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장흥위씨(長興魏氏) 반계공파 반계종가
장흥 장흥위씨(長興魏氏) 반계공파 반계종가
한 집안(장흥위씨 반계공파) 12대 연속 문집 남겨
“밭 갈고 글 읽어라”유훈
장천재 학당 열고 가학교육
공동경작 향약 ‘사강회’조직
위씨 보물 방촌유물관 전시
종가 안채
전라도 5대 명산으로 이름난 전남 장흥 천관산(天冠山) 동쪽에는 옛 장흥의 중심 텃골로서 장흥위씨 집성촌인 방촌리가 있다. 선사시대 유적인 고인돌 94기(전라남도 기념물 제134호, 장흥 방촌리 지석묘군)가 군집해 있고, 외침으로부터 마을을 방비하기 위해 천관산 중턱부터 석성과 토성으로 둘러친 회주고성의 성터가 남아있다. 신라조, 고려조에는 장흥(옛 이름 회주)을 통치하는 행정 치소가 있었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 명승 지정 예고된 천관산 자락 경치 좋은 방촌리 호동마을에서 주경야독하며 대대로 가학을 이어 12대가 문집을 남긴 장흥위씨 반계공파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알아본다.
◇고려 시중 위창주 중시조
장흥위씨는 신라 선덕여왕 때 당나라에서 파견돼 귀화한 8학사 중 아찬·상서시중을 지내고 회주군에 봉해진 위경을 시조로 모시고, 고려조에서 대각간시중을 지낸 위창주를 중시조로 세계를 잇고 있다. 중시조 5세손 위계정(1038~1107)은 청렴하고 문장이 뛰어난 문신으로 고려사에 기록되고 벼슬은 문하시중에 올라 예종 묘정에 배향됐다. 15세손 위덕룡의 네 아들에 의해 상계분파가 이뤄지고, 둘째 위자량에 의해 관산파가 이어진다.
◇선조 유훈 따라 주경야독
21세 위덕후(1556~1615)는 재주가 영민하기로 알려졌으며 제용관판관을 지내고 안항공파를 열었다. 그는 유훈으로 “농사에 힘쓸 것, 제사를 잘 받들 것, 형제간에 화목하게 지낼 것, 자손을 잘 가르칠 것, 노복을 어루만져 감싸줄 것, 관리를 공경할 것” 등 여섯 가지를 남겼다. 그의 셋째 아들 위정명(1589~1640)이 가훈을 계승해‘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글을 읽을 것,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할 것’이라는 훈계를 유고에 남겼다. 관산 방촌의 장흥위씨 후손들은 이 같은 선조의 유지에 따라 장천재 등에서 가학 교육에 힘썼다. 존재 위백규(1727~1798)와 같은 학자도 탄생시켰다. 장흥 관산 방촌의 향촌규약을 실천하는 ‘사강회’를 조직해 공동경작을 비롯, 향약을 통해 아름다운 향촌생활과 문화를 만들었다.
◇유례 찾기 힘든 열두인물 문집
반계종가는 가문의 학통을 계승해 12세를 이어 대대로 유고 문집을 남긴 문장가 집안이다. 위관식이 편집한 ‘위씨세고’에는 종가조인 위정명의 반계공 유고부터 2세 위동현(1628~1677, 호는 보헌), 3세 위세호(1656~1688, 취백당), 4세 위명득(1685~1745, 영성), 5세 위백양(1718~1752, 유사), 6세 위도순(1748~1816, 원취당), 7세 위영우(1786~1857, 소암), 8세 위하조(1809~1881, 호산)까지 8명의 유고가 실려 있다. 9세 위관식(1843~1910)의 춘파유고, 10세 위계룡(1870~1948)의 오헌유고, 11세 위질량(1892~1972, 후계)과 12세 위일환(1910~1977, 호곡)의 후계·호곡유고 등 문집을 제작해 보존하고 방촌유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한사람의 일평생을 기록한 일기나 유고가 인물 생존 당대의 정치·경제·사회·민속 등을 알려주는 보물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사례는 다수 존재한다. 그러나 400여년 동안 한집안 혈손이 각 시대마다 일생의 학문과 정신을 담아 기록한 ‘12세유고’는 유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반계종가 유고문집에 대해 학계의 연구와 가치 부여가 필요해 보인다. 종가는 위도순이 터잡은 이래로 8대를 지켜온 호동마을 종택을 잘 보존했고, 2012년 문화재청은 중요민속문화재 제270호 ‘장흥 오헌고택’으로 지정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출처 : 남도일보(http://www.namdonews.com)
[출처] 장흥 장흥위씨(長興魏氏) 반계공파 반계종가|작성자 풀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