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대 老母와 세 아들 이야기
80 老母와 세 아들 이야기
할머니의 全재산인 3억5000만 원짜리 아파트엔 2억씩 두 건, 4억 원의 근저당권이 설정돼 있었다.
10여년 전 서울에 있을 때의 얘기다.
동네 할머니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고향이 이북인 이 할머니는 6·25동란 중에 피난 내려왔다고 한다.
피난길에서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 셋과 함께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동대문 근처 시장판에서 남의 일 거들어 주고 그 품삯으로 겨우 연명을 할 정도였으나
성실하고 정직했던 덕에 시장의 큰 포목점에서 판매원으로 일자리를 내 주어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점원 급여가 넉넉할 리 없고, 자식들의 미래를 생각하여
피눈물 나는 검약절식(儉約節食)의 고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다행히 인심이 후한 주인의 도움으로 몇 년 후 가까운 곳에 조그만 가게를 얻어 독립을 하게 되었다.
운이 닿아서인지 장사가 잘 되었고, 마침 아들 셋도 모두 착하고 공부를 잘하였다.
돈이 모여 자기 가게도 장만하고, 또 늘리는 등 세월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아들 셋은 모두 대학 교육까지 시켰다. 그리고 하나씩 결혼을 시키고 새 가정을 꾸려 직장 따라 내보냈다.
큰아들은 중고등학교 교사로, 둘째아들은 대기업 회사원으로. 막내는 국내에서 의과대학을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여기까지는 비록 戰時에 남편을 잃고 아들 셋 딸린 과부로 혹독한 고생을 했지만 불행 끝에 다행이었다.
며느리들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했다. 차츰 아들들과도 멀어져 갔다.
세월도 속절없이 흘러갔다. 모아둔 돈은 자식들의 마음을 얻고자 애쓰다 다 털렸다.
아파트 한 채 달랑 남았는데 나이는 80을 훌쩍 넘었다. 허리는 꼬부라지고 몸이 예전 같지가 않다.
그 사이 큰아들은 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했고, 둘째는 모 그룹 계열사 부회장으로 퇴직하고,
셋째는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현지 대학병원에 교수로 눌러 앉았다.
같은 서울에 살면서도 두 며느리는 아예 코빼기도 보이질 않고,
두 아들은 한두 달에 한 번씩 할머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피는 듯 다녀갈 뿐이라고 한다.
외로운 이 할머니가 갈 곳은 없었다. 집을 팔아 양로원에 가려는 생각으로 나를 찾은 것이다.
당시 나는 회사를 나와 부동산중개사무소를 내고 있을 때였다. 할머니의 아파트 등기부등본을 떼어 봤다.
어? 근저당권? 그것도 2건? 이게 뭐지? 그랬다.
할머니의 아파트에는 채권최고액 2억 원씩 2건, 합계 4억 원의 근저당권이 설정되어 있었다.
이게 무엇인가고 여쭈었더니 채권자 이름을 확인한 할머니가 큰아들과 둘째아들이라고 한다.
행여 할머니가 독단으로 집을 팔까 싶어 아들 둘이 근저당권을 설정해 놓은 것이다. 참 알뜰한(?) 자식들이다.
물론 할머니가 도장을 직접 찍어 준 게 아니라 아들들이 어머니 몰래 도장을 훔쳐 그 짓을 해 놓은 것이다.
그때까지도 할머니는 모르고 있었다. 못된 것들!
당시 그 아파트의 시세는 3억5000만 원 정도, 근저당권이 시세보다도 높게 설정되어 있었다.
할머니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이 집은 현재 상태로는 팔 수가 없다고 말씀 드렸다.
너무나 딱했다. 대책을 마련해 줘야겠다는 생각에 미국에 가 있는 아들네와는 사이가 어떠냐고 물었더니
다행히 막내며느리는 사람이 좋다고 했다.
그러나 몇 년 만에 어쩌다 한번씩 보는 며느리를 제대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마침 아들이 며칠에 한번씩 국제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다고 한다.
내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아들에게 나한테 전화를 한번 하라고 일렀다.
며칠 후 미국에서 할머니의 막내아들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할머니가 귀가 약간 어두워 긴 얘기는 못 나누어 왔는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막내 아들은 깜짝 놀랐다.
할머니는 늘 별 일 없다고만 했던 것이다. 객지에서 고생(?)하는 막내가 염려할까 봐
그 형님들이 저지른 패륜을 차마 얘기하지 못했던 것이다.
할머니를 모셔갈 의향은 없는가고 타진을 해봤다.
형님들과의 관계가 그렇다면 당연히 자기가 모셔갈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집 문제는 중개사님이 좀 도와주십시요"라고 내게 부탁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다시 아는 변호사에게 부탁을 했다.
힘들거나 복잡한 사건이 아니어서 흔쾌히 처리해 주겠다는 승낙을 받을 수가 있었다.
두 아들을 상대로 '근저당권 말소 청구의 訴'를 제기했다.
뻔뻔했던 아들들도 차마 법정에는 나타나지 못했다. 사건은 일사천리로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막내며느리가 귀국하여 할머니를 모시고 갔다.
아파트 처분은 천천히 하기로 하고, 우선 목동에 있는 사돈(막내며느리의 언니)에게 관리위임을 해뒀다.
세상에 별 놈들을 다 봤다. 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말을 실감했다.
한편 소용 있는 자식도 있었다. 그러나 자식이 아무리 소용 있은들 마누라, 영감만이야 하겠는가?
첫댓글 부지깽이같은 서방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옛어른들의 말씀...
효부보다 악처가 낫다!는
말도 있고...
"나만 없어봐라!
당신은 개밥에 도토리야!"
그러니 서로 자알 위하고
살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