개구리 중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에 달려있어.”
아이들은 모두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성당에 계속 나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각자는 자아라는 용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용이 헛된 꿈을 조장합니다.
그렇게 교만해진 우리는 결코 뚫을 수 없는 행복을 얻겠다고 머리가 깨지라 모든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 ‘길의 교만’과 ‘돌밭의 육욕’과 ‘가시밭의 물욕’에서 벗어나야만 참 행복에 이를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잠시 멈추어 서서 내가 어디에 머리를 들이박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키가 크지 못한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초등학교 때 밥 먹는 것보다 축구 하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점심시간에 남들 밥 먹을 때 저는 혼자 공을 들고 운동장에서 놀았습니다.
그때 끼니를 거르면 키가 안 큰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저 그때 행복한 것에 집중했을 뿐이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아 그렇게 키가 커야 할 시기는
그렇게 지나버렸습니다.
우리 삶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 에너지를 창호지를 뚫는 데 쓸 것인지 그것에게서 벗어나는 데 쓸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허튼 데에 에너지를 쓰면 열매를 맺을 에너지는 남지 않게 됩니다.
참 행복은 메뚜기와 같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청개구리와 같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에 있습니다.
겸손하게 진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진리란 참 행복은 세속-육신-마귀 자아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30배, 60배, 100배의 행복을 누리려면 메뚜기의 삶을 버리고 청개구리의 삶을 택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강론>
(2026. 7. 24. 금)(마태 13,18-23)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시다.>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마태 13,18-23).”
1)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인간의 응답이 합해져서
이루는 결과입니다.
마르코복음에 있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잘 나타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마르 4,26-29).”
여기서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는,
“하느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데”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1코린 3,6-7).”
어떤 땅이 ‘좋은 땅’이 되는 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것도 안 해도 저절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으려면
인간 쪽의 응답과 협력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4).”
신앙인이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인답게 사는 것은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신앙인 안에 머물러 계시는 분입니다.
만일에 신앙인답게 살지 않고, 신앙생활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자기 안에 머물러 계시는 예수님을 밀어내는 것과 같고, 또 ‘예수님 안에서’ 벗어나서 ‘예수님 밖으로’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스스로 ‘나쁜 땅’이 되는 일입니다.
2) ‘길에 뿌려진 씨’의 경우, 악마가 와서 마음에 뿌려진 말씀의 씨를 ‘빼앗아’ 간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인간이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서 먹은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사탄이 와서 하와를 유혹한 일이 먼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창세 3,1-5), 실제로는 하와가 하느님의 명령을 잊어버리고 선악과를 먹고 싶어 한 일이 먼저 있었고, 사탄이 와서 먹어도 괜찮다고 부추긴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에도, 배반할 마음이 없었던 유다에게 사탄이 접근해서 배반하라고 유혹한 것이 아니라, 유다가 배반하고 싶어 할 때 사탄이 와서 배반해도 괜찮다고 부추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유혹이라는 것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길’을, 악마가 접근하기도 전에 먼저 마음이 말씀에서 떠나 있고, 말씀은 안 듣고 세속의 소리를 듣는 것을 더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3) ‘돌밭에 뿌려진 씨’는,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기 전에는 표시가 나지 않는 경우입니다.
편안할 때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환난과 박해 때에도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을 잘할 사람인지, 아니면 그냥 넘어질 사람인지는, 편안한 시절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실제로 환난과 박해가 닥치기 전에 “나는 돌밭에 뿌려진 씨가 아니다.
나는 좋은 땅에 뿌려진 씨다.” 라고 큰소리치면 안 되고, 늘 스스로 조심하면서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서 ‘뿌리’는 ‘실천’을 뜻합니다.>
4)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서 아무도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거의 모든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도전 과제와 같습니다.
특히 ‘세상 걱정’은 성인 성녀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성인 성녀들은 걱정되니까 더욱 굳게 믿으려고 노력하고 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걱정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고,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걱정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유혹도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극복하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7월24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 13,18-23: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해설 부분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씨를 뿌린 사람은 사람의 마음에 씨를 뿌리나, 어떤 이의 마음은 길가와 같고, 어떤 이는 돌밭과 같으며, 어떤 이는 가시덤불 속과 같고, 어떤 이는 좋은 땅과 같다.”(마태 13,19-23 참조) 이 비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삶의 결과가 얼마나 풍성한 열매로 나타나는가를 보여 준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으로 “악한 자가 와서 빼앗아 간다.”(19절) 이는 사탄의 간섭으로 말씀을 놓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씀을 무관심하게 받아들이면, 하느님의 은총도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한다."(Homiliae in Matthaeum 46 요약)라고 말한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기쁘게 받지만, 뿌리가 없고 인내가 부족한 사람으로 환난이나 박해가 오면 신앙을 쉽게 포기하고 만다. 교회 전통은 이러한 상태를 “겉으로는 신앙을 따르지만, 내면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고 설명한다.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은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말씀의 생명이 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이며, 참된 기쁨과 행복이 세속적 욕망에 가려져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세속적 욕심이 말씀의 힘을 억누르면, 영혼은 말라간다.”(Enarrationes in Psalmos 87 요약)라고 가르친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받아들이고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으로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이는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적극적 협력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가능한 열매이다.
우리의 마음이 길가나 돌밭이 되지 않도록 기도, 묵상, 성사 생활, 말씀 묵상으로 마음을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을 제거하는 습관과 절제는 가시덤불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단순히 성경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봉사, 사랑, 용서, 나눔으로 말씀을 구체화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뿌려주신 씨앗이 자라도록 도와주는 것은 우리의 선택과 노력이다. 교회 전통에서는 이를 “협력 은총(cooperatio gratiae)”이라고 부른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과 우리의 적극적 선택이 만나야 말씀의 씨앗이 싹트고 열매를 맺는다.
내 마음의 밭은 말씀의 씨앗이 잘 자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는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열매를 맺고 있는가? 세상의 유혹과 걱정이 내 신앙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가? 말씀을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 삶이 그리스도를 닮은 생명의 결실로 풍성해지도록 매일 마음을 가꾸고 노력해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