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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된 말씀을 행하지 아니하면
신 28:58-68
58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59 여호와께서 네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60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붙게 하실 것이며
61 또 이 율법책에 기록하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네가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62 너희가 하늘의 별 같이 많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 되지 못할 것이라
63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시고 너희를 번성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시던 것 같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니 너희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뽑힐 것이요
64 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네가 그 곳에서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목석 우상을 섬길 것이라
65 그 여러 민족 중에서 네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며 네 발바닥이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거기에서 네 마음을 떨게 하고 눈을 쇠하게 하고 정신을 산란하게 하시리니
66 네 생명이 위험에 처하고 주야로 두려워하며 네 생명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라
67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이 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 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
68 여호와께서 너를 배에 싣고 전에 네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가 다시는 그 길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시던 그 길로 너를 애굽으로 끌어 가실 것이라 거기서 너희가 너희 몸을 적군에게 남녀 종으로 팔려 하나 너희를 살 자가 없으리라
신 28:58-68 / 만일 여러분이 이 책에 기록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고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는 그 존귀하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않으면 59) 여호와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에게 엄청난 재앙들을 계속 내리고 흉악한 질병들도 계속 내리실 것입니다. 60) 여러분이 애굽에서 보고 두려워하던 그 질병들을 여호와께서 다시 여러분에게 쏟아놓아 여러분의 몸에 달라붙게 하실 것입니다. 61) 또 이 율법책에 기록되지 않은 모든 질병과 재앙도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쏟아 부어 마침내 여러분을 전멸시키실 것입니다. 62) 여러분이 만약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늘의 별처럼 많은 백성이 되지 못할 것이며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몇 사람만이 살아 남을 것입니다. 63) 여호와께서 이제까지는 여러분에게 좋은 일을 베풀어 주시고 여러분을 점점 더 번창하게 하시는 일을 기쁨으로 삼으셨으나 그때부터는 여러분을 망치고 전멸시키는 일을 기쁨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제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도 쫓겨날 것입니다. 64) 그때에는 여호와께서 땅 이 끝에서 저 끝에 이르기까지 세계 만민 가운데에 여러분을 흩어 놓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거기서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조상들이 모르던 우상들, 곧 나무나 돌로 만든 이상한 신상들을 섬길 것입니다. 65) 그러나 여러분은 세계 만민들 가운데에서 발바닥을 붙일 만큼도 쉴 곳을 찾지 못하고 항상 떠돌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거기서도 여러분을 쫓아다니며 마음을 불안하게, 두눈을 흐리게, 정신을 산란하게 하실 것입니다. 66) 여러분의 목숨이 항상 위험한 곳에 매달려 있어서 밤이나 낮이나 떨게 되고 안심하고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67) 아침이 되면 `언제 저녁이 되느냐?' 고 애를 태우며 저녁이 되면 `언제 아침이 되느냐?'고 애를 태울 것입니다. 듣고 보는 일마다 가슴 떨리는 것들 뿐이어서 점점 더 무서움만 느끼게 될 것입니다. 68) 여호와께서는 일찍이 여러분에게 다시는 애굽으로 데려가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때에는 오히려 여러분을 배에 실어 애굽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기서 노예 시장에 나가 원수들에게 자기 몸을 남종과 여종으로 팔려고 해도 사는 사람조차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대가는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질병의 재앙(58-63)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여호와를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으로 경외할 것과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서만 자신을 경외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애굽의 모든 질병, 애굽에서 유행하던 질병들과 출애굽 때에 모세를 통해 내린 재앙들로 치실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출 15:26; 삼상 5:6). 특히 율법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은 지금까지 존재하지도 않았던 질병들까지도 징벌의 수단으로 사용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결과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남는 자가 얼마 없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여호와께서 선을 행하시고 번성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망하게 하시며 멸하기를 기뻐하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땅에서 뽑혀서 버려질 것입니다. 이는 언약의 폐기가 아니라, 언약을 준수하지 못한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세계 각국으로 흩어짐(64-68) 가나안 족속들이 그들의 부도덕한 행실 때문에 그들의 땅에서 쫓겨난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똑같이 행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세계 각지로 흩어 그들이 이방인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학대와 고통을 당하되 발바닥이 쉴 곳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삶의 희망을 잃어 아침이면 저녁이, 저녁이면 아침이 되기를 바라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시 애굽으로 끌고 가 그곳에서 사람취급을 당하기는커녕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노예로 팔려갈 지경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치고 수척해진 이스라엘의 모습에 아무도 그들을 노비로 살 수 조차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여호와께 순종할 때 보배로운 백성이 된다는 약속과는 완전히 대조적입니다(26:18). 이처럼 하나님을 모신 인간은 거룩한 성전과 같은 여김을 받지만 우상을 섬김으로 인해 여호와께 버림받은 인간은 더러움에 버려져 썩어지는 쓰레기와 같은 취급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고전 3:16; 롬 1:24).
적용: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조되어야 할 것은 율법적인 규례들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고 참된 경건에서 우러나오는 행위대로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벧전 1:17).
북 이스라엘은 남 유다에 비해 지리적으로 훨씬 유리했습니다. 이스르엘 평야와 악고 평야와 돌 평야가 있었고 최북단엔 요단 강의 근원지인 헐몬 산이 있어 흘러내린 물이 갈릴리 호수로 모여 들었습니다. 비옥한 평야 지대가 있어 농사에 경제적 풍요를 누렸습니다. 성경은 북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이유에 대해 그들이 여호와의 신앙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바알 신앙에 노출되었던 북 이스라엘의 멸망 후에 약 140여 년을 지속해 왔던 남 유다지만 기록된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할 때 극렬한 재앙으로 심판과 저주를 집행하셨습니다.
왜, 경고(징계)를 주실까?
신명기 28:58-64 / 윤봉원 목사(진광교회)
1. 각종 경기에서 심판은 선수에게 경고 또는 퇴장을 왜 줄까요?
축구, 태권도, 레슬링, UFC 등 각종 경기를 할 때 심판은 경고나 퇴장 명령을 할 때가 있다. 심판은 규칙을 어긴 선수에게 이런 것을 준다. 그러나 세상 심판은 선수들의 행위를 다 제대로 살피지 못하기 때문에 경고감이 경고를 안 받기도 하고, 경고감이 아닌 헐리우드 액션에 속아 넘어가서 경고감이 아닌데 경고나 퇴장 명령을 하기도 한다. 왜 이렇게 심판이 선수들에게 불이익을 주는가? 그것은 선수를 보호하고, 정한 게임을 정상적으로 잘 마칠 수 있으며, 정정당당하게 실력을 겨루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약 심판이 이런 경고를 주지 않는다면 게임은 정상적으로 치러지지 않을 것이며, 난장판이 될 것이요, 불법을 더 크게 행하는 선수가 승리하게 될 것이다.
UFC 격투 세계에서는 선수가 법을 어기고 경기를 치르면 영구 제명을 하는 것을 신문 기사를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요 기업이요 백성인 성도들을 사랑하시기를 독생자를 희생하시기까지 하셨다. 지금도 한 순간도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시는 데 쉼이 없으시다. 그런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각종 징계와 어려움이라는 경고를 왜 주실까? 하나님은 전지전능자시다. 그의 말씀에 불순종한 백성에게 어떤 경고를 주시며 그 경고를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그 교훈을 우리의 삶에 온전히 적용하도록 하자.
2. 불순종의 결과
2.1. 신체적 정신적 질병과 재앙(58-61)
신명기 28장은 말씀의 순종 여부에 따라 축복과 저주에 대해 극명하게 대조를 보인다. 모세는 축복과 저주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지혜로운 선택을 하도록 권유한다.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초래될 저주에 대해 매우 다양하고 반복적인 어조로 기록해 주고 있다.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붓게 하실 것이며 또 이 율법책에 기록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너의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58-61)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그가 명령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않고 그를 경외하지 않을 때 그 불순종의 죄가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한 백성이요, 그를 경외하며, 사랑하며, 전심전력 다 기울여 섬기도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분임을 명확히 하셨다(신 10:12, 20; 13:4; 17:19). 그럼에도 그의 백성이 말씀을 지키지 않고 그를 섬기지 않는 백성은 부모든 자녀든, 무서운 신체적 질병과 재앙을 중하고 오래도록 내리시겠다고 경고하셨다. 더 나아가서 장마철에 폭우가 하늘에서 쏟아지듯 애굽에 내렸던 모든 질병을 들어부으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쟁앙을 오나전히 멸망할 때까지 내리겠다고 경고하셨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경고이다.
이것은 십계명의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신 5:9)이라는 말씀을 뜨 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전에 모세에게 하셨던 약속과는 180도 배치되는 말씀이다. 모세는 이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그들로 애굽에서 경험한 질병을 걸리지 않게 하실 것이며, 오히려 그들의 대적들이 그 질병을 경험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한 적이 있다(7:15). 그때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들을 공격하셨으나, 이제는 정반대의 자세로 돌아서시겠다는 선포이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대적자이시며 오히려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을 위하시는 분으로 돌변하시겠단다. 그는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이 경험할 애굽의 질병을 이스라엘에게 가져오신다. 아울러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모든 질병을 극심하게 경험하게 하실 것이다(출 15:26).
왜 하나님은 한 때는 질병과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하셨다가 이제는 길고 극렬한 재앙과 질병을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멸망될 때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하셨는가. 그것은 이와같은 끔찍한 복과 주저 목록은 수사학적으로 생생함, 과장됨, 충격을 주려는 목적도 있어 보인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사랑하는 백성이라 불순종할 때는 그냥 두고 보시지 않겠다는 선포인 것이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가 불순종하면 무서운 질병과 재앙, 멸망을 당하는 것과 같은 징계를 주시는 이유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고, 진리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순종함으로 온전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징계와 어려움을 주어서라도 바른길, 생명의 길, 순종의 길로 인도하시겠다는 선포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고통이 따르지만 말씀에 순종할 때 기쁨과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이런 징계를 통하여 인간 본성의 죄악성을 경고하고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본분을 벗어난 삶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와 회개를 권면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 극심한 질병과 징계의 어려움이 우리를 괴롭히는 경고가 계속 될 것임을 미리 알려주신 이 사실을 항상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
2.2. 뽑히고 흩어짐으로 노예살이를 하게 됨(62-64)
‘너희가 하늘의 별 같이 많았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되지 못할 것이라’(62)
하나님은 불순종에 대한 재앙과 질병 때문에 이스라엘의 수가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을지라도 소수만 남을 것이다라고 경고하셨다. 이와같은 숫자의 감소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말씀(‘하늘을 우르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5)을 뒤엎는 것이다. 이들이 애굽에 들어갈 때의 숫자인 70명을 생각나게 한다(창 46:27).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대로 번창했다.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은 사백년 뒤 출애굽 때에는 장정만 60만이 되었다. 소수였던 이들은 애굽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출 1:7).
그러나 이제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불순종하게 되면 매우 극심한 재앙으로 인한 인구 감소하기까지 비참해 질 것을 경고하셨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고, 본토에 남은 자는 2만 명에 불과하게 되는 비극을 당하기도 했다. 말씀에 불순종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저주를 역사를 통해 증명해 낸 샘이다.
‘이왕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시고 너희로 번성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던 것 같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니’(63)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기를 기뻐하시리니”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간절하고 애타는 심정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악인조차도 그 죄악 중에서 멸망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에겐 더욱 그러하실 것이다.
‘너희가 들어가 얻는 땅에서 뽑힐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네가 그곳에서 너와 네 열조의 알지 못하던 목석 우상을 섬길 것이라’(63-64)
‘땅에서 뽑힐 것이요’(63) 하나님은 심기도 하시고 뽑기도 하신다. 하나님께서 한 그루 나무를 뽑으실 수 있는 것처럼 한 민족을 전복시킬 수 있다. 아멘!! 하나님은 그들의 번영의 뿌리와 가지를 뽑고 꺾으실 수 있다. 하나님은 한 개인이나 국가라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회복할 힘이 없도록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자들을 포로로 끌려가 죽게 하신다. 인간은 그들이 저지른 죄로 말미암아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다. 우상숭배는 유대인들을 가나안으로부터 떠나게 하였다. 이와같이 불신앙과 반역은 하나님의 은혜의 범위 밖으로 쫓겨나게 되는 비극의 씨앗이다.
불순종 생활을 계속하면 가나안 땅으로부터 쫓겨나 집없이 세상 구석구석까지 방랑하게 된다. 하나님에게 진정으로 충성하지 못하면 그 어떤 나라도, 사회도, 신조도 결속될 수 없고, 확보될 수 없다. 하나님은 불순종으로 하나되어 바벨탑을 쌓은 악을 행한 노아의 후손들을 흩으신 분이시다.
‘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창 11:8)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가를 확고히 해야 한다! 그럼에도 또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다음의 말씀이 응하여 그 징계를 받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신 31:17)
3. 하나님의 경고, 불순종의 삶에서 순종의 삶으로의 방향 전환 메시지이다!!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대한 본문에 기록한 모든 저주는 이스라엘 백성이 당하게 될 고난을 실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단순한 엄포가 아니다. 실상이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가장 중요하게 요구하시는 것은 자신을 경외하며 사랑함으로 그들에게 주신 명령과 규례에 순종하는 것이다. 말씀을 떠난 불순종의 삶은 신체적, 정신적 질병과 재앙이다. 그리고 약속의 복을 누리는 대신 뽑히고 옮겨져서 하나님의 축복 대신 신앙적으로, 물질적으로, 환경적으로 온갖 파란만장한 불행을 겪으며 살아가야 하는 멸망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불순종하여 하나님께서 물질적 경고, 신체의 질병의 경고, 신앙적 환경적인 각종 경고를 받을 때 이것은 하나님의 경고라는 사실을 즉각 알아 차려야 한다. 그리고 그 경고는 지금까지 불순종하는 악한 삶에서 즉시 순종의 삶으로 돌아서라는 회개의 메시지임을 분명히하고 즉시 회개해야 한다. 다시 주의 말씀을 항상 묵상하며, 기도하여 성령의 인도와 진리를 따라 순종하는 삶으로 방향 전환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징계와 심판의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말고 축복과 범사가 잘되는 형통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이런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주와 언약
신명기 28:58-68 / 이근호 목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자신만만합니다. 너희들은 결코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되리라 고 말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만큼 사람에 대해서 아시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인간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단정 지음에 불만을 갖고 열심히 말씀을 지키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추가적인 법을 집어넣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근원을 압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사단이 어떤 계약관계에 있는지를 아십니다.
이 근원을 ‘율법에 의한 저주’를 통해서 밝히고자 하는 겁니다.
따라서 성도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기회를 가지면 되는 겁니다. 즉 “나는 저주받기 싫어!”라고 나오면 아니되는 겁니다.
어차피 우리는 자신의 근원을 박차고 부정할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선입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우상을 안 섬기고 하나님만 섬기는 경우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기어이 오늘 말씀대로 우상을 섬기지 않을 수 없게 만드십니다. 왜냐하면 근원으로 돌아가서 대기하지 않을 자는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각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인간을 향하여 저주를 예고하는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겁니다. 즉 성경을 안 본 것으로 여기고 말씀도 안 들은 것으로 여기는 겁니다. “나는 이제부터 저주를 언급하는 그런 신하고는 안 놀아”라고 돌아서면 그만인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방인들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말씀을 주시는 대로 다 순종하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화롭게하고 거룩하게 하는 이 말씀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겁니다. 말씀 지키는 것이 힘들다고 중도 포기하면 악마만 좋아들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실은 율법 아래 있는 것이 곧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을 이들은 알지 못합니다.
즉 율법을 얼마나 많이 지키느냐에 따라 저주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순종에 의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겠다는 그 의도 자체가 이미 저주에서 못 벗어난 의식입니다. 갈라디아서 3:10-11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세 번째 반응은, 자기 자신이 율법이 주는 저주를 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겁니다. 이것이 인정되면, 존재 자체가 저주 유발자이기에 아무리 선하고 착하게 보이는 일을 한다할지라도 의가 될 리가 없음도 아울러 인정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알게 된 자라서 비록 하나님이 버릴 지라도 여전히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인 것을 유지하는 자입니다.
즉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서 ‘저주 주시는 하나님-저주받아 당연한 자’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자기에게 유리해서가 아니라 이런 관계성이 곧 진리요 합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에 그 어떤 힘든 조치를 취한다 할지라도 반항하거나 불만을 가질 근거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만약에 인간이 저주하게 만든 이 율법을 어느 누구라도 온전히 지킨 자가 등장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또한 놀라운 사실은, 율법 안에 ‘이웃 사랑’의 조항도 포함되어 있어 만약에 제대로 된 율법 준수자가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나선다면 그 다른 사람도 율법의 약속에 따라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겁니다.
이런 분의 등장은 ‘손님 대접’의 형태로 알려집니다. 히브리서 13:2에 보면,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손님’이란 주인이 혼자서 끙끙 앓듯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손님의 방문이란, 율법 완성에 있어 하나님편의 적극적인 선수조취가 취해진다는 말입니다.
누군가를 방문한다는 것은, 손님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저주받아 지옥갈 날만 기다리게 되는 처지에서 난데없는 손님의 방문은 주인되는 자의 자세나 태도를 파악하게 만듭니다. 손님방문으로 인해 이웃사랑이 실효성을 거두게 됩니다. 사전 협의없이 맺어진 결과입니다.
손님의 방문은 주인의 모든 행함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형편을 그대로 복사합니다. 손님 자신의 처지로 이해합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마태복음 5:17-18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주님께서 언명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인간은 이 말씀 앞에 주눅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막상 추가적인 법율 투입 후에 만나게 되는 문둥병 환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일체의 사전에 유리한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그냥 죄 사함을 해버리시는 겁니다. 그 환자가 예수님에게 대하는 태도보고 결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저주를 바탕으로 깔아놓고서 하나님께서 그 위에 한 분을 내세워 구원자로 삼습니다. 율법의 처벌이 ‘행함 처벌’이 아니라 ‘존재 처벌’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율법을 지킨 양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를 어겼든 10개를 어겼던 간에 동일 인물이 이상 저주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이 ‘존재처벌’에 가해지는 저주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수 년간 바르게 살아왔다고 자처해도 한 번의 잘못이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순수하고 법을 만족시킬 위인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율법 환경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준수하십니다. 법은 마치 가을철의 철새나 바다 밑의 정어리 떼처럼 마치 한 몸이 움직이는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움직입니다. 이로 인해 ‘저주 파트’는 필히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율법 준수는 모든 계명을 일일이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단번에 이루십니다. “다 이루었다”(요 19:30) 그 다 이루심 안에는 이웃 사랑도 완성된 겁니다. 이웃을 위해서 자기 몸을 대신 희생하는 그 원칙 말입니다. 이 원칙에 준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성취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십니다.
마태복음 26:26-28에 보면,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일방적 나누어주심 앞에서 그 어떤 인간도 자기 의로움을 내비칠 수가 없습니다. 저주는 주님으로 인해 도중 처리가 된 겁니다. 이제 주님의 의로움이 축복으로 자기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겁니다. 이처럼 저주가 바탕이 되지 아니하면 언약도 성사될 수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자랑이 오직 피뿐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의심나는 곳에 달린 생명
신명기 28:58-68 / 허영진 목사
이스라엘이 양자택일의 갈림길을 만났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분기점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가 그들 앞에 이르렀습니다.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 네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린 것 같아서 주야로 두려워하며 네 생명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라”(신 28:58,66).
이스라엘은 한 민족으로서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안에 존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민족의 생명 자체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은 바로 생명을 배반하는 행위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선택은 생명과 죽음 양자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축복은 생명이요, 저주는 죽음이었습니다.
“의심나는 곳”이란 단두대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잘못된 선택을 하면 칼날이 목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적 부패에서 비롯되는 멸망이었습니다.
오늘날 인류의 생명도 의심나는 곳에 달린 것과 같습니다. 단두대의 칼날이 세계의 목을 겨누고 있는 절박감을 느낄 때가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민족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개인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모든 심각한 문제의 요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넘어지고 실패하는 것은 대부분 무슨 환경이나 사회제도 때문이 아닙니다. 외부의 적들이 강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사실은 자기 내부의 원수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려 있습니다. 심판자의 판결은 그의 말씀에 어떻게 응답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헬라의 철인 헤로도투스는 “인간의 운명은 그 자신의 영혼 속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줄리어스 시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잘못은 운명의 별에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자신 속에 있는 것이다.” 내 뜻, 내 주장대로만 살려고 고집하면, 모든 것이 나를 반대하고 괴롭히는 것 같습니다. 가족도, 교회도, 고용주도, 정부도, 그리고 운명도 다 원수같이 보입니다.
문제에 부딪쳤을 때 누구 때문이냐고, 밖에서 희생양을 찾지 말고 자신 속에서 문제의 뿌리를 파헤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고, 앞을 향하여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놓일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오늘 아침 신문지상에도 등장합니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변명이 도처에 가득합니다. 이 변명의 배후에는 자기 자신 밖에서 알리바이(현장부재증명)를 찾아내기만 하면 책임을 회피할 수 있고, 내 뜻대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숨어 있습니다. 기독교의 의미와 가치의 생명이 알리바이를 찾는 사람들 때문에 의심나는 곳에 달려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알리바이를 꾸며서라도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람 을“불가피성을 사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들이 바로 악당이라고 말했습니다. 교회에도 불가피성에 매달려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생활환경에 갇혀 사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 복잡한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는 가정의 식구가 되었습니다. 우연히 한 동네에 살게 된 옆집 아이들과 친구가 됩니다. 이미 결정된 한계상황 안에 살며 정해진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선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행위입니다. 현장부재증명을 이용하여 책임 전가하기를 그만두고 하나님 앞에 정직해질 때 우리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치가 지닌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릴 때 알리바이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사치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주여 내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영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한 번도 정직해져 본 적이 없고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한 적이 없다면 오늘 한 번 그렇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알리바이를 찾는 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하나님 안에 있는 새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될 것입니다.
눈길을 예수님께 맞추고, 절대로 거기서 떼지 마세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생애를 공부하고, 그의 부탁에 응답하세요. 그리고 그를 찾으세요. 그를 부르세요. 주님을 믿고 그에게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기면, 우리의 생명은 의심나는 곳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6월 8일 월요일 QT
28장의 2/3는 저주의 말씀입니다. 실제 저주의 내용은 57절까지이고 오늘 읽은 말씀은 전체적으로 저주가 오게 되는 이유에 대해 재확인하시는 말씀들입니다. 저주의 내용이 사뭇 무섭고 떨립니다. 그러나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저주의 긴 말씀들에 표현된 문자의 겉내용은 두려운 것들이지만, 그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그리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실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이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과 저주의 토대를 어디에 두고 지금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까? 언약 신앙입니다. 멀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행하신 언약에 기초하여 주시는 말씀이요, 가깝게는 모세를 통해 주신 시내산에서의 십계명을 통해 맺으신 언약에 기초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출34:27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 행하는 것이고, 축복과 저주의 선언 또한 신실한 믿음의 삶을 이끌어 내시려는 의도에서 주신 말씀들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강제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만 가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당신의 백성들의 순종을 받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결단은 우리의 몫으로 늘 남겨 두셨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믿음을, 자원하여 드리는 사랑을 하나님께도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큰 사랑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작게 흐르더라도 잔잔히 임하더라도 신실히 변함없이 드리는 사랑을 기다리시지 않으실까요?
탕자의 비유 나오는 불의한 둘째 아들이 모든 것을 잃은 후 그제서야 아버지의 사랑, 그 은혜의 품이 어떠한지를 깨닫고 돌아오게 되죠. 돌아오는 아들의 마음은 ‘아버지의 품꾼으로라도 좋다’는 가난해진 마음이었습니다.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 사랑을 갈망하여 돌아오는 아들에게 보여주는 그 아버지의 사랑이, 축복과 저주의 선언을 하시는 신명기의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언제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28장 본문 전체에서 축복 보다는 저주의 선언이 훨씬 길다는 것, 저주가 그만큼 많다는 것은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선택해야 하는 길이 넓은 길이기보다는 좁은 길이기 때문에 저주의 선언을 길게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복을 받는 길은 좁은 길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7:4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니라”하셨습니다. 축복의 길은 좁습니다. 왜냐, 축복은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길은 하나, 순종의 길인데, 그 길을 가기가 그리 편하거나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길에서 벗어나는 것은 왜 그리 쉬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주의하게 하시려고 저주의 선언을 길게 말씀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틀에서 본다면 우리는, 그리고 나는 지금 넓은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좁은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가려는 그 길을 가고 있나요? 아니면 찾는 이가 적은 길로 옮기고 있나요? 신명기 28장을 마무리하면서 오늘 우리 신앙의 길이 어느 길에 속하였는지, 가던 길 멈추어 서서 살펴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
신 28:58-68
본문 해석
<네가 만일 …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도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58절). 그렇습니다. 여호와라 하는 이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제3계명도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름이란 단순한 기호나 호칭이 아니고 그 사람 자체, 그 존재 전부입니다. 따라서 어른의 이름, 부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 것이 동양의 오랜 전통입니다. 십계명 역시도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엄격한 규범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는 모독이 아니라 오직 경외하고 감사하고 찬양해야 할 <영화롭고도 두려운 이름>입니다. 옛날에는 일국의 왕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못해 <폐하>나 <전하> 같은 극존칭을 사용했고, 자칫 왕의 이름과 관련 실수를 범했다가는 최고의 존엄을 능멸한 죄로 극형에 처해졌습니다.
오늘 본문도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도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재앙을 극렬하게>(59절)하시고, <애굽의 모든 질병>(60절)이 <네 몸에 들어붙게>하시고, 그 <모든 재앙을 네가 멸망하기까지>(61절) 내리실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패역무도한 죄악을 쌓을수록 온갖 극악한 질병들이 더욱 창궐하여 마침내는 인간을 멸망케 한다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64절). 이 예언은 A.D.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실제 성취되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지 않고 욕되게 하고 멸시한 민족이 당하는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것인가를 여실하게 보여준 참혹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흩어져 <목석 우상>(64절)을 섬기는 이방을 떠돌며 2천 년 동안이나 디아스포라로 살았습니다. 모쪼록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시고 찬양하시고 영화롭게 하십시오. 거기에 진정한 행복과 축복이 있습니다.
결단과 적용
-십계명 중 제3계명의 전문을 적어보십시오(출 20:7).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를 욕되게 하는 경우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신다>(63절)는 말씀의 역설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의 기도
주님, 저희로 하여금 <영화롭고도 두려운 이름>인 여호와를 늘 경외하고 영화롭게 할지언정 모욕하거나 망령되이 일컫는 일이 없도록 단속해 주시옵소서.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지 않으면 재앙이 극렬하고 질병이 오래 중하다고 하셨고, <너희가 하늘의 별 같이 많을지라도 남는 자가 얼마되지 못할 것>(62절)이라고 하셨사오니 부디 이 엄중한 경고를 귀담아 듣고 저주나 재앙이 아닌 은혜와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기에 합당하도록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