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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그렇게 비누가 다짐을 한지 몇일 지나지 않아, 정말로 사건은 터져버리고 말았다.
혜선이 공중파를 타기전까진 하루. 딱 하루가 남아 있는 상태였다.
찰칵 찰칵.
요란한 셔터소리와 함께 터지는 플레쉬. 그리고 그건 선주와 혜선의 집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일이
터져도 심하게 터진 듯.
“야. 이게 무슨 일이냐?”
잠에서 깨어난 혜선이 거실로 나오며 중얼 거렸다. 이미 그녀들이 사는 곳의 복도는 기자와 리포터들
로 가득이었고, 방금 일어난 혜선은 바깥의 시끄러움과 선주의 안절부절함에 궁금증을 표시했다.
“나도 모르겠어. 아침부터 기자들이 들이 닥쳐선..”
입술을 지긋이 깨어무는 선주. 머리를 마구 헝크러 트리더니 한숨과 함께 혜선에게 말한다.
“더군다나 우리 가수생활 접어야 된다는 전화까지 왔단 말이야!!”
선주의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혜선은 일어나자마자 무슨 봉변이냐는 듯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사람들이 이렇게 들이닥치는 것도 선주는 알 수 없었고, 직접 사장에게서 가수생활 접어야 겠
다는 전화가 온 것도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한 선주였다.
그리고 자신의 파트너인 혜선은 그런 자신의 말을 듣고 완전 얼어버렸으니 더 답답했다.
“우..우리가 가수를 그만 둬?”
“..(끄덕)”
선주는 말 대신 고개만 한번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혜선은 그런 선주의 끄덕임에 쇼파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그렇게 많이 충격적이진 않았다. 가수를 관둬야 된다는 생각에 쓰러진 것도 아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공중파를 탔는데. 하루만 더 있었으면 공중파를 타서 사람들에게 얼굴을 더 많이 비
쳤을 텐데. 그게 안타까워서 주저앉은 혜선이었다.
“그럼 우리 내일 공중파에 얼굴 안 비쳐지는거지?”
“그거야. 당연한거 아니냐..”
“으아악! 저 기자들 대체 뭐 때문에 여기 온거야!!!”
혜선이 괴성을 지르며 외쳤고, 그런 그녀의 말에 선주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에 관련 된 거라던데.”
“뭐 어떤거?”
“류비누의 여자가 니가 아니냐면서…. 뭐 그런거.”
선주가 혜선을 힐끔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선주의 말에 아무런 대꾸가 없는 혜선.
그런 혜선을 보더니 선주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흥분을 해서 크게 말한다.
“아니. 그게 말이 되냐구! 너랑 어떻게 그 대스타인 류비누랑 연관 지을 수가 있냐고! 안그래? 그치?
안그렇냐구! 말이 안되잖아. 정말. 어떻게 너랑….”
“류비누. 개새끼. ..죽여버릴테다!!!!!!!!”
선주가 흥분을 해 따다닥 말하는데도 불구하고 혜선은 그녀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있었다. 다만 류비
누의 얼굴을 생각하며 몇대 쥐어패는 상상을 하며 이를 뿌드득 갈 뿐.
“혜..혜선아???”
“내가 그렇게 가수가 하고 싶다고 헀더니. 이자식이 기어이 일을 저질렀군.”
선주는 그제서야 자신이 헛생각을 했단 걸 깨달았다. 혜선이 비누와 아는 것 처럼 말했으니 말이다.
설마 진짜 스캔들의 여 주인공이 혜선일까? 라는 생각으로 살짝 눈을 굴려가며 혜선을 꼼꼼히 따져보
았다. 아무리 봐도 대스타와 스캔들이 났을 여자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 혜선이었기에 선주는 의아했다.
어떻게 혜선이 비누와 그런일이 있을 수가…….
“저..정말 너였어?”
“뭐가?”
“그 스캔들의 주인공!”
선주가 놀랍다는 듯이 혜선에게 말했고, 그런 선주를 향해 혜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마도 그럴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는 혜선때문에 선주는 더 열이 뻗쳐왔다. 대스타 류비누와 사귀는 것
도 부럽고 놀라운데, 이젠 그녀때문에 자신의 미래가 완전 무너져 버리는 것이니까.
“야!!!! 그럼 너 때문에 내 꿈은 어떻게 되는건데!”
“내 알바 없잖아....................”
“…….”
잠시 찾아온 침묵. 혜선이 힐끗 선주를 한번 바라보더니
“...라고 하면 니가 열받겠지?”
“당연한 거 아니냐?”
황당하단 표정으로 선주가 혜선에게 말했다. 혜선은 자신이 그 말을 해 놓고 웃긴 듯 피식 웃어버린다.
그리고 걱정 말라는 듯 한마디를 덧붙인다.
“걱정마. 어차피 너한테까진 큰 피해 없을거니까.”
“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선주가 혜선의 말에 말도 안된다는 듯 반문하고.
“응.”
“..야!!!!”
“아휴. 귀청 떨어져. 살살 좀 말해.”
혜선이 귀를 후비적 거리며 선주에게 말한다.
“어떡하니. 정말 어떡하려고 그래!”
“뭘??”
“너도 니 꿈이 망가지는 건데, 그렇게 태평 할 수 있어?!!!!!”
버럭 소리를 치는 선주다. 그녀는 자신의 꿈이 망가지는 것도 마음 아팠지만, 혜선의 꿈이 무너지는
것도 너무나 안타까웠다.
“꿈? 하하하. 야. 너 웃긴다? 내가 언제 가수가 내 꿈이라고 말 한 적 있든? 아니지?”
“…….”
혜선의 말을 들어보니, 정말 그랬다. 선주 자신이 ‘난 정말 어렸을 때 부터 꿈이 가수였고, 지금 그 꿈
을 이루게 되서 너무 기뻐!’라고 말했을 때도 혜선은 정말 심드렁하게 ‘그래?’라고 밖에 말을 하지 않았
었다.
“내 꿈 좋아하시네. 야. 나 가수 한 이유도 단지 누구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한 것 뿐이야. 그러니까
난 가수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라구. 야. 어차피 너한텐 피해 안 가게 할.....”
짜악.
하고 혜선의 고개가 돌아간다. 선주에게 한방 먹어버린 그녀다.
“정말 넌 구제불능이구나?”
선주는 이렇게 말하곤 자신의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거실에 홀로 남은 혜선은 이렇게 중얼
거린다.
“때리려면 더 쎄게 때리던지. 정말 약해 빠졌구만.”
볼을 쓰다듬는 혜선이다.
..
..
“너 이새끼! 니가 우리집 앞 이렇게 만들어 놓은거지!!!!!”
-나..나 촬영 때문에 끊어야…….
“야!!!! 내가 가수 하고 싶다 그랬어? 안 그랬어?!!!!”
정신을 가다듬고 선주에게 맞은 볼의 붓기가 살짝 빠졌을 때 쯔음 혜선은 비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게 내가 가수 하랬어! 하지 말랬어?!!!
“내가 하고 싶다는데 니가 왜 그래!!!!!!”
-더 이상 여기 있다간 너 다치니까! 더 이상 여기 있으면 우리... 못 이뤄지니까!!!
“…….”
처음엔 미안함 가득한 비누의 목소리였지만, 뒤로가면 갈수록 목소리가 커져버렸다. 그리고...
-…너 나보다 노래하는게 더 중요해? 나보다 노래가 더 좋아?
“…공과 사는 구분 해야 하는 거잖아.”
비누의 말에 혜선이 한층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긴 말 필요없고, 조금만 기다려. 내가 거기 갈 테니까.
“오긴 어딜 와! 촬영한다며! 오지마! 여기와서 무슨 소리하게!!!... 여..여보세요? 여보세요? 야!!!!! 야 이 새꺄!!!!!!”
혜선이 크게 불러보지만 이미 전화는 끊긴 지 오래였다. 그 뒤부터 혜선은 정말 비누가 올까? 안절부
절 하며 거실을 왔다 갔다 거리고, 선주는 여전히 자신의 방에 틀어박힌 채 나올 생각을 안하고 있다.
방에서 혹시나 선주가 울 까, 혜선은 걱정이 되었지만 일단은 선주보다 비누가 정말 올까가 더 걱정이
었다. 정말 이곳에 온다면 기자들에게 빠져나갈 수 없게 되는거니까.
탕탕탕-
“거기 안에 있는 거 아니까, 인터뷰 좀 해주세요!”
바깥엔 기자들이 아직도 많이 있는 게 분명했다.
..
그렇게 안절부절 하기도 잠시. 비누가 혜선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여보세..”
-숫자 세아려.
“응?”
-딱 스물까지 세아려서 타이밍에 맞춰서 문 열어.
“뭐?!!!”
-지금부터 세아려. 그럼 간다!
또 끊긴 전화. 혜선은 울상을 지으며 어쩔 수 없이 숫자를 세아렸고,
“1,2,3,……12,……20.”
스물까지 세아리고 문을 여는 혜선. 그리고 그때에 맞춰 들어오는 한 사람.
“으악!!!!!!”
그 사람은 류비누였다. 정말 대책 없는 남자다.
비누는 곧장 문을 쾅 닫았다.
혜선은 비누의 얼굴을 보고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고, 혜선의 비명과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 선
주가 급히 거실로 뛰쳐나왔다. 거실로 나온 선주의 눈가는 이미 분홍빛을 넘어서 벌겋게 변해져 있다.
그치만 선주는 자신이 몰골이 어떤지 따져보기도 전에 류비누의 얼굴을 실제로 보고 굳어 버렸다.
“너 이새끼! 악. 이 대책없는 놈아!!!!”
그리고 혜선이 비누를 마구 패는 것을 보고 한번 더 굳어버린다.
“야.야. 아파! 좀 때리지 마 봐.”
“이럴거면… 이럴거면….”
비누를 때리는 손길이 점차 멎고, 정말 눈물이라는 건 없을 듯한 혜선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한방울씩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는다.
정말 분하다는 듯이. 비누를 매섭게 쏘아 볼 뿐이었다.
그리고 비누는 혜선을 부드럽게 끌어 안으며 토닥인다. 그래도 그녀는 가만히 있을 뿐이다.
“그러게 내가 처음부터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근데 왜 무모한 도전을 하냐고….”
“말했잖아. 진채린보다 더 유명해 질 거라고……!”
약간 눈물기가 묻혀진 목소리로 혜선이 말했다.
“그건 이제 된거잖아. 나랑 진채린이랑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다 정리 됐으니까.”
“…그리고, 만약에 너랑.. 겨...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너희 부모님한테도 떳떳해야 하잖아. 그러니까
고졸인 내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이란건 .. 이거밖에 없으니까. 다행히 이거라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대 스타인 너한테도 내가 맞춰줘야 할 여자여야 하잖아.”
혜선의 그 말에 비누는 가슴이 턱. 하고 막혀왔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니…….
그녀의 성격을 생각해 본다면 이건 정말 예상밖이었다. 그래서 비누는 더 가슴이 아려왔다.
곧 비누는 자신의 가슴에 가둬 두었던 혜선을 풀어주고선 그녀의 어깨를 자신의 팔로 꽈악 잡곤 눈을
마주한다.
혜선의 발갛게 변해진 눈가와 눈물을 보니 비누는 가슴이 더 아팠다. 자신이 한 일이 잘 한 짓인가. 하
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혜선이 생각하고 있었던 ‘결혼’이란 걸 하려면 가수를 관뒀어야 했으니 말이다.
“…하.. 그럼 진작에 그걸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학벌 같은 건 필요없어. 내가 좋은데 무슨 학벌이야!
그리고… 우리엄마는 내가 연기자 한다고 했을때도 반대 많이 했었거든? 그래서 며느리는 더더욱 이
직종이 아니어야 한다는게 우리 엄마의 고집이야. 그래도.. 그래도 가수 할레?”
비누의 말에 혜선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그럼. 그럼 선주는 어떡해!”
선주를 한번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그러게요. 전 어떡하죠? 이제? 전 이대로 무너지는 건가요?”
“아니요. 그건 걱정 마세요. 수혁이가 알아서 당신은 다시 혼자서라도 세워 놓을 거니까.”
“하. 너무 무책임 한 것 아닌가요? 사랑도 좋지만 다른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게 대스타 류비누인가요?”
“훗..”
선주의 톡 쏘는 듯한 말투에 비누가 살짝 웃는다. 그 웃음에 선주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 거린다.
“……?”
“떫으면 그쪽도 유명해 져서 이런 것 한번 해 보시던지요.”
혜선에게 대했던 부드러움과 너무나 대조되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선주는 잠시 혜선에게 보였던 그의
부드러움에 자신이 그를 잘못 생각 하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혜선에게 아무리 친절하고 잘대해줘도
자신은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기에 친절할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럼 해결 다 된 거죠? 난 더 이상 혜선이의 다리와 팔이 까지는 걸 바라진 않고, 그쪽이야 팔이 까지
던지 다리가 까지던지, 온몸이 상처 투성이가 되던지 상관은 없거든.”
“야! 류비누! 너 선주한테 왜그래!”
비누의 쌀쌀맞음에 혜선이 비누를 꾸짖었다.
“..나랑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이잖아?”
너무나 칼같은 대답에 선주는 당황스러웠다.
선주는 가슴 속 조그마한 한켠에 혹여나 비누와 친해질 수 있을까? 란 감정을 품었었다. 일단은 자신은
가수이기 전에 여자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류비누의 팬이었으니까.
“내 동료잖아!!”
“이젠 아니잖아.”
“……내 친구야!”
혜선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마디를 더 내 뱉었다.
그러자 비누가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아이구. 우리 왕따. 드디어 친구가 생겼구나?”
그 말에, 비누와 혜선, 그리고 선주까지 피식 웃어 버렸다.
그리고 비누는 손을 탁탁 털며 선주를 보며 한번 웃는다.
“혜선이랑 친구라니까 더 이상 나쁘겐 말 안 할게요. 혜선이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마친 비누는 혜선을 데리고 문을 벌컥 열어버렸고,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기자들은 어느
새 비누와 혜선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비누는 그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일 다 밝힐테니까 오늘은 그냥 가 주세요.”
그리고 재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혜선과 함께.
홀로 집에 남은 선주는 비누의 그 조각같은 외모와, 차가운 행동. 그리고 혜선에게 대하는 그 다정한..
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그 따사하고 부드러운 행동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52>
기자회견인 듯 해 보이는 높은 장소에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여자와, 당당히 고개를 쳐들고
있는 남자. 그리고 가득히 모인 기자와 리포터들. 노트북 앞에 앉은 사람들은 급히 손을 움직이느라
바쁘고, 수첩을 들고 있는 사람들은 글을 쓰기 바쁘다.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들은 여기저기 잡기 바쁘다.
“처음 만난 건 언제였죠?”
“글쎄요. 삼월달이었나?”
“그럼 어디서 처음 만났죠?”
“풉. 스타월드 앞에서 참 특이한 여자다 싶어서 바라본게 첫만남이었죠.”
비누가 그때 생각이 난다는 듯이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를 띈다.
여전히 혜선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아무런 말도 않고 있다.
“사귀게 된건 언제였죠?”
“얼마 안 됐어요.”
“얼마 안 됐는데 이렇게 공식적으로 밝히나요? 설마 헤어지......”
이 질문을 한 사람은 아직 초보인 듯 했다. 사귀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초를 치기 위해서 한마디 한 것
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사람도 곧 자신의 말이 실수인 걸 깨닫곤 입을 급히 막았다.
그렇지만 이미 비누의 심기를 건드린 후였다.
“그럴 일 절대 없구요. 그딴 소리 하려면 나가주세요. 기분 나빠져서 제대로 기자회견 자리도 못 가지
겠네요. 하...”
비누가 웃는 얼굴을 거두고 표정을 굳혔다.
그 표정에 이것저것 질문 하려던 사람들이 동작을 일순간 멈췄다.
괜히 심기를 거슬렸다간 불똥이 자기네들한테 튈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비누의 심기를
툭- 하고 한대 쳐 버린 신입을 마구 째려보고 있었다.
“그..그럼 이제 혜선씨에게 물어볼게요.”
이제 어쩔 수 없이 혜선에게 질문을 돌려야만 했다.
“저기, 지혜선씨. 가수 아니였나요?”
“네. 맞아요.”
“그럼 가수 그만 둘 건 가요?”
“네.”
그 질문에 혜선은 아무런 거침없이 대답을 했다.
혜선은 솔직히 가수를 조금 더 하고 싶었지만 그럴바 차라리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비누의 말을 들었다.
무엇보다 괜히 가수 했다가 비누의 어머니의 심기를 거스르기 싫었기 때문이다.
이 질문 뒤에 여러 많은 질문들이 더 오갔고, 마지막으로 비누와 혜선의 인사를 끝으로 기자회견은 마
쳤.....을 줄 알았건만 둘의 다정한 포즈를 취해 달라는 기자들의 말에 비누와 혜선은 어쩔 수 없이 나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일어섰다.
“끌어 안아 주세요!”
“휘이익~”
이 질문에 비누는 혜선의 허리를 단박에 길고 단단한 팔로 감쌌고, 그 모습을 찍느라 바쁜 사진기자들
이었다.
이 포즈 뒤에 서로의 볼에 입을 맞추는 장면과 서로 마주보고 웃는 모습까지, 몇차례 찍고 난 뒤 그들
은 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로서 그들은 공식적인 연인이 된 것이었다. 고로 헤어지기 엄청 어렵게 된 것이다. 헤어지게 될 생
각이 그들에게 없는 듯 하지만, 사람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깐 뭐…….
어쨌든 지금은 차 안.
“씨, 너 때문에 이게 뭐냐?!”
혜선이 툴툴 거리며 폰 밧데리를 빼 버린다. 이미 혜선의 폰은 대구에 있는 자신의 친구, 유진·지수·라
영의 문자를 비롯한, 자신의 연습생 선배·친구들. 그리고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전화와 문자로 가득했
다.
그치만 외국에 가 있는 자신의 엄마와 아빠에겐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자. 폰 필요할 것 같은데 이것 써요!”
비누의 매니저가 자신의 폰을 혜선에게 건네며 말했다.
“고마워요~”
혜선은 인사를 한 번 한 후에 급히 외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부모님껜 알려야 도리일
것 같아서였다. 원래대로라면 기자회견을 갖기 전에 미리 알렸어야 했지만 그런 걸 알릴 경황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혜선의 머리에서 자신의 부모님께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곁에 있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수정에게 알릴 생각밖엔 없었다.
수정은 혜선의 그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물론 진호도.
오히려 혜선이 수정에게 알리다가 놀라 버렸다. 이 말 한마디 때문에…….
‘혜선아 그런건 좀 돌려가면서 말해주렴. 뱃속에 있는 우리 아기가 많이 놀라거든.’
어쨌든 지금 혜선은 자신의 엄마인 소정에게 연락을 하는 중이다.
‘받아라! 받아라! 제발 받아라!’
이렇게 중얼중얼 거리기도 잠시.
-Hello~
“어..엄마?!!!!”
혜선이 갑자기 흘러나오는 영어에 잠시 당황해하며 말을 더듬는다.
-혜선이?
“응! 엄마 나야!”
-..시간이 몇신데 전화하고 지랄이냐. 지랄이! 응?
소정이 잠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평소같았으면 전화 받자마자 욕질을 해대는 자신의 엄마에게 투덜거리며 반박을 했을 혜선이었지만
오늘은 그런 걸 다 무시하고 자신이 할 말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다급히 소정을 부르는 혜선.
-왜!!!
“나..나...연예인 됐었다?”
..이.이런.
혜선이 연예인 된 것 까지 소정에게 말하지 않은 모양이다. 뭐 어차피 수정이 보호자역을 하고 있었으
니 소정이 혜선의 보호자를 하지 않아도 됐었긴 했었기 때문이다.
-그래? 잘됐네. 그걸 평생직업 삼고 살면 되니까. 근데...뭐..? 연예인?!!!!!!!!
소정이 이제야 자신이 한 말을 깨닫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듯 목소리가 확 커져버렸다.
“응. 연예인.”
-니..니년이! 엄마 허락도 안 맡고, 감히 연예인을 해쌌써?!!!! 너..너.... 그딴 걸 왜 해!!
사투리와 표준어가 뒤섞인 소정의 꾸짖음이 혜선을 마구 때리고 있었다.
“그딴거라니! 연예인이 뭐 어때서!”
-엄마는 싫다. TV나와서 헤헤 거리고 웃는거. 내는 싫다! 그러니까 얼른 관둬라이? 엄마가 한국으로
급히 날아가는 수가 있다? 앙?? 그러니까 관둬라? 엉?!!
계속되는 꾸짖음에 혜선이 피식 웃으며 비누를 한번 쳐다봤다.
비누는 소정의 말이 하나도 안 들리는 상태였기에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궁금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안 그래도 엄마의 장차 사위 될 사람이 깽판을 놔 버렸네요!!”
혜선이 이렇게 말하며 비누를 다시 한번 쳐다보곤 어깨를 으쓱인다. 그런 그녀를 보며 비누도 그녀를
따라 어깨를 으쓱인다. 그 행동에 혜선은 소리없이 크게 웃으며 그의 머리를 한대 콩! 쥐어 박는다.
머리를 한대 쥐어박힌 비누는, 아프지도 않은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냥 ‘지금 난 너무 행복해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하는 표정이다.
-뭐? 사위? 그건 또 뭐야!!!
“엄마. 류비누 알지?”
혜선은 여기까지 말하고 비누의 귀에 폰을 바짝 갖다 붙였다. 비누는 왜 이러나 싶어, 얼떨떨했지만
그녀가 하는데로 폰을 귀에 바짝 밀착 시켰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정의 말.
-알다! 마다!! 그 잘생긴... 하. 예술에 가까운 연예인이지. 엄마가 여기에 와서도 그 사람이 최근에 찍
은 드라마는 빠짐없이 빌려 본다 아니냐! 정말 너무 멋진 연예인이야. 눈 앞에서 한번 보고 싸인받고
악수 한번만 해봤으면 소원도 없다. .. 근데 류비누는 왜?
소정의 말에 비누의 입은 귓가에 걸렸다. 일단 장모님 될 사람에게 좋은 인상으로 심겨져 있으니 말이
다. 비누는 소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혜선에게 폰을 넘겼다.
혜선은 소정이 비누에게 어떻게 말했을지 다~ 안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더니 폰을 받고
말을 한다.
“나 그 사람이랑 스캔들 났어. 근데 정말 사귀는 거라서 방금 기자회견까지 끝났어.”
-뭐?!!!!!!!!!!!!!!
“어쨌든 이거 내 폰 아니라서 나중에 다시 자세한 얘기하고 일단 끊을게!!”
혜선은 급히 전화를 끊고 비누를 보며 씨익 웃는다. 비누도 그녀를 따라 씨익 웃는다.
“하. 정말 꿈 같다.”
“뭐가?”
“엄마가 하는 말 들어보면 넌 정말 만나보기 힘든 인물이잖아.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만나기엔…….
근데 그 남자가 내꺼라는게.”
혜선이 이렇게 말하자 비누는 그녀를 꼬옥 끌어 안으며 토닥인다.
“나 만나보기 힘든 인물 아냐. 내가 다른 연예인보다 잘 안 돌아다녀서 그러는거야. 그리고 이거 꿈 아
냐. 현실이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현실! 꿈처럼 깨어나면 사라지는 허망한게 아닌, 꿈에서 깨어나면
옆에서 싱긋 웃으며 같이 누워 있는 그런 상대란 말이야. 안그래?”
비누의 멋드러진 말에 혜선은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응. 그렇지. 근데.. 매니저분이 상당히 심기가 불편하신가봐.”
이렇게 말하며 매니저를 바라보니, 매니저는 비누의 그 멘트에 이미 넋이 나간지 오래였다. 운전중에
이런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비누의 말이 너무 닭스러워서 어쩔 수 없이 이런 표현이
아니면 도저히 어떤 표현을 써야 할 지 알 수 없는 그런 표정이었다.
“냅둬. 맨날 표정이 저래.”
“풉....”
비누의 신경끄라는 말투에 혜선은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
그리고 그때 비누의 폰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비누의 폰은 두개였다. 하나는 집안 사람들과 정말 친한 사람들밖에 모르는 폰. 그리고 하나는 업무용.
그리고 지금 울린 건 첫번째 폰이었다. 업무용 폰은 꺼 놓은지 오래니 말이다.
“여보세요?”
-너! 너! 이게 어떻게 된거야! 한마디 말도 없이!!!!!
비누의 아버지인 비훈이었다.
“엄마는 알고 있어.”
비누의 이 말투에 혜선은 비누가 꼭 아기처럼 보였다. 나이 스물셋 먹은 남자도 아직까지 ‘엄마’란 단
어를 쓰니 말이다. 하긴. 혜선 자신도 아직 ‘아빠.엄마’라고 말하는데, 이것도 이상 할 건 없었다.
-그..그건 너희 엄마 사정이고! 난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에이~ 아빠도 농담도 잘하셔. 아빠가 엄마한테 귀띔 해준거 아냐? 그래서 엄마가 그런 행동 한 거고.
안그래?????”
-..그......그건.
맹가사도에 나왔던 비훈의 이미지와 많이 다른 조금 푼수끼 다분한 모습이다.
그도 그럴것이 비한때문에 이것저것 신경쓰고 엄숙했던 비훈도 이젠 아예 자식들에게 포기를 한 상태
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누는 비한과 달리 부모에게 애교도 많고 붙임성도 좋았기에 비훈이 이런 상
태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솔직히 혜선이 이쁘지 않아?”
-..조...좀 이쁘긴 하더라.
“그치? 지금 당장 집에 갈까??”
-그치만 난 허락 할 수가 없다. 이 녀석! 한번도 소개 시켜주지 않고 덜컥 기자회견이라니!
“……그럼 말고. 결혼 할 때도 안 부를테니까.”
-이 녀석아!!!!!
혜선이 정말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줄 알고 표정이 굳어 있고, 그런 그녀와 달리 비누의 얼굴
엔 장난기가 가득이다.
“하하. 농담이야! 농담! 곧 소개시켜 드릴게요! 우리 아버지가 시간이 되는 날요!”
-…흐.흐음.
“하하하. 아빠 그럼 그때 뵈요~”
-그래. 제대로 챙겨 입고 와! 이녀석.
“알았다니까. 그럼 끊을게요~”
전화를 끊은 비누는 크게 한번 웃어버린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왜..왜 웃어?”
“크큭.아무것도 아냐.”
비누의 이 행동에 혜선은 눈만 한번 흘길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우선은 혜선 자신에게 나쁜 말을 한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갑자기 혜선이 생각난 듯 비누에게 말한다.
“너 왜 저 분이 나한테 폰 건냈을때 폰 두개라고 말 안했어?”
“…글쎄. 왜 그랬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비누는 장난조로 말하긴 했지만, 정말 왜그랬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폰이 두개있던 건 언
제나였으니까 새삼스럽지도 않았고, 매니저가 폰을 건네는데 ‘나 폰 두개니까 이거써!’라고 말을 하기
도 뭔가 이상하니까 말이다.
♬~
더 이상 혜선이 말을 잇지 못하게 또 다시 울리는 비누의 폰.
그리고 비누는 그 폰을 보더니 혜선에게 폰을 건넨다.
“나?”
“응. 단아야~”
“윽…무슨 전화가 이리도 빨리와!”
혜선이 이렇게 말하며 폰을 건네 들었다.
“응~ 언니.”
-비누는? 비누는?
다급히 비누를 찾는 단아. 혜선은 폰을 톡톡 건드리며 비누 널 찾는다는 제스쳐를 취해보았지만, 비누
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나 잔다고해!” 라고 소근소근 말한다.
“..언니. 비누 지금 자는데?”
-그래? 에이~ 시시하다. 어쨌든 너 어떻게 된거야?
“뭐..뭐가?”
-방금 엄마한테 전화왔는데, 막 펑펑 우시더라구.
“엄마?”
-응. 비한이네 엄마. 그리고 내 엄마.
혜선은 단아의 말을 들으며 부러워했다. ’나도 과연 비누의 어머니와 저렇게 호칭을 부를 수 있는 사
이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말이다.
“울다니?”
-다 키워 놓은 자식이 자신을 떠난다고 말이야.
“…그렇구나. 그럼 나 많이 미움받는거야?”
-아니. 인정한단 말이잖아. 떠난다는 말 하는 것 보면.
혜선은 단아의 이 말에 정말 미친듯이 기뻐왔다. 곧 이어 들리는 단아의 목소리.
-가까운 곳이면 우리 밥 한끼나 하자~ 비한이가 만나자고 한다?
<53>
“오랜만이네. 그쪽 여자분.”
“네. 두번째로 만나는 거네요.”
비한이 고급 음식점에서 단아와 기다리다 혜선과 비누가 나타자가 제일 처음 건넨 말이었다.
그쪽 여자분이란 말에 혜선은 조금 짜증스럽긴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싱긋 웃으며 단아에게 인사
를 건낸다.
“언니 안녕?”
“응. 혜선아, 빨리 앉아. 방금 우리가 음식 시켜놨어!”
“…난 눈에 뵈지도 않냐? 단아랑 형이나 다 날 무시하는구만?”
아이같은 투정을 부리며 비누가 의자에 털썩 앉고 혜선도 곧 의자에 앉는다. 그런 그들을 보며 비한
이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한다.
“여자에 대한 매너가 없는 놈이네. 넌.”
“내가 뭘!”
“넌 쟤한테 의자 빼주는 센스도 없냐?”
비한이 혜선을 가르키며 말하고, 그 말에 비누는 아차 싶어서 혜선을 바라본다. 멀뚱멀뚱 눈을 깜빡
이는 혜선. 비누에게 한마디 한다.
“괜찮아. 그런거 하면 느끼해서 더 싫어.”
이 한마디에 비한은 울상이 되고, 비누는 의기양양해진다.
혜선은 정말 그런 건 싫었다. 의자를 빼주고 자신이 앉는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남자가 다시 의자를 밀
어준다. 도리도리. 생각만으로도 느끼했다.
자신의 어느 귀족 집안의 귀부인이 아니고서야 별로 해보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처제. 그러면 안된다?”
“네에?”
비한이 식탁보를 건드리며 말한다.
“왜? 처제란 말이 잘 못 됬나?”
“아. 아니요!”
비한이 식탁보를 툭툭 털며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말한다. 식탁보에 뭔가 묻은 듯 비한이 계속 식탁
보를 툭툭 치고, 그런 비한의 손을 단아가 탁. 쳐버린다.
그런 단아의 행동에 비한이 고개를 번쩍 뜨고 바라보고, 그 모습에 단아는 아이를 꾸짖는 엄마의 표
정과 함께 눈을 깜빡인다.
눈을 감빡일때마다 없었던 쌍커플이 옅게 생기는 단아의 눈이다.
“흐음. 알았어. 안 하면 될 거 아냐.”
비한은 곧 식탁보를 툭툭 치던 손을 거둔다. 그러자 다시 온화해지는 단아의 표정이다.
비누는 눈꼴시리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혜선에게 눈치를 준다. 무엇을 눈으로 말하는 것 같긴 하지만
혜선은 전혀 알아 채지 못한다.
고개를 문쪽으로 가르키는 걸 보면 나가자는 뜻인데 말이다.
“왜 그러냐. 너? 목 아파?”
눈치 없이 단아가 비누를 바라보며 말을 하고, 비누는 똥 밟은 표정과 어색한 웃음을 동시에 지으며
“아하하. 아무것도 아냐. 그런데 이 방 차~암 좋네.”
비한이 개인방을 잡아 놓은 상태였기에 그 방에는 그들 넷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그게 비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데이트 하고 싶으면 둘이서 하면 될 것 가지고 왜 자신들을 불러들여선 그런 닭
살을 떨어야 하는지 비누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혜선이랑 오붓한 시간을 지낼 수 있게 보내주던지.
“그치? 방 내가 예약했어.”
생글생글 웃으며 단아가 말하고.
“참. 형도, 누가 매너있고 누가 매너있는지 개념을 못 찾네.”
빈정대듯 비누가 말하고, 비한은 잠시 그런 자신이 동생을 말을 이해하려고 머리를 굴리다, 몇초가
지나지 않아 비누가 말하는 요점이 무엇인지 깨닫곤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그린다.
“아이고. 내가 매너가 없는거였네? 그건 때려치우고. 너네들 이제 공식 연인 된 걸 축하해 주려고 불
렀는데 그래도 되는거냐?”
축하해 주려고 부른거라고 말하자 비누의 표정은 한결 누그러졌고, 그렇게 수다를 잠시 떨고 있을 때
쯔음 요리들이 차례차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저것 쓸데없는 수다를 떨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대화의 대부분이 어떻게 만났냐, 언제 만났냐, 어디가 끌려서 이렇게 된거냐. 뭐 이런 비누와 혜선의
연애 스토리를 묻고 듣는게 대부분이 었다.
그렇게 식사를 두시간 가량 했을까 그들은 곧 헤어지게 되었다. 단아는 혜선과 헤어지고 싶어하는 눈
치가 아니었지만 비한이 꾸역꾸역 ‘그럼 아한이는?’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단아는 비한
과 함께 집으로 돌아간 거였고, 이제 남은건 비누와 혜선뿐이었다.
“아. 나도 이제 집에가야지.”
혜선이 어색하게 허둥지둥 말하고, 그 말에 비누가 한쪽 입꼬리 올리며 말한다.
“어딜 가. 날 굶주리게 한 죄는 받아야지?”
※ ※ ※
비누의 집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
“이야~ 여기도 되게 오랜만에 와 본다.”
10층을 지나가는 걸 보며 혜선이 이렇게 말한다.
“난 매일 여기서 내렸는데. 그치?”
말을 끝마친 혜선이 180cm가 훌쩍 넘는 키를 소유한 비누를 올려다보고, 그러면 비누는 음흉한 미소
와 함께 11층에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혜선의 팔목을 잡고 자신의 집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영문도 모른채 끌려가야 하는 혜선이 팔목을 빼려고 발버둥치지만, 결국엔 포기하고 비누를 따라가는중.
“야! 왜 끌고 가는건데!!”
혜선이 크게 소리치고, 그 소리에 비누가 피식 웃으며,
“…박력있어 보이잖아.”
“풋.”
쾅.
혜선의 웃음을 끝으로 비누의 집 현관문은 굳게 닫겼다.
..
..
..
비누의 집 안.
이것저것 두리번 거리며 물건들을 바라보는 혜선.
“이야. 첨이야. 너네집.”
방문을 열어보거나 이것 저것 만지는 예의없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혜선은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눈
으로 볼 수 있는 건 다 보고 있었다.
거실 벽걸이 TV 바로 옆에 커다랗게 걸려있는 브로마이드 하며, 남자답지 않게 깔금한 집 안.
“…끙.이제 매일 와도 돼.”
“응?”
부엌에서 물을 한잔 마시며 급히 말하는 비누. 긴 손가락으로 주전자를 식탁에 올려놓고 컵도 식탁에
그대로 올려놓고 혜선의 옆에 선다. 그리고 혜선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걸치더니.
“넌 이제 매일 와도 된다고. 너만.”
비누가 이렇게 말하며 혜선을 끌고 쇼파에 털썩 앉는다. 푹신한 쇼파의 감촉이 혜선과 비누를 감싼다.
그리고 그 폭신함에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그들이 한대 엉켜져 버렸다. 비누의 얼굴이 혜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상태. 그러니까 키스를 하려면 할 수 있는 분위기.
더듬더듬 팔을 뒤로 내뻗어 리모콘 처럼 생긴 걸 잡더니 버튼을 하나 탁! 누르는 비누. 그러자 환하게
켜져있던 거실의 불은 꺼지고, 또 다른 버튼을 하나 누르자 은은한 빛을 내며 불이 켜진다. 정육점 분
위기가 풍기는 그런 색의 불빛이.
그 오묘한 색의 불빛이 그들을 더 끈적한 분위기로 만들어준다.
“저기. 나, 아직 양치도 안 했는데.”
그 끈적한 분위기가 어색한지 혜선이 혹여나 아까 먹은 것의 냄새가 풍길까,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
하고, 그런 그녀에게 비누가 말한다.
“괜찮아. 나도 안 했어.”
“풋.”
비누의 말에 혜선은 다시 한 번 웃어버리고, 비누의 얼굴은 그렇게 점차 혜선에게 더 가까워져 버리
더니 혜선의 입을 금새 먹어버린다.
그렇게 끈적한 분위기 속에 긴 입맞춤이 이어지고 풀썩. 하고 혜선은 쇼파로 엎어져 버린다.
혜선이 넘어진 건지 비누가 넘겨트린건지 알 순 없지만, 어쨌든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입술을 미친듯
이 찾다가 잠시 뒤 천천히 비누가 떨어져 나온다.
“하아...”
“하아...하..”
키스하느라 찬 숨을 내 쉬느라, 숨소리가 거칠어진 그들이다.
그러길 잠시 비누가 혜선에게서 떨어져 앉더니 주먹을 꾸욱 쥐었다 폈다를 반복한다.
“우리 빨리 결혼해야겠다.”
“응?”
“나 진짜 여자앞에 두고 이렇게 참기는 처음이야. 하. 진짜 결혼을 빨리 하던지해야지.”
비누가 이렇게 말하며 혜선의 머리를 장난기 가득하게 마구 헝크러 트리고, 혜선은 그런 비누의 장난
에 웃어버리고 만다.
솔직히 비누가 키스에서 더 이상 나오면 어쩌나 하고 내심 걱정하고 있었던 터였기 때문이다.
의외스럽게도 혜선은 아직까지 無경험 이었으니까. 비누가 들으면 좋아할 만한 말이겠지?
“풋.”
“왜 웃어!”
“너 변태 같아서.”
“뭐?!! 이게!!!!!”
비누는 혜선의 목을 살짝 조르며 다시 혜선의 위로 올라타고, 언제 끝날 수 알 수 없는 긴 키스가 다
시 이어졌다. 하지만 키스. 그 이상의 진도는 나가지 않았다. 절때.
비누는 결혼 전까지 혜선과 지킬 것은 지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그들은 마구 장난을 치다가 늦은시간. 비누의 침대에서 꼬옥 끌어안고 골아 떨어졌다.
※ ※ ※
다음 날.
♬~
요란한 전화벨 소리와 함께 그들은 잠에서 깨어났고, 그 전화를 받기 무섭게 혜선과 비누는 뷰티샵을
찾아갔다.
그 전화의 주인공은 바로 비한과 비누의 어머니인 지숙이었다.
집으로 내려와서 그 여자를 좀 보자는 지숙의 호출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급히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뷰티샵에서 치장을 하고 옷까지 거기서 맞춰 입은 혜선과, 그냥 그곳에서 아무
정장이나 한개 사 입은 비누.
그곳의 직원들은 비누의 그냥 걸쳐입은 정장에서도 빛이나자 모두들 반했다는 그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곧 혜선이 비누의 앞에 나타나고, 비누는 그런 혜선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더니 어깨동무를 하
고 그곳을 빠져나온다.
".....어떡해. 너무 멋있어!"
비누가 빠져나가자 그곳의 여직원들은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 ※ ※
본가.
비훈과 지숙이 살고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집을 보고 입을 크게 벌리며 놀라는 혜선이었다. 비한을
봤을때나 비누를 봤을때 귀티가 흐르긴 했지만 이렇게 잘 사는 집안 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혜선이다.
잘 살아도 이렇게 잘 살 거라곤 정말 예상치 않았던 그녀라서 그런지 지금 많이 충격적인 듯 하다.
초인종을 누르고.
“아줌마, 저예요.”
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열리는 대문. 으리으리한 대문이 소리없이 열리고 곧 집 안으로 한발짝 발
을 들여놓는 혜선.
정말 눈을 떼지 못하는 집안의 풍경에 혜선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도착한 집 안.
집안 역시 고급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잘 살아도 여간 잘 사는게 아닌 듯 했다.
집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고급쇼파에 앉아 있는 지숙과 비훈이 보이고, 그런 그들을 향해 혜선이 살짝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급히 사온 과일 바구니를 그들에게 건낸다.
“왔냐?”
과일 바구니를 가정부 아줌마에게 넘기며 비훈이 쌀쌀맞게 말했다.
“응.. 아니!! 네. 왔어요.”
갑자기 말을 높이는 비누. 바로 옆에 있는 혜선 때문이었다.
“그래. 앉아라.”
“예.”
“그 시덥지 않는 존댓말은 집어치우고.”
“하하. 응.”
곧장 비누의 존댓말을 지적하는 비훈이었다. 존댓말은 비한 하나로 충분했다. 비누는 애교가 여간 많
은게 아니었다. 물론 부모님에게만 말이다. 그래서 존댓말은 비훈. 자신이 어색했다.
“후. 잘도 일을 저질렀더군?”
“봤어?”
“그럼! 보지, 안보냐! 자식에 관련 된 일인데?”
비훈과 비누가 말다툼아닌 말다툼을 나눌때, 지숙은 혜선을 꼼꼼히 따져봤다. 그리고 혜선은 곧은 자
세로 앉아서 그런 지숙의 시선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
그치만 지숙은 시선을 거둘 생각을 않는다.
“아가씨 몇살이지?”
“어머님. 말 낮추세요. 아. 전 스무살입니다.”
어머님이란 말이 나올 것 같지 않던 혜선의 입에서 어머님이란 말이 나오자 비누가 비훈과 대화를 나
누다 말고 멈춰 혜선을 바라본다.
의외로 혜선이 가정적이다. 라는 생각을 하는 비누다.
“그래? 젊군. 세살차이.”
“호호호호.”
혜선이 조신하게 조용한 목소리로 웃는다. 물론 입을 가리고 말이다.
그런 모습에 비누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씨익 웃고, 그런 비누의 머리를 비한이 콩. 쥐어박는다.
‘뭐가 좋다고 웃어? 이자식아!’라고 말하는 듯 하다.
역시나 비훈과 지숙은 비누 앞에선 유치해지는 듯 하다. 비한 앞에선 그렇게 엄격하더니…….
하긴 비한은 첫째고 사업을 물려 받아야 했으니 그건 어쩔 수 없으니깐.
“그래. 고등학교 졸업이 끝이라지?”
“아. 네….”
혜선의 말이 흐려진다.
“아. 괜찮아. 괜찮아. 그런 것 가지고 혼내려는 건 아니니까. 나도 고졸이야. 호호. 기죽을 필요없어.”
“네!!!!”
지숙의 그 한 마디에 혜선은 기운을 차리고 씩씩하게 대답한다. 그 모습이 귀여운지 지숙은 진하게 웃는다.
“돈은 우리 비누가 많으니 상관없고, 일이 이렇게 됐으니 결혼을 하긴 해야겠지? 언제가 되든 난 상
관 없지만 우리 그저 니가 어떤 아이인가 한번 보고 싶어서 이렇게 부른 것 뿐이야. 이렇게 만난 거
아직 점심 전이지? 점심이나 한끼 같이 먹고 가라고. 호호.”
“네. 어머님.”
혜선은 지숙의 다정다감함에 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에게 스토커짓을 한 사람도. 커터칼을 가득 담은 편지를 보낸 것도. 지숙이 한 짓임을 알
면 혜선이 과연 이렇게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까? 호호.
<54>
“이름이 지혜선이라고 했지?”
“네. 아버님.”
식사를 끝마친 후, 그들이 거실에 앉아 후식으로 과일을 먹으며 대화를 나눈다. 비훈이 혜선의 ‘아버
님이란 소리에 입이 귀에 걸릴 듯 말듯, 웃음이 날 듯 말듯 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거 결혼을 서두르는게 낫겠지?”
“네?”
비훈의 말에 과일을 한입 베어물다 깜짝 놀라는 혜선이다.
“왜? 싫으냐?”
“아… 아뇨!”
“후후.. 결혼을 서두르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야.”
“……?”
과일 쥬스를 한 모금 마시며 다시 뒷 이야기를 잇는 비훈.
“뭐, 결혼을 하든 말든 너희들의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 기자회견까지 마친 상태에서 너희들이
결혼을 서두르지 않는다면 새아기 너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 걱정되서 하는 말이야.
비누 저녀석을 좋아하는 팬들 중에 광적으로 좋아하는 팬들은 널 가만히 두지 않을 거란 얘기지.
결혼을 일찍 하면 할 수록 광적으로 좋아하는 팬들의 공격이 그만큼 줄어들겠지. 아무래도 정신나간
팬들이 백에 하나정도는 꼭 있으니 말이야. 결혼전엔 아무래도 결혼까지 가지 않게 막으려고 하는 사
람들이 훨씬 더 많을테고 그럼 힘든 건 새아기 너야. 그리고 우리도... 흐음. 저 녀석을 빨리 처치 했으
면하고 바라고 있는 중이었거든.”
혜선은 비훈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중간중간에 ‘새아기’라는 말에 볼이 살짝 붉
게 변하긴 했었다.
비훈의 논리정연한 말과 자신을 걱정해 주는 말에 혜선은 감동을 받았다.
“곧 상견례도 해야겠지? 부모님은 어디 계시나? 내가 연락할까?”
“아뇨.아뇨! 호호. 제가 연락할게요. 아버님.”
“그래. 빠르면 빠를수록 더 좋으니까 그렇게 하도록하고, 으챠. 난 일이 있어서 이만 일어나 봐야겠구나.
하룻밤 묵고 가려면 묵고 가고, 이왕이면 하룻밤 묵고가렴.”
“네. 아버님!!
혜선은 자상한 자신의 시아버지 될 사람을 보고 기분 좋은 듯 웃었다.
그리고 비누는 혜선의 손을 이끌고 이렇게 말한다.
“그럼 우리도 이만 올라 가 볼게~ 저녁에 다시 봐요~ 아버지~어머니!”
비훈과 지숙은 그런 비누를 보며 다 키워 놓은 자식이 언제 저렇게 컸나? 라는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눈가의 주름. 그 주름이 더욱 자글자글해져 있었다.
그 말은 곧 웃고 있다는 말이 되겠지?
어쨌든 비누와 혜선이 사라지자, 지숙이 밖으로 나가는 비훈을 마중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고졸이라고 말 한게 잘 한 거겠죠?”
“그럼~ 잘 한 일이고 말고.”
“괜히 기죽일 필요는 없으니까 잘 한 거겠죠. 뭐. 어쨌든 잘 다녀와요~”
“...아. 저 녀석들을 보니 나도 데이트란게 하고 싶군. 오늘 저녁.. 저 녀석들은 집에 두고 우리끼리
데이트나 할까?”
“좋은 생각이네요!”
“훗. 그럼 마칠때쯤 연락 할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
“네~”
이 말을 마친 비훈이 바깥으로 나갔고 지숙은 기지개를 한번 쭈욱 펴며 쇼파에 다시 앉아 과일을 먹
으며 TV시청을 하기 시작했다.
아!! 고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얘기를 하자면,
지숙은 대학까지 다 마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혜선의 기를 죽이고 싶지 않아 고졸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될 것이지만, 지숙이 고인이 될 때까지 아무도 학벌에 대해 한번도 언급 하지 않
아서, 이 이야기는 절때 혜선에게 들킬 일이 없었다.
※ ※ ※
비누의 방에 들어 간 그들.
혜선이 신기한 듯 비누의 방을 두리번 거린다.
“뭘 또 두리번 거려?”
“신기해서!”
“뭐가 또 신기하냐?”
“그냥. 어머님의 손길이 잔뜩 느껴진거 같애. 이 방은 아파트의 그 방하고 분위기가 많이 틀려.”
혜선이 여기저기 둘러보다 무언 갈 발견헀는지 ‘엇!’이란 말 소리와 함께 책장의 위 쪽에 있는 것을
꺼내기 위해 아둥바둥 거린다.
여자 치곤 키가 큰 혜선이었지만 위쪽의 무언 갈 꺼내기엔 역부족인 듯 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비누가 가볍게 그 쪽에 서더니 그것을 꺼내든다. 그 무언가는 앨범.
“하옇튼 호기심은 많아서!!”
비누가 앨범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말한다.
“으아. 무슨 먼지가 이렇게 가득이냐?! 앨범을 왜 저런데 놔둬! 색 바래게!”
먼지가 묻은 앨범을 보며 혜선이 콜록 거리며 손 사래질을 하고, 비누도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살
짝 옆으로 돌려 앨범을 털어내기 시작한다.
잠시 뒤, 앨범에 묻은 먼지를 다 털어낸 비누는 혜선의 어깨에 팔을 휘두르곤 침대에 털썩 앉는다.
무미건조하게 비누가 입을 연다.
“자꾸 단아가 보려고 하잖아. 그래서 그냥 대충 던져놨어. 걔 키 작아서 저거 못 꺼내잖아.”
“하긴.. 언니가 키가 작긴 하더라.”
혜선이 비누의 말에 동의를 하며, 비누가 한장 한장 넘기는 앨범으로 눈을 돌린다.
“꺄!!! 설마 이게 너라고 하진 않겠지?”
작은 아이를 보며 혜선이 귀여워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다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비누를 바라보며
절때 이건 비누가 아니란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미안하게도 접니다만?”
비누가 혜선의 어깨에 있던 팔을 꼬옥 눌러 장난조로 목을 쪼르며 말한다.
..
그렇게 그들은 하루종일 앨범을 보다가, 저녁을 둘이서만 해결하고 본가에서 하룻밤을 머무르고 다
음날 아침 집을 나서게 되었다.
“참 잘 어울려요.”
지숙이 그들의 차가 멀어지자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잘 어울려도 우리만큼은 아냐.”
비훈이 너스레를 떨며 말하고 지숙은 그런 비훈을 보며 웃음밖에 안 나오는지 웃을 뿐이다.
※ ※ ※
“이제 어쩌지?”
차 안에서 혜선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혼잣말을 중얼 거린다.
“뭘 어째?”
“아. 아냐.”
이렇게 말하며 폰에 밧데리를 끼워 넣는 혜선. 밧데리를 끼우기 무섭게 반짝이는 폰. 연락이 얼마나
많이 왔던 건지 쉴 세 없이 문자를 지우고 부재중 전화 온 목록을 지워도 역부족이다.
그러다 결국 다 지운 혜선은 자신의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누구한테 걸어?”
운전을 하며 묻는 비누.
“우리 엄마.”
“엄마는 왜?”
“상견례 얘기 해 봐야지!! 아! 받았다. 쉿!”
혜선이 비누에게 조용하라는 시늉을 해 보이고 비누는 그 시늉에 조용히 운전만 한다.
-Hello~?
“엄마!?”
-아빠다. 이녀석아. 넌 아빠랑 엄마 목소리도 구분 못 하냐?
“어쩐지 엄마 목소리 치곤 굵다고 했어.”
혜선이 오랜만에 아빠 목소리를 듣고는 반가워 하며 전화를 한다.
-엄마한테 얘기 들었다. 너 류비눈가 하는 사람이랑 결혼할거라고 때썼다며?
“에에? 내가???”
-어제 너희 엄마, 다 키워 놓은 딸이 엄마 배신한다면서 울고불고 하다가 방금 한국으로 떠났어.
“악!!!! 정말?!”
혜선의 놀라는 목소리에 운전을 하던 비누도 깜짝 놀란다.
-응. 하암. 아빠는 피곤해서 더 자야 겠으니까 이만 끊고, 나도 곧 한국 갈 거니까 그때 봐. 단단히 각
오 하라고. 딸. 아빠는 엄마보다 더 화나니깐.
“에이~ 화난 목소리 아닌데?”
-…돈 잘 번다며? 그래서 아빤 기쁘다.
“뭐야! 그게. 푸하하.”
-농담이구. 나중에 만나면 다시 얘기하자. 아빠 정말 졸려. 하아암.
“응. 알았어. 아빠 잘 자구, 다음번에 봐요~ 되도록이면 일찍!”
-그래. 딸. 잘 지내~
전화를 끊고 기분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혜선을 보며 비누가 궁금한 듯 운전을 하며 힐끔 혜선을 보며
전화 내용에 대해 묻는다.
“뭐래?”
“그냥… 뭐. 너 마음에 들어 하는 것도 같고.”
“응? 정말? 다행이다! 한국엔 언제온데?”
“곧 올 거 같다고는 하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어. 이런. 엄마는 벌써 오고 있다는데?”
혜선의 말에 비누가 운전을 하다 말고 잠깐 경직 된 듯 하다. 갑자기 혜선의 부모님을 생각하게 자신
들의 부모님처럼 순순히 허락해 줄까. 아니면 절때 안된다며 심한 반대를 할까.
이런 생각이 비누의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왜그래? 갑자기?”
“아. 아무것도 아냐.”
♬~
그리고 그때 울리는 비누의 두번째 폰. 그러니까 연기자 류비누가 쓰는 폰!
그 전화를 받기 싫다는 듯 비누는 조금 망설인다. 왜 그러나 싶어 혜선이 폰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
“…받아봐.”
혜선의 차가운 음색.
비누는 받을까 말까 하다 그냥 받아버린다.
“류비누 입니다.”
-저예요. 진채린.
그녀의 얇고도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비누의 차 안을 울린다. 헤어지고 난 후 처음 하는 전화통화. 그
리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채린의 존댓말.
혜선은 그 목소리가 듣기 싫은지 차 창문을 열고 바람소리와 시끄러운 차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시끄럽네요. 어디죠?
하지만 곧 진채린의 이 말 한마디에 비누가 급히 차 창문을 올린다.
혜선은 그런 행동이 마음에 안드는지 표정을 살짝 굳히긴 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도로입니다. 그런데 어쩐일로 전화를?”
-아. 축하한다고 전하려구요. 오늘 아침에 TV에선 비누씨와 혜선씨의 기자회견이 아주 크게 났던데요?
“고맙군요.”
비누가 차갑게 채린에게 대답한다.
-언제 한번 만나서 차 한잔이라도 하죠? 그래도 예전의 정이란 게 있는데.
채린의 이 말 한마디에 혜선의 표정은 더 굳어 버린다. 그리고 비누가 이런 혜선의 표정을 놓칠리가
없었다. 그래서 단호히 채린에게 말한다.
“아뇨. 더 이상 그 쪽이랑 할 얘기가 없는 듯 하군요. 그리고 예전의 정이란건.. 훗, ‘정’따위가 우리에게
있었는지 모르겠군요. 어쨌든 축하전화는 고맙게 받아들이지만, 이런 전화는 곤란스럽군요. 지금 제
옆엔 혜선이가 버젓히 앉아 있거든요.”
비누의 이 말에 채린이 당황한 듯 하다.
-그..그러세요? 어쨌든 정말 축하드리고…. 결혼 할 때 부르세요. 그럼.
이게 끝이었다. 그와 그녀의 마지막 통화.
이 통화 이후로 그들은 우연히 만난 적은 있었지만, 만나도 거의 가벼운 인사만 할 뿐 더 이상의 발전
은 없었다. 동료애라던가 그런 것 조차 그들에겐 없었다.
“잘했냐?”
“응. 앞으로도 그런식으로만 해. 다른 여자한테 눈길 줬다간 내 손에 아주 그냥 아작 날 줄 알아!”
혜선이 뾰로퉁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쥔다.
그 주먹이 귀여운 듯 비누는 ‘하하하’ 소리 내어 웃으며 운전을 한다.
※ ※ ※
한 편,
전화를 끊은 채린의 심기는 그리 편하지가 않다.
비누의 그 쌀쌀함이 채린에겐 익숙했지만 오늘의 쌀쌀함은 더 심했다.
헤어진 직 후였기에 그래도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잘 대해 주길 바랬지만, 그 옆에 혜선이 있었
다니…….
“이러면 내가 그와 친구하는 것 까지 포기해야 하는 거잖아….”
채린이 중얼거리며 폰을 집어 던진다.
정말 돈도 많은 여자다.
폰을 집어 던진 채린은 곧 옷을 차려 입고 바깥으로 나가 자신의 차를 몰기 시작한다.
채린의 차는 곧 빠른 속력으로 도롯가를 가른다.
사고가 나지 않을까 염려스럽지만 절때 사고는 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말이다.
채린이 도착한 곳은 어느 Bar.
“이게 누구야? 류비누한테 차인 진채린아냐?”
바에 가자 어느 배우가 채린을 알아 보고 다가온다. 그런 그를 보며 채린이 피식 웃으며 그 남자의 어
깨를 한대 친다.
그 배우는 비누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인기가 있는 남자 배우였다.
“이 짜식이. 나 술이나 한 잔 사주라.”
그리고 가식이라면 가식이라고 할 수 있는 진채린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말이다.
“또 뭐 때문에 아침부터 여기 왔냐?”
“…그럼 니놈은 뭐한다고 아침부터 여기 있냐!”
채린의 말에 그 배우는 피식 웃으며 채린에게 양주를 사 줄 뿐이었다.
“여기~ 매일 마시는 걸로~”
그 남자 배우는 이렇게 주문을 시키고 난 후, 채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세월의 흔적이라면 흔적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많이 변한 채린이었다. 얼굴도 성격도…. 그리고 명성도.
“그러게 내가 처음부터 류비누는 안 된다고 했잖냐.”
“가지고 싶었다고 했잖아. 욕심을 부려서라도.”
채린의 이 말에 그 남자 배우는 기지개를 쭈욱 펴더니,
“…그게 난 안 되냐?”
“……풋. 그런 위로라면 안 받아도 되네요!”
그 남자배우의 말에 채린이 피식 웃으며 술을 들이킨다. 그리고 그 남자배우도 킬킬 웃으며 한잔 마신다.
그러다 갑자기 채린이 생각 난 듯 이렇게 말한다.
“야! 너 부인은 어쩌고 여기 와 있냐!?”
그랬다. 이 남자는 벌써 결혼을 한 몸이었다.
“…친구들이랑 술 마신다고 여기 온거.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어. 아침까지 퍼 마시다가 지금 나 부른거 있지!!
내가 자다가 일어나서 여기 온 거잖아. 그러다가 너 만나서 이러고 앉았지. 뭐.”
“이 애처가!!”
“하하. 너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해봐. 이렇게 안되나.”
그 남자의 말에,
“그런 사랑…나도 할 수 있을까?”
라고 조그맣게 중얼 거리는 채린이다.
그뒤, 그들은 기분좋게 술잔을 기울였다.
“아! 난 운전을 해야하니 이정도로 패스~”
....뭐 결국엔 채린이 거의 다 마시긴 했지만 말이다.
<55>
“그래. 우리 딸의 어디가 그리 좋던가?”
“모든게 다 좋습니다.”
“……흐음~”
지금 이 상황은 비누와 혜선이 대구에 있는 혜선의 집으로 가서 그녀의 엄마인 소정의 앞에서 대화
를 하고 있는 중이다.
소정은 한국에 오기 무섭게 바로 다음날 혜선을 불렀고, 비누는 촬영이 있음에도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곳으로 내려왔다. 혜선과 함께.
“……있을 수 없는 일이네.”
소정의 이 한마디에 비누의 표정이 그 말 뜻을 모르겠단 듯 궁금한 표정이 한가득이다.
“내 딸의 모든 게 좋다는 게 말이 안 된단 걸세. 솔직히 말해봐. 어디가 그렇게 좋았던가?”
“엄마!!”
“쉿. 넌 조용해.”
소정의 말에 혜선이 다급하게 소정을 부르지만, 그런 그녀의 부름을 단박에 잘라버리는 소정이다.
혜선은 소정의 그런 행동이 부담 백퍼센트로 다가오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성격과 가끔씩 나오는 터프함이 좋습니다.”
“얼굴 보고 좋다고 말 안해서 다행이군.”
“하하하.”
비누가 이마에 살짝 고인 식은땀을 닦아내며 대답한다. 혜선은 비누의 옆에서 소정과 비누를 번갈
아 보면서 걱정스럽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의 엄마인 소정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류비누씨.”
“말 놓으세요. 자..장모님.”
비누가 익숙치 않다는 듯 더듬거리며 장모님을 내뱉는다.
“누가 장모님이래? 내가? 내가 류비누씨 장모님이야?”
소정의 입가에 살짝 맺히는 웃음. 비누는 소정의 그 말에 자신을 싫어하는 줄로만 알고 잔뜩 긴장을
하고, 혜선은 중간에서 어쩌나. 하고 그냥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
소심하게 그 한마디에 아무말 없는 비누다.
“…말해봐. 내가 류비누씨 장모님이야?”
류비누‘씨’ 장모님이야? 라는 말이 과연 존댓말일까 반말일까 구분이 잘 가진 않지만 소정의 그 말에
비누는 다시 입을 연다.
“네. 장모님입니다.”
“오호호호호호호호호. 정말 내가 류비누씨 장모님이야?”
“네. 장모님!
소정이 기분 좋은 듯 웃고, 그 웃음에 익숙치 않은 비누는 순간 당황을 하며 혜선을 바라본다. 혜선은
자신을 바라보는 비누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조용히 입모양으로 말한다.
‘우리 엄마 지금 기분 엄청 좋아.’
그 말에 용기를 얻은 비누.
“장모님!!”
이라고 큰 소리로 소정을 한번 불러본다.
“왜? 사위?!!!”
소정은 바로 비누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인다. 그리고 사위라고 말한다. 그 단어 하나에 비누
는 감격을 금치 못한다. 혜선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새아기’란 말을 들었을때도 이 기분이었을까?
라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그..그럼 허락해주시는 겁니까?”
“허락하다 마다. 저렇게 모자란 애 데리고 가 준다는데, 더군다나 ‘류비누’가.”
류비누란 말에 악센트를 주고 말하는 소정. 연기자 류비누를 좋아하는 소정의 마음이 얼마만큼인지
여기에서 짐작이 간다.
“아직 저녁 전이지? 저녁 먹고 여기서 자고 가.”
벌써부터 사위라도 된 냥.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손으로 혜선의 방을 콕콕 가르키며 말하는 소정이
다. 이로서 그들은 가볍게, 가뿐하게, 사뿐하게, 너무나도 쉽게 양가의 어른들에게 모두다 허락을
맡은 상태.
그들의 기분은 정말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하지 못 할 정도로 기뻤다.
..
부엌.
식탁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는 중이다.
식탁의 가운데엔 좀 커다란 접시에 빨갛게 물들인 닭들이 들어가있다. 닭.볶.음.탕! (닭도리란 표현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왠만하면 사위라거나 그렇게 될 사람들이 오면 닭 한마리를 푹 고아서 내 놓기 마련인데 좀 특이한
식탁이었다.
“사위. 닭 좋아하나?”
“엄청 좋아합니다!”
소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젓가락과 한 손을 이용해서 닭고기 하나를 드는 비누고, 그런 비누의 손
을 탁 치는 소정. 비누는 자신이 뭘 잘 못 했나 싶어 소정을 조심스레 바라보지만, 소정은 닭 다리
하나를 잡더니 비누에게 건네준다.
“손 씻었으니까 먹어도 될거야. 호호. 그리고 우선 다리부터 먹어야지. 왜 닭가슴 부터 잡나?! 응?
많이 먹어! 내가 정말 열심히 만든 요리야. 혜선아. 뭐하니! 류서방한테 물 떠 주진 않구!”
소정이 호들갑을 떨며 말하고, 혜선은 그런 자신의 엄마가 익숙치 않아 표정이 얼떨떨 할 뿐이다.
..
..
..
그렇게 요란스런 식사가 끝나고 부엌에서 설겆이를 하는 두 모녀.
“너 어쩌다 저렇게 큰 걸 물은거야?”
“…어쩌다 보니. 근데 엄마 그 말투 좀 어떻게 해주면 안되?”
혜선이 아까부터 자꾸만 거슬렸던 걸 말한다.
“내 말투가 어때서? 교양있지 않니? 호호호.”
“전혀. 우리엄마 안 같아. ‘야이 까씨나야! 이거 안하나! 저거 안하나!’ 이랬던거랑 너무 다르잖아.”
혜선이 퐁퐁을 잔뜩 묻혀 거품을 낸 그릇을 소정에게 넘기며 말한다. 소정은 그 그릇을 헹구며 말한다.
“그러는 너도 왠 표준어냐? 그리고 외국에 나가서 살아봐. 어쩔 수 없이 표준어 쓸 수 밖에 없어.”
“난 서울에서 사니까 어쩔 수 없고, 엄만 외국에서도 한국사람들이랑 대화 나눠? 응?! 한국사람이
그렇게 많냐?!!!!!!”
“응. 많아.”
“……정말?”
“응.”
소정의 단호한 말에 혜선은 민망한지 설겆이를 더 빡빡 하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며 소정은 흐뭇
한 미소를 보인다.
혜선이 넘겨주는 그릇을 헹구며 소정이 혜선을 톡톡 친다.
“왜?”
“어떻게 만난거야?”
“…그냥 이모가 하는 가게 갔다가 만났어.”
“…술집?”
“응.”
“아~ 진짜 실물로 보니까 더 멋지다. 얘! 이제 평생을 같이 할텐데 매일 보면 얼마나 행복할까!”
다 헹군 그릇을 탁탁 털어 올려놓으며 소정이 중얼거린다. 그 중얼거림에 혜선은 피식 웃으며 손을
씻는다.
그렇게 설겆이를 끝마치고 거실로 나오니, 비누가 사라지고 없다.
“어디갔지?”
혜선이 이렇게 중얼 거리다 자신 방의 방문이 열려있자 그곳으로 빠르게 걸어간다. 그리고 그런 자
신의 딸의 뒷모습을 보며 소정은 조용히 거실에 앉아 TV만 볼 뿐이었다. 좋은 분위기를 망치기 싫
어서 한 센스있는 행동이었다.
..
어쨌든! 자신이 방문이 열려있어 빼꼼히 그 방 안을 들여다보니 비누가 책상에 앉아 무언갈 보고 큭
큭 거리고 있다.
혜선은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비누에게 조심히 다가가 뒤에서 어깨를 갑자기 확 잡으며,
“웍!”
하고 비누를 놀래킨다.
“허어.... 놀래라.”
헛숨을 들이키며 비누가 놀란 듯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리고 아까전에 보던 걸 계속 보기 시작한다.
혜선은 뭘 보나 싶어 비누의 손에 쥐어진 걸 보다가, 얼굴이 쌔빨게진 채로 그 것을 뺏어버린다.
“야!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왜 뺏어!!”
비누가 짖궂게 말하며 혜선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을 뺏으려고 하고, 혜선은 그런 비누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왜 남의 일기장은 보고 그래!”
혜선이 외치고, 비누는 그런 혜선의 손에 있는 일기장을 가볍게 뺐더니 이렇게 말한다.
“재미있잖아. 그리고 과거의 널 알 수도 있고.”
비누의 그 말에 웃고 있던 혜선이 표정이 굳어버린다. 과거의 너. 과거의 너.
혜선은 일기장을 다시 뺏으려고 했고, 그러다 일기장이 바닥에 떨어져 버린다. 그리고 그 일기장을
주으려고 고개를 숙이는 비누. 일기장을 들고 일어서며 천천히 읽는다.
“나 때문에 용이가 죽…….”
일기 첫부분을 읽다가 비누는 말을 흐려버린다. 그리고 혜선의 표정을 보니, 다행스럽게도 아주 담
담한 표정인 혜선이다.
어색해진 분위기 때문일까? 비누가 곧 일기장을 덮는다.
“아~ 우리 뭐 할까?”
비누가 화재를 바꾸고자 이렇게 말했고, 그런 비누를 향해 혜선이 묻는다.
“무슨 일인지 안 궁금해?”
“…궁금하지만 물으면 니가 안 좋을 것 같아서.”
누가 비누가 남을 배려할 줄 안다고 생각하겠나. 하지만 지금 비누는 혜선을 위해 궁금해도 궁금하지
않은 척 하고 있었다.
“말할께. 들어.”
“말하겠다면 들을게. 말해봐.”
비누는 굳이 혜선이 말하겠다는데 말리고 싶진 않았다. 솔직히 좀 궁금하긴 했으니까.
“내가 고등학교때 사겼던 남자야.”
“응. 이름이 남자 이름 같더라.”
“정말 많이 사랑했던 남자야.”
“그래? 흐음.”
혜선의 입에서 ‘사랑했던 남자’라는 말이 나오자 살짝 표정이 일그러지긴 했지만 곧 본 표정으로 돌
아오는 비누.
“그리고 나 때문에 죽은 남자야.”
“그렇구나.”
비누가 이렇게 말하며 혜선의 얼굴을 바라본다. 자신때문에 누군가가 죽었다면 살아남은 사람의 고
통을 비누는 알 것 같았다. 당해보진 않았지만 그냥 알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왠지 그녀의 표정을 보니, 비누는 알 것 같았다. 그 슬픔의 깊이를…….
“저번에 니가 나한테 고백했을때 내가 말했었지?”
“사랑 못한다고? 사랑 받을 자격, 사랑 할 자격 없다는거?”
“큭큭.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네?”
“그럼~ 처음으로 여자한테 차인건데. 기억하고 말고.”
비누가 분위기를 살짝이라도 풀어보고자 가볍게 말했지만, 혜선이 표정은 그리 풀어지지는 않는다.
“용이 때문이었어. 용이 때문에 평생 사랑같은거 할 수 있을지 몰랐어.”
“그럼 지금은…?”
비누의 물음. 그 물음에 혜선이 답해준다.
“…저번에 내가 사라진 적 있었지? 좀 오랫동안.”
“응. 그때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었지.”
비누의 이 말에 혜선이 피식 웃음지으며 다시 말을 잇는다.
“그때 용이 친구랑, 용이를 죽게 만든 여자를 만났어. 아. 나 때문에 용이가 죽긴 했지만, 그 죽음을
부른 아이가 있었거든. 그 여자아이.”
용이를 죽게 만든 여자란 말이 나왔을때 비누가 모르겠단 표정을 지어서, 혜선은 다시 덧붙여 말을
했다. 나 때문에 용이가 죽긴 했지만, 그 아이를 죽게 만든 계기를 만든 아이라고.
“아. 그래?”
“응. 그런데 그 아이들... 어느새 연인사이가 되어있더라구.”
“흐음….”
“그리고 용서라고 할 수 없는 용서도 받았어. 그냥 내가 그렇게 생각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때부터 마음이 무지 편안해 지고, 니 생각밖에 안나더라?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된 거고.
만약에 그때 대구에 내려오지 않았다면, 우린 평생... 친구로만 지냈겠지? 후음….”
혜선이 이렇게 말하며 침대로 걸어가 벌러덩 눕는다.
“…나 눈 좀 붙일게. 그냥 마음이 좀 그렇네.”
혜선의 그 말에 비누도 혜선의 옆에 벌러덩 눕더니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며 비누가 자신의 손으로
혜선의 손을 감싸 쥔다.
“아파하지마. 그럼 나도 아파.”
“…….”
“…이제 내심장이랑 니심장이랑 연결 되어 있으니까, 니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내가 아프면 너도
아파야돼. 이기적이지만…. 우린 항상 같이 즐겁고 같이 아파야돼. 그러니까.. 아프지 마라. 지혜선.”
눈을 감고 들은터라 더 감미롭게 들리는 비누의 목소리다.
그리고 그 감미로운 목소리에 혜선은 비누의 허리를 꼬옥 끌어안으며 잠의 나락에 빠져든다.
비누도 같이 혜선과 잠에 빠져든다.
달칵.
하고 열리는 문.
둘이서 끌어안은 채 좁은 침대에서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소정이 켜져 있는
불을 끄고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온다.
밖으로 나온 소정은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Hello~
“여보. 나야.”
-아. 어때?!!! 괜찮아? 싸가지 없거나 뭐 그러지 않아?
“전혀. 혜선이를 감싸 줄 수 있는 멋진 남자더라. 정말 내가 젊었다면…….”
-여보!!!!!!!!
버럭 소리치는 혜선의 아빠 진석이다.
“…호호호. 농담인데 정색하긴. 어쨌든 당신도 얼른 한국 내려와요. 그쪽 부모님도 우리랑 빨리 만
났으면 하고 바라나 봐~”
-이번 일 끝나는데로 내려갈게.
“언제 끝나는데?”
-아마도… 3일정도 후면 다 끝날 것 같아.
“그래요? 호호. 그럼 3일 후에 봐요.”
소정은 이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으며 다시 TV로 시선을 돌린다.
비누가 참 마음에 드는 소정이었다.
팬카페 : http://cafe.daum.net/LovelySo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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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틴 로맨스소설
[ 중편 ]
스캔들 <51~55>
발광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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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27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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