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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할 불순종
신 28:47-57
47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48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 마침내 너를 멸할 것이라
49 곧 여호와께서 멀리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가 날아오는 것 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
50 그 용모가 흉악한 민족이라 노인을 보살피지 아니하며 유아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51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의 소산을 먹어 마침내 너를 멸망시키며 또 곡식이나 포도주나 기름이나 소의 새끼나 양의 새끼를 너를 위하여 남기지 아니하고 마침내 너를 멸절시키리라
52 그들이 전국에서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네가 의뢰하는 높고 견고한 성벽을 다 헐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의 모든 성읍에서 너를 에워싸리니
53 네가 적군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한 공격을 받아 곤란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살을 먹을 것이라
54 너희 중에 온유하고 연약한 남자까지도 그의 형제와 그의 품의 아내와 그의 남은 자녀를 미운 눈으로 바라보며
55 자기가 먹는 그 자녀의 살을 그 중 누구에게든지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적군이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맹렬히 너를 쳐서 곤란하게 하므로 아무것도 그에게 남음이 없는 까닭일 것이며
56 또 너희 중에 온유하고 연약한 부녀 곧 온유하고 연약하여 자기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도 아니하던 자라도 자기 품의 남편과 자기 자녀를 미운 눈으로 바라보며
57 자기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가 낳은 어린 자식을 남몰래 먹으리니 이는 네 적군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하게 하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함이리라
신 28:47-57 /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풍성하게 주어 잘살게 하실 때에 여러분이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않으면 48)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원수들을 보내어 그들을 섬기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굶주림과 목마름을 당하며 입을 옷도 없고 어느 것 하나 충분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는 여러분에게 쇠멍에를 씌워 주어 마침내 전멸하게 하실 것입니다. 49) 여호와께서 땅 끝의 먼 곳에서 한 백성을 불러다가 여러분을 치게 하실 것이며 여러분은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독수리가 덮치듯이 그들이 여러분에게 덮칠 것이며 50) 용모도 흉악하게 생긴 족속이 노인과 어린아이도 무차별하게 쳐죽일 것입니다. 51) 그들이 여러분의 가축을 다 잡아먹고 여러분의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도 다 먹어 치우고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아서 결국 여러분은 굶어 죽게 될 것입니다. 52) 여러분은 높고 튼튼한 성벽들을 의지할 것이지만 그 흉악한 족속은 여러분을 성읍 안에 가두어 놓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땅 어디에서나 그들이 여러분을 성읍 안에 포위하고 마침내 모든 성벽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53) 여러분이 원수들에게 포위되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면 여러분이 낳은 아들딸들 곧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자녀들까지 잡아먹게 될 것입니다. 54-55) 여러분 가운데에서 아주 너그럽고 온순한 남자도 거침없이 자기 자식들을 잡아먹을 것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그 고기를 나누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의 형제들이나 자기 품안의 아내나 남아 있는 자식들에게도 나누어 주지 않으려고 눈을 부라릴 것입니다. 성읍마다 원수들에게 포위되어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정도로 굶주림에 시달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56) 여러분 가운데에서 아주 너그럽고 온순한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땅바닥에 발도 대지 않을 만큼 호강하면서 귀엽게 살던 여자도 품안의 남편과 자기 자식들에게 눈을 부라릴 것입니다. 57) 그 여자는 오히려 자기의 두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갓난아기까지 은밀하게 먹어 치울 것입니다. 성읍마다 원수들에게 포위되어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정도로 굶주림에 시달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은 불순종의 삶을 끊어내도록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결과(47-4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든 것이 풍족할 때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섬길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대적들로부터 너무 심한 압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대적들의 노예가 되어 마치 철 멍에를 그들의 목에 메게 한 것처럼 굶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핍절한 삶에 빠질 것입니다.
대적들을 섬김(49-52) 대적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들을 에워싸고 멸망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어리석게도 자신들의 성읍이 견고하기에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 요새는 결코 그들을 지켜주지 못할 것입니다. 대적의 침략은 땅 끝, 즉 이스라엘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적이 독수리처럼 오게 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먹을 것이며,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주전 586년 바벨론 침공이나 주전 722년 북 이스라엘을 공격한 앗수르의 침공처럼 이스라엘이 조공을 바치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견고한 성벽을 다 헐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앗수르와 바벨론은 독수리로 암시되고 있는데(호 8:1; 렘 48:40), 독수리는 빠르고 강한 군사력을 상징합니다. 또한 이 대적들은 잔인하고 흉악하여 젊은 사람들뿐 아니라 노인과 아이들까지도 노예로 삼고 살육할 것입니다.
비참한 결과(53-57)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대적에게 에워싸이게 되며 그들의 귀부인들까지 자신의 자녀를 먹게 되는 상황까지 발생하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신 저주의 극치입니다(레 26:29). 실제로 여호와를 배반한 북 왕국 여호람 때 사마리아 성 안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포위되어 멸망하기 직전에 임했습니다(왕하 6:24-33; 애 2:20; 4:9-10). 이처럼 영적 변절이 불러온 가장 심각한 결과는 적에 의한 유린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자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주권적 통치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을 뿐입니다(시 49:20).
적용: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결과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혹여나 당신의 영적인 삶 가운데 부지중에라도 불순종한 것이 있는지 점검해 봅시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지은 인간은 사망이라는 형벌이 선고되어 있습니다. 사망에는 영혼이 몸에서 분리되는 육체적인 죽음이 있는데 모든 사람에게 정해 놓으신 일입니다. 더욱 무서운 형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불신으로 교제가 끊어진 상태요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가장 두려운 영원한 죽음의 형벌입니다.
< 설 교 >
부요를 영영히 누리는 길
신 28:47-48 / 지용수 목사
예수님을 믿는 가장 큰 목적은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아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받는 복은 우리의 인격이 주님과 같이 변화되어 우리가 귀한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또 부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셔서 부하게 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셔서 가난하게 하시고’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잠언 10:22) 할렐루야!
우리가 부하게 되고 모든 일이 잘 되어도 마음에 근심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평안과 함께 오고 오래 갑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은 세상의 방법으로 부자가 되지 마시고 하나님께 복을 받아 부요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가난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가 어렵습니다. 가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시고 부르짖게 만드시는 훈련 과정과 도구는 될지언정 축복은 아닌 것입니다. 왕의 아들과 딸이 이웃집에 돈을 빌리러 다닌다면 그것이 왕에게 영광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저와 여러분이 날마다 형편이 어려워서 돈을 빌리러 다닌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왕자와 공주가 어렵게 살면 왕에게 누가 되듯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늘 어렵게 살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잘 되기를 바랍니다.
성공하시기를 바랍니다.
승진하시기를 바랍니다.
부잣집 앞의 나사로처럼 하나님을 믿어도 천국은 갑니다. 그러나 부잣집 앞의 나사로 같은 사람이 되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힘이 있어야 농촌 교회도 돕고, 선교사도 파송하고, 가난한 사람도 돕고, 교회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힘이 없으면 이렇게 귀한 성전 건축을 해도 마음뿐이지 헌금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힘이 없는 사람은 부모를 섬기기도 어렵습니다. 자녀를 제대로 교육시키기도 어렵습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잘 교육시켜서 별 같은 인물이 되게 해야 하는데 가난하면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부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링컨에게 “당신은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변호사가 되고, 어떻게 미국의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습니까?”라고 묻자 링컨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렇게 되기로 마음먹은 그 시간에 이미 그 일의 절반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할렐루야!
‘나는 부자가 되어야 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자가 되어야 해.’ 하고 마음을 먹는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가난하지만 진실하게 살 거야.’라고 마음먹는 그 사람은 그렇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먹고 살면 진실하게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반드시 성공하고 크게 되어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며 살아야 될 줄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노력해야 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으면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처음 오신 분이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이 자리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은 완료형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영생을 얻었고’
이미 완료가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은 이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하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도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펼쳐 놓으신 길을 우리가 노력해서 열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이 100%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만 은혜 속에서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께서 주시지만 기도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
부자가 되려면 부자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사야 58장 13절, 14절에 말씀하십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할렐루야!
주일에 교회로 와서 예배만 한 시간 드리는 것은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종일 하나님을 높이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고 특별히 우리에게 물질의 부요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사람에게 주 안에서 행복도, 명예도 주시고 특별히 부요를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십일조를 드리는 자는 창고에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수입이 1억인데 생활비로 쓰는 것이 천만 원이라고 백만 원만 헌금하는 것은 십일조가 아닙니다. 수입이 1억이라면 천만 원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켜 주십니다.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 눈 딱 감고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쟁이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아무리 주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잘 해도 부모님을 섭섭하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십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섬기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부모님을 섭섭하게 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복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골로새서 3장 20절에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Children, obey your parents in everything, for this pleases the Lord.)』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원어로 보면 ‘우리가 부모를 즐겁게 하는 것,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다.’라는 뜻입니다.
따라 합시다.
“하나님과 부모는 한 방향이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부자가 되는 길입니다. 부자가 되려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효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상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시편 128:2)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함에 있습니다. 게으르게 살고도 부귀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게으른 사람이 부귀를 누리게 되었다 해도 그런 사람은 곧 망합니다. 그러나 부지런해도 어리석게 부지런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 분야의 전문 기술을 쌓고 그것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왕융칭은 지금 대만에서 제일가는 부자입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에도 다니지 못했습니다. 16살 때 쌀가게를 시작했는데 그 지역에 쌀가게가 30개나 되어서 그의 가게는 늘 적자가 났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던 그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밤새도록 돌과 모래를 가려내어 돌과 모래가 섞이지 않은 쌀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모든 쌀가게에서는 모래나 돌이 섞인 쌀을 그대로 파는데 그의 가게에서만 돌이나 모래가 섞이지 않은 쌀을 팔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쌀을 사가는 손님들에게 “그냥 가세요. 제가 배달해 드릴게요.” 하고는 배달까지 해 주었습니다. 사실 쌀을 사서 메고 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처음 왔을 때만해도 우리 교우들 중에 가난한 집이 많아서 저희 집에 있는 쌀을 한 말, 두 말 메고 가난한 집에 갖다 주곤 했는데, 그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는 그 힘든 쌀 배달까지 해 주었습니다. 또 손님들의 식구 수를 기억했다가 쌀이 떨어질 때쯤 되면 “쌀이 떨어져 가지요?”라며 손님이 찾아오기 전에 쌀을 들고 그 집으로 갔습니다. 불과 몇 달 만에 매상이 10배로 올랐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니 그는 대만 최고의 갑부가 된 것입니다. 부지런하면 됩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우리는 부요하되 그 부요함을 대를 이어 누려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시므리는 왕이 된 지 7일 만에 적군에게 포위당하니 스스로 왕궁에 불을 질러 죽습니다. 이런 시므리 왕이 축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 보면 노인이 악전고투 끝에 대어를 낚게 됩니다. 고기가 너무 크니 배에 실을 수가 없어서 뱃전에 묶어 두고, 배 길이만큼 긴 고기를 잡았다고 좋아하는데 어디선가 상어 떼가 나타나 그 고기를 뜯어 먹습니다. 열심히 상어 떼를 쫓았지만 결국 고기는 앙상한 뼈만 남게 됩니다. 고기를 잡고 기뻐한 것은 몇 시간도 채 안 됩니다. 이것을 축복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갔지만 결혼한 지 3일도 지나지 않아 이혼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아합은 왕이 되고 이세벨은 왕후가 되어 권세를 누리지만 아합이 죽으니 그 피를 개가 핥고 이세벨이 죽으니 그 시체를 개가 다 먹어 두개골과 손바닥만 남습니다. 또 열왕기하 10장에 보면 그의 아들 칠십 명은 목이 잘려 죽는데, 그 목이 광주리에 담겨 예후에게 보내집니다. 이것이 무슨 축복이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그 왕위를 대대로 누립니다.
부유하게 되었든, 왕이 되었든, 성공했든 대를 이어 영영히 누리는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그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 할렐루야!
우리가 대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고, 갈수록 더욱 전성기를 맞는 방법은 더욱 열심히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교회에 충성하는 일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는데 복을 받고 나서 하나님을 뒷전에 두면 하나님께서 그 복을 빼앗지 않으시겠습니까? 사울이 겸손하니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시고 전쟁에서도 이기게 하시고 강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왕이 된 후 하나님은 뒷전이고 자기를 위한 기념비를 세우며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에게 대를 잇는 복을 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촛대를 옮겨버리십니다.
그러나 다윗은 왕이 된 다음에 하나님을 더 기뻐합니다. 시편 122편 1절에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라고 찬양합니다. 시편 16편 2절에서 3절에는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나의 복이고, 성도들이 나의 즐거움이고, 교회가 나의 행복입니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가지고 올 때는 너무 좋아서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속살이 다 보이도록 춤을 추며 하나님을 즐거워했습니다. 교회에서 박수를 치면 자기 체면이 깎이는 줄 알고 박수를 치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다윗은 왕인데도 그렇게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복을 주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미국에 갔다가 40일 만에 돌아왔을 때, 손자 준이가 40일 동안 사라졌다 나타난 할아버지를 보고는 “와! 우리 아빠지? 그지? 우리 아빠지? 그지?” 하면서 깡충깡충 뛰며 좋아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두 시간을 그렇게 뛰어다니며 좋아하는 것을 보니 제 간이라도 빼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미국에 가서 만났을 때는 이놈이 시큰둥하고 뛰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야 임마, 국물도 없다.’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같은 손자지만 저를 보고 좋아서 뛸 때는 제게 있는 것을 다 주고 싶었는데, 저를 보고도 시큰둥해서 배신당한 기분이었습니다. 이번에 제가 상처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 앞에서 아기처럼 즐거워할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지 모릅니다.
시편 100편 1절, 2절에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라고 찬양합니다.
느헤미야 8장 10절에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for the joy of the Lord is your strength.)』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힘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면 그 복을 계속해서 주시고 점점 더 큰 복을 주십니다. 언제나 기쁨과 즐거움으로 주님을 섬기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에서나 의와 정직을 지켜야 합니다.
성경 곳곳에 의인이 받을 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시편 37:1-2)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시편 37:10)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궤휼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잠언 2:21-22)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시편 37:29)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이사야 26:7)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시편 118:15-16)
악인의 등불은 결국 꺼지지만 의인의 등불은 점점 더 환하게 됩니다. 아무리 복을 받아도 방탕하게 살면 결국 망하게 됩니다. 아무리 복을 받아도 정직한 길을 가지 않으면 복을 다 빼앗기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정직하고 의롭게 살면 하나님께서 주신 복 속에 영영히 거하도록 영원히 그 의인의 집을 지켜주십니다. 의인의 재산, 자녀, 모든 것을 도와주십니다.
우리 모두 죄를 멀리해서, 받은 복을 영영히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간 앞에, 사람 앞에, 물질 앞에 의롭고 깨끗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합니다.
그리고 온유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5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는 겸손과 같은 뜻입니다.
시편 37편 11절에도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가졌다고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나는 남과 달라. 수준이 달라.’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꺾어버리십니다.
우리에게 ‘나는 남과 다르다’고 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우리는 다 똑같습니다.
따라 합시다.
“우리는 흙덩어리다.”
오늘 죽으면 똑같이 썩어서 냄새날 우리인데 무엇이 잘났습니까? 무엇을 가졌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야고보서 4:6)
하나님께서 높여 주셨을 때, 부유하게 되었을 때, 십일조를 2억 3억 10억 할 때 더 겸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장관이 되고, 대통령이 될 때도 겸손해야 그 복을 오래 누리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어서도 나단 선지자가 “당신이 죄인이오.”라고 할 때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회개했습니다. 왕이니 그런 말을 하는 선지자의 목을 칠 수도 있었지만 다윗은 겸손했습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하나님의 종을 죽였다가 결국 자신은 미치게 되고 아들들도 죽게 됩니다.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가 존경하는 영국의 총리였던 처칠은 겸손하기로도 유명합니다. 전쟁 중 제임스라는 중사가 탄 전투기 엔진에 불이 붙었을 때 그는 탈출하지 않고 오히려 밧줄로 자기의 허리를 묶고 비행기에 올라가 엔진의 불을 껐습니다. 그래서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했습니다. 국가의 재산인 전투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공중에서 곡예를 한 중사에게 빅토리아 훈장이 수여되었습니다. 그는 훈장을 받기 위해 처칠 총리 앞에 섰습니다. 대장 앞에서도 덜덜 떨 일개 중사가 총리 앞에 섰으니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긴장해서 굳어 있는 제임스 중사에게 처칠이 다가와 묻습니다.
“내 앞에 서니 긴장되고 떨리지요?”
“예, 각하. 예!”
“당신 앞에 서니 나도 떨리고 긴장됩니다.”
“예?”
“당신은 그만큼 중요한 사람입니다. 영웅입니다.”
처칠은 그렇게 중사의 긴장을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난 체하지 않고 누구 앞에서나 늘 겸손한 처질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유명한 한 역사가가 처칠의 집에 갔다가 벽에 현상 수배 전단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키는 173cm, 몸집은 크고 돼지같이 생겼음. 턱에 수염이 많음. 미련하고 네덜란드 말도 제대로 못함, 머리가 아주 나쁜 놈임, 이름은 처칠. 죽이든지 생포하든지 상관없음. 잡아 오는 사람에게 25파운드.’
그것은 보어 전쟁 때 포로로 있다가 탈출한 처칠을 잡기 위해 보어인들이 뿌려 놓았던 전단인데 그것을 처칠이 보고 가져온 것입니다. 처칠은 총리가 된 후에도 그 전단을 자기 방에 붙여놓고 ‘25파운드밖에 안 되는 자신’을 늘 기억하며 언제나 겸손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우리의 고향은 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리 좋은 것으로 세워주셔도 우리는 흙입니다.
한 옷걸이가 자신이 좋은 옷을 걸쳤다고 으스대니 옆의 옷걸이가 “얘, 너는 옷걸이라는 걸 잊지 마.”라고 했답니다. 아무리 좋은 옷을 걸쳤어도 옷걸이는 옷걸이일 뿐입니다. 그 옷을 벗기면 다 같은 옷걸이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겸손합시다. 꿈에서도 겸손합시다.
만일 제 아내가 난 체하며 “어쩌다가 내가 당신 같은 남편을 만나 가지고……. 나는 장관을 만날 여자인데…….” 라고 한다면 제가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그러나 아내가 “여보, 당신을 만난 것이 제가 받은 가장 큰 복이에요.”라고 한다면 아내에게 뭐든지 다 주고 싶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겸손한 태도로 대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도 겸손해야 합니다. “고맙다. 아빠 엄마는 그렇게 살지 못했는데…….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잘 해주니 고맙다.”라고 할 때 아이들이 힘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에서나 이렇게 온유한 자가 그 복을 오래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이익을 많이 남겨 드려야 합니다.
에베소서 1장 11절에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회사고,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따라 합시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많은 이익을 돌려 드릴 수 있을까?”
우리는 늘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밤낮 생각하는 일은 ‘어떻게 하면 영혼을 많이 구원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릴까? 어떻게 하면 10만 영혼, 50만 영혼을 구원할까?’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입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어 헌금을 많이 하고, 선교사도 파송하고, 선한 일도 많이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직장인은 ‘내가 어떻게 직장생활을 해서 우리 부원들에게 주님의 은혜를 은은히 나눌까?’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부장님이 예수님을 믿으면 그 부서의 크리스천 부원들이 좋아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부원들은 ‘우리 부장님이 예수 믿지?’라며 조심하게 됩니다.
김영삼 장로님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대통령에게 장로님다운 신앙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말이 있었지만 사실 장로님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사회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서울에 있는 한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의 한 집사님 부친이 벽촌에 사시다 돌아가셔서 교인들이 장례식을 하러 갔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서는 기독교식으로 못해!”라며 교인들을 쫓아내 장례식을 할 때 고생을 많이 했답니다. 그 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그 집사님의 모친이 돌아가셨답니다. 교인들이 장례식을 하러 또 그곳에 가면서 “아이고! 이번에는 또 어떻게 하나?”라며 걱정했는데 그 동네에 도착하니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어서 오세요. 기독교식으로 장례식을 하세요. 나라님이 장로님이신데…….”라고 하더랍니다.
따라 합시다.
“나라님이 장로님이신데.”
공직에 있든, 직장에 있든 우리는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이익을 돌려 드려야 합니다. 록펠러가 그 돈을 자기만을 위해 썼다면 지금 누가 록펠러를 알아주겠습니까? 그는 그 돈으로 교회를 많이 짓고, 뉴욕 시민의 수도세를 다 내고, 사회에 봉사를 많이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뉴욕 시민의 수도세를 록펠러 가(家)에서 다 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록펠러는 세계인이 알아주는 아는 사람이 되었고, 그 부가 4대, 5대까지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록펠러에 버금가는 부자였던 오나시스는 그 많은 돈을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썼습니다. 아들에게 자가용 비행기를 사 주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의 아들은 비행기 사고로 죽고, 그는 술병으로 죽어가면서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낭비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이익을 많이 드리면 하나님께서 더 흥왕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50년 넘게 부를 유지하는 부자가 거의 없습니다. 100대 기업에 들었던 사람들을 조사해 보면 50년 뒤에도 여전히 그 리스트에 남아 있는 사람은 열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 깃발 날리며 살던 사람도 그렇게 스러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어 주시니 그 부를 영영히 누리는 것입니다.
시편 125편 1절에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주님! 주님!”
앉으며 일어서며 걸으며 핸들 잡으며 언제나 “주여! 주여!”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문에, 저와 제 집에 방패가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의 방패가 되실 줄 믿습니다.
웨익스와 니콜라스는 웨스트민스터 초등학교 동급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니콜라스가 놀다가 실수로 교실의 커튼을 찢었습니다. 선생님이 오셔서 “니콜라스! 네가 이 커튼을 찢었지?”라고 묻자 니콜라스는 당황해서 “아니에요. 제가 안 찢었어요.” 하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영국에서는 거짓말하는 것이 큰 죄여서 그 일로 니콜라스가 퇴학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웨익스가 “선생님, 소문과 달라요. 커튼을 찢은 것은 저예요.”라고 해서 웨익스가 벌을 받고 니콜라스는 퇴학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30년 뒤, 왕을 중심으로 한 왕당파와 크롬웰을 중심으로 한 공화파의 내전이 있었습니다. 왕을 모시던 장교들이 공화파에게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때 크롬웰 장군의 참모였던 니콜라스는 처형자 명단에서 자기 친구 웨익스의 이름을 보게 되었습니다. 니콜라스는 크롬웰 장군에게 “각하, 지금 사형자 명단에 있는 사람들 중에 웨익스라는 친구가 있는데…….” 하면서 커튼 이야기를 했습니다. 크롬웰이 그 이야기에 감동을 받고 사면장을 내려 웨익스가 살게 되었습니다. 한 친구에게 베푼 작은 일이 자기의 생명을 건진 것입니다. 사람도 의리가 있으면 은혜를 갚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의리가 넘치는 분이십니다. 주님께 한 우리의 작은 충성을 주님께서는 더 크게 갚아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조금만 예쁘게 살아도 주님께서는 더 큰 것으로 우리에게 부어 주십니다. 영영히 부를 누리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라
신 28:47-48 / 피영민 목사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축복, 여호와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저주’라고 요약될 수 있는 신명기 28장은 아마도 성경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장(章)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순종은 축복이요, 불순종은 저주’라는 이 사상을 신명기 사관이라고 합니다. 사무엘서나 열왕기서, 역대기와 같은 이스라엘 역사는 대부분이 신명기사관에 근거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신명기 사관의 역사서들을 보면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왕도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나라도 복을 받게 된 것을 볼 수 있으나, 왕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자신들이 저주 받을 뿐만 아니라 나라까지도 저주 받게 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신명기 사관은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원리요, 우주를 통치하시는 근본적인 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명기 사관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신명기 사관은 이방인이 아니라 언약관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당되는 공식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순종하면 축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이방인들, 혹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축복과 저주라는 말 자체가 해당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축복이나 저주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축복이고, 하나님께서 복을 빼앗으시면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택함 받아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축복을 누릴 수 있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로 축복이나 저주는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모두 포함한다는 사실입니다. 신명기 28장에서는 축복과 저주가 주로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용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그림자요, 그 그림자는 신약에서 영적인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신명기 28장의 물질적인 축복은 결국 축복의 실체인 신약의 영적, 내세적인 축복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만약 기독교가 물질에 대한 축복만 선포하면 기복주의라는 비난을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28장은 물질 축복을 넘어서 영적인 축복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로 축복과 저주에 관한 하나님의 강력한 경고는 강도 높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저주로 인해 멸망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심술궂은 악의의 표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에 가만히 지켜보는 부모가 있습니까? 부모라면 가지 말고 돌이키라고 강력하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이든 저주든 그 경고는 하나님의 강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넷째로 축복과 저주는 내세의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치의 증감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축복은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가 증가되는 것이요, 저주는 성도가 가지고 있는 가치가 감소되는 것입니다. 천국에 갈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면 현세적 가치든, 내세적 가치든, 물질적 가치든, 영적인 가치든 간에 가치가 계속해서 증가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그런 가치들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게 됩니다. 따라서 신명기 28장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는 순종(obedience)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순종해야 축복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축복보다는 순종이 더 중요한 단어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순종을 ‘섬김’이라는 표현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사람은 섬기는 대상에게 순종하기 때문에 순종과 섬김은 같은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누군가를 섬기며 살도록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과 같은 자세로 아무도 섬기지 않고, 아무에게도 섬김을 받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올바른 대상을 찾아서 섬길 때에 기쁨도 오고 축복도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누군가 실직을 당했다는 것은 섬겨야 할 직장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실연을 당했다는 말은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섬겨야 할 상대방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실직이나 실연을 당한 사람들의 마음에는 슬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섬길 대상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만 봐도 사람은 누군가를 섬기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나는 아무도 안 섬겨. 내가 오늘 예배 나와서 앉아 있는 것은 내 아내 때문이지 하나님을 섬기려고 앉아 있는 것은 아니야. 나는 오직 나만 섬기지”라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고 되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무도 섬기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무도 섬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죄의 종, 마귀의 종이 되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이 오리겐과 펠라기우스,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처럼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대한민국의 국민이 될 자유와 선택과 권리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남자, 혹은 여자로 태어날 자유를 가지고 출생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 가운데 자유라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섬기며 누군가의 뜻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1. 섬김의 두 가지 대상
이스라엘의 민족 역사는 좁은 의미로 개인의 역사를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난 축복과 저주의 원리는 한 성도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을 때는 외적들이 침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했을 때는 외적들이 쳐들어와서 그들의 종이 되었습니다. 블레셋과 아람, 모압과 암몬, 앗수르와 바벨론, 그리고 로마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등장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다니엘은 기도를 하다가 이 사실을 깨닫고 다니엘서 9장을 통해 자신의 깨달은 바를 기록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우리 민족이 바벨론에 70년동안 포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의미를 깨달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자들이 외적의 종이 되어 외적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하신 그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로구나.” 그래서 다니엘은 눈물로 회개하면서 다시 기도하면 돌이키시겠다고 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돌이키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길 수 있는 대상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이고, 둘째는 외적들입니다. 그런데 섬길 대상은 마음대로 자유스럽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면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면 되는 것이고,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외적들을 섬길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습니다만 이스라엘도 지정학적인 위치가 좋지 않습니다.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언제든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질 수 있는 나라였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지키는 능력은 이스라엘의 군사력이나 경제력, 정치력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는 능력은 오직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손(Invisible hand of God)'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이스라엘을 지키고 있을 때는, 어떤 외적들도 이스라엘을 쳐들어 올 수 없었습니다. 설령 쳐들어왔다고 할지라도 패배하고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능력의 손은 거두어지고 외적들이 쳐들어 와서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 121:1-2,4).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이 지키시면 아무리 군사력과 경제력이 약하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은 약하지 않습니다.
원수들은 하나님의 비교대상도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며, 우리를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건져내어주시고, 언제나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치를 자꾸 증가시켜 주십니다. 별로 존귀하지 않던 사람도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존귀해 집니다. 말단 사원이던 사람이 큰 기업의 사장이 됩니다. 수년 전에는 형편없던 사람이 성자와 같이 변합니다. 술 먹고 허랑방탕하게 생활하던 사람도 건강하고 밝은 사람이 됩니다. 재물과 명예와 건강의 가치가 더해집니다.
그러나 원수들은 어떻습니까? 언어도 다르고 용모도 흉악하며, 노인과 아이들도 긍휼히 여기지 않는 잔인한 백성들입니다. 게다가 한 민족도 아니고 수많은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이 민족을 만족시켜주면 저 민족이 쳐들어오고, 저 민족을 기쁘게 하면 이 민족이 분노합니다. 원수들은 이스라엘의 가치를 빼앗고 착취합니다.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신앙, 재물 등의 가치를 빼앗기 때문에 외적을 섬기다보면 저주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만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섬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주신다는 하나님의 통치의 대원리입니다. 하나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면 하나님께서 영육간의 축복을 주시고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요즘 북한이 핵을 가지고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북한을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미국도 김정일을 못 당해내는 것 같고, 유엔이 아무리 제재를 한다고 해도 북한은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김정일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김정일을 잠깐만 휩쓸고 지나간다고 해도 김정일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지켜주실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제대로 섬겨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이 개인에게든, 가족에게든, 교회에게든, 국가에게든 유일한 살 길이며 축복의 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섬김의 두 가지 태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때도 그냥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섬김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본문 47절을 보면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어떤 단어를 강조하여 읽느냐에 따라 이 말씀이 주는 의미의 뉘앙스가 상당히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서 ‘섬기지’를 강조하여 읽으면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할 때 48절의 고통이 온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를 강조하여 읽으면 하나님을 섬겨도 기쁨과 즐거움으로 섬겨야 축복이 된다는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지 않고 약할 때에는 하나님을 만복의 근원으로 알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섬기다가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모든 것이 풍족해지면 그때 마음이 변질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섬겨도 예전의 기쁨과 즐거움이 없이 그저 의무적인 자세로 섬깁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일에 날씨가 좋으면 ‘날씨도 화창하고 놀러가기에 너무 좋은 날인데 오늘이 벌써 주일이군. 할 수 없이 교회에 가야겠네’라고 생각합니다. 또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도 ‘목사님. 그건 목사님께 해당되는 이야기지요. 제가 지금 예배당에 앉아있는 것만 해도 충분하니 그런 신앙생활은 목사님께서 전공으로 하시지요’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면 하나님을 섬겨도 그 결과로 축복을 얻지 못하고 48절의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기쁨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을 축복해주십니다. 시편 100편 1-2절은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는 기쁨으로 섬겨야 합니다. 또 느헤미야서 8장 10절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도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기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능력이 되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9장 7절은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헌금을 해도 즐겁게 해야 합니다. ‘십일조 떼먹었다가는 열 배로 손해 보는 것이 아닐까?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는 것이 낫겠지. 내긴 내되 다 낼거 뭐 있나? 어차피 아무도 모를 텐데 생활비의 십일조만 내지’하는 태도로 마지못해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를 중요하게 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릴 때도 기쁨으로 드려야 합니다. 사람의 영혼이 잘 되었는지 잘못되었는지를 판단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도 기쁨이나 즐거움이 전혀 없으면 그 사람 영혼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울지 않기 위하여 웃어야 할 이유를 찾아야 했다. 매일 나를 짓누르는 고통을 이기기 위한 무기로 나는 웃음을 선택했다. 내게 웃음이 없었다면 나는 인생의 실패자가 되었을 것이다.” 노예 해방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정치를 이끌어 나가다 보니 링컨 대통령에게는 적도 많고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컨이 모든 사명을 다 이루고 역사의 위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항상 마음의 기쁨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억지로라도 웃어야 합니다. 얼굴에 억지웃음을 지어도 몸이 착각하여 엔도르핀을 많이 생성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웃음을 선택하고 기쁨과 즐거움을 선택하여 하나님을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섬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지 않으면 48절의 결과를 얻게 됩니다.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지 않으면 섬김의 대상이 바뀝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원수 대적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섬김의 대상이 바뀌고 섬김의 태도에도 변화가 옵니다. 철 멍에를 목에 매고 원수가 끄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끌려가지 않으면 목이 부러질까봐, 고통이 올까봐 할 수 없이 짐승처럼 대우를 받으며 대적들을 섬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지금 47절의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지난 20년 동안 축복을 많이 받아서 풍족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가난할 때는 기뻐하였던 신앙의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많은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기쁨과 즐거움 대신 교만과 악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결국 우리 목에 철 멍에가 오게 될 것입니다. 북한이 핵실험으로 세계와 우리나라를 위협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위정자들의 목에 철 멍에가 매어졌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위기상황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는 48절의 상황에 완전히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47절에서 48절로 넘어가는 문지방에 와 있는 상황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돌이켜야 합니다.
여덟 살에 왕으로 즉위한 요시아 왕은 어린 나이에 왕에 등극했지만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마음에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전을 수리하는 중에 신명기를 발견합니다. 요시야가 신명기를 읽으면서 왜 이 나라가 저주를 받고 고통이 임하게 되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치 않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발견한 요시야 왕은 겸비하여 통곡하며 회개한 후에, 백성들을 모두 모아 언약을 갱신하고 유월절 행사를 대대적으로 치렀습니다.
우리 한국의 성도들도 귀에 듣기 좋은 이야기만 듣고 은혜 받았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오늘 우리도 신명기를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신명기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반성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법을 소홀히 한 우리의 죄악을 회개하고 다시 기쁨으로 섬기는 백성이 될 때에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능력의 손이 이 나라를 지켜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손앞에는 북한도, 핵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의 죄악이 문제일 뿐입니다.
3. 섬김의 두 가지 결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와 외적을 섬길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달라질까요?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요, 자기 백성을 축복하셔서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시는 도구로 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면 자꾸 가치를 증가시키십니다. 신명기 28장 2절을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모든 복은 물질의 복, 현세의 복 뿐만이 아니라 영적인 복, 내세의 복도 포함하는 복입니다. 다시 말해 영육간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물론 영육간의 축복이 충돌될 때는 영적인 축복이 더 중요하지만,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물질의 복, 현세의 복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섬기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육간에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신명기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여호와를 기쁨으로 섬긴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는 모두 복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버린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는 다 멸망했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주의 사상을 세상에 내 놓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온 백성이 모두 잘 살길이라고 믿고 따라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공산주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역사의 원동력을 물질이라고 보고 하나님을 부정하며 배척했습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대로입니다. 공산주의를 택한 나라치고 부자로 잘 살거나 백성이 영육간에 풍족함을 누리는 경우를 보지 못했습니다. 육신적으로도 망하고, 영적으로도 망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는 역사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거나, 섬긴다고 하면서도 외형과 형식으로 섬기는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는 결국 육적으로 가난해지고 영적으로 피폐하여 멸망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결 론
우리는 누군가를 섬겨야 될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섬김의 유일한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잘못된 대상을 섬기고 있는 분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섬김의 대상을 바꾸십시오.
어떤 목사님의 전도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무슨 종교를 가지고 계십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저는 ○○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이 목사님은 다시 “그 종교를 믿어서 행복하고 잘되셨습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잘 되긴 뭐가 잘 되요. 다 굶어죽게 생겼구먼!”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도전하였습니다. “아니, 굻어죽게 만든 그 종교를 왜 계속 믿고 있습니까? 바꾸세요. 예수님을 믿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시면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자 그 분이 ‘바꾸세요’하는 말에 은혜를 받았는지 정말로 다음 주에 예수님을 믿고 축복된 삶을 누리게 되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잘못된 대상을 섬기는 분들은 오늘 당장 바꾸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을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내일 당장 굶어 죽을 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나와야 합니다. 얼굴에 기쁨을 띠고 마음에 즐거움을 택하십시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바른 섬김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른 태도로 섬기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육간에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날마다 영적인 복도 더하시고 육적인 복도 차고 넘치게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명품 그리스도인
신 28:47-50 / 이근수 목사
서론 : 왜 사람들은 명품을 좋아하는가?
한국 사람은 명품을 좋아합니다. 명품이라면 가짜라도 가지고 싶어 합니다.
옷, 핸드백, 시계, 화장품, 구두, 신발 등
우리나라도 세계인이 좋아하는 명품이 있습니다.
핸드폰, 액정TV, PDP-TV, 컴퓨터 게임프로그램, 100층 이상 초고층 건축 기술 등 - 세계인에게 품질을 인정받았습니다.
1. 명품은 왜 명품인가?
그럼 사람들은 왜 명품을 좋아합니까? 명품은 품질이 뛰어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명품은 사용해 보면 좋습니다. 이름 있는 신발을 신어 보면 발이 편합니다.
명품은 1년을 사용하고 10년을 써도 변질이 되지 않습니다.
* 그리스도인도 명품이 되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좋아야 합니다.
사람들을 편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믿음이 가고 신뢰가 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사귀고 싶고, 함께 하고 싶어야 합니다.
2. 명품의 목표는 세계 최고가 되는 것입니다.
명품은 세계에서 최고로 좋은 상품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운 사람이 만듭니다. 그래서 세계인들로 부터 최고로 좋은 상품이라고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가격도 최고로 받습니다.
4. 명품은 어떻게 만들어 집니까?
명품은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의 결과로 태어납니다.
공부하는 학생, 사업하시는 여러분은 잘 들으세요.
시행착오를 겪으며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하고 노력하세요. 그러면 학교에서 최고, 국내에서 최고, 세계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런 성도들과 자녀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나이키 운동화
나이키가 누구 때문에 부자가 되었는지 아십니까?
한국입니다. 나이키의 시작은 뉴욕의 뒷골목 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주문을 받아서 운동화를 만들어 주던 작은 공장이 잘 되니까 해외에 하청을 주어서 큰 회사가 되었습니다. 나이키가 하청을 준 곳이 바로 80년대 말에서 2000년초까지 부산 지역 공장들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만든 운동화가 품질이 우수하니까 나이키는 세계적인 인기와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때 나이키 사는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한국 근로자의 임금이 올라가고 생산 비용이 올라가니까 공장을 중국과 인도네시아로 옮겼습니다.
나이키가 부산을 떠나자 부산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나이키는 세계 최고의 운동화를 만드는 것을 목표지만 부산의 공장 사람들은 먹고 살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운동화를 만들며 돈 많이 달라고 노동자들이 매년 임금 인상투쟁을 하니까 나이키사는 힘들어 하다가 공장을 폐쇄하고 부산을 떠나 중국 인도네시아로 공장을 옮긴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 최고의 운동화를 만들면서도 세계 최고의 운동화를 만들겠다는 목표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운동화 공장은 문을 닫으니 세계 최고의 기술자들은 실직을 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아이구 내 팔자야, 내가 뭐 운동화 만들다가 인생 종치겠구나’하면서 운동화 만드는 기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니까 결국 세계최고의 운동화 만드는 솜씨는 더 이상 세계 최고의 운동화를 만들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지금도 나이키 본사는 한국 노동자들의 기술을 아까워하며 그리워한다고 합니다.
5. 명품은 모양을 자주 바꾸지 않습니다.
명품 중에 ‘버버리’가 있습니다.
본래 영국군인 장교가 비올 때 입는 군복이었습니다. 군인 장교가 비오는 날 버버리를 입고 나가 애인을 만났는데 ‘멋있다’고 해서 계속 입었답니다. 이 얘기가 민간에 퍼지면서 버버리 사는 민간인 버버리를 만들어 유명 상품이 되었습니다. 군복이 히트를 친 것입니다.
버버리는 무늬와 모양은 그대로 유지하고 소재만 변화를 준답니다. 20년이 지나도 감이 상하지 않는 질긴 감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소비자에게 비싸도 사게 합니다.
10년 ~ 30년이 지나도 변절하지 그리스도인은 - 명품 그리스도인입니다.
10년 ~ 30년을 살아도 배신하지 않은 부부는 - 명품 부부입니다.
100 이 지나도 그리운 사람은 - 명품 인간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모세 바울 도 명품 인간입니다.
1000년 ~ 2000년이 지나도 그리운 분은 예수님 이십니다.
6. 명품의 4대 조건
1. Good Design - 디자인이 좋습니다.
자기만의 독특한 디자인을 합니다.
자기만의 특별한 모양과 무늬를 가지고 있습니다
2. Good material - 소재와 재질이 좋습니다.
원단이나 가죽, 장식이 좋습니다.
상품의 소재가 좋습니다.
3. Good Product - 제품이 좋습니다.
잘 만듭니다. 끝마무리를 완벽하게 합니다.
4. Good easy use - 쓰기가 편합니다.
명품은 사용하기가 좋습니다.
써보면 물건이 좋습니다.
본문 : 명품 그리스도인 의 4대 조건
1) 하나님 말씀대로 삽니다.
예배신간에 ‘아멘’ 한 대로 삽니다.
설교 시간에 들은 말씀대로 삽니다.
집에서 성경 읽은 대로 삽니다.
붉은 글씨 - 예수님 말씀대로 삽니다.
2) 세상 사람과는 다르게 삽니다.
예배당 안의 삶과 밖의 모습이 같습니다.
명품 그리스도인은 독특합니다.
사는 모습이 다릅니다.
상사와 동료로부터 다르다는 말을 듣습니다.
3) 신뢰를 받습니다.
사람들이 믿어줍니다.
그래서 회사 돈과 기밀을 맡깁니다.
* 기업 비밀을 빼돌린 사람들- / 회사와 국가 재산을 개인의 이익을 위해 중국에 팔아먹으려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굴지의 IT 회사에서 일하다 사표를 내고 그동안 직장에서 일하며 안 중요 제품 설계도를 몰래 빼내서 중국에 팔아먹으려던 사람들이 검찰에 잡혔습니다. 5억을 중국 기업에게 받고 회사와 국가는 수조원의 피해를 보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명품 그리스도인은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명품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사장님, 상사, 동료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쉽지 않겠지요.
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삽니다.
명품은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를 위해 있습니다. 명품 그리스도인은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명품 그리스인이 되라는 하나님의 말씀 [47]
1. 하나님을 섬기라[47]
하나님을 섬기면 축복을 받지만 [1-14]
섬기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47]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풍족하여도 - 감사가 없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하나님이 저주 하신다고 하셨습니다.[47]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가 받는 고난
1) 가족 간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54,56]
부유하게 좋은 집에서, 좋은 차타고, 잘 먹고 잘 살아도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고, 서로 갈등하며 삽니다.[54]
남편 아내 자식들이 서로 미워하며 삽니다. [56]
2)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습니다.[48]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하게 됩니다.
3) 적의 침략을 받습니다.[48, 49-53]
독수리 같은 이방인 적이 침략합니다.[49]
성을 포위합니다.[53]
어른 아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흉악하고, 잔인한 야만족이 침략하여[49,50]
모든 양식과 가축을 약탈해 갑니다.[51]
적이 철 멍에를 메개하고[48]
너무 배가 고파 사랑하는 자식을 잡아먹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53, 55, 57]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 저들은 저주를 받아 멸망을 받습니다.
2. 불순종하는 자가 받는 아픔 [58, 59]
1) 극열한 재앙을 당하여 멸망 합니다. [59,61]
(1) 두렵고 떨려 평안이 없습니다.[65]
(2) 생명이 위험 합니다.[66]
(3) 병이 듭니다.[59, 60]
2) 전사자가 많습니다[62]
그 땅에서 뿌리가 뽑힙니다.[63]
나라가 망합니다.
3) 포로로 끌려가 적의 종이 됩니다. [64,68]
두렵게 삽니다.
정신없이 삽니다.[64,65,67]
4) 목석 우상을 섬깁니다.[64]
좋으신 하나님을 배신한 결과, 결국 우상을 섬기며 어리석게 삽니다.
결 론 : 명품 그리스도인은
1. Good Design - 디자인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디자인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2. Good material - 좋은 말씀으로 살게하셨습니다.
3. Good Product - 하나님이 잘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복 받아 잘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4. Good easy use - 쓰기가 편하고 좋습니다.
명품 그리스도인은 좋은 일에 사용됩니다.
이웃을 전도하여 구원합니다.
명품 그리스도인은
1) 하나님 말씀대로 삽니다.
2) 예배당 안의 삶과 밖의 모습이 같습니다.
3) 명품 그리스도인은 신뢰를 받습니다.
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삽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합니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벧전2:9]
1. 예배자가 되고
2. 전도자가 되라고 명품으로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 아름다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왕 같은 제사장들, 거룩한 나라로 삼으신 것은 명품 그리스도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명품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예수님이 지상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제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이 징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예배 잘 드리고,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명품 그리스도인이라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풍 족
신 28:47-57
믿음은 곧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따라서 삶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믿음을 담아서 보여주는 그릇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삶이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말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제가 입만 열었다 하면 강조하는 '기도하고 성경보고 예배드리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신자가 기도하는 것은 삶이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성경보고 예배드리는 것도 역시 삶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뭔가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생각하기를 기도하고 성경보고 예배드리며 살아가는 것을 믿음의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삶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하루 생활 속에서 '이것이 삶입니다'라고 특별히 내세울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특별히 '삶'이라는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루 24시간 모두가 삶입니다. 심지어 저녁에 잠자는 것까지 삶이며, 화장실 가는 것까지 삶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루 생활 속에 특별히 믿음의 삶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여기십니까? 숨쉬고 잠자고 밥먹고 화장실 가고 직장에 다니는 것은 그냥 삶이고, 그속에서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 등은 믿음의 삶으로 구분되는 것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밥먹을 때 기도 안하고 먹으면 그냥 삶이고 기도하고 먹으면 믿음의 삶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삶속에 그냥 살아가는 삶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 다시 말해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일상적인 생활이라고 여기는 밥먹고 잠자고 직장에서 일하는 것들은 믿음과는 별개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속에서 성경묵상하고 기도하는 것들을 가지고 믿음생활이라고 따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담고 살아가는 삶은 주님과의 동행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에 보면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고, 예배를 잘 드리고, 부지런히 성경묵상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유다서를 보면 에녹은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예언하면서 살았습니다. 즉 에녹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담겨있었던 것입니다. 에녹은 무엇을 해도 심판을 염두에 두고 살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동행입니다. 노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노아의 삶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삶이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심판을 염두에 둔 삶이었습니다. 먹고 마시면서도 세상은 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것이 목적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동행입니다. 즉 자신의 목적이 포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삶에 심판이 담겨 있는 것, 이것이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특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삶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연관시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요11장에 보면 나사로가 죽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와달라는 기별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바로 가시지 않고 이틀을 더 유하시면서 늑장을 부립니다. 결국 나사로가 죽고 난 뒤 도착한 예수님을 보고 마르다와 마리아가 한 말은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을 오기 전까지는 주님이 없는 인생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찾아와서 고쳐주는 분으로 바라봤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이라는 말은 나사로가 병들고 죽어갈 때 그들과 주님은 별개의 관계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얼마나 근심이 되고 걱정이 되고 조바심이 일어났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마르다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라는 말씀에 대해서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라고 대답합니다. 과연 이 대답을 삶이 있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기 전에는 자기들과 함께 하지 않은 것으로 알았습니다. 즉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던 그 자리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아직 오시지 않은, 안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들의 삶이 아니면서도 얼마든지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만약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주님이 자신들의 삶이었다면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 가는 그 순간에도 주님은 그 자리에 계시는 분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로가 죽는 것도 주님의 뜻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담긴 삶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에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이 밥먹고 직장에서 일하는 모든 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심지어 술먹는 자리에 참석했다면 그 자리에까지도 주님이 계십니다. 이렇게 주님이 내 삶의 전부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을 믿음 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아플 때에도 주님이 함께 하시고 있음을 알 것이고, 하는 일이 안되고 꼬일 때에도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안할 때든 괴로울 때든 기쁠 때든 슬픈 때든 항상 변함없이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곧 삶이 있는 믿음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믿음의 삶을 주님이 나의 삶 전체가 되어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종교 행위나 착한 행위 등으로 생각을 해 버리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을 일상적인 삶과 믿음의 삶으로 구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행동, 즉 믿음의 삶이라고 생각하는 착한 행동이나 종교적인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신앙에 대한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7절을 보면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풍족해지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 생각 같으면 풍족하면 오히려 더 하나님을 잘 섬기고 말씀에 순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풍족해지니까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이 이해가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로 심판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는 마치 여호와의 동산처럼 아름답고 애굽처럼 모든 것이 풍족한 땅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풍족하면 하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을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 풍족하고 모든 일이 순탄하게 잘 되어갈 때가 가장 위험한 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풍족하고 하는 일이 순탄하게 잘 되어질 때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만큼은 하나님의 도움이 별 필요가 없다는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은 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리기를 삶이 없이도 이런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믿음이 있다든지 예수님을 마음에 두고 산다든지 하는 판단을 섣불리 내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풍족함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임을 안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그 마음이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나보다 부족하게 살고, 고통과 괴로움에 파묻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내가 잘한게 뭐가 있다고 나같은 것을 이렇게 풍족하게 살아가게 하십니까?'라는 감사가 진심으로 그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면 분명 그 사람은 하루하루가 은혜로 가득 채워진 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래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풍족함과 순탄함 가운데 살아가다 보면 자신의 풍족과 순탄함에 대해서 당연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라는 의식이 점차 희미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풍족에서 느끼던 감사도 역시 희미해집니다. 감사가 희미해지고, 은혜에 대한 의식도 희미해질 때 나타나는 현상은 신앙생활의 권태입니다. 삶에서 감사와 은혜를 느끼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교회를 통해서 채우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교회 다니는 것을 취미생활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취미생활은 내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서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바라볼 때 내 신앙생활의 기쁨을 채워주고, 교회 다니는 즐거움을 채워주는 곳으로 여겨버린다면 그것은 교회를 취미생활의 장소로 여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주님을 내 삶으로 여기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취미생활은 풍족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풍족하기 때문에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를 가지고 집안도 꾸미고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교회도 찾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오늘 돈 만원이 없으면 죽는다고 할 때 그런 여유가 나오겠습니까? 자식이 순탄하게 커주고 말썽을 부리지 않을 때 사람은 자식에 대한 여유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으로 인해서 고통을 많이 받은 사람은 자식문제로 하나님께 나올 때는 참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럴 때 이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교회가 사랑이 있다 없다에 관심 둘 여유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부르면서 내 자식이 하나님을 잘 믿고 착하게 해달라는 부르짖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지금의 교회 생활이 배부른 여유에서 나오는 취미생활이 아닌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의 교회 생활을 일부러 부정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과연 여러분이 아무 것도 없고 진짜 먹고살기 힘든 그런 지경에 처했는데도 '하나님'을 부르면서 교회를 찾아 나올 수 있느냐는 것을 묻고 싶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48절에 보면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말씀들을 보면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은 정도를 자기가 낳은 자녀까지 먹는 것으로 말합니다. 평소 아이들을 미워하고 성격이 난폭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54절 56절을 보면 유순하고 연약한 남자, 유순하고 연약한 부녀라고 할지라도 그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현재 이러한 상황에 처했다고 상상해 보십시다. 과연 지금의 신앙생활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만이 아니라 신28장에 나오는 저주의 경우를 모두 내 한몸에 집중시킬 때 과연 우리들이 질병과 실패와 궁핍한 삶속에서 교회를 바라보고 사랑이 있다 없다, 교회가 이렇다 저렇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저주하신다는 그 내용들이 단 하나라도 나에게 떨어졌을 때 우리의 마음은 다른데 여유를 두지 못합니다. 다만 '하나님'을 부르면서 두손들고 나올 뿐입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풍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리거나, 간절함으로 나온다거나, 하나님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긴박함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유를 가지고 교회를 쳐다보니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교회의 모습이 보여지게 되고 거기에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여유를 가지고 교인들을 바라보니까 교인들에게 대해서 이런 저런 평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풍족함으로 인해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여호와를 섬기지 못하게 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래의 인간은 오직 하나님만을 나의 기쁨과 나의 즐거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본래의 인간은 결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기쁨과 즐거움의 통로로 삼지 않습니다. 교회도 나에게 즐거움이 될 수 없고, 돈도 기쁨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교회나 돈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은 결국 일시적인 것이고, 그것들이 사라지면 내 기쁨과 즐거움도 함께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제가 힘들고 어렵다 싶을 때 항상 마음속으로 되새기는 성경구절은 하박국 3:17-19절의 말씀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있어서 기쁨과 즐거움의 통로가 무엇인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 때문에 즐거워 할 수 있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이 기쁨과 즐거움은 내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할지라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면, 신앙생활의 기쁨과 즐거움을 나와 함께 교회로 모이는 다른 교인들의 행동 때문에 잃어버린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입니까? 내가 다니는 교회의 분위기나 다른 무엇인가 때문에 믿음의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린다면 과연 그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그것은 지금까지 여호와로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 한 것이 아니라 착하고 인품 좋고 사랑이 많은 성도 때문에 기뻐했고, 내 마음에 쏙 드는 교회의 분위기로 인해서 즐거워했다는 결론 밖에 되지 않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교인과 교회로 인해서 얻고 있었던 기쁨을 다시 교인과 교회로 인해서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풍족함과 여유 속에서 나 자신의 종교생활의 만족을 채우려고 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풍요로움이 여러분의 덫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물론 풍요로우면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풍요로 인해서 여러분이 먹고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는 마음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풍요로움이 우리들의 덫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 28장의 하나님의 저주를 담고 살아가면 됩니다. 지금의 풍요를 즐기기 전에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렸을 때를 상상하라는 것입니다. 건강도 사라지고, 직장도 사라지고, 돈도 다 없어지고, 집도 없어졌을 경우를 상상해 보면 됩니다. 과연 내가 그런 지경을 당했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상상하면서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주어진 것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결국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구분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고 나를 기쁘게 해주지 못하는 것은 쓸모 없는 것으로 여기고 나에게서부터 잘라내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풍요는 작은데 담겨 있는 주님의 은혜를 무시하게 만듭니다. 직장 잘 다니고 꼬박꼬박 월급 받으면서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다보니까 하루 세끼 밥먹는 것 속에 담겨있는 주님의 은혜가 무시되어집니다. 그러나 나중에 직장을 그만두게 되고 하루 세끼 밥먹는 것도 힘들어질 때, 예전에 아무 걱정 없이 밥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이 모두가 은혜였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다 저렇다 투덜대는 것도, 교회로 모일 수 있다는 그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역시 모이고 싶어도 모일 수 없는 상황이 닥쳤을 때, 예전에 마음놓고 교회로 모일 수 있었던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작은데 담겨 있는 은혜를 풍요로 인해서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점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못하고 자꾸 엉뚱한데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기도를 안해서 그렇다. 성경을 보지 않아서 그렇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잠들고 일어나는 그 잠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셨음을 잊지 않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대하는 밥상에도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함을 잊지 않고, 직장에서 일하는 속에서 함께 하셨고, 내가 길가다가 넘어지는 그때도 주님은 함께 하고 계셨음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분명히 작은데서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풍요를 누려도 풍요에 빠지지 않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할 불순종
신 28:47-57 / 구성교회
100권이 넘는 책(제가 알기로)을 쓰신 목사님이 계십니다. 신학계에서 모르는 분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갑자기 모든 사역을 중지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라고 하는데, 다른 쪽에서 들리는 소리는 성추문(性醜聞)이라고 합니다. 이 말이 사실인지 아직 모르지만, 정말 사실이라면 큰 충격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거룩을 매우 강조했던 분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사람은 연약하며 믿을 수 없는 존재임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오래전 어느 CCM 음악가가 불륜을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이 만든 찬양을 불러도 되는지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절대 부르지 않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만든 사람이 문제여도 찬양은 문제가 없으니 부르겠다고 했습니다. 또, 오래전 유명한 어느 목사가 역시 성 문제로 문제가 생기자 어느 분은 그분이 쓴 책을 모두 버렸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든 사람이 문제니까 찬양이나 책을 안 부르고 버리는 게 맞을까요? 아니면 결과물은 상관없으니 부르고 소장하는 것이 좋을까요? 이런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말씀을 통해 분별하는 방법을 훈련하고 연습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악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악’은 우상을 섬기는 일을 비롯하여 하나님이 금지한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악을 제거하라는 말은 악을 저지른 사람에게 반드시 책임을 묻고,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하라는 뜻입니다.
노래와 책이 문제가 된다면 없애야 합니다. 그런데 노래를 듣고, 부른 사람과 설교와 책을 보고 들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없애야 할까요? 그럴 순 없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지만, 책과 노래는 사람을 악하게 하지 않습니다. 악한 의도로 만들어지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그냥 놔둬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만든 사람도 유혹과 시험에 연약한 사람이며,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지닌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동시에 그들의 죄를 기억하여 다시는 똑같은 잘못과 실수가 반복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 사람으로 인한 악한 영향이 공동체와 더 넓은 세상에 퍼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칫 잘못하면 자기가 속한 공동체가 완전히 무너질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사회적으로 쉽게 용납될 수 없는 죄를 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자기 잘못이 이렇게 큰 반향을 일으킬지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면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죠. 그런데 교회 공동체에 속한 성도들에게 ‘가족’이라는 개념이 심겨 있기에 큰 문제가 일어나도 그냥 덮으려는 모습이 강합니다. 물론 무조건 잘못을 드러내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로 인해 공동체가 큰 어려움에 빠질 수 있음을 기억하며 조금이라도 조심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은 주어진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말씀을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을 쓰고 싶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죄가 얼마나 큰 혼란과 문제를 가져오는지, 그리고 우리는 그런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경고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평소 삶에서 실천할 수 있을지 나누고 싶었습니다.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나만 조금 더 죄에서 벗어났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닙니다. 결국 서로서로 응원하며 말씀을 붙잡는 것만이 해결책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이 늘 함께하고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내 의지와 생각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매일 매 순간 다짐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이 약속한 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은혜의 날들을 살아가는 하나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순종보다 더 중요한 것
신 28:47-48
신명기 28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많은 복을 약속한 장입니다. 심지어 가축의 새끼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는다고 할 정도로 소산이 풍부해지며,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6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1절)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치 순종하면 복을 받고 거역하면 벌을 받는 조건부 하나님을 섬기는 기복 신앙처럼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어린양의 피의 공로에 의지하여 출애굽을 했고 홍해의 물세례를 거쳤습니다. 말하자면 이미 구원 받은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구원 받은 성도가 이뤄나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이며 또 그분의 품 안에서 누릴 복락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신명기 28장을 포함한 모든 율법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일 뿐 아니라 또 그렇게 지키는 것 자체가 유익이자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글에서도 예를 든 적이 있습니다만 “조건부 복”과 “마땅히 누려야할 복”의 차이를 쉽게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공원에 11시까지 오면 바비큐를 주겠다고 하면 반드시 11시까지 도착하는 것이 조건입니다. 그러나 회사야유회를 가면서 “공원에 11시까지 오시오. 그러면 바비큐를 즐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11시까지 모였기 때문이 아니라 회사 직원이라서 바비큐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이 아파 가지 못하거나 일이 생겨 늦게 가거나 다른 공원을 찾아가면 아무리 회사직원이지만 바비큐를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그 법도대로 살면 자연히 복을 누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당연히 복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런 뜻을 재차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48절 이하의 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풍족하게 되었다는 것은 46절까지의 설명으로 인하면 하나님의 법도를 지켰기에, 다른 말로 순종의 결과로 복을 받은 상태입니다. 최소한도 하나님이 직접 복을 베푸셨거나 인간이 추구한 복을 허락하셨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더 이상 다른 벌을 부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감사와 경배가 따르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받은 것에 대해 고맙다고 인사하지 않으니까 괘씸해서 벌을 준 것입니까? 시쳇말로 실컷 주어 놓고는 다시 빼앗아 가는 꼴 아닙니까? 아니면 또 다시 감사와 경배가 복과 벌을 받는 조건으로 제시된 것입니까?
우선 신자가 당신의 법도를 지켜서 도덕적 삶을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근본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미 당신의 백성이 되었기에 당신의 품 안에서 당신이 주시는 모든 은혜와 권능을 누리게 하되 그 누릴 수 있는 수단이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조건부 기복신앙은 신구약 성경의 어떤 말씀과 사건에도 결코 적용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당신의 주권적 선택과 일방적 구원이 선행된 후에 당신의 영광을 맛보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순종하여서 풍족을 누렸는데 또 다른 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무슨 뜻이 됩니까?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것 가운데 순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신자가 가나안에 들어가 누려야할 하나님의 복 중에 가장 중요한 복이 따로 있는데, 바로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역으로 말해 신자가 진정한 기쁨과 즐거운 마음 없이도 여호와를 섬기거나 순종하는 모습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법도를 오해하여 기복 신앙, 조건부 축복으로 지킬 수도 있지만 당신께선 절대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진심으로 기꺼이 섬기지 않는 순종은 오히려 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궁극적인 뜻은 오직 당신을 기쁨으로 경외케 하는 것입니다. 신자더러 단순히 도덕적 생활을 하게 하거나, 또 그런 자에게 복을 주고자 하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자신을 순종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당신과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온전하게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맺는 수단이 순종이며, 순종의 결과로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복이며 불순종의 그것은 벌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풍족한 가운데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섬기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다 나쁠 때는 간혹 원망과 의심이 들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 나쁜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습니다. 반면에 모든 것이 좋은 것뿐일 때에 당연히 그것을 주신 하나님도 좋아 보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다 없어진다고 해도 그분이 가장 좋은가 나아가 유일한 기쁨이 되는지 진지하게 따져 보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계명을 지키면 조건부로 복을 준다든지, 그 결과로 복이 보장된다든지 하면 어느 누구도 안 지킬 바보는 없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런 식으로 절대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당신께서 주권적으로 택하시고 일방적으로 구원하실 이유도 없습니다. 가만히 두어도 당신께 순종하는 백성들이 많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여 택하신 신자를 도달시키기 원하는 단계는 따로 있습니다. 풍족하게 누리고 있는 모든 복을 일순간에 포기하라고 했을 때에 기쁨으로 순종하고 그래서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좋은 것을 다 잃어버리고도 그분 한 분 만으로도 기쁨과 즐거움을 잃지 않는 자리입니다.
신자를 일부러 고생시키려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고난을 거쳐야만 신앙이 성숙되어진다는 영적 필요 때문만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백성과 나라들 앞에 당신 자신만이 증거 되기를 원하시지 당신이 주신 복이나 벌이 증거 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그 일을 하도록 부름 받은, 아니 구원 받은 자가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담대한 고백과 함께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7-9)
모든 것이 나빠 보일 때에는 하나님마저 나빠 보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모든 것이 좋아 보일 때에는 하나님이 안 좋아 보일 신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바로 그 때에 그 모든 것을 다 포기하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신다면 순종할 수 있습니까? 혹은 당신께서 그렇게 강권적으로 몰고 가실 때에도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분만 섬길 수 있습니까? 순종보다 경배를 먼저 하고 그래서 경배하기에 순종하십니까? 아니면 단지 순종하는 것으로 경배하는 표를 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