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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이라는 이름으로 만개한 수원의 젊은 꽃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남들보다 더 잘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하는 것이 장점이라 생각한다.”
- 상무 제대 후 프로로 무사히 오리라 생각했지만 수원으로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수원에는 어떤 과정으로 입단하게 됐나?
나 자신도 수원에 올 거란 생각을 못했다. 사실 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수원이 싫어서가 아니라 좋은 선수가 많은 최고의 구단에서 뛸 자신이 없어서였다. 처음 내게 관심을 보여주신 분은 김순기 스카우터 선생님이셨다. 그 분께서 나를 유심히 보시고 팀에 추천하셨다고 알고 있다.
처음 수원에서 전화가 왔을 때는 “못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었다. 그러자 김순기 선생님께서 “직접 만나자”고 하셨고 이후 몇 차례 더 만나면서 고민을 하게 됐다. 결국은 마음을 먹게 됐는데 김순기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이 결정적으로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너 하기에 따라 달렸다. 열심히만 하면 수원 입단이 너한테는 엄청난 기회가 될 거다”라는 말이셨는데 그 말을 들은 뒤 “그래, 어디를 가든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럴 거면 수원에서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을 갖게 됐다.
- 수원 입단 당시에도 큰 관심은 받지 못했다. 김남일, 송종국, 안효연 등 높은 명성의 선배들이 입단한 영향도 부인할 수 없지만, 사실 조원희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내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게 더 좋았다. 부담이라는 귀찮은 존재가 없으니까. 오히려 그게 자극이 돼 열심히 해서 관심을 모아보자는 생각도 갖게 됐다.
고맙게도 처음부터 기회가 왔던 것 같다. A3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고 이후 조금씩 내 자리를 잡아가며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처음 경기에 나섰을 땐 감독님이 원하시는 걸 하자는 생각 뿐이었다. 그랬던 게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처음 수원에 왔었을 때는 소속팀 형들도 나를 잘 몰랐다. (곽)희주 형, (김)두현이 형, (최)성현이 형, (전)재운이 형, 동현이 정도가 친했다. 지금은 그나마도 다 떠나고 동현이, 희주 형, 성현이 형만 남았다. 그 세 명과는 항상 같이 다닌다.
- 시즌 초반 3개의 트로피를 쓸었을 만큼 수원의 출발은 좋았다. 하지만 정규시즌에서 실패하며 절반의 성공에 그치고 말았는데, 본인이 생각하는 이유는 뭐라고 보나?
컵 대회 우승 때까지만 해도 날아가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아무튼 최고였다. 나는 당연히 우리가 전관왕을 할 줄 알았다. 그 정도로 팀이 상승세였고 분위기가 좋았다. 그런데 부상자가 생기고 많은 경기로 인해 피로가 누적되니까 팀이 가라 앉기 시작했다.
팀의 전반적인 사이클이란 게 한번 안되기 시작하니까 계속 안됐다. 잘하던 팀도 삐끗하면 이렇게 가라 앉는다는 걸 처음 경험하게 됐다. 원인을 알지만 다쳐 있는 선수들을 데려올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매 경기 이겨야 하는 부담감을 안고 있으니 부상 선수들의 자리에 누구를 파격적으로 실험할 수도 없었다. 그런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끝도 없는 추락이 시작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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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시간이라도 계속 출장할 수 있게 해 준 차범근 감독의 배려도 올 시즌 조원희가 부쩍 성장하게 된 요인이라고 보는데?
그렇다. 실수를 많이 해서 다음 경기에는 못 뛸 거 같았는데도 항상 뛰게 해주셨다. 그래서 5분이 됐든, 10분이 됐든 뛰기만 하면 감독님이 원하는 대로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나는 내 스타일을 고수하기 보다는 항상 감독님께 맞추려고 노력하는 스타일이다.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고... 차감독님은 강한 압박을 추구하시니까 수비 시 프레싱에 신경을 더 많이 쓰고 역습 시에는 공간으로 들어가 빠른 연결을 해야 한다.
- 개인적으로 올 시즌 조원희 선수가 뛴 경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후기리그 성남전이다. 아드보카트 감독도 관전을 한 경기였는데 그 때의 강렬한 인상이 이란전 출장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그 경기가 나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줬다면 나로선 기분 좋은 일이다. 그때는 한참 몸이 좋았다. 이왕 대표팀에 선발됐고 감독님이 오신다는 얘기도 들었으니 잘해야 한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러면 안 된다 평소와 다름 없는 플레이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결국 젊은 선수들은 그렇게 하게 된다.(웃음) 그런데 경기 내용은 좋았지만 내 실수로 팀이 지고 말았다. 내 입장에서는 가장 안타까운 경기다.
- 이란전을 다녀온 뒤로 플레이가 많이 달라졌다는 얘기가 나온다. 기술적인 부분에서 훨씬 자신감을 갖게 된 것 같은데?
사실 어렸을 때 공격수로 뛰었다. 그때 써먹은 기술들이 지금 나오는 것이다. 내가 인지하는 부분은 아닌데 최근엔 나도 모르게 드리블이나 페인팅을 자신 있게 구사한다.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나름대로 자신 있다. 지금은 다들 힘 있고 강한 이미지로만 보시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겠지만 원래는 기교 있는 스타일에 가깝다.
- 자신의 가장 큰 경쟁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남들보다 더 잘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하는 것이 장점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부상을 당했을 때는 다소 여유를 가졌으면 한다. 이란전 때 부상을 당한 뒤 재활에 시간이 필요했는데 다소 조급해 보였다.
어느 선수나 마찬가지겠지만 부상을 당하면 일단 몸이 근질근질 해 참을 수가 없다. 제일 중요한 건 당시에 팀이 어려웠기 때문에 어서 빨리 팀에 보탬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최대한 빨리 복귀하고 싶어 조급하게 행동했는데 이후 감독님과 팀원들이 완전한 몸 상태로 돌아오는 데만 집중하라고 한 뒤에는 여유를 갖고 재활을 했다. 앞으로는 부상 중에는 완전히 몸이 낫는 것만 생각하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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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컵 우승과 월드컵 출전을 향한 쉼 없는 질주
“소년의 꿈이라고 할까?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94년 월드컵을 봤는데 그때부터 월드컵은 내게 동경의 대상이자 환상의 무대였다. 스페인 전에서 서정원 선생님이 골을 넣고 좋아하시던 모습을 보고 받은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가 한참 축구를 좋아하게 되는 단계였는데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 나도 꼭 나가고 싶다’는 다짐을 가슴에 품었었다.”
- 넉살이 좋은 편이가? 훈련 때 보면 열살 차 이상 나는 선배들과도 스스럼 없는 것 같다.
그런 편이다. 형들한테 장난도 많이 친다. 우리 팀에서 가장 고참이 (박)건하 형인데 이제는 나 없으면 잠이 안 온다고 할 정도다.(웃음) 때론 형들이 심하지 않냐며 걱정 할 정도다. 우리 팀의 어린 선수 중에 건하 형의 별명(찰리 박)을 부를 수 있는 선수는 나 밖에 없는 것 같다. 군대를 일찍 갔다 와서인지 눈치가 빠르고 윗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조절한다.
-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고 알고 있다.
항상 열심히 기도하고 종교생활을 하려고 노력한다. 주일에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종교 생활을 열성적으로 하게 된 건 상무에서 유동표 목사님을 만나고 나서부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지만 세계청소년대회에 갔다 온 뒤 힘든 시기가 있었다. 인대가 끊어져서 수술을 했는데, 팔까지 부러지게 됐다. 힘든 시기였는데 목사님을 따라 교회에 가서 좋은 말씀을 많이 듣게 됐고 이후 1년 동안 빠지지 않고 새벽 기도에 나갔다. 그때부터 신앙심을 갖게 됐다.
- 조원희의 트레이드 마크라면 몇 년 째 고수하고 있는 짧은 헤어스타일이다. 이제 제대도 했는데 기를 생각은 없나?
머리카락을 기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앞으로도 계속 지금처럼 짧게 자르려고 한다. 3-4년 전만 해도 머리카락을 많이 길렀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후에 머리카락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운동하는 데 방해 되서 깎는 게 아니라 관심이 없다 보니까 지금 상태를 고수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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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에서 함께 주목받고 있는 이호와 함께 ⓒ스포탈코리아 서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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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감독이 부임한 이후 가진 첫 대표팀 경기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월드컵에 참가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한 것 같은데?
아니다. 아직 결정 난 건 아무것도 없다. 내년 초에 있을 진지훈련에도 갈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월드컵에 가까워졌다는 생각보다는 매번 주어지는 기회를 차근차근 살리고 싶다. 도약할 수 있는 단계에서 매번 부상이 나를 괴롭혔는데 이란전이 끝나고도 부상이 왔었다. 앞으로 부상당하지 않게 조심하고 기회들을 잘 살려서 월드컵에 꼭 나가고 싶다.
- 축구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월드컵이지만 유달리 애착이 큰 거 같다.
소년의 꿈이라고 할까?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94년 월드컵을 봤는데 그때부터 월드컵은 내게 동경의 대상이자 환상의 무대였다. 스페인 전에서 서정원 선생님이 골을 넣고 좋아하시던 모습을 보고 받은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가 한참 축구를 좋아하게 되는 단계였는데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 나도 꼭 나가고 싶다’는 다짐을 가슴에 품었었다.
이후에 98년 월드컵 때는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던 시절이니까 그 경기를 보면서 세계 무대에서 뛰는 강한 선수들과 붙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특히 그땐 공격수다 보니 골도 넣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 어렸을 때는 공격수, 예전에는 중앙 미드필더, 지금은 측면 미드필더를 보는데 지금 보고 있는 포지션의 매력은 무엇인 거 같나?
각 포지션 별로 다 매력이 있는 거 같은데... 지금 뛰고 있는 측면은 많이 뛰어야 하는 위치다. 유럽 축구를 보면 사이드에서 빠르게 나와서 올리는 크로스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른다. 그런 경기력을 펼쳐보여서 관중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게 매력인 것 같다.
예전에 측면은 못하는 선수들이 본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인식도 그렇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위치가 측면이다. 측면이 살아야 경기가 산다. 내가 뛰어서가 아니라 이제는 정말 측면이 제일 중요한 위치가 된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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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우 왼발을 고루 쓰는 걸로 안다. 그래서 양쪽 측면을 다 볼 수 있는 것 같은데, 어느 발이 더 편한가?
왼쪽에 서면 왼발로는 주로 크로스를 올리고 오른발로는 슈팅을 때린다. 왼발잡이에 가깝지만 오른발도 많이 써왔다. 아무래도 슈팅은 오른발이 더 편한 것 같다.(편집자 주-이란전 골은 오른발 슛이었다)
- 군 문제도 해결한 만큼 해외진출도 유리할 것 같은데?
당장은 힘들겠지만 좋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유럽에 꼭 가고 싶다. 유럽 축구의 열기를 내 몸으로 느끼고 높은 수준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워보고 싶다. 어느 리그에서 뛰든 상관 없다.
꼭 가고 싶은 팀은 PSV 아인트호벤이다. 세 분의 선배님들이 거쳐가시며 큰 발자취를 남기셨고 팀 스타일도 나와 맞는 것 같다. 무엇보다 그 팀의 유니폼이 끌린다. 너무 단순한 이유라고 하겠지만 사실이다. 아인트호벤에 입단하는 것은 내 궁극적인 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수원을 정상에 올려놓은 뒤 유럽으로 가고 싶다.
- 당장 있을 평가전과 한달 뒤의 FA컵, 또 월드컵이라는 먼 목표가 있는데, 어떻게 치를 것인가?
지금 내 목표는 두 가지다. 수원에서 잘하는 것과 대표팀에서도 잘 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정말 중요한 기회를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기회인 FA컵에서 우승해 수원을 AFC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하는 게 첫번째 목표다. 대표팀에서의 목표는 스웨덴과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이어지는 2경기에서 나와 감독님의 기준에 근접하는 플레이를 펼치는 것이다. 대표팀에서 뛰는 수원에서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내 궁극적 목표 중 하나인 월드컵 진출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
- 긴 인터뷰에 감사한다. 앞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선수가 되길 빌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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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원희, 곽희주 두 선수 정말 수원경기 볼때마다 기량이 향상되는 두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조원희 선수 올 해 정말 알차게 보낸듯...
정말 축구밖에 모르는거 같네요. 무리하게 빅리그에 욕심 부리지도 않고, 좋은 감독 있는 유럽팀에 가서 좀더 성장하길 기원합니다.
왜난 자꾸 김남진처럼 보이지
전 그 웃찾사에 나오는 김하늘- _-
솔직히 아인트호벤 유니폼 멋있다!!
조원희의 능력은 앞으로 여러가지로 도움이 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