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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이야기 나눔터 스크랩 민중가요에 관하여
젊은미소 추천 0 조회 138 12.03.20 21: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70년대 후반의 대중가요와 민중가요  

1. 대중가요계의 변화
  
  (1) 대마초 파동과 포크의 좌절, 그리고 변질
  
70년대 중반으로 향하면서 더욱 영향력이 강해지던 대중예술의 신세대,  

청년문화세력은 75.11월 대마초 사건으로 그 발전이 꺾이게 된다.

70년대 초 청년문화 붐은 한편으로는 대중문화의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면서,

그것이 여전히 대중문화적 체제순응식 사랑타령과 미국식  자유주의의 흉내내기에 그쳐있는 것에 대해서

대학생과 지식인 사이에는 10월유신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반동화와 그에 대한 대학생,

지식인들의 거센 반대 움직임을 호도하기위해 오히려 조장되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앞에서 미국의 모돈포크의  진보적 사회작 측면이 상당히 약화되거나 제거된채 이식된 포크는 그런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러한 청년문화가 미국식 히피이즘을 모방한 대마초흡연이나  스트리킹으로 드러났다는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유신체제는 장발,미니스커트, 대마초단속등을 통해 이러한 미국식 자유주의의 흉내조차 금지하였다.  

대마초사건으로 이장희, 이종용,  윤형주, 김세환, 신중현, 김추자등 인기 음악인들이 구속, 활동정지를 당했다.

김민기의 작품은 72년에 이미 음반출고가 중지되어  있었고, 이 시기에 이르러 <아침이슬>은  공식적으로 금지곡이 되었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75.4월 긴급조치4호, 민청학련 사건, 5월 긴급조치 9호, 유신헌법 찬반투표실시 등의 숨막히는상황이었다.

이전과 같은 포크의 발전은 중단되었고 포크는 분위기로나마  가지고 있었던 반문화적인 요소를 청산하고  기성가요계의 중심부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한번쯤>,<왜불러>등에서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던 송창식은 뽕짝과의 결합을 시도하면서 가요계의 중심부로 진입했고,

김정호, 정종숙도 기성가요계로 진입하였다.

더 이상 김민기의 노래를 부를 수 없었던 양희은은  <내 꿈을 펼처라>,<한 사람>등 이주원의 작품을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70년대 초반의 싱싱한 분위기는 많이 거세되면서, 포크 역시 대중화되어 쇼 프로그램에서 통키타가 아닌 밴드의 반주에 맞추어 불리워졌고

기성가요와 결합한 속화된  포크, 포크록이 생산되었다.
  김만수<푸른  시절>, 둘 다섯<긴머리 소녀>,<밤배>, 전영 <어디쯤 가고 있을까>, 전영록<애심>, 
버들피리<눈이 큰 아이>등등의

노래는 70년대 초반의 포크보다 참신함이나 음악적 세련됨에 있어서나 별 발전이 없고  오히려  퇴보하기도 한다.

송창식<토함산>,<그대 있음에>, 이정선<섬소년>,<뭉게구름>, 정태춘<시인의 마을>,<촛불>, 조동진 <행복한  사람>,<작은  배>등

몇몇이 그나마 포크적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2) 트로트의 부활과 무주공산 가요계
  
가요계는 그야말로 스타가 없이 무주공산이었다.

남진,나훈아의 열기도 이제시들어졌고, 최병걸, 이수미, 권태수, 김훈, 최헌, 이은하, 혜은이, 김태곤, 송대관

등등의 가수들이 별 참신한 경향없이 인기를 유지해가고 있었다.

작품의 경향은 뽕짝, 포크, 스텐다드등이 적당히 섞인 것 같은 그러한 노래들이었다.

76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필두로 그동안 포크의 열기로 주춤했던 트로트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트로트적인 노래를 록그룹사운드식으로  연주하는 트로트고고가 유행하였고,

전자악기의 사용이 늘어갔다. 최헌<오동잎>,<앵두>, 김씨네<연안부두>등
  
  (3) 대학가요제와 록의 제 2세대
  
이런 분위기에서  대학가요제란 70년대 포크정도의 참신성도  기대하기 힘든것이었다.
젊은 층이 가요의 주요 수용층으로 떠오르고 있었으며 그들의 취향은 달라지고  있는데,

기성가요계는 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보다 젊은 감수성에 맞는 대중가요를 상업적 이벤트를  통해 생산해내고자 하는 상업적  의도와,

대마초 파동과 정치적 억압으로 구멍뚫린 젊은층의 마음을 대신 충족시켜 줄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정치적 배려가 맞아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작품수준은 초기  포크보다 저열했고 사회적 적극성은 고사하고 초기 포크가 가진 반문화적 분위기도 나타나지 않았다.

새로운 실험보다는 대중적 인기를 고려하여 수상작이 결정되었고, 회가 거듭할수록 '가수등용문' 같은 상업적  경향은 더더욱 강화되었다.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의 그나마 새로운  경향은 '록'이었다. 영사운드, 히식스, 신중현 등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이들 대학생 록그룹들은 상당한 인기를 모으며 청소년 문화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샌드페블즈<나 어떡해>, 활주로<탈춤>,  이명훈<그대로 그?게>, 옥슨80<불놀이야>등. 또한

김창완 3형제의 산울림은 70년대 후반까지의 록 1세대의 부드러운 분위기를 탈피하고 이장희 등의  포크록과도 구별을 짖는

감각적파격과 지적인 이미지를 몰고 왔다.  <아니벌써>,<내마음에 주단을 깔고>,<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꺼야>,<빨간 풍선>등.
그러나 아직 록은 70년대 포크가 해냈던 정도의 새로운 인식이나 정서를  담아내지는 못하였고,

단지 질감과 양식의  변화로서만 받아들여졌다. 폭발적인 정서의 표출, 강한 리듬과 큰 음량, 전자악기의 금속적 질감의  사이키델릭한 분위기 등 록

고유의 질감과 정서가 돋보일 뿐이었고, 가사의 중요성은 줄어들엇다.

이러한 록의 열풍은 록의 제2세대라고 부를 만하며, 80년대 초반으로이어진다.  

 

  2. 민중가요 문화의 성립
  
  (1) 낭만적 학생운동기의 종말과 새로운 출발
  
75년 긴급조치시대의 시잣과 함께 낭만적 학생운동기는 끝을 맺게 되고, 학생운동은 양적인 축소와 함께 질적인 심화를 동반하게 된다.

즉, 운동권과 비운동권이 분리되게 되고, 운동권은 일반학생 대중과는 다른 인식, 다른 생활,문화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반성하고,

바꾸고자 노력하며 대학 생활4년동안 일생을 거는 결단을 해야 했다.  

이들은 대중가요에 대해서도 비판적관점을 가지면서 대중가요가 가지는 체제순응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자신의  노래문화를 반성하였으며, 새로운 노래문화를 원하였다.

민중가요는 바로 요 지점, 즉 학생운동권의 노래문화로 시작하였다. 대중가요에  대한비판 내지는 극복의 전망을 가지고,

대중가요와는 구별되는 향유층, 별도의 존재 방식을 가진 독자적인 노래문화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는 자생적인 노래문화였으며 이러한 민중가요를 주도하는 집단, 즉 노래운동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노래운동, 음악운동이 본격화되는 것은 84년경에 이르러서이다. 일제시대와 마찬가지로 민중가요는 음악운동에 비해 선행하며, 

대중 스스로 만들어 놓은  민중가요문화에 의해 노래운동의 성립과 발전이 추동되어 나아가는 식이었다)

김민기는 노래에 관한한 한 개인일 따름이었을 뿐이고, 노래운동집단의 산실인 서울대 메아리와 이대 한소리는 아직 취미 써클차원의 모임이었다.

따라서 이들 대중가요 문화는 완전히 새로운 문화가 아니라, 기존의 노래를 대중 스스로 선택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구전하는 방식으로형성되었다.
  
  (2) 데모노래와 복음성가류
  
운동권의 노래로서 가장  먼저 선택된 것은 60년대  이후 불려왔던 소위 데모노래와 기타 몇몇의  노래들이었다. <해방가>, <탄아탄아>, <바람이 분다>,<스텐카라친>,<러시아농민가> 등에 75년 이후 <훌라송>,<정의가>등이 덧붙여진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훌라훌라 /  같이 죽고 같이 산다 훌라훌라
무릎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다 / 우리들을 정의파다 훌라훌라

                         <훌라송>

(미국남북전쟁당시 남군의 노래의 선율에 가사를 붙임)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교회운동이 발달하고, 교회가 사회운동에서 가지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진보적 교회운동에서 기존의 복음성가,외국의 반전운동,인권운동 노래들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그것이 다시 학생운동권으로 유입된다.

(노래책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내일을 위한 노래}도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출간).

<오, 자유>,<흔들리지 않게>,<우리의 믿음  치솟아>,<보람된 생활>,<이 시계절반은 나>,<가라 모세>,<춤의 왕>,<미칠 것 같은 이 세상>등등.
  
  (3) 김민기에 대한 재해석과 그의 변화
  
비로소 김민기는 대중가요가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김민기의 노래가 가지고 있던 특유의 장점은 바로 그것이 곧 민중가요의 중요한 자산이 될 근거가 되었다.

대중가요로서는 더이상 들을 수 없었던 그 노래들을 이제 민중가요로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회성이 강한 노래들, 미래로의 지향과적극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노래들이 더욱 부각되었다.

또한 노래에 구체적인 사회적 의미가 부여되고 재해석 되었다.

<친구>,<아침이슬>등. 학생운동하는 사람들의 고민과 결단 등으로 해석되었다.

김민기의 작품의 경향은 74년군입대와 제대, 야학의 체험, 유신말기 상황을 거치면서 변화한다.

또한 작품의 수가 거의 줄어들게 된다.

지식인적 자의식이 강하게 표출되는 작품이 거의 생산되지 않고  민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소외된 계층, 노동자, 농민에  대한

구체적 관심이 높아지고 그 발전된 형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또 미래에 대한 밝은 지향을  담은 노래가 늘어나고 국악풍의 실험도 늘어난다.

<식구생각>,<소곰땀  흘리흘리>,<상록수>,<천리길>,<밤뱃놀이>,<늙은 군인의 노래>.
그의 민중지향성의 최고 수준인 노래무용극 <공장의 불빛>(78)은 동일 방직사건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민족극운동의 맥락에 있다. 마당극 운동에서 보자면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지만 민중가요에 있어서는 거의 파격적인 것이었다.

거의 모든 대사를 노래로 처리하는 록 뮤지컬과같은 작품이었다.

노동자의 삶과 투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며 이에 따른 가사와 악곡의 사용도 파격적이고 다양하다.

그러나 역시 투쟁장면의 형상화보다는 개인적인 장면에 많은 할애가 되어있고 형상화도 잘 되어있다.
  
  (4) 김영동과 다른 노래들
  
60년대 그 맹아적 모습을  보이기 시작해서 70년대에 본격적으로 성립된 민족극운동은,

공연예술분야에서는 최초의 움직임이었을 뿐 아니라 연극이라는쟝르의 종합예술적 성격,

악가무가 결합된 전통예술을 적극적으로 이어받고있다는 특성 등으로 비단 연극뿐 아니라

춤과 음악까지를 결합한 종합적인 연행예술운동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따라서 노래분야에서도 적지 않은 작품적 성과를 남긴다.

이종구, 김영동, 김구한 등은 당시 연극반이었던 김민기와 함께 연행예술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종구의 <마라데스>( 소리굿아구  삽입음악),<빈산>(김지하 시), 김영동의 <누나의 얼굴.(윤동주 시),개구리 소리>(이오덕 시)등등의 작품이 있다.   

그 밖에 국내 음악인들의 사회성 있는 내용의 노래들이 민중가요로 흡수된다.

 <진달래>(이영도 작시, 한태근 작곡),<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작시, 변규백 작곡),<녹두꽃>(김지하 작시, 조념  작곡)등과

한대수, 양병집, 이연실 등의 사랑노래가 아닌  포크송들인 <행복의  나라로>,<서울하늘>,<타박네>,<한중가>등과

출처를 알 수 없는 <기러기>, 동요 <우리의 소원>, 60년대대중가요 <아다다>,  민요<아리랑>,<진주난봉가>등도 민중가요의 목록에  올라있었다.
  
  (5) 민중가요의 다양함과 그 미덕
  
이 시기에 민중가요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에서 우리는 대중들의문화적 저력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대중가요의 획일성과 체제순응성을 거부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노래,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노래를 의미의 변경을 통해서라도 선택, 발전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민중가요는 대중가요에 비해 매우 다양한 내용과 양식을 가지게 된다.  

양식적으로도 동요, 포크,스텐다드에서 찬송가,민요,군가까지에 이른다.

내용으로서도 사람살이의 다양한 모습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들어있다. 

이러한 다양함은 새로운 노래가 만들어지기보다는 기존의 노래 중의 몇몇을 선택함으로써 생긴  현상인면도 있으나

이와 함께 대중가요의 사랑타령에 대한 명확한 거부의 산물이기도하다.

따라서 사랑타령으로의 획일성이 사라지면서 그 체제순응성도 극복된다.
또한 국악과 민요에 대한 의식적인 지향도 눈에 띈다.

기존의 다양한 노래문화를 먹어치워 민중가요로 소화해내는 대중의 소화력

(일제시대 창가와 뽕짝까지 먹어치웠던 것을 생각해 보자)을 통해 기존의 노래양식들은

이러한 전혀 다른 존재방식 속에 들어옴으로써 진보적 시각으로 재해석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광주항쟁과 80년대 초반의 민중가요 
  
1. 80년 봄이라는 시기
  
70년대 후반의 민중가요가 대학의 대다수 대중들에게 확산되고, 민중가요의대중적 기초가 만들어지는 시기이다.

이 과정에서 노래가 정치적·사회적  영향력, 운동성, 즉 집단적 정서를 고양하고  

공동체의식을 강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시기 대학노래써클은 초기 포크송 경향의 취미써클로부터,

80년 봄을 겪으면서 민중가요 일반을 받아들이고 보급하는 운동성을 띤 써클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2. 80년대 초반 민중가요의 발전과 그 경향
  
  (1) 처음부터 민중가요로 만들어진 노래들이 생산
  
기존에 만들어진 노래를 취사선택한  것이 아니라, 대학생 스스로의 손으로 만들어지고 입에서 입으로 돌아다니면서 다듬어지고 취사선택된다.

그 이유는 이미 70년대까지의 민중가요와는 다른, 새로운 노래의 경향을 요구하기 시작했으며,

김민기의 포크와 복음성가류 등 이전까지의 노래로서는 그 요구를 모두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새로 만들어지는 작품들은 80년 이후 당시 학생대중들의 인식, 정서적 흐름에 가장 적확하게 조응하는 것이었다.
  
  (2) 단조 행진곡의 시대
  
이 시기의 행진곡들은 단순히 구호를 반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정서를 강하게 담고 있었다. 

이는 이들 노래를 부르던 학생들이 운동을 단순한 명분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의와 용기는 젊음의 생명 /   승리의 깃발은 높이 솟았다
    외쳐라 젊은이여 호국의 정기 / 민족을 이끌고 지켜온 용사
    삼천만 겨레가 뒤를 잇는다 /   아아 자유를 위하여 피 흘린 이 땅
    승리의 여명이 동터 오른다
                         <정의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깨어나서 외치는 끝없는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임을 위한 행진곡>
  
이 시기에 노래들은 장조에서 단조로 옮아가는 경향을 보인다.

70년대까지<해방가>, <정의가>, <솟아라> 등 행진곡의 대부분은 장조였고,

복음성가류역시 장조의 노래가 주를 이루었다. 

80년 겨울 <전진가>(일명 <가자 가자>,박치음 작사·작곡)가 나와 삽시간에 전국에 퍼지면서 단조행진곡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낮은 어둡고 밤은 길어 /     허위와 기만에 지친 형제들
     가자 가자 이 어둠을 뚫고 /   우리 것 우리가 찾으러
                     <전진가> 80년
  
      어두운 그림자 하늘 가려 /    남 몰래 흐르는 저 비명소리
     (후렴)뜨거운 피 형제들아 /    어서 일어서서 가자 가자 가자
      억압의 발길에 짓밟혀도 /    이대론 못 죽는다 일어서자
               <전진가2> 1,2절  81년
  
단조 행진곡은 80년 봄의 죽음과  패배,  절망의 비장함과 이를 딛고 일어서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81년 강주 연행예술운동패('광대'로부터 '신명'으로 이어지는)들과 황석영, 김종률이 함께 만든 노래극 

 <빛의 결혼식>의 피날레곡으로 백기완의 미발표 시에 김종률이 곡을 붙인 것이다.  

<빛의 결혼식>은 광주항쟁 때 도청에서 전사한 윤상원 열사의  영혼결혼식을 모델로 한 것이다.

     <전진하는 새벽>, <전진하는 동지>, <선봉에 서서>

    쏟아지는 빗발 뚫고 오던 무거운 어깨 /
    말없이 동녁 응시하던 동지의 젖은 눈빛
    이제사 터오니 당신의 깃발로 / 두견으로 외쳐대던 사선의 혈기로
    약속한다 그대를 딛고 전진하는 새벽 /
    어느새 닥친 조국의 아침 그대를 기억하리라
                             <전진하는 새벽> 82년 
  
기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선봉에서>, <광주출정가>, <전진하는 새벽>,  <민족해방가>로  이어지면서

단조행진곡은  우리 민중가요 행진곡의  전형을 이루었다. (80년대 후반 노동가요로 까지 계승됨)

     선봉에선 내 친구여 너의 찬 손 내가슴에 /  끊일 듯 끊이지 않는 너와 나
     우리 지금 헤어져도 새벽에 다시 만나리 / 바람 부는 저 들판에 횃불을 당기자
             <선봉에서> 1절, 84년경
  
     징소리 울렸다 북소리 울렸다 /   메마른 이강산을 적의 피로 물들이자
    가자 가자 가자 혁명의 전사들아 /  가자 가자 가자 피의 전선으로
    죽음이 두려우랴 삶이 두려우랴 /   죽기로 싸운다면 승리하리라
    가자 가자 가자 혁명의 전사들아 /  가자 가자 가자 피의 전선으로
           <민족해방가> 1절, 85년 경
  
  새로 만들어진 노래뿐 아니라 기존 노래나 악곡을 가져오는 경우에도 주로 단조행진곡의 수요에 맞추어진 것이었다.

    <압록강행진곡> 등 독립군가류와 <출정가>
  
    노래 부르세 즐거운 노래 /  이른 아침 안개를 ?고 
    내일 전선 멀리 떠나갈 /  이 밤을 노래부르세
    (후렴) 사랑하는 조국 /   내일은 멀리 산으로 산으로
    이른 아침에 먼 산을 보니 /  낯 익은 붉은 손수건
  
    멀리 떠나세 깨어일어나 /   장백산맥 넘어 만주로
    쓰러진 전우 영혼을 모아 /   이 밤을 노래 부르세

 

<출정가> (러시아 수병의 노래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 81년 경 유행 복음성가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81년 경),
<오월> : 미셀 폴나레프(Mischel Poiareff)의 <Gui a tue' grandmaman?>의 악곡 <새 농민가> : 백창우 작사·작곡의 대중가요

<바램>, 기타 군가(진중가요)의  개사곡류 : <전선을 간다>, <사나이 한목숨>, <전우야 잘 자거라> 등
  
     장미꽃 우거지 아크로 폴리스 /      쇠창살 둘러친 면학의 도서관
     젊은 넋 숨져간 그 때 그자리 /      피 뿌리던 그 날을 벌서 잊었나
     학우여 들리는가 피 맺힌 목소리 /   학우여 보이는가 한 맺힌 눈동자
              <전선을 간다> 개사곡
  
  
  3. 단조 서정가요의 시작
  
 단조의 비장함은 비단 행진곡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느리고 유장한 이른바 서정가요에서도 단조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비로소 이 시기부터 행진곡과 서정가요의 작품경향이 만들어진다.
 <친구2>(81년 경), <타는 목마름으로>(82년 경),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민중의 아버지>, <이 산하에>(문승현 작사,작곡),

<노래2>(김남주 시), <사월 그 가슴으로>, <부활하는 산하>(이성지 작사,작곡), <의연한 산하> 등.
그 외에 드라마주제가 <예성강>도 불렀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  아 이미 떠났다고
     어두운 죽음의 시절 /  꿈도 없이 누웠다가
     이 새벽 안개 속에 /  떠났다고 대답하라
     저 깊은 곳에 영혼의 외침 / 저 험한 곳에 민중의 뼈아픈 고통
     내 작은 이 한몸 역사에 바쳐 / 싸우리라 사랑하리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82년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짤린 하나님 / 우리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당한 하나님 / 그래도 내게는 하나뿐인 민중의 하나님
  하나님 당신은 죽어버렸나 /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있을까
  쓰레기 더미에 묻혀버렸나 가엾은 하나님
              <민중의 아버지> 83년
  
    예성강 푸른 물에 바람이 불면 /  말하라 강물이여 여기 젊은 이 사람들
    말하라 강물이여 그대는 알리라 /
   겨레 위해 쓰러져간 그 때 그 자리 그 사람들
    말하라 금남로여 그대는 알리라 /
    민주 위해 쓰러져간 그 때 그 자리 그 사람들
                     <예성강) 1,3절
  
  
4. 작품경향과 그 의미
  
  (1) 비장함, 희생, 격렬함.
    
80년 봄의 죽음과 패배, 5공화국 초기의 지독한 억압적 분위기와  잇달은 희생을 겪으면서도

민주화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비장함을 표현하고 있으며,상황이 극단적으므로 정서는 매우 격렬하다.

(치덜리는 노여움,가슴이 빠개지도록 사무지는 이 산하, 목 놓아 통곡) - 혁명적 낭만주의 경향을 보임.

이를 통해  광주항쟁에 대한 패배의식이  극복된다.  <오월의 노래>, <무등산가>,

<오월>, <부서지지 않으리>, <광주출전가>로 학살, 죽음,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으로부터 부활하는 광주,

투쟁하며 승리하는 광주의  이미지로 나아간다. <광주출정가>가 만들어진 85년은 홍성담의 판화 <대동세상>이 만들어지는 때이기도 하다.
  
  (2) 양식적 변화의 의미
  
양식적으로 볼 때, 단조 행진곡은 단조 군가(진중군가)의 영향, 단조 서정가요는 단조 스탠다드와 가곡의 영향을 받고 있다.

(물론 단조 진중가요 역시단조 스탠다드의 영향 하에서 만들어졌다) 단조 서정가요는 <동심초>같은 가곡이나 포크의 일정한 영향도 받았다.
포크보다 넓은 계층, 연령층에게 호소력있는 스탠다트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적어도 음악적으로 민중가요는 넓은 계층의 호소력을 지닐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격렬한 절정부, 절절한 비극성이  있고 비극, 슬픔과 눈물이 있으나 뽕짝처럼 과잉되지 않고 나름의 절제를 해낸다.

즉 포크(복음성가류 포함)에서 단조행진곡과 서정가요로의 변화는 작품에서 그리는 인간형이 혼자  담담하게 사색하는

지식인에서 집단적으로  행동하고 격렬하게 고뇌하는 지식인으로 변화한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김민기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5. 노래운동(음악운동)의 시작과 창작곡들
  
  (1) 활 동
  
84년 노래모임  새격의 활동 시작과 부정기간행물  {노래}의 발간으로 대학밖에서 본격적인 노래운동(음악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80년을 계기로 운동성을 획득한 메아리, 한소리, 석화(노래얼) 등 대학노래써클의 첫 졸업생 그룹이었다.

(문승현, 김창남, 김보성, 표신중, 이영미 등).  메아리의 변화는{메아리}라는 악보집의  변화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79년에 펴낸 4집에서까지도 각 노래의 분류 등이 이루어지지 않고 내부 회람용처럼 만들어졌다. 

서문에는 '수많은 갈등 속에서 삶을 영위해야 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예술은 하나의 구원일 수 있습니다.'로 시작하여

현재의  대중예술이 상업주의에  물들어있어서 대학인의 감정과 의식을 투명하게 반영한 노래가 없는 실정에서 이 노래책을 냄으로써

'노래를 향한 지적인 노래를 향한 초석'을 삼고자 한다고 밝힌다.  
  그러나 80년대에 낸 5집에서는 '한 시대의 노래는 어떤 형태로든  그것이 만들어지고 불리우는 시대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역사의 산물이다.

'로시작하여 '역사의 주체인 민중들의 의식과 감정을 투명하게 반영한 노래', '사회의 진실'을 담는 노래를 재향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작품도 1부 데모와 작자 미상의 민중가요류, 2부 <진달래> 등 정식으로 발표되지 않은 음악인들의 노래,

3부 김민기의 노래, 4부 한대수, 양병집, 돌, 나동민, 김의철의 노래, 5부 메아리 창작곡, 6부 복음성가와 영가류 등으로 분류하여 싣고 있다.
이 시기에는 이미 형성된 민중가요문화를 정리, 보급하는 일이 가장 우선되었다. 

84,85년을 경유하면서 연세대, 성균관대 등  많은  대학에 진보적  노래써클이 생겨났고,

보다 다양한 대학 출신들이 노래운동 집단으로 이전해왔으며, 86년경부터는 음악학  졸업생들도 노래운동 집단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잘 알려진 데모노래, 김민기, 복음성가류 등을 비롯하여 잘알려지지 않았던 개인 작품들,

즉 돌, 안혜경, 메아리와  한소리 창작곡,  새롭게만들어 불려지기 시작하는 노래들을 수집, 편곡, 정리하여 공연과 노래테이프를 통해 보급하였다.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노래테이프 2집 <또 다시  들을 빼앗겨>(84년), 5집 <민주주의여  만세>, 6집 <우리가락 좋을시고>(85년),

9집 <그 날이 오면>(86년),11집 <해방의 노래>(87년) 등이 새벽에서 제작한 테이프이며,

그 시기 중요한민중가요 작품을 수록한  비합법노래테이프의 전범의 구실을 하였다.

또한  노래책 {임을 위한 행직곡}(학민사}를 편집하였다. 또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이들 노래와 함께 보급함으로써, 민중가요 작품을 풍부히 하였다.
  그러나 민중가요 작품을  주도하기보다는 자생적인 작품들에 따라가는 셈이었으며, 차차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작품생산력이 고양되었다.

유일한 노래운동 단체인 노래모임 새벽은 86년 즈음까지는 10명 미만의 작은 집단이었다.
대학써클의 경우는 정기공연이 가능한 실정이었지만, 

대학 밖에서는 아직정기공연과 같은  형태의 공식적 공연이 가능하지 않았고 또 그럴만한 역량도 되지 않았다.  
84년 <가지꽃>,<또다시 들을 빼앗겨>,85년 <불꽃>,87년 <신이수일과 심순애>등의 공연 외에도,

재야단체의 집회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등의 공연이 많았다.
  
  (2) 창작품의 경향
  
70년대 메아리와 한소리의  창작품들은 포크가 주종이었으며, 김민기, 한대수 등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작품들이었다.

사랑노래가  아닌 것이 주종을 이루었지만 사랑노래 역시 많았고, 사회에 대한 관심은 당시의 민중가요에 비해서는 작고 소극적이었으며,

내향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민중가요에 대해서는 전폭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특히 행진곡 등 적극적 태도를 가진 작품들)
이 시기 메아리의 한동헌과 문승현의 작품이 주목할 만하다.
한동헌 <그루터기>,  <바람씽씽>, <노래>,  <쐬주>, <비료지기>, <신개발지구에서> 등.
문승현 <기도>,  <영산강>, <여행자>, <바다여 바다여>,  <아버지를 찾아간아이>, <찬비오는 새벽>,

<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 등.그 외  김기수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  김창남 <강>, 정종수  <약수 뜨러 가는 길>,

이영웅 <친구> 등.
문승현의 작품형향은 80년을 경유하면서 변화한다.  

<오월의 노래>, <닭>등 사회현실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품 속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 밖에 박윤우의 <꽃상여 타고>, <맹인부부가수>, 김제섭의 <산하>등이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이들의 창작곡은 노래패들끼리 부르는 레파토리였으며, 전체 민중가요의 중심적 경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들이 만든 노래에는 행진곡은 한 편도 없었고,<타는 목마름으로>와 같은 격력한 감적을 담은 노래도 만들지 못했다.
84년 노래모임 새벽 창립 후 문승현의 <이 산하에>가 드디어 민중가요의 중심에  진입했고,

이는 후배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이성지의 <사월그 가슴으로>, <부활하는 산하> 등 단조 서정가요로 나타난다. 

(86년 경부터는 새로운 경향을 주도하기도 함).  그외 <부서지지 않으리>(김준태 작시,  이미영 작곡), <코카콜라>(곽재구 작시 김제섭 작곡).
그러나 여전히 행진곡은 만들지 않았으며, 행진곡 열풍에 대한 나름의 우려를 가지고 있는 등 그러한 경향과는  완전히 일치할 수 없었다. 

행진곡을 잘 감동적으로 편곡하고 부르지도 못했다.
  이 시기의 공연양식은 몽다쥬식의 노래공연으로 83년 고대 석화(노래얼)의 공연에서부터 시작하여 84년 <또 다시 들을 빼앗겨>이후 대중화 되었다. 

노래발표회식이 아닌 단일한 주제를 가지고 노래, 시와 멘트, 슬라이드, 연극적 장면 등이 몽따쥬식으로 구성됨.

(노래극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88년 이후 집체극의 형태로 발전하기도 하였으나, 연극이라고는 볼 수 없음)  

 

6. 민요운동의 시작과 고민
  
84년 민요연구회  창립으로 민요운동이 본격화된다. 민요운동은 포크를 중심으로 한 노래써클의 발전으로 이루어진 노래운동과는

달리 풍물운동처럼 마당극을 중심으로 한 연행예술운동의 발전과정에서 형성되어, 전통민요 보급에그치지 않고 창작민요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둥당에타령>, <액맥이타령>, <질꼬내기>, <비타령>, <노세소리>, <이어도사나> 등
전통민요와 <진도아리랑>, <아리랑타령> 등 신민요, 그밖에 동요, 구전가요, 독립군가까지 계승하고,<돌아가리라>(신경림 시),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신경림 시), <저  놀부 두손에 떡  들고>(양성우 시, 이상 김용수 작곡), <우리 것이다>(신경림 시, 김석천 작곡),

<비야 비야>(김석천 작사,작곡), <광주천> (박선욱 작시,  이정란작곡) 등의 창작곡을 발표하여 그동안 노래패에서는 적극적이지 못했던

국악과 민요의 진보적·민중가요적 계승을  하고자 한 성과가 크다.
  그러나 대중의 자생적인 민중가요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민요의 적극적 계승은 쉽게 대중화되지  않았으며,

민중가요가 점점 대중화됨에 따라 아이러니칼하게도 민요운동의 세는 점점  약해졌다.  

노래운동에서는 민요운동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계승, 수용하지 못했으며, 일반 대중보다도 더민요적·국악적 감수성이 적은 실정이었다.  

대중성을 위해서 서양음악적, 대중음악적 측면을 받아들이면 노래운동과 다른 독자적인 민요운동의 영역이 없어지는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7. 그 밖의 노래들
  
* 한돌
  김민기의 작품 창작이 뜸해진 대신, 기층민중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포크로담아내는 돌의 작품이 뒤를 이어 생산되었다.  

<갈 수 없는  고향>, <터>,<땅>, <가지꽃>, <소>, <내일이면 간다네>, <못  생긴 얼굴> 등 기층민중,

소외받은 사람들의 삶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한 노래들로  대체로 김민기의 <식구생각>을 연상시키는 동요의 분위기이며,

5음계의 단순  소박함이 특징이다.
  
* 김의철  
<군중의 함성>, <이 땅의 축복 위하여>, <불행아> 등 70년대 말부터
  
* 안혜경 
70년대 <민주>, <허재비>, <황혼>, <까치길>, 80년대 <침묵의 봄>, <작업장타령> 
  
* 박용범(박치음) 
<전진가> 외에 <산처일기>, <땅의 사람들> 
  
* 그 외 
<이 세상 사는 동안>, <작업장>, <서울길>, 구전가요 <해야 솟아라>, <고아>, 대중가요 <에레나로 불리운 순희> 등  

 

  80년대 중반의 변화와 기타의 노래들
  
1. 84년과 85년이라는 시기
    - '시의 시대'에서 '소설의 시대'로
  
단조 행진곡을 중심으로  단조스탠다드풍의 서정가요가 보족적 위치를 차지한 80년대 초 민중가요의  작품 경향은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민중가요의 변화를 보이는 이 시기는 비단  민중가요뿐  아니라 민족극, 민족문학 등 진보적 예술운동 진영의 여러 쟝르에서

동시적으로 작품 경향의 변화를 보였던 시기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1) 84년과 85년
  
84년 이른바 유화국면,  자율화국면의 시작으로, 80년 패배의 충격으로부터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민운동이 일정한 세력의  회복을 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각 이념써클의 조직력 회복으로 운동권의 수가 증가하며 시위의 회수와 강도가 높아진다거나,

학도호국단에  학생운동이 침투한다거나  대학축제를  대동놀이 등 연행예술운동의  성과로 채운다거나 등등)  
제 5공화국 정권의 일보후퇴가 이루어짐으로써 제적생의 복교와 총학생회의 부활, 대학  내의  대중집회 허용,

상주 기관원 철수(과연 실지로 얼마나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등이 이루어지고, 이른바 재야단체라고 불리는 민민운동단체 발족하게 된다.

(83년 가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발족(의장 김근태), 84년 4월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발족을 시발로, 84년에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족미술협의회], [민주언론운동협의회], [한국출판운동협의회], [민주교육운동협의회] 등등 수많은 단체들이  만들어짐.

85년 3월 이러한 민민운동단체들이 협의체적 연합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발족)이 시기에 단조행진곡,

마당극, 시 등 80년대 초반의 민족예술의 성과가 최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이들 작품들은 격정적이며 주장이 단순하고 뚜렷하다.
주장이 뚜렷하다는 것은 타도 대상이 분명하며 이에 대한  타도 의지가 강하며, 이 이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생각을 할여유가 없었으며 할 필요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타도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여지가 없는 당위였다.  
<전진가>:음악적으로 2마디가  기본이며 8마디에서  모든 노래가 끝난다. 

가사도 '가자' '나가자' '단결하세'식으로 단순한 의미가 기본을 이루는 노래도 많다.
그러나 85년 하반기부터 정부측의 탄압이 강화됨에 따라 다시 제적생, 구속자 늘어나고,

84년까지 이루어낸 한 단계의 발전을 딛고 새로운 단계의 발전이 요구되고 있었으나 그 방향은 불투명했고,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단계의방향을 모색하는 일종의 과도기의 모습이었다. 따라서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와 정서를 갖게 된다.  
가자, 나가자 식의 단순한 주장이 더 이상 호소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고, 열정을 가라앉히고 객관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태도가 싹트며 이를 바탕으로 한 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논리를 요구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앞으로의 운동방향을 둘러싸고 비합법 문건들을 통한 격렬한 논리투쟁, 사상투쟁이  벌러지는 것도 이 때이다. 
(학생운동의 각 패밀리가 완성, 정돈되는 것은 83,84년 즈음이며, 이 시기에초보적인 정파적 움직임으로 발전하기 시작함)
진달래, 오월, 붉은 꽃잎 등의 시어들만으로도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고

감동스러웠던 시의 시대가 가고 소설, 특히 장편소설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 시기에 선 굵은 집단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던 마당극에 대한 비판이 시작된다.
  
  
  2. 민중가요의 작품 경향 변화
  
  (1) 행진곡 중심에서 서정가요 중심으로
  
대중의 정서가 이렇게 변화하므로  단순하고 선 굵은 정서의 행진곡보다는보다

개인적이고 복잡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서정가요를 더 요구하게 된다. 

물론 행진곡은 계속 만들어졌으나 인기를 주도하지는 못한다.
<이 산하에>는 빠르게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85년에 들어서면서 서서히큰 인기를 얻었다. 

이  뒤를 이어 <부활하는 산하>(이성지 작사,작곡),<의연한 산하>(작자 미상), <노래 2>(김남주 시, 김경주 작곡) 등

서정가요 계열의 긴 노래들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이러한 서정가요의 인기는 대학 노래팀들이 84,85년간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데에 그 한 원인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들은 공연을 통한 서정가요의 집중적인 보급을 이루어낸다.
  
  (2) 행진곡의 길이가 길어짐
  
    이 시기는 말이 많아지는 시기, 논리가 복잡해지는 시기로 <전진하는 오월>, <민족해방가> 등의 작품이 나오게 된다.
  
  
  3. 장조 서정가요의 시작
  
단조 행진곡과 단조 서정가요에서  드러나는 격정적 감정을 자제하고,

보다절제되고 이성적이려 하는 태도를 가진 장조 서정가요  작품이  나오고 인기를얻기 시작한다. 

<그날이 오면>(85년, 문승현 작사,작곡)이 86년에 들어서면서 널리 불려지고, 80년대 장조 서정가요의 시발을 이룬다.
대체적인 특징은 의미단위가 길고, 낭만적  격정성을 가라앉힌 고전적인 차분한 화성과 선율 전개한다는 것이다. 

단조 서정가요가 60년대 단조스탠다드의 전통을 받고 있다면 이들 장조 서정가요는 찬송가와  가곡, 포크의 영향을강하게 받고 있다. 

올갠 반주나 혼성합창의 편곡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격정을 속에 감춘 절제된 감정을 운용하고, 매우 부르기 어렵다. 

문승현의 또 하나의 역작  <이 산하에>로 민중가요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데에 성공했다면

이 노래로부터 민중가요의 경향을 미리 짚고 선도하는 데에 이르게 되며,

그 뒤를 이어 <벗이여 해방이 온다>(86년,  이성지 작사,작곡 -김세진, 이재호 열사 추모곡, 추모곡이면서도 장조)가 발표된다.
  
  (4) 개사곡(改詞曲)의 급격한 퇴조
  
학생운동의 상승이 뚜렷했던 83년부터 대학에서 개사곡 붐이 인다.
그 이전의 노동자들의  개사곡(노래가사 바꿔부르기)이 주로 노동자들이 부를 민중가요의 부재로 인해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음으로써 생겨난 것이거나,

노동자 교육용  프로그램(즉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기, 주체적으로 사고하기 등을 위한)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대학생들의 개사곡은 주로 반전의 재치를 중심으로 하는 풍자적인 개사곡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
<개사곡의 구조와 사회적 기능>참고 -

    * <00대는 짭새땅>, <아, 대한민국> 등이 대표적임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 돈 있으면 돈 있으면 돈 있으면)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어  (빽 있으면 빽 있으면 빽 있으면)                
   (하략)
              <아, 대한민국> 개사곡
  
  어쩌다 빌려온 양키놈 돈에 우리 공장 문 닫아 버렸네
  어쩌다 빌려온 쪽발이 돈에 우리들은 갈 곳이 없네
  사장님께 할 말이 있는데 왜 이리 용기가 없을까
  월급은 안 줘도 수출은 안돼도 원리금 상환 꼬박꼬박
  개판 개판 한국경제 개판인가 봐
           <어쩌다 마주친 그대> 개사곡
  
즉 기존에 익숙하게 알고 있는  노래를 가져와서 가사의 몇 부분을  바꿈으로써,

기존의 노래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새로운 의미  사이의 부조화로 인한충돌과 긴장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노래장난으로

바로 그 부조화와 충돌이 반전형 개사곡의 요체이다.

(따라서 악곡과 가사의 부조화 때문에  노래의 질이떨어진다는 식의 평가는 잘못된 것임)
개사곡은 주도적인 노래는 아닐지라도, 일반 민중가요에서는 채워주지 못하는 희극성, 풍자의 재리를 만끽하는 노래로서

독자적인 존재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자고 새면 새로운 개사곡이 나왔던 83,84년을 지나 85년부터는 노래공연을 위한 의도적인 창작을 제외하고서는

(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대여 날유혹하지 말아요> 등) 자생적이고 풍자적인 개사곡의 창작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풍자라는 미적 원리가 당시의 변화된 정서 속에서 호소력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풍자는 풍자주체가 상승하고

풍자대상이 쇠퇴하는 역동적인 흐름 속에서 가능해진다.  완전히 쇠퇴하지 않았으며 비록 지금은  풍자주체에 비해 힘이 강하고
지배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만 머지 않아 쇠퇴해가리라는 흐름을  감지하는 사람들이 에돌아치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비판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그러한 동적인 흐름이 계속되다가  정체가이루어지는 시기, 풍자주체의 상승이나 풍자대상의 하강이 두드러지지  

않는시기이므로 풍자는 호소력을 잃는다.  풍자적인 마당극의 쇠퇴도 이와 관련있다.  

  
기층민중의 삶을 다룬 작품과  노동자가 부르는 민중가요
  
  (1) 70년대 이래 연민주의적 시선
  
지식인이 만들어낸 노동자나 농민의 삶의 모습은 가난하고 슬프며 무력하다.
 <서울로 가는 길>, <공장의 불빛>(김민기),  <황혼>, <까치길>(안혜경),  <하얀 비행기>(김제섭),

<약수 뜨러 가는 길>(정종수), 돌의 <소>,  <갈 수 없는 고향>, <땅> 등
이는 지식인들이 여태까지 한 번도 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 기층민중, 소외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의  시작을 뜻한다. 

이러한 연민은 못 사는 사람들에 대한 양심의 발로이다.
  그들의 삶의 어려움을 설명하려고 들면서도 직설적인 설명을 피하려고 형상화한 흔적이 역력한데,

설명하려고 한다는 것은  그들의 삶을 모르고 있는 대상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도 이들 노래는 노동자들의 즐겨부르는 노래와는 거리가 있다.
이런 노래의 양식은 대체로 포크이며, 포크적 질감과 태도를 가진다.
  
  (2) 극복, 탈피의 노력
  
그러나 실제의 노동자들과 접하면서 지식인들이  책에서 읽고 머리속에서 그려온  민중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탈피의 노력을 한다. 
민요풍의 노래가 가지고 있는 민중성과 역동성(직설성에서 오는)을 빌어온작품들을 발표하게 되는데 -  

<작업장 타령>(안혜경, 84년  경), <서울길2>(김지하 시, 오용록 작곡, 82년) - 이는 마당극을 중심으로 한 연행예술운동과 관련 있음.
그러나 여전히 설명적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하늘 나는 저 새는 너의 날개짓으로 / 푸른 하늘 날으면서 맘껏 자유 누리는데
  기계에 매어달린 못난 이내 몸뚱이는 / 고달픈 몸짓만 되풀이하는구나
  어허야어허
    (후렴) 누구를 원망해랴 못 배워 땅만파는
           우리 부모 원망하랴 어허야어허
  
  가난해서 못 배운 설움만도 뼈 아픈데 / 걸핏하면 교양없다 무식하다 쥐어박고
  부모님이 나에게 지어주신 이름 있건마는 / 공순이 공돌이 개 부른듯 불러대네  
  어허야 어허 (후렴)
  
  작업장에 들어서니 형무소가 따로 없네 / 일하는 자 시키는 자 너무나도 다르구나
  이 세상 모든 것을 이내 손이 만들건만 / 이 세상 모든 것 이내 손길 거부하네
    어허야 어허 (후렴)
  
85년 이후 노동자의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확보하려는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대개는 노동자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 <귀례 이야기>(이성지 작사,작곡), <깜빡잠>, <우리 이야기>(김보성 작사,작곡 -  어린이용의 <우리이야기>를 개사한 형태인데,  

    노동자용의 이 노래가 더 많이 알려져 있다)
    : <밥,자유,평등,평화>(김보성,김용수), <대결>(박노해 시, 김보성): 노래로 하는 라이프 스토리 <살아온 이야기>(김용수 정리)
    오늘도 시다판에 엎드려 깜박잠 자는데 /
    고향집 뒷산길 들국화 이리도 예뻤나
    잠깨지 말았으면 엄마도 봐야하는데 /
    그러나 언니의 호통소리 엄마도 봐야하는데
                   <깜빡잠> 1절
  
    (후렴) 라라라라라라  라라라 라라라라 힘찬 투쟁
           라라라라라라 라라라 민주노조 만만세

    아늑한 사장실 책상을 마구 치며 노조를 노조를 포기하라모두 개새끼들 불순분자  길길이 날뛰는 저들은
    아아 기업주와 노동자는 마치 사슴과 돼지들처럼 동등할 수는 없대요
    묵묵히 일하고 시키는 대로 따르고 주는 대로 받고 항상 복종함이 안정사회 이루는 노동자 도리라지만
    인간이란 똑같이 존중하며 서로서로 이낄 때 큰 힘됨을 우린 몸으로 안다
    너흰 돈과 무력 권력만이 전지전능함을 믿지만
    우린 온 세상이 평등과 사랑 일치될 것을 믿는다. 솟구쳐갈수록 뜨겁게 다가오는 숙명의 대결을 어찌한단 말이냐
    너희들이 짓?고 깨뜨릴수록 우린 더욱더 힘차게
    우린 인간으로 평등으로 민주주의로 통일로
    솟구쳐갈수록 뜨겁게 다가오는 숙명의 대결을 어찌한단 말이냐  <대결>
  
    내가 어렸을 적 엄마가 말했어요 /
    서울에 가서 돈 벌어 갖고 시골에 와서 시집가라고 // 나는 서울이 너무나 좋아 중학교 졸업하고 / 서울로 갔답니다.//

    서울 와서 처음 다니던 공장은 / 너무도 힘들고 고달픈데 한달 월급은 삼만  오천원 //

    나는 서울이 너무나 싫어  공장이 너무나 무서워 / 엄마에게 돌아갔어요 //

    엄마 엄마 / 서울은 너무나 싫어 공장은 너무나 무서워 / 다시는 공장에 안 갈거라고 //
    집에 와서 있다 오빠와 싸웠어요 / 그런 후에 가정부로 가서 오개월 동안 일을 했었죠 //

    나는 공순이란 놀림이 싫어 공장이 너무나 무서워 /노동자가 안되겠다고 //

    엄마 엄마 /  그러나 알겠어요 우리가 노동자 된 것 /우리들 모두의 운명이라고 / 

    어떠한 고난과 시련이 우리 앞에 있을지라도 / 굳센 용기 힘을 모아 싸우러 가자 //
    악의 무리 물리치는 노동자가 됩시다
                        <살아온 이야기>
  
70년대와 80년대 초반의 노래에  비해  구체성이 확보되었고, 투쟁적인 노래가 나오기 시작한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으나,

역시 노동자의  일상을 힘들면서도 역동적이고 힘차며, 비참함도 직설적이면서  질기디질긴 생명력의 느낌(<노동자의 생활>)을 가지지 못하고

<깜빡잠>처럼 어리고 곱고 연약하여 무력하다. 또한 여전히 양식은 포크에 묶여있고, 그 포크의 연약함과 비생활성의영향을 받고있다.
  
    내 손 거쳐 만든 물건 백화점에 가득해도
    셋방살이 내 집에는 재고품도 하나 없네
    어쩌다가 이 내 몸은 노동자로 태어나서
    거친 세상 풍랑 속에서 멸시 천대 받는구나
     <노동자의 생활> 1절
                  (노동자 장남숙 시)
  
이들 노래의 몇몇 곡들은 노동교회 등을 통해 보급되기도 하였지만,  역시대학으로 많이 퍼져나갔다. 본격적인 노동가요가 만들어지기 어려운 여건이었다.
반면 노동자들이 좋아한 노래들은 <사노라면>과 <불나비>이다.  이들 노래는 대중가요 중 보다 대중적인

(그런 의미에서 통속적이라고 할 수 있는) 양식을 차용했으며, 특히 <불나비>는 70년대 말,

80년대 초의 대학가요제 풍의 속화된 록의 형태이다.
이런 노래들은 설명적이지 않으면서도  노동자의 감수성에 맞았던 것이다. 

일상적 낙관적이고 역동적으로 힘들지만 힘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하고있다.

(투쟁이 일상화 될 수 없었던 시절이므로 어차피 일상의 표현이 중요함). 표현은 직설적이며 외향적이다. 

이러한 낙관이 근거없는 것이라고 할 수도있겠지만, 실상은 몸을 움직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서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며,

자신의 삶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러한 일상적 낙관성과 역동성은 무지향적이다. 

<불나비>에서 야간의 지향성을 보이는 듯하지만, 역시 '불나비'라는 비유가 패배주의의 냄새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이 외에 80년대 초부터 불려졌던 <민족해방가>가 있다.  


  
86년 이후 학생운동의 대중화와 편안한 노래들
  
학생운동의 대중화가 이루어져 써클의  양적 팽창과 단과대나 과를  중심으로 한 조직화가 진전된다.

그리하여 지하운동가 같은 비장하고 긴장된 분위기에서 보다 밝고 편안한 대중적 분위기가 만들어고

자연수러운 양적 성장의 귀결이기도 하면서 대중노선의 관철이기도 한다.
84년 경에 만들어진 <광야에서>(문대현 작사,작곡)이 뒤늦게 인기를 끌게되고,

<솔아, 푸르른 솔아>(안치환 작사,작곡)의 인기 등 편안한 노래가 유행하게 된다.
기득권 포기나 생명을 바침   같은 극단적인 결단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비장함이 없다.  
감옥에 가 있는 동지나 우리 민족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도 그렇게 지하운동가 같은 비장한 각오를 가지지 않는다.
이 시기 반미 내용의 노래들은 단순히 새  날, 해방의 세상, 인간다운 세상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또  일반적인 민주화의 지향과는 다른, 반미와 분단극복을 명확하게 내세운 노래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전의 통일지향의 <터>같은 노래와 달리 주 타도대상으로서의 미제국주의를 설정하고

반미의 내용성를 두드러지게 드러낸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특정 정파와의 관련이 있다.  

 

<반전반핵가>(박치음 작사,작곡), <반미출정가>(윤민석 작사,작곡), <민족해방가2>
  
  제국의 발톱이 이 강토 이 산하를 / 할퀴고 간 상처에 성조기만 나부껴
  민족의 생존이 핵폭풍 전야에 섰다 / 이 땅의 양심들이 어깨 걸고 나가자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이 목숨 다 바쳐 / 해방의 함성으로 가열찬 투쟁으로
  반전 반핵 양키 고우 홈!
                    <반전반핵가>
  
그러나 아직 통일  지향의 내용의 형상화는 잘 이루어지지 않으며, 대학생노래에 있어서 정파에 따른 노래의 분리 현상이 시작된다. 

편안한 노래, 반미·통일지향의 노래와 정파에 따른 노래의 분리 현상 등은 이후 대학생의 노래에서 더욱 강화되어 나타나게 된다.

 

<출처: 웹문서>

 

 

 그날이 오면

 

 

                문대현 작사 / 작곡

                노래 / 노래를 찾는 사람들

 

 

한 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빛나는 눈물들
한 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짧은 추억도
아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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