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되면 사람들은 기억 속에서 바래져 가는 먼 옛날의 고향 추억이나 당장 치러야 하는 성묘와 차례 등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남들과 다른 추석날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몇 달 후 아이 낳으러 친정에 내려오면 신세지겠다는 속셈이긴 하지만, 서울의 둘째 딸 내외의 배려로, 2000년 9월 추석 전날 오후 부산 다대포항에서 출발하는 풍악호로 생전 처음으로 가보게 되는 북녘 땅의 여행길에 올랐다. 풍악호는 금강호와 봉래호에 이어 현대해상이 금강산여행에 투입한 세 번째 크루즈선이다. 외국 선사로부터 일정 기간 빌려서 이름만 바꾸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내자와 부산 다대포 임시 국제여객 부두에 도착하니 배의 입구에서는 낮선 남녀 외국인 승무원들이 도열하여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트윈 침대에다 TV와 냉장고 그리고 응접 세트에 과일 바구니 등이 있는 객실(주니어 스위트)까지 필리핀인 승무원이 안내를 하여 주었다. 객실 내부를 둘러보니 호텔 같아서 조금은 들뜬 기분이 되었다.
얼마 후 선내 방송에 따라 강당으로 가보니 비상시 대처 요령과 풍악호의 홍보 비디오 등을 보여주었다. 몇 번의 일본 여행에서 타본 배들보다 훨씬 규모와 시설이 좋다는 생각을 하였다. 승선 시 적어낸 코스별로 조를 구성하였다. 상팔담, 만물상 그리고 해금강의 세 코스가 있는데 이틀 동안 그 중 두 곳을 조별로 선택하여 보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상팔담과 만물상코스를 택하였다. 각 코스별로 20명 내외의 승객이 타는 버스 15대 가량이 배정되어 각 버스마다 현대해상의 인솔자가 동승한다고 하였다.
어두워 질 무렵 시작된 저녁 식사는 한식 뷔페로, 옆자리의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어 보니 부산 사람들은 300여 명의 승객 중에 반 정도이고 나머지는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경인지역에서 온 사람들은 동해항까지의 불편한 교통편이 원인인 사람도 있었고 금강호나 봉래호의 표를 예약할 수 없어서 부산까지 왔다는 사람도 있었으며, 충청도, 전라도, 경상북도 등지에서 온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같은 규모의 선실인데도 내고 온 요금이 관광회사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저녁 후 캄캄한 바다 멀리 보이는 아련한 육지의 불빛과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 불빛을 관망하다가 쇼를 한다는 방송에 이끌려 공연장으로 가보았다. 이런 저런 너스레 끝에 북한말 공부를 한다고 한다. 먼저 전구를 북한에서 뭐라 하는지 아느냐부터 시작되었다. 전구는 불이 켜지는 유리알이니 불알이라 하며 형광등은 긴불알, 두줄 형광등은 쌍불알, 두줄 형광등에서 하나가 없는 것은 짝(외)불알, 가로등의 아래위로 길게 설치된 형광등은 선불알 등등. 그 다음엔 샹들리에는 뭐라는지 맞추어 보라는 퀴즈 문제가 나왔다. 답은 전구가 떼를 지어 있다하여 '떼불알'이었다.
다음 날 추석의 일출을 보고자 카메라와 캠코더를 메고 갑판으로 나가니 벌써 동이 트기 시작하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모처럼의 기회를 놓칠 뻔하였다. 서둘러 카메라에 몇 장 담았다. 그리고 켐코더로 일출 장면을 촬영하고 있는데 뒤에서 '큰일납니다'는 소리가 났다. 놀라 돌아보니 승무원이 이곳은 장전항에 가까운 북한 영해이기 때문에 모든 촬영은 금지되어 있으니 모두 선실로 들어가라고 손짓을 한다. 그러고 보니 북한 땅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객실내의 욕실에서 더운물로 기분 내어 샤워를 하고 식당의 창 너머로 북한 땅을 바라보며 아침식사를 하였다. 차례 상을 차려 놓았으니 원하는 사람은 차례를 지내라는 방송을 듣고 구경 삼아 가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줄을 서있었다. 북한의 바다 위에서 북한 땅을 보고 지내는 추석 차례라 감회가 새로웠다.
승무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내려선 북한 땅, 생각보다 크고 깨끗한 부두 시설을 지나 셔틀버스로 500m 거리의 입국 심사장으로 갔다. 처음 마주하게 되는 제복을 입은 북한 사람, 그들은 무표정하긴 하였지만 얼굴이 붉지도 머리에 뿔도 나지 않은 우리와 같은 모습이었다. 한 조 20여 명의 승객을 태운 버스들의 앞뒤로 북한의 안내 및 감시인을 태운 버스를 위시하여 20여 대가 줄을 지었다. 길 양쪽에 2m 정도 높이의 철조망이 쳐진 새로이 포장된 도로를 따라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이사이 일정한 간격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추석 음식을 머리에 이고 산으로 성묘 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와 다를 바 없었다.
버스 속에서 현대해상의 인솔자의 말이 계속되었다. 이동 중의 버스 속에서는 물론 내려서도 북쪽의 사람과 건물을 촬영해서는 안되며 위반 시에는 촬영기기를 압수 당한다고 하였다. 휴지를 버려서도 침을 뱉아도 담배를 피워서도, 안 된다는 말 뿐이었다. 너무 금지사항만 강조하여 인솔자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지 금강산의 네 가지 이름을 설명해 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봄에는 경치 아름답기로 금강석과 같다 하여 금강산(金剛山)이라 하고, 여름에는 불로장생의 신선들이 사는 곳에 견주어 봉래산(蓬萊山)이라 하며,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답다 하여 풍악산(楓嶽山)이라 한다 하였다. 그리고 개골산(皆骨山)은 눈 덮인 산세가 동물의 갈비뼈와 같다 하여 붙여진 겨울 이름이라 하였다.
먼저 도착한 곳은 금강산 관광의 전진 기지인 온정각 휴게소였다. 이곳에는 두 곳의 식당과 기념품 가게, 옥내 휴게실, 야외 휴게소, 기념사진 촬영장 그리고 교예 공연장 등 현대적인 시설이 마치 우리나라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였다. 사용할 수 있는 화폐가 달라라는 것 말고는. 이곳의 시설들은 모두 현대에서 건설하였고 버스의 운전기사들을 포함한 근무자들은 대부분이 조선족들을 현대에서 고용하였다고 한다. 팔고 있는 물품은 모두가 북한산이고 잘 팔리는 품목은 들쭉술과 송화가루였다.
온정리 휴게소를 출발하여 신계사 터를 지나 구룡폭포와 상팔담을 둘러보았다. 도중에 북한 감시원에게 카메라를 압수 당한 사람도 있었으며 나도 켐코더가 자신들을 비추었다고 내용을 확인 당하기도 하였다. 다시 온정리 휴게소로 돌아와 늦은 점심식사 후 버스로 10분 거리의 현대에서 건설한 온정리온천에서 지친 몸의 피로를 풀었다.
부슬비 오는 다음날은 만물상 코스였다. 창 너머로 보이는 하한계(곡)와 관음연봉의 풍광이 눈길을 끌었다. 만상정에 내려 절부암과 천선대를 올라보고 돌아와 온정리의 금강산 문화회관에서 평양모란봉교예단의 공연을 보았다. 어쩌면 저렇게 기계같이 빈틈없이 할 수 있을까 하는 측은한 마음과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 공연장도 현대에서 얼마 전에 준공한 돔형 건물이었다. 공연이 끝나 출연자가 모두 나와 예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인사를 하자 모두들 일어서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이틀 동안 둘러 본 금강산에는 그림으로만 보던 구룡폭포도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상팔담도 노래로만 듣던 일만이천봉도 변함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남도 북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남은 샹들리에라 하고, 우스개 말이긴 하지만 북은 떼불알이라 하는 말에서와 같이 양쪽 사이의 패어진 골의 깊이를 실감한 여행이었다. 추석이 되면 떠올리게 되는 '떼불알'의 기억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첫댓글 떼불알과 샹들리에의 차이를 좁혀서
새로운 신조어가 탄생되기를 바래봅니다
하리센새 이바구는 재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