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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주목받는 신예로 떠오른 조원희 ⓒ스포탈코리아 이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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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희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주목 받는 축구 선수 중 한명이다.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한국 대표팀에 부임한 후 가진 첫 경기였던 이란전에서 자신의 A매치 공식 데뷔전을 치른 이 스물 두 살의 청년은 단 한번의 강인한 임팩트로 자신의 존재를 모든 축구 팬에게 알렸다.
그가 이란전에서 자신의 이름 석자를 각인 시키는 데 필요했던 시간은 단 59초면 충분했다. 주심의 경기 시작 휘슬과 동시에 노도와 같은 기세로 이란을 몰아친 한국. 왼쪽 측면에서 골문을 노리고 올린 크로스가 이란 수비의 헤딩에 의해 거둬지는 찰나 조원희의 가슴에 한차례 안긴 공은 그의 오른발에 여지 없이 걸렸다. 조원희의 발을 떠난 공은 이란 선수들의 몸을 잇달아 맞으며 골문으로 향했고, 골키퍼가 손 쓸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 들어갔다.
순식간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상황을 마무리 지은 조원희는 일약 국민적 스타로 떠올랐다. 그에 대한 반응만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조원희는 이란전 이후 자신감 넘치는 플레이로 소속팀에서 보다 확고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에게 전적인 신뢰를 보내왔던 차범근 감독마저도 “보름 새에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됐다”는 말로 그의 변화를 얘기하고 있다.
단순한 유망주의 차원을 넘은 대한민국 대표팀의 오른쪽 측면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른 선수. 대표팀의 경쟁 구도를 크게 소용돌이 치게 만든 선수. 그가 조원희다.
하지만 1년 전만 해도 조원희를 주목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현재도 그가 어떤 선수인지 정확히 인지하는 사람은 적다. 그만큼 조원희는 너무나 많은 유명세를 짧은 시간동안 얻었다. 그래서 그를 더 알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지난 시절을 들어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확신했다.
스웨덴, 세르비아-몬테네그로와의 유럽 2연전을 앞두고 휴식을 취하고 있던 조원희를 만나 궁금한 얘기들을 물어볼 수 있었다. 운동장에서는 성실함과 열정으로 무장했지만 밖에서는 여유와 유쾌함이 돋보이는 이 청년과의 만남의 시간은 내내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다음은 조원희와의 인터뷰 전문.
이란전이 낳은 신데렐라, 조원희
“사실 기대도 전혀 안하고 있었다. 원래 선수들은 경기를 앞두고 훈련을 할 때 낌새 같은 걸 느끼는 데 아드보카트 감독님은 그런 게 전혀 없으셨다. 나와 이호 같은 경우는 눈길 한번 제대로 안 주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놀랐고 떨렸다.”
- 대표팀 경기와 FA컵 일정만 남겨두고는 대부분의 시즌을 마친 상태다. 2005년 한해는 조원희에게 어떤 의미였나?
글쎄...(웃음) 작년에 우승을 거둔 팀에 운 좋게 입단하게 됐고 시즌 첫 대회부터 우승을 하며 나름대로 많은 기대를 했었다. 차범근 감독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제일 중요한 건 정규 리그였는데 결과가 좋지 못해 많이 아쉽다.
팀 성적이 좋지 않아 서운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좋은 일들만 있었던 매우 뜻 깊은 한해였다고 생각한다. 모든 게 끝난 것이 아니니까 다음 시즌에는 잘할 수 있게 더 노력할 생각이다.
- 방금 본인이 말했듯이 팀과 개인의 입장이 정 반대였는데?
사실 정규리그 성적과 여러 악재로 인해 분위기가 좋은 것만은 아니어서 팀 내에서 웃고만 다니지 못한다. 나만 제일 잘된 경우라고 떠들고 다니는 것도 눈치 보이는 일이다. 분명 뜻 깊은 한해였는데 ‘팀이 더 잘 됐으면...’ 하는 생각은 지금도 계속 든다.
감독님이나 몇몇 형들은 “너무 걱정 말아라. 네가 열심히 한 결과다”라고 해주신다. 그분들이 잘 보살펴 주셔서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거라 생각한다. 항상 내 주변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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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전으로 A매치 첫 출장을 기록한 조원희 ⓒ한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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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란전에 출장한 것이 조원희의 축구인생에 매우 큰 파장을 일으킨 것 같다.
사실 출전한 것만 해도 영광이었다. 하지만 이왕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하니 최선을 다해 내가 가진 모습을 가능한 많이 보여주고 싶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싶다는 의지도 있었고 운도 따르다 보니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던 것 같다. 앞으로 기회가 얼마나 더 주어질 지는 모르지만 그건 꼭 살려서 내 축구 인생의 목표인 월드컵에 선배들과 함께 가고 싶다.
- 들리는 얘기로 이란전을 앞둔 미팅에서 선발 명단에 들어간 뒤 굉장히 고무됐었다고 하는데?
전혀 생각치 못했던 일이라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선발로 뛰게 됐다는 사실을 미팅에서 명단을 불러줄 때 처음 알았다. 사실 기대도 전혀 안하고 있었다. 원래 선수들은 경기를 앞두고 훈련을 할 때 낌새 같은 걸 느끼는 데 아드보카트 감독님은 그런 게 전혀 없으셨다. 나와 이호 같은 경우는 눈길 한번 제대로 안 주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놀랐고 떨렸다.
- 첫 골의 기회가 자신에게 올 줄 생각이나 했었나?
(고개를 저으며)전혀... 감독님이 경기 전에 주문하신 게 사이드에서의 강한 압박과 빠른 공격과 수비였다. 일단은 공격보다 수비에 먼저 치중하자고 생각했었다. 사실 리그 경기 중에도 득점 기회가 거의 오지 않는 편이다.(편집자 주-올 시즌 조원희는 K리그에서 단 1도움만을 기록했음) 그래서 기회가 올 거란 생각도, 또 그걸 골로 넣을 거란 생각도 못했다. 경기에 출전하는 것만으로 떨렸으니까. 골 넣은 뒤에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이후에도 경기를 뛰는데 계속 가슴이 떨려 죽는 줄 알았다.
- 이란전 이후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역시 주위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다. 이란전 이후에는 알아보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한편으로는 무턱대고 안 좋게 보는 사람들도 있다. ‘유명세를 탄다는 게 이런 거구나’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걱정도 많이 드는데 그럴수록 운동에만 전념하려고 한다. 한 경기 잘했으니 사람들이 나를 좀 더 지켜 본다고 생각하니 부담도 큰 편이다. 앞으로는 못해도 이란전에서 보여준 정도는 해야 욕을 안 먹을 것 같다.(웃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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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과의 첫 A매치에서 골을 기록한 조원희 ⓒ한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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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란전 끝나고 반응들이 근사했다. 수비수들 맞고 들어간 공을 보고 당구에 빗댄 사람들도 있는데?
나도 봤다. ‘조무탈’이네, ‘쓰리 쿠션의 제왕’이네 하는 식의…(웃음) 실제로 나는 당구를 잘 치는 편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 가끔씩 친구들이랑 치긴 했는데 많이 늘지 않더라. 대표팀에서는 지훈이랑 주영이가 치는 걸 주로 구경만 한다. 이란전 끝나고 신문에서 내가 고교 때 다니던 당구장 사장님 인터뷰도 나오던데 진짜 황당했다.(웃음)
- 앞으로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발전하고 싶나?
능력도 더 발전해야겠지만 아직 경험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다양한 경기를 경험하고 싶다. 장점도 적은 편이니 남들보다 한두 발짝 더 뛰고 열심히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감독님들이 원하는 지시 사항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선수가 되고 싶다. 항상 그 마음을 잊지 않는다. 내가 골 넣는 선수는 아니니까 맡은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기본 신념이다.
밝지만 않았던 지난 날, 그래도 희망만은 놓지 않았다
“길지는 않지만 최근까지만 해도 축구인생이 그리 순탄한 편은 아니었다. 학창시절 때부터 1-2년 전까지만 해도 굉장히 힘들었던 시기였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고난이 큰 약이 된 경우지만 말이다.”
- 조원희의 과거는 거의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어떻게 축구를 시작하게 됐나?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시작했으니 이제 11년 정도 됐나? 원래는 다른 운동을 했다. 쇼트트랙이었는데 특출 난 선수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꾸준히 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축구부 담당이시던 담임선생님께서 체육시간에 내가 공을 차는 걸 보시고는 축구를 본격적으로 해보길 권유하셨다. 그래서 시작하게 됐다. 이후 배재 중학교와 배재 고등학교에 진학해 계속 운동을 하게 됐다.
- 선수가 잘 크기 위해선 지도자의 힘이 절대적인 것 같다. 축구인생에서 좋은 지도자들을 만났다고 생각하나?
물론이다. 내가 축구를 해오면서 중요한 시기마다 좋은 지도자를 만났던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학창 시절에 나를 가르쳐 주신 백현영 선생님과 박규 선생님은 깊은 애정과 관심으로 나를 지도해주셨다. 두 분을 만난 건 내 인생의 큰 행운이었다. 광주 상무의 이강조 감독님을 만난 것도 마찬가지다. 이 자리 올 수 있기까진 이 감독님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지금의 차범근 감독님은 당연히 말할 것도 없다. 지금까지 만난 지도자 중 나를 가장 크게 일깨워주신 분이 차 감독님이시다. 티비에서만 보고 동경해왔던 사람 밑에서 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기회를 주시려 하고 잘 챙겨주시니까 더 고마울 수 밖에 없다.
- 대학을 선택하지 않고 연습생으로 프로에 입단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였나?
안 간 게 아니라 못 간 거다. 잘되지 않았으니 대학엔 못 간 거고… 이후에 울산에 연습생으로 가서 1년 간 있었다. 그곳에서 뛰는 형들에게 많이 배웠고 프로로서의 자세를 갖게 됐다. 그 시간동안 청소년대표로 아시아대회를 갔다 온 뒤 상무 입대를 결심하게 됐다. 시기가 잘 맞아서 세계청소년대회에도 출전할 수 있었다.
길지는 않지만 최근까지만 해도 축구인생이 그리 순탄한 편은 아니었다. 학창시절 때부터 1-2년 전까지만 해도 굉장히 힘들었던 시기였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고난이 큰 약이 된 경우지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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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남북민족평화축전에서 골을 기록한 조원희 ⓒKFA 홍석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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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이동국, 박성배, 서동원, 김상식, 김영철 등 쟁쟁한 선수들을 모두 상무에 입대했다. 큰 커리어도 없는 선수가 그 틈에 끼어 입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텐데?
이강조 감독님께서 나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셨던 게 결정적이었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고등학교 때 이 감독님께서 내가 뛰는 경기를 많이 보셨다고 한다. 나와 같이 운동을 하던 친구 아버지와 친하셨는데 그 친구를 보러 오셨다가 저를 눈여겨보셨고 좋게 평가하셨다. 이후에 연락이 됐는데 감독님께서 상무로 와서 준비를 하라고 얘기해주셨고 나도 그 말씀을 따라 입대하게 됐다.
감독님께서는 항상 내게 “성실히 운동해라”는 말씀을 하신다.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는데 유독 강조하셨던 게 열심히 하라는 얘기였다. 죽도로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하셨는데 정말 죽도록 했다. 그러니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 사실 사병으로 입대해도 19살이면 적은 나이인데, 많게는 열살 가까이 차가 나는 선배들과의 생활이 힘들지 않았나?
솔직히 힘들었다. 나이 뿐만 아니라 여러 생각에서 차이가 많은 형들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 처음엔 혼자 한 켠으로 가서 운적도 많았다. 나이가 제일 어렸기 때문에 입대 뒤 궂은 일은 다 내 몫이었고 잔일이나 빨래도 많이 했다.
그래도 (서)동원이 형이나 (박)성배 형 같이 나이 많은 형들은 막내 동생 뻘이라고 잘 챙겨줬다. 지난 일이니까 웃어넘길 수 있는 일들이다. 지금 돌아서 보면 그게 사회생활 나오기 전에 적응하는 단계로 큰 도움이 됐다는 생각이다.
- 상무를 다녀온 선수들 얘기를 들어보면 이강조 감독님을 은인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았다. 항간에는 축구계의 ‘재활공장장’이라고도 하는데?
내게도 이강조 감독님은 특별한 은인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존재다. 그 분이 없었으면 내가 이만큼 못했다고 확신한다. 이 감독님은 항상 모험을 많이 하시는 분이다. 한 경기서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기회도 꾸준하게 많이 주시는 편이다.
상무에 오는 선수들이 주로 프로에서 잘 풀리지 않아 오는 경우가 많은데 일단 선수로 하여금 자신감을 많이 갖게 도와주신다. 또 감독님은 잘 알려지지 않은 선수라도 유심히 보다가 발탁해서 키우는 편이시다. 사실 올 시즌만 봐도 상무에 다녀와서 제 자리 못 찾은 선수가 거의 없다. 그만큼 선수 보는 눈이 탁월하시다.
나 같은 경우는 입대하고 첫 해는 오른쪽에서, 이듬 해는 왼쪽에서 뛰었다. 상병이 되면 당연히 오른쪽을 내가 확실히 볼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리를 옮기라고 하셨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는 왜 그렇게 시키시는지 이해를 못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까 다 나를 더 발전시키기 위한 생각이셨다. 왼쪽, 오른쪽 모두 다 뛸 수 있다는 게 내가 얼마나 메리트를 갖고 있는 건지 이제야 알겠다. 예전에는 거의 오른쪽만 뛰었는데 이젠 왼쪽이 더 편할 정도다.
- 아시아 청소년 대회에 다녀온 뒤 꽤 오랜 시간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되지 못했었다.
일단 상무에 입대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때 청소년대표팀이 해외에 전지훈련을 가게됐는데 나는 군사훈련을 해야 했고 군인 신분이라 나갈 수 없었다. 이후 다시 소집됐는데 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회복훈련이 필요해 갈 수 없었다.
- 그때 세계 청소년 대회가 연기됐었는데, 본인 입장에서는 적잖은 행운이었겠다.
정말 운이 좋았다. 당시 아시아대회가 2002년 10월이었는데 상무 입대가 11월이었다. 세계대회는 3월로 정해져 있어서 사실상 내가 갈 수 없는 처지였는데 아프카니스탄에서 전쟁이 발생해 대회가 연기됐었다. 그 뒤에 북한, 일본 평가전과 수원컵에 나갈 수 있었고 거기서 잘 보였는지 세계대회까지 갈 수 있게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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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U-20 세계선수권 미국전에서의 조원희 ⓒKFA 홍석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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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세계대회를 앞두고 남궁웅과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사실 남궁웅 쪽이 경쟁에서 유리하다고 봤는데 막상 대회를 앞두고는 조원희가 주전으로 낙점받았다.
내가 생각해도 그때는 몸 상태가 좋았다. 상무에서 경기를 많이 하고 왔기 때문에 당시에 경기에 정기적으로 나오지 못하던 웅이보다 체력적인 부분에서 좀 더 앞서지 않았나 싶다. 일단 웅이가 기술적인 부분이나 경기 풀어나가는 부분이 나보다 월등히 좋은 선수였다. 그래서 기회가 올 거란 생각은 별로 안 했었다. 그런데 의외로 박성화 감독님이 출전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셨고 나도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 세계대회에서는 많이 아쉬웠다. 멤버도 좋았기 때문에 8강 이상의 성적이 가능했는데?
너무 많은 경기를 했던 게 화근이었던 것 같다. 프로에서 뛰는 선수들은 리그에 이어 계속 경기를 하다 보니 몸이나 마음이 지쳐있었다. 하지만 잘해보자는 생각에 다시 마음을 먹으며 정신력을 가다듬었고 16강 전을 준비했다. 일본에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이길 거라 생각했고 실제로 경기도 좋았다. 마지막에 그렇게 골을 먹은 건 지금도 분하고...
우리끼리도 8강까지는 갈 거라 믿었다. 대진표대로라면 8강에서 브라질을 만났기 때문에 일단 거기까지 올라간 뒤 브라질이랑 최선을 다해 붙어보자고 얘기했었다. 지금 돌아보면 당시 느끼던 것 이상으로 그때 멤버가 좋았던 것 같다. 역대 최고란 말이 무색하지 않은 구성이었다. K리그에서 뛰는 어린 선수 중에 잘한다는 선수는 다 왔었으니까.
->2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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