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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혜월혜명 < 연재 < 기획연재 < 기사본문 - 불교신문 https://share.google/UiffRenlVLXAAN9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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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혜월혜명
기자명
입력 2008.04.12 11:02
근세 한국불교 중흥의 씨앗을 뿌린 경허스님 법제자인 혜월혜명(慧月慧明,1862~1937)스님은 무심도인(無心道人)이다. 덕숭산에서 남방으로 내려와 부산 백양산 선암사에서 대중들에게 깨달음의 향기를 전했던 스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무심도인으로 깨달음 향기 전한 ‘지혜의 달’
경허스님 상수제자 한국불교 선맥 중흥
○…일제 강점기. 부산 선암사에는 많은 대중이 모여 들었다. ‘남방의 도인’인 혜월스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선농일치(禪農一致)의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따르는 이유도 있었지만, 농사를 짓지 않고는 대중 외호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선암사에서는 소를 키워 농사일을 거들도록 했다. 지금처럼 농사를 기계로 짓지 않던 시절에 소는 가장 큰 재산이었다. 소에게 ‘우순(于順)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준 혜월스님은 “너무 일만 시켜 미안하다. 다음 생에는 사람 몸 받아라. 농사철만 지내면 편히 쉬도록 해줄게”라며 아꼈다고 한다.
<사진설명>부산 원효정사에 모셔진 혜월스님 사진. 진영은 부산 해운정사에도 모셔져 있다. 출처=부산 원효정사
○…
어느 날 고봉(古峰)스님을 비롯한 수좌(首座)들이 양산시장에 가서 소를 팔아 버렸다. 절로 돌아온 수좌들은 원주에게 “대중공양 때 맛있는 반찬을 해 달라”며 소판 돈을 건넸다고 한다. 시장에 다녀온 혜월스님이 소를 찾았지만 있을 리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공양을 마치고 대중공사가 벌어졌다. 아무리 천진불이라지만 소를 팔아버렸으니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혜월스님은 꾸중대신 “살던 소 갖고 오너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이때 소를 판 ‘주모자’인 고봉스님이 앞으로 나와 네발로 기어 다니며 “음매 음매”라고 소 울음을 냈다. 이를 본 혜월스님은 “내 소는 애비소요, 애미소이지, 이러한 송아지가 아니다”라고 했다. 혜월스님 전법제자 운봉(雲峰)스님의 손법제자 진제스님(조계종 원로의원.부산 해운정사 조실)은 “깨달음을 찾는 납자들의 세계에서는 소를 판 ‘엄청난 일’도 공부의 방편”이라고 말했다.
○…“스님, 옷 좀 우리에게 보시하십쇼.” 혜월스님이 마을에 나타나면 동네 거지들이 뒤를 따라 다녔다. 마음 좋기로 소문난 스님이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기 때문이다. 옷을 달라면 옷을 주고, 먹을 것을 달라면 먹을 것을 주니, 거지들에게 스님은 부처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승복을 벗어준 스님은 더럽고 낡은 거지 옷으로 갈아입고 선암사로 돌아오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신도들이 스님 옷 대주기 바빴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온다. 일제가 수탈을 일삼던 시기로 먹고 사는 일이 너무 어려워 많은 사람이 유랑하던 시절, 중생의 아픔을 보듬어 준 스님은 ‘보살’이었다.
○…절에 재(齋)가 들어오면 상좌나 신도와 함께 장을 보러갔다. 하지만 장을 온전하게 보고 오는 일은 드물었다. 어느 날 시장에서 콩나물 한독(광주리)을 샀다. 대중들이 많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런데 옆에서 장사하는 또 다른 상인들이 “시님. 우리 콩나물도 사 주세요”라고 하면, 스님은 주저 없이 “그래요. 그럼 주시오”라며 모두 샀다. 한동안 선암사 대중들은 콩나물을 재료로 한 반찬과 국을 ‘질리도록’ 먹어야 했다.
뒤로멈춤앞으로
○…스님은 차별을 두지 않고 대중을 맞이했다. 출.재가를 분별하지 않았고, 재산.명예.지위도 스님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깨달음을 이뤄야 할 수행자이며 중생일 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누구든 절에 왔다 돌아가면 문밖 까지 나와 공손하게 합장하며 배웅했다고 한다. 부산 원효정사 회주 법산스님은 “보살행을 하셨지만 도인이라는 상(相)을 내지 않으셨던 분”이라고 말했다.
○…혜월스님은 법을 전해준 경허(鏡虛)스님이 북방에서 입적해 마을 뒷산에 법구를 모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수월(水月)스님이 만공(滿空)스님에게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경허스님 입적은 1912년 4월이었으며, 소식이 도착한 것은 이듬해 여름으로 추정된다. 혜월스님은 철우(鐵牛).운봉(雲峰).운암(雲庵)스님 등 선암사 대중 5~6명과 함께 갑산으로 향했다. 만공스님 일행과 합류한 혜월스님은 경허스님 법구가 모셔진 산에 도착했다. 찌는 듯한 무더위로 법구 수습에 선뜻 나서기 어려웠다. 이때 혜월스님은 “내가 하지”라며 법구를 모셨다. 철우스님 법어집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혜월선사는 철우스님을 앞세우고 다른 스님 몇 분과 수덕사의 만공스님을 모시고 가서 경허선사의 무덤을 파 화장을 하게 되었다. 경허선사의 뼈는 장대한 황골이었고 장례 중에 혜월선사는 그냥 말없이 눈물만 흘리셨는데, 철우스님은 그날 혜월선사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고 한다.”
○…혜월스님 열반 상황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백양산에서 솔방울을 주워 자루에 담고 내려오는 길에 산기슭에서 입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솔방울을 주워 올 때면 백양산 중턱 길에서 한 번씩 쉬었는데, 그곳서 입적했다는 것이다. 1937년 2월 어느 날. 그날도 스님은 평소처럼 절로 돌아오고 있었다. 늘 쉬어가던 곳에서 한숨 돌린 스님은 백양산과 마을을 한번 바라본 후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는 자세를 취하다 원적에 들었다. 가고 옴이 따로 없는 선지식의 열반을 혜월스님이 보여준 것만은 사실이다. 길에서 열반에 든 부처님처럼 혜월스님은 집착하지 않는 삶의 가르침을 마지막 순간까지 보여주었다.
○…혜월스님이 공양을 마치고 양치하는데 치사리(齒舍利)가 나와 방광(放光)을 했다고 한다. 이를 본 혜월스님은 바닥에 떨어진 치사리를 발로 깔아뭉개면서 말했다. “에이, 고약한 놈.” 스님의 유훈에 따라 법구는 화장후 사리를 수습하지 않고 백양산으로 돌아갔다. 부도와 비를 세우지 않은 것도 스님의 뜻을 따른 것이다. 진제스님은 “입적에 들기 전 혜월선사는 백양산에 올라 떨어진 솔방울을 주워 불 때는 일로 소일 하셨다”면서 “일생을 무심도인의 경지에서 수행정진하신 선지식”이라고 했다.
운봉스님에게 내린 전법게 /
혜월스님의 법맥은 운봉스님을 통해 향곡.진제스님에게 계승됐다. 또한 철우스님에게도 게송을 지어주었다. 절도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혜월스님의 필체는 평생 무심도인으로 자유 자재했던 삶을 보여주는 듯하다. 1902년 쓰인 운봉스님의 전법게 한글풀이는 진제스님 법어집 <고담녹월(古潭月)>을 인용했다. 한글풀이는 다음과 같다.
<사진설명>혜월스님이 운봉스님에게 내린 전법게.
“운봉 성수에게 부치노니, 일체의 유위법은 본래 진실 된 모양이 없으니 저 모양 가운데 모양이 없으면 곧 이름하여 견성이라 함이라. 세존응화 2951년 4월 경허문인 혜월 설함”
付雲峰性粹(부운봉성수)
뒤로멈춤앞으로
一切有爲法(일체유의법)
本無眞實相(본무진실상)
於相若無相(어상약무상)
卽名爲見性(즉명위견성)
世尊應化(세존응화) 二九五一年(2951년) 四月(사월)
鏡虛門人(경허문인) 慧月(혜월) 설(說)
행 장 /
천장암 근처 바위굴서
짚신 만들다 깨달음 성취
1862년 6월19일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신씨(申氏)이고,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13세에 덕숭산 정혜사로 입산해, 15세에 혜안(慧眼)스님을 은사로 출가사문이 됐다.
관음정진을 하던 혜월스님은 24세 되던 해에 경허스님을 만나면서 새롭게 발심 했다. 얼마나 열심히 수행 정진하는지 경허스님이 “혜명(혜월스님의 법명)이의 화두일념은 마치 새끼 잃은 어미 소가 새끼소를 생각하는 것과 같고, 3대 독자를 잃은 홀어머니가 죽은 아들 생각하듯 하는 구나”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설명>부산 선암사 전경.
서산 천장암 근처 바위굴에서 7일간 정진하며 정각(正覺)을 성취했다. 정진 6일째 되는 날 경허스님이 “내일은 길을 떠나야 하니 짚세기나 하나 지어주게”라며 짚을 굴에 넣어주었다. 스승의 뜻에 따라 짚신 한 켤레를 삼아놓고, 다른 짚신을 틀에 넣은 후 ‘탁’하고 두드리는 망치소리에 깨달음을 이루었다.
이 같은 일을 전해들은 경허스님은 인가(印可)를 하고 혜월이라는 법호를 지어 주었다. 경허스님이 혜월스님에게 법을 전하며 한 게송이다. “了知一切法(요지일체법) 自性無所有(자성무소유) 如是解法性(여시해법성) 卽見盧舍那(즉견노사나) 依世諦倒提唱(의세제도제창) 無生印靑山脚(무생인청산각) 一關以相塗糊(일관이상도호)” 우리말 풀이는 이렇다. “일체법을 요달해 알 것 같으면, 자성에는 있는 바가 없는 것. 이같이 법성을 깨쳐 알면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 세상 법에 의지해서 그릇 제창하여 문자와 도장이 없는 도리에 청산을 새겼으며 고정된 진리의 상에 풀을 발라 버림이로다.”
깨달음을 이룬 후 혜월스님은 27년간 덕숭산에 머물다 51세(1913년 무렵)에 남방으로 주석처를 옮겨 정진했다. 양산 미타암과 내원암 등 선방을 유력하던 스님은 부산 선암사에 머물며 납자들을 지도했다.
1937년 어느 날 가고 옴이 없는 경지를 보여주며 원적에 들었다. 세수 75세. 법납은 63세였다.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운봉(雲峰).호봉(虎峰).운암(雲庵).철우(鐵牛) 스님 등이 있다. 부산 안양암 성공(性空)스님도 10년간 혜월스님을 시봉했다.
부산=이성수 기자
[불교신문 2418호/ 4월16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일제 강점기. 부산 선암사에는 많은 대중이 모여 들었다. ‘남방의 도인’인 혜월스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선농일치(禪農一致)의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따르는 이유도 있었지만, 농사를 짓지 않고는 대중 외호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선암사에서는 소를 키워 농사일을 거들도록 했다. 지금처럼 농사를 기계로 짓지 않던 시절에 소는 가장 큰 재산이었다. 소에게 ‘우순(于順)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준 혜월스님은 “너무 일만 시켜 미안하다. 다음 생에는 사람 몸 받아라. 농사철만 지내면 편히 쉬도록 해줄게”라며 아꼈다고 한다.
<사진설명>부산 원효정사에 모셔진 혜월스님 사진. 진영은 부산 해운정사에도 모셔져 있다. 출처=부산 원효정사
○…어느 날 고봉(古峰)스님을 비롯한 수좌(首座)들이 양산시장에 가서 소를 팔아 버렸다. 절로 돌아온 수좌들은 원주에게 “대중공양 때 맛있는 반찬을 해 달라”며 소판 돈을 건넸다고 한다. 시장에 다녀온 혜월스님이 소를 찾았지만 있을 리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공양을 마치고 대중공사가 벌어졌다. 아무리 천진불이라지만 소를 팔아버렸으니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혜월스님은 꾸중대신 “살던 소 갖고 오너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이때 소를 판 ‘주모자’인 고봉스님이 앞으로 나와 네발로 기어 다니며 “음매 음매”라고 소 울음을 냈다. 이를 본 혜월스님은 “내 소는 애비소요, 애미소이지, 이러한 송아지가 아니다”라고 했다. 혜월스님 전법제자 운봉(雲峰)스님의 손법제자 진제스님(조계종 원로의원.부산 해운정사 조실)은 “깨달음을 찾는 납자들의 세계에서는 소를 판 ‘엄청난 일’도 공부의 방편”이라고 말했다.
○…“스님, 옷 좀 우리에게 보시하십쇼.” 혜월스님이 마을에 나타나면 동네 거지들이 뒤를 따라 다녔다. 마음 좋기로 소문난 스님이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기 때문이다. 옷을 달라면 옷을 주고, 먹을 것을 달라면 먹을 것을 주니, 거지들에게 스님은 부처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승복을 벗어준 스님은 더럽고 낡은 거지 옷으로 갈아입고 선암사로 돌아오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신도들이 스님 옷 대주기 바빴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온다. 일제가 수탈을 일삼던 시기로 먹고 사는 일이 너무 어려워 많은 사람이 유랑하던 시절, 중생의 아픔을 보듬어 준 스님은 ‘보살’이었다.
○…절에 재(齋)가 들어오면 상좌나 신도와 함께 장을 보러갔다. 하지만 장을 온전하게 보고 오는 일은 드물었다. 어느 날 시장에서 콩나물 한독(광주리)을 샀다. 대중들이 많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런데 옆에서 장사하는 또 다른 상인들이 “시님. 우리 콩나물도 사 주세요”라고 하면, 스님은 주저 없이 “그래요. 그럼 주시오”라며 모두 샀다. 한동안 선암사 대중들은 콩나물을 재료로 한 반찬과 국을 ‘질리도록’ 먹어야 했다.
뒤로멈춤앞으로
○…스님은 차별을 두지 않고 대중을 맞이했다. 출.재가를 분별하지 않았고, 재산.명예.지위도 스님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깨달음을 이뤄야 할 수행자이며 중생일 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누구든 절에 왔다 돌아가면 문밖 까지 나와 공손하게 합장하며 배웅했다고 한다. 부산 원효정사 회주 법산스님은 “보살행을 하셨지만 도인이라는 상(相)을 내지 않으셨던 분”이라고 말했다.
○…혜월스님은 법을 전해준 경허(鏡虛)스님이 북방에서 입적해 마을 뒷산에 법구를 모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수월(水月)스님이 만공(滿空)스님에게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경허스님 입적은 1912년 4월이었으며, 소식이 도착한 것은 이듬해 여름으로 추정된다. 혜월스님은 철우(鐵牛).운봉(雲峰).운암(雲庵)스님 등 선암사 대중 5~6명과 함께 갑산으로 향했다. 만공스님 일행과 합류한 혜월스님은 경허스님 법구가 모셔진 산에 도착했다. 찌는 듯한 무더위로 법구 수습에 선뜻 나서기 어려웠다. 이때 혜월스님은 “내가 하지”라며 법구를 모셨다. 철우스님 법어집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혜월선사는 철우스님을 앞세우고 다른 스님 몇 분과 수덕사의 만공스님을 모시고 가서 경허선사의 무덤을 파 화장을 하게 되었다. 경허선사의 뼈는 장대한 황골이었고 장례 중에 혜월선사는 그냥 말없이 눈물만 흘리셨는데, 철우스님은 그날 혜월선사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고 한다.”
○…혜월스님 열반 상황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백양산에서 솔방울을 주워 자루에 담고 내려오는 길에 산기슭에서 입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솔방울을 주워 올 때면 백양산 중턱 길에서 한 번씩 쉬었는데, 그곳서 입적했다는 것이다. 1937년 2월 어느 날. 그날도 스님은 평소처럼 절로 돌아오고 있었다. 늘 쉬어가던 곳에서 한숨 돌린 스님은 백양산과 마을을 한번 바라본 후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는 자세를 취하다 원적에 들었다. 가고 옴이 따로 없는 선지식의 열반을 혜월스님이 보여준 것만은 사실이다. 길에서 열반에 든 부처님처럼 혜월스님은 집착하지 않는 삶의 가르침을 마지막 순간까지 보여주었다.
○…혜월스님이 공양을 마치고 양치하는데 치사리(齒舍利)가 나와 방광(放光)을 했다고 한다. 이를 본 혜월스님은 바닥에 떨어진 치사리를 발로 깔아뭉개면서 말했다. “에이, 고약한 놈.” 스님의 유훈에 따라 법구는 화장후 사리를 수습하지 않고 백양산으로 돌아갔다. 부도와 비를 세우지 않은 것도 스님의 뜻을 따른 것이다. 진제스님은 “입적에 들기 전 혜월선사는 백양산에 올라 떨어진 솔방울을 주워 불 때는 일로 소일 하셨다”면서 “일생을 무심도인의 경지에서 수행정진하신 선지식”이라고 했다.
운봉스님에게 내린 전법게 /
혜월스님의 법맥은 운봉스님을 통해 향곡.진제스님에게 계승됐다. 또한 철우스님에게도 게송을 지어주었다. 절도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혜월스님의 필체는 평생 무심도인으로 자유 자재했던 삶을 보여주는 듯하다. 1902년 쓰인 운봉스님의 전법게 한글풀이는 진제스님 법어집 <고담녹월(古潭月)>을 인용했다. 한글풀이는 다음과 같다.
<사진설명>혜월스님이 운봉스님에게 내린 전법게.
“운봉 성수에게 부치노니, 일체의 유위법은 본래 진실 된 모양이 없으니 저 모양 가운데 모양이 없으면 곧 이름하여 견성이라 함이라. 세존응화 2951년 4월 경허문인 혜월 설함”
付雲峰性粹(부운봉성수)
뒤로멈춤앞으로
一切有爲法(일체유의법)
本無眞實相(본무진실상)
於相若無相(어상약무상)
卽名爲見性(즉명위견성)
世尊應化(세존응화) 二九五一年(2951년) 四月(사월)
鏡虛門人(경허문인) 慧月(혜월) 설(說)
행 장 /
천장암 근처 바위굴서
짚신 만들다 깨달음 성취
1862년 6월19일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신씨(申氏)이고,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13세에 덕숭산 정혜사로 입산해, 15세에 혜안(慧眼)스님을 은사로 출가사문이 됐다.
관음정진을 하던 혜월스님은 24세 되던 해에 경허스님을 만나면서 새롭게 발심 했다. 얼마나 열심히 수행 정진하는지 경허스님이 “혜명(혜월스님의 법명)이의 화두일념은 마치 새끼 잃은 어미 소가 새끼소를 생각하는 것과 같고, 3대 독자를 잃은 홀어머니가 죽은 아들 생각하듯 하는 구나”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설명>부산 선암사 전경.
서산 천장암 근처 바위굴에서 7일간 정진하며 정각(正覺)을 성취했다. 정진 6일째 되는 날 경허스님이 “내일은 길을 떠나야 하니 짚세기나 하나 지어주게”라며 짚을 굴에 넣어주었다. 스승의 뜻에 따라 짚신 한 켤레를 삼아놓고, 다른 짚신을 틀에 넣은 후 ‘탁’하고 두드리는 망치소리에 깨달음을 이루었다.
이 같은 일을 전해들은 경허스님은 인가(印可)를 하고 혜월이라는 법호를 지어 주었다. 경허스님이 혜월스님에게 법을 전하며 한 게송이다. “了知一切法(요지일체법) 自性無所有(자성무소유) 如是解法性(여시해법성) 卽見盧舍那(즉견노사나) 依世諦倒提唱(의세제도제창) 無生印靑山脚(무생인청산각) 一關以相塗糊(일관이상도호)” 우리말 풀이는 이렇다. “일체법을 요달해 알 것 같으면, 자성에는 있는 바가 없는 것. 이같이 법성을 깨쳐 알면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 세상 법에 의지해서 그릇 제창하여 문자와 도장이 없는 도리에 청산을 새겼으며 고정된 진리의 상에 풀을 발라 버림이로다.”
깨달음을 이룬 후 혜월스님은 27년간 덕숭산에 머물다 51세(1913년 무렵)에 남방으로 주석처를 옮겨 정진했다. 양산 미타암과 내원암 등 선방을 유력하던 스님은 부산 선암사에 머물며 납자들을 지도했다.
1937년 어느 날 가고 옴이 없는 경지를 보여주며 원적에 들었다. 세수 75세. 법납은 63세였다.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운봉(雲峰).호봉(虎峰).운암(雲庵).철우(鐵牛) 스님 등이 있다. 부산 안양암 성공(性空)스님도 10년간 혜월스님을 시봉했다.
부산=이성수 기자
[불교신문 2418호/ 4월16일자]
○......
<사진설명>혜월스님이 운봉스님에게 내린 전법게.
“운봉 성수에게 부치노니, 일체의 유위법은 본래 진실 된 모양이 없으니 저 모양 가운데 모양이 없으면 곧 이름하여 견성이라 함이라. 세존응화 2951년 4월 경허문인 혜월 설함”
付雲峰性粹(부운봉성수)
뒤로멈춤앞으로
一切有爲法(일체유의법)
本無眞實相(본무진실상)
於相若無相(어상약무상)
卽名爲見性(즉명위견성)
世尊應化(세존응화) 二九五一年(2951년) 四月(사월)
鏡虛門人(경허문인) 慧月(혜월) 설(說)
행 장 /
천장암 근처 바위굴서
짚신 만들다 깨달음 성취
1862년 6월19일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신씨(申氏)이고,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13세에 덕숭산 정혜사로 입산해, 15세에 혜안(慧眼)스님을 은사로 출가사문이 됐다.
관음정진을 하던 혜월스님은 24세 되던 해에 경허스님을 만나면서 새롭게 발심 했다. 얼마나 열심히 수행 정진하는지 경허스님이 “혜명(혜월스님의 법명)이의 화두일념은 마치 새끼 잃은 어미
소가 새끼소를 생각하는 것과 같고, 3대 독자를 잃은 홀어머니가 죽은 아들 생각하듯 하는 구나”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설명>부산 선암사 전경.
서산 천장암 근처 바위굴에서 7일간 정진하며 정각(正覺)을 성취했다. 정진 6일째 되는 날 경허스님이 “내일은 길을 떠나야 하니 짚세기나 하나 지어주게”라며 짚을 굴에 넣어주었다. 스승의 뜻에 따라 짚신 한 켤레를 삼아놓고, 다른 짚신을 틀에 넣은 후 ‘탁’하고 두드리는 망치소리에 깨달음을 이루었다.
이 같은 일을 전해들은 경허스님은 인가(印可)를 하고 혜월이라는 법호를 지어 주었다. 경허스님이 혜월스님에게 법을 전하며 한 게송이다.
“了知一切法(요지일체법)
自性無所有(자성무소유)
如是解法性(여시해법성)
卽見盧舍那(즉견노사나)
依世諦倒提唱(의세제도제창) 無生印靑山脚(무생인청산각) 一關以相塗糊(일관이상도호)”
우리말 풀이는 이렇다.
“일체법을 요달해 알 것 같으면, 자성에는 있는 바가 없는 것. 이같이 법성을 깨쳐 알면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 세상 법에 의지해서 그릇 제창하여 문자와 도장이 없는 도리에 청산을 새겼으며 고정된 진리의 상에 풀을 발라 버림이로다.”
깨달음을 이룬 후 혜월스님은 27년간 덕숭산에 머물다 51세(1913년 무렵)에 남방으로 주석처를 옮겨 정진했다. 양산 미타암과 내원암 등 선방을 유력하던 스님은 부산 선암사에 머물며 납자들을 지도했다.
1937년 어느 날 가고 옴이 없는 경지를 보여주며 원적에 들었다. 세수 75세. 법납은 63세였다.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운봉(雲峰).호봉(虎峰).운암(雲庵).철우(鐵牛) 스님 등이 있다. 부산 안양암 성공(性空)스님도 10년간 혜월스님을 시봉했다.
부산=이성수 기자
[불교신문 2418호/ 4월16일자]
○......
혜명
慧
明
종교·철학
인물
조선 후기
일제강점기
조선후기 정혜사 안수좌의 제자로 경허의 법맥을 계승한 승려.
이칭
호
혜월(慧月)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1년(철종 12)
사망 연도
1937년
출생지
충청남도 예산
집필 및 수정
집필 1995년
김선근 (전 동국대학교, 인도철학)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정의
조선후기 정혜사 안수좌의 제자로 경허의 법맥을 계승한 승려.
내용
성은 신씨(申氏). 호는 혜월(慧月). 충청남도 예산 출신. 1871년(고종 8) 덕숭산 정혜사(定慧寺)로 출가하여 안수좌(安首座)의 제자가 되었고, 1884년에 경허(鏡虛)로부터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수심결 修心訣≫을 배우다가 깊은 뜻을 깨달았으며, 1901년 오도하여 경허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1908년부터 도리사(桃李寺), 파계사(把溪寺) 성전(聖殿), 울산미타암(彌陀庵), 통도사, 천성산 내원사(內院寺) 등에 머무르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특히, 무소유(無所有)와 천진(天眞)으로 생애를 일관하여 가는 곳마다 많은 일화를 남겼다.
파계사 성전에 있을 때에는 함께 있는 동승(童僧)에게 ‘큰 스님’이라 부르면서 존대하였고, 내원사에 있을 때에는 승려들에게 포식을 시키기 위하여 소를 판 뒤, 소를 찾는 주지 앞에서 발가벗고 소걸음을 흉내내며 소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또한, 평생 동안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一日不作一日不食’의 생활을 준수하였고, 가는 곳마다 불모지를 개간하여 논밭을 일구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만공(滿空)의 사찰건축, 용성(龍城)의 역경(譯經), 그의 개간사업을 높이 받들어, 이들 세 고승을 당대의 3대걸승이라 하였다. 내원사에 있을 때에는 손수 산 2,000여 평을 개간하여 훌륭한 논으로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세 마지기의 논을 마을사람의 요청으로 팔게 되었다.
대금을 받아 돌아왔으나 그 돈이 두 마지기 값밖에 되지 않자 제자들이 힐책하였다. 이 때 “논 세 마지기는 그대로 있고 여기 두 마지기 값이 있으니 다섯 마지기가 아니냐! 욕심이 없는 승려의 장사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언제나 보시를 행하고 꾸밈없이 행동하며, 근면탈속의 탐욕이 끊어진 근래의 희유한 승려로 평가받고 있다. 1937년 부산 범일동 안양암(安養庵)에서 제자 운봉(雲峰)에게, “일체의 변하는 법은 본래 진실한 모습이 없다.
그 모습의 뜻이 무상임을 알면 그것을 이름하여 견성이라 한다(一切有爲法 本無眞實相 於相義無相 卽名爲見性).”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참고문헌
『한국불교소의경전연구(韓國佛敎所依經典硏究)』(이지관, 보련각, 1973)
- 『한국고승평전』(김정휴, 홍법원,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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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의 길-혜월 혜명선사
1997-04-29
"만공아, 혜월이 몸이 앉은채로 얼어서 굳었구나""스님 날씨가 추워 얼어서입적을 했나 봅니다""눈빛이 살아있으니 죽지는 않았어""스님 벌써 7일째차디찬 바위굴 돌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수행하고 있으니 냉기가 척추를타고 올라와 얼어서 굳었나 봅니다""빨리 물이나 덥혀오거라""스님 머리만 따뜻하고 눈만 움직일 뿐이예요""부처님의 설산고행상을 보는 것 같구나"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의 대화소리에 선정에서 깨어난 혜월스님은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몸은 얼어서 내몸이아니었다.慧月스님은 조선말 세도정치와 척족의 정치로 민초들이 파탄의 지경에 이르러 고통을 겪고 있던 시기에 불법으로 살다 불법을 위해 불법으로 돌아간天眞의 몇몇 무심도인 가운데 한분이었고 禪匠중의 선장이었다.경허스님이서산 천장암에서 定眞을 떨치며 수행에 매진하고 있을 때 혜월스님을 만나게 되었다.일자무식이지만 천진무구한 인품과 날카로운 지혜의 法器를 간파한 경허스님은 혜월스님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고 참선의 관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리도록 지도했다.관음정진과 참선으로 3년간의 기도와 수행을 마친 혜월스님은 어느날 경허스님의 문을 두드렸다."스님 저에게 글을 가르쳐 주십시오""때 늦게 글은 무슨 글을 배운다 하는가" "글 배우는 때가 따로 있겠습니까. 배우면 배우는 것 아니겠습니까""응그런가.그러면 배워 보자구"보조국사의 <수심결>을 가르치며 글을 깨우쳐준 경허스님은 임제의현선사의 <臨濟錄> 한구절을 화두로 던져 주었다.四大不解說法聽法虛空不解說法聽法只汝目前歷歷孤明物形段者解說法聽法"네가지 물질적요소는 법을 말할줄도 들을 줄을 모르고 허공도 또한 그러하거니 다만네 눈앞에 항상 뚜렷하여 홀로 밝고 형상없는 그것이라야 비로소 법을 말하고 법을 듣느니라"혜월스님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듯 멍하니 입을 다물지 못하고 "목전에 뚜렷하고 형상 없이 홀로 밝은 것이라. 형상없이 홀로 밝은 것이 무엇인가"에 정신이 집중되고 모든 망상이 딱 멈추었다.이때 경허스님은 다시 큰소리로 "알겠느냐, 어느 물건이 설법하고 청법하느냐. 형상 없으되 뚜렷한그 한 물건을 일러라"혜월스님은 더욱 앞이 캄캄했고 의심덩어리가 가슴에 뭉치게 되어 비수처럼 꽂혀 답답할 뿐이었다. 이때부터 혜월스님은 밥을 먹어도 기도 염불을해도 머리와 가슴에는 늘 "대체 이 한 물건이 무엇인가"하는 화두로 꽉 차서 앉으나 서나 잠잘때나 대소변을 볼때나 오직"한물건이 무엇인가"의 한생각 뿐이었다.혜월스님의 화두 참구를 보고 경허스님은 "혜월이의 화두일념은 마치 새끼잃은 어미소가 새끼소를 생각하는 것과 같고, 3대독자를 잃은 홀어머니가죽은 아들 생각하듯 하는구나"하고 칭찬했다.이렇듯 수개월동안 화두일념을놓고 숙면일여 몽중일여 경지에서도 "대체 이 한 물건이 무엇인가"를 참구하던 혜월스님은 마침내 생사결단의 각오로 천장사 바로 옆 바위굴에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여보게 혜월 무엇이 보이는가"경허스님이 매일 한번씩 바위굴에 들러 말을 던질뿐 연암산산새도 산짐승도 소리를 잃은지 오래였다.이렇게 바위굴에들어간지 6일째 되던날 경허스님은 "내일은 길을 떠나야 하니 짚세기나 하나 지어주게"하고 바위굴에 짚을 넣어 주었다.일념에 일념이 거듭 뭉쳐 7일이 되던날 혜월스님은 짚신 한 켤레를 다 삼아놓고 마지막으로 짚신을 틀에 넣고 "탁"하고 두드리는 나무망치소리에 그렇게 찾던 "한물건"이 환하게 열리며 벅찬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혜월스님은 경허스님을 찾아가 화두 공안에 대해 점검을 받으며 법거량을청했다."그래 참선은 무엇하러 하는가""못에는 고기가 뛰고 있습니다""그래자네 지금 어디 있는가""산 꼭대기에 바람이 지나 갑니다"경허스님은 그자리에서 印可하고 전법게송을 내렸다.了知一切法 白性無所有如是解法性 卽見盧舍那休世諦 倒提昌 無生印靑山脚一關以 相塗糊"일체법을 사무쳐 알면 자성에또한 소유가 없는것/이와같이법성을 깨쳐 알면 노사나 부처님 곧 보리라/세상의 생멸법 쉬어 생사초월한도리 부르짖노니/청산 다리 한 빗장으로서 서로 우물쭈물 하도다"경허스님은 혜월스님에게 "남방이 緣土이니 이 길로 남쪽으로 가도록 하라"했다.혜월스님은 하직하고 곧 양산 미타암으로 갔다.오도를 한뒤로도 保任를 계속했고 一日不作 一日不食을 그대로 실천하며잠시도 쉬지 않고 쓸고 닦고 짚신 삼고 새끼를 꼬는가 하면 노는땅 쓸모없는 땅은 다 일구어서 좋은 논.밭으로 개간했다.형식에 걸림없고 무엇에도 집착없이 本願淸淨한 마음자리를 格外的으로 자유자재 했던 혜월스님은 일화는 수없이 많다.부산 금정산 선암사에 있을때 한 신도가 뭉치돈을 내놓으면서 아버지 49재를 청했다.상좌 운암스님은 재일 하루전 절 대중들을 데리고 시장에 나가면서 "스님,아침 공양하신뒤 천천히 돈 가지고 시장으로 오십시요"라고 말했다."알았다.먼저 가 보도록 해라"얼마후 시장을 가던 혜월스님은 양쪽다리가 모두 없는걸인이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갖고 있던 돈을 다리없는 걸인에게 다 주었다.상좌 운암스님은 재 지낼 물건들은 흥정해서 잔뜩 실어놓고 큰스님만 기다리고 있다가 빈손으로 오는 스님의 모습을 보고 의아해 하며 말했다."스님 재지낼 물건 흥정 다 했습니다""그래 벌써 재 다 지냈다. 내가 오다가 재 잘 지냈다"무심도인 해월스님의 면목은 대개 이러하다. 스님개인의사생활은 아주 검소하고 순약해서 소지품이라고는 발우 한벌에 작은 이불하나, 삼베옷 한벌에, 참선할때 쓰는 방석이 전부였다. 스님은 밤에 잘 적에는결코 요를 까는 일이 없이 맨바닥에 잠깐 눈을 붙일 뿐이고 언제나 참선,예불, 기도, 울력등 일 밖에 모를 뿐이었다.스님은 말년에는 "나무정승"을 많이 부르시며 정진하셨는데 하루는 제자운봉을 불러"이제 가야겠다""한말씀 하시고 가셔야지요"一切有爲法 本無眞實相於相義無相 卽名爲見性"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법/본래 진실한 바탕이없다/겉모양 보고 상 없는뜻 사무쳐 알면/바로 이것을 견성이라 하네"이같은 전법계송을 운봉스님에게 주고 나무와 이야기를 주고 받던 선암사아래에 안양암에서 삼매에 들어 단식에 들었다. 이후 뒷산에 올라 솔가지를잡고 선채로 坐脫立亡의 열반에 들었다.<林秉禾 기자>
ㅡ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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