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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운동사 원문보기 글쓴이: 신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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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전권을 위임받은 이완용 총리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통감은 <한일병합조약>에 기명하고 조인했다. 조약의 제1조는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하고, 제2조는 “일본국 황제폐하는 제1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전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고 기록했다. 왜란(倭亂)과 호란(胡亂)도 견딘 한국이 망하는 순간이다.
"짐은 한국의 통치권을 믿고 의지하는 대일본 황제폐하께 양여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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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조칙이고 조약이 아닐 수 없다. 제 나라 강토와 백성의 생명과 재산도 보호하지 못하는 군주가 ‘동양의 평화’와 ‘만세의 행복’을 논하고 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군주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신하가 앞장서서 주권을 넘겨주고 있다. 군주가 군주가 아니고, 신하가 신하가 아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8월 29일 순종은 한국의 주권을 일본에 넘겨주게 된 이유를 국민들에게 설명하는 현대판 ‘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사직을 이어가는 어렵고 막중한[艱大] 업무를 이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같이 나라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 것을 먼저 자신의 ‘부덕’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동안 난국을 타개하고 국면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노력했음을 강변했다. 그러나 원래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됐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도저히 만회할 시간이 없고 또한 방책을 찾을 수 없음을 탄식했다. 순종의 ‘담화문’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이런 위기를] 맞아서 사태의 지리멸렬함이 더욱 심해지면 끝내는 수습할 수 없는 데 이를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맡겨서 완전하게 할 방법을 찾고 공을 들여 혁신의 효과를 얻게 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짐이 이에 결연히 내성(內省)하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
오늘 짐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이렇게 해서 이조 500년의 사직이 무너져 내렸고, 4000년의 민족사가 끝났다. 그리고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한민족은 망국민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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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일본 정부도 천황의 이름으로 특별담화가 발표됐다.
일본 천황은 대한제국의 병합에 이르게 된 ‘전말’을 간단히 설명했다. 한국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안전을 위협하는 ‘화란(禍亂)의 연원(淵源)’이라는 것, 이 화근을 끊어내기 위하여 일본은 한국을 보호하면서(을사강제조약, 1905) 시정의 개선을 주도했다는 것, 4년의 보호기간을 통해서 한국의 사정은 크게 개선됐다는 것, 그러나 지금의 ‘보호체제’만으로는 공공의 안녕을 유지하고 민중의 복리를 증진하기에 불충분하다는 것, 그래서 보다 혁신적인 조치, 즉 병합이 필요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 한국이 병합을 원하고 있다는 것 등을 강조했다.
일본천황 "한국 병합은 시세에 응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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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별도의 문서를 통해서 고종을 ‘덕수궁 이태왕(李太王)’으로 칭하고, 순종을 ‘창덕궁 이왕(李王)’으로 부를 것을 명시했다. 망국은 수치의 역사다. 자의였든 타의였든 망국의 역사를 주도한 군주와 지배계층이 그 후 오랫동안 일본의 보호 속에서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는 사실 또한 망국에 못지않게 부끄러운 역사다.
어전회의, 병탄조약, 순종의 대국민 담화, 일본천황의 담화, 그 어느 곳에도 ‘강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의 황제가 동양의 평화와 한국인의 안녕을 위해서 일본에게 병합을 ‘당부’했고, 일본의 천황이 이를 ‘승낙’했다. 일본이 강압적으로 한국을 ‘병탄’한 것이 아니라, 한국이 임의적(任意的)으로 ‘병합’을 원했기 때문에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일본의 간교함과 치밀함이 배어있고, 한국의 허약과 무능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