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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압 평지 언약갱신
신 29:1-15
1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모압 땅에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은 이러하니라
2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3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5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6 너희에게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7 너희가 이 곳에 올 때에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우리와 싸우러 나왔으므로 우리가 그들을 치고
8 그 땅을 차지하여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나니
9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10 오늘 너희 곧 너희의 수령과 너희의 지파와 너희의 장로들과 너희의 지도자와 이스라엘 모든 남자와
11 너희의 유아들과 너희의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 있는 것은
12 네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며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하시는 맹세에 참여하여
13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14 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15 오늘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서 있는 자와 오늘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이니다.
신 29:1-15 / [모압 땅에서 새로 맺는 계약] 이것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새로 맺도록 명령하신 계약의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이미 호렙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셨으나 이제 보충해 주신 것이다. 2) 그리하여 모세가 온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모으고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들과 그의 온 백성에게 하신 모든 일들을 여러분이 직접 눈으로 다 보았습니다. 3) 여호와께서 얼마나 무서운 재앙을 애굽 백성에게 내리셨으며 얼마나 놀라운 이적과 기사들을 행하셨는지는 여러분이 직접 보았습니다. 4)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여러분의 마음과 눈과 귀를 열어 그때 본 일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5) 내가 여러분을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인도하였지만 여러분의 몸에서 옷이 해지지 않았고 여러분의 발에서 신발이 닳지 않았습니다. 6) 여러분은 떡도 먹지 못하고 포도주나 독주도 마시지 못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여러분을 먹여 살리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여러분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여호와께서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여러분이 깨달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7) 우리가 이곳으로 올 때에 헤스본의 왕 시혼과 바산의 왕 옥이 우리와 싸우러 나왔지만 오히려 우리가 그들을 쳐서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8) 그래서 우리가 그 아모리 족속들의 땅을 빼앗아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상속 재산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9)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계약의 말씀을 지켜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든지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10) [계약의 당사자들] 여러분은 오늘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우두머리와 장로들과 관리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들은 물론 11) 여인들과 어린아이들도 나오고 여러분의 진영에 몸붙여 사는 이방인들까지 나오고 장작을 패는 이들로부터 물을 긷는 이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다 나와 서 있습니다. 12-13) 여호와께서는 오늘 여러분 모두와 계약을 체결하려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여러분에게 약속하신 것과 같이 또 여러분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고 여호와나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었음을 오늘 여호와께서 선포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 계약에 동의를 하고 이 계약의 의무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14-15) 여호와께서는 오늘 이곳에 와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 있는 여러분만이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여러분의 후손들과도 오늘 이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의 시간을 보낸 광야 2세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있는 모압 평지에서 이전 세대가 호렙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습니다.
모압 땅에서(1) 이 본문을 모압 땅에서의 언약의 갱신이라고 부릅니다. 출애굽기 19장 이하에서 출애굽한 히브리 민족은 호렙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하지만 지난 40년간의 광야에서의 실패가 가나안 땅에서의 실패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모세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호렙에서나 모압에서나 언약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을 것이며,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안전히 보호할 뿐만 아니라 풍성한 축복을 내리시겠다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의 우상으로 인하여 광야에서와 같이 실패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언약을 갱신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2-9) 지금 모세와 함께 있는 이들은 대부분 광야 2세대입니다. 하지만 그들 중의 40-50대 이상의 연장자들은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서 있었던,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보았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광야 2세대들도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옷이 낡아지거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한 것을 경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광야 생활 동안 떡과 포도주를 먹거나 마시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신 8:3; 마 4:4).
언약과 맹세(10-15)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 부분적 맹세가 아니라 그들의 삶 전부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성도는 주일에만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는 주일 성도가 아닌 언제나 하나님 안에 있는 전적인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믿음과 회개로 복종하며 온 마음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또한 이것은 모세와 함께 하는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장차 가나안 땅에서 태어날 후손들과 오늘날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모든 성도에게 주시는 언약의 말씀이자 신앙입니다.
적용: 믿음의 첫사랑을 기억하고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지금 여기가 당신의 모압 갱신의 자리가 되기 바랍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좀 도와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러자 아주머니는 활짝 웃으며 청년의 도움을 받아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었습니다. 아주머니가 떠나고 다른 청년이 아주머니를 도와준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우리도 한창 바쁜 와중에 좋은 마음으로 도움을 주려는 건 알겠는데 그렇게까지 물어보고 도와 드릴 것까지 있나?" 친구의 물음에 다른 청년은 말했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그분께 도움을 드리는 것이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동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거든. 나는 저 아주머니가 장애인이 아니라도 내 손이 필요하면 언제든 도와드렸을 텐데 괜한 오해나 불편한 마음을 드리고 싶지 않았어.“
< 설 교 >
기적을 신고, 축복을 입고
신 29:5-6 / 강문호 목사
오늘은 중요한 날입니다.
두 가지 결단을 주님이 촉구하시는 예배시간입니다.
하나는 전도 결단이고 다른 하나는 봉사 결단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사명을 받는 날입니다. 카알 힐티는 말했습니다.
<사명을 받은 날은 생일 날보다 귀한 날이다.>
삼척 교회 부흥회 중에 R.A. 토레이가 창설한 태백 예수원에 가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 상이 군인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분이십니다. 그가 그런 별명을 가지게 된 이야기입니다.
토레이가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습니다. 폭탄을 맞아 죽을 뻔하였습니다. 다행스럽게 구사일생으로 생명은 건졌지만 오른 팔 하나를 잃어 버렸습니다. 말하지면 팔병신이 된 것입니다. 그는 비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팔 하나 잃어버린 팔 병신에게 누가 시집올가? 팔 하나 잃어버린 팔 병신을 누가 직장에서 부를가? 팔 하나 잃어버린 팔 병신이 무슨 사람 구실을 할가?>
그래서 삶을 포기하고 자살하려고 시도하였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믿음이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팔없는 아들을 잘 길렀습니다. 격려하여 주었습니다. 소망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그는 이 말씀에 큰 은혜의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는 평생 처음 이런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모든 것을 감사합니다. 팔 하나 없는 것도 감사합니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기도 후 그는 중얼거렸습니다.
<아직도 나는 할 일이 있다. 팔 잃어 버린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 아픔은 사명이다. 나같이 팔하나 없는 사람을 찾아 위로하자.>
그런데 한국에 6.25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으로 팔이 잘라져 나가는 병사들이 많다는 뉴스에 눈이 뜨였습니다. 그는 한국으로 왔습니다. 미국에는 선교단체를 만들어 돈을 모금하여 보내게 하였습니다. 세브란스 병원으로 와서 팔이 잘린 병사들에게 의수 팔을 만들어 붙여 주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팔 잘린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의 자녀들이 대를 이어 한국을 위하여 일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토레이도 태백산에 예수원을 만들어 성령운동을 하다가 그 곳에서 죽었습니다. 무덤이 지금도 그 곳에 있습니다. 무덤앞에서 나는 사명적인 기도를 하고 내려왔습니다.
팔을 만들어 주면서 살던 토레이가 죽기 전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섭리가 있다. 팔을 잃어버린 것을 감사하였을 때 하나님은 나에게 지혜를 주셨다. 한 가지 봉사를 통하여 평생 보람을 느꼈다. 하나님은 나를 삶의 의미를 느끼는 높은 곳으로 인도하여 주셨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 갑니다.
야곱의 식구 70명이 애급으로 들어 갔습니다. 400년 살았습니다. 200만명이 되었습니다. 가정이 들어가서 민족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인도하여 광야로 나왔습니다. 시내산에 도착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집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금과 은과 놋으로 지은 후에 성막을 덮는 덮개는 물개 가죽을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료를 바치라고 공포하였습니다. 금은 패물이 얼마나 많이 들어 왔는 지 그만 가지고 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물개 가죽도 헌물로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성막을 잘 지어 하나님께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대한 질문을 하나 하여야 합니다.
<열대 지방에서 도대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개가죽을 무엇 때문에 광야로 가지고 나온 것일가요?>
구두를 만들기 제일 좋은 가죽은 소가죽입니다.
그런데 소가죽으로 구두를 만들지 않는 민족이 있습니다. 힌두교 민족은 소를 숭상하기에 소가 자기들의 신입니다. 그래서 자기 신을 잡아 구두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가죽으로 구두를 만들어 신지 않습니다. 애급 민족은 힌두교 민족은 아니지만 소를 숭상하는 민족입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애급에서 400년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 민족을 본받아서 소를 숭상하였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모세가 40일 금식기도하는 중에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이 공부를 하다가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필이면 왜 금송아지를 만들었을가요?>
한 아이가 대답하였습니다.
<금이 모자라서 그랬겠지요.>
여하간 금송아지를 만들었다는 것은 소를 숭상하였다는 증거입니다. 중국사람은 금 용을 만들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금 돼지를 만듭니다. 미국 사람은 금 독수리를 만듭니다. 그들은 금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소를 숭상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기에 소가죽으로 구두를 만들지 않습니다. 구두를 만들기에 두 번째 좋은 가죽이 물개가죽입니다. 물개 가죽은 단단하고 부드럽습니다. 그리고 물개는 한번도 싸움에서 진 적이 없는 동물입니다. 물과 육지 양 쪽에서 사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물에서 싸우다가 지려고 하면 육지로 나옵니다. 육지에서 싸우려다가 질 것같으면 물속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그래서 미국 장교들은 전쟁에서 지지말라고 물개가죽 구두를 신습니다. 미국 스프링스에 있는 공군 사관학교 생도들이나 뉴욕에 있는 육군 사관학교 생도들이나 볼티모아에 있는 해군 사관 학교 생도들도 물개 가죽 구두를 신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개 가죽을 광야로 나올 때에 가지고 나온 것은 광야를 걷다가 구두가 헤어지면 만들어 신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40년 걸려서 가나안에 갈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기껏해야 10일 정도면 갈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오늘 날 차로 달리면 4시간 정도 거리입니다.
그래서 물개가죽을 조금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광야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 성막을 물개 가죽으로 덮개를 만들어라.>
모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이들은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물개 가죽을 다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구두가 헤어지면 만들 재료가 없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기적을 주셨습니다.
<주께서 사십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너희로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29;5-6)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제와 오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은 우리 일을 하여 주십니다.>
우리 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12월 25일 성탄절에 1225명을 전도하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이 오신 날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꼭 하나입니다.
<영혼 구원입니다. 사람을 살리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탄절에 다른 것을 하지 말고 영혼 구원하여야 합니다. 오늘 작정서에 몇 명 전도하겠다고 작정하시고 지금부터 기도에 들어가야 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면 됩니다.
세계적인 전도자 무디에게 어느 날 청년이 와서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전도하신다고 들었는 데 맞습니까?>
무디 목사님이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청년이 다시 물었습니다.
<왜 매일 전도하십니까?>
무디가 말했습니다.
<5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디는 매일 전도하는 이유를 5가지 들려 주었습니다.
1. 주님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우리의 최초의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2.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에 전도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 16;26)
3. 나는 빚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헬라인에게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나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누군가가 나에게 복음을 주었으니 나도 누구에겐가 복음을 주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은 다 빚진 사람들입니다. 다 누구에겐가 복음을 전하여야 합니다.
4. 내가 복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도하는 사람을 축복하여 주십니다. 다니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별과 같이 빛나리라>(단 12;3)
5. 사람들이 내일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전 4;2)
시골에서 농사만 짓던 늙은 농부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국회위원에 당선되었다는 말을 듣고 아들을 찾아 갔습니다. 마침 벨기에 대사와 식사중이었습니다. 늙은 농부 아버지는 벨기에 대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셨나요?>
아들은 당황하였습니다. 벨기에 대사는 침착하게 한 마디하였습니다.
<아니요.>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 후 아버지가 돌아 가셨습니다. 벨기에 대사로부터 화환이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글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예수님을 전한 최초의 사람입니다. 그 후 나는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지금은 크리스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언젠가는 열매를 맺습니다.
스펄지온 목사님 이야기도 이런 사실을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하루는 택시를 탔습니다. 운전기사 물었습니다.
<저는 손님을 압니다.> 목사님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저는 처음인 것같은 같은데요.>
택시 기사가 말했습니다.
<모르실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생생하게 손님을 기억합니다. 10여년 전이었지요. 손님이 제가 운전하는 이 택시를 타셨습니다. 제 택시를 타시고 제게 예수님 이야기를 하여 주셨습니다. 일부러 더 멀리 가시며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내가 알았지요. 그 때 나는 예수 믿기를 거절하였지요. 그러나 마음이 이상하여 집으로 돌아간 후 성경을 읽었지요. 나는 예수를 영접하였지요. 손님은 나에게 예수를 증거한 처음 분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었지요.>
그렇습니다.
전도는 전하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면 열매는 하나님이 맺게 하여 주십니다. 12월 25일 1225명 전도를 위하여 한 사람이 두 세 사람씩 정하여 놓고 지금부터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믿음으로 작정하고 1225시간 기도팀들이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년 계획을 위하여 오늘 우리 목회자들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갑니다. 내일 아침 나올 예정입니다. 이미 지난 주간 장로님들은 분담을 마쳤습니다.
한 분이 한 곳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오늘 작정하시면 우리가 내년 계획을 세워 오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실제적으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일군이 필요합니다.
1. 교육부
영아부 교사, 유치부 교사, 초등부 교사, 중등부 교사, 고등부 교사, 청년부 교사.
2. 선교부
농어촌 선교부, 지역 선교부, 유치장 선교부,
3. 위원회
성막 위원회, 새가족 위원회, 양육 위원회, 문서 선교 위원회, 멀티미디어 위원회.
4. 중보기도
5. 성가대, 찬양단
6. 전도부
지역 전도, 학원 전도, 지하절 전도, 노방 전도. 노인정 전도, 병원 전도.
7. 교회 청소
우리 교회는 큰 건물입니다. 한 사람이 한 곳을 맡아서 일년동안 그 곳을 깨끗이 청소하여 보십시오. 예수님이 너무나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 사랑이 예수님 사랑입니다.>
지하실
1층 앞뜰, 옆뜰, 뒤뜰, 까페, 화장실(2), 사무실, 도서실, 현관
2층 현관
3층 현관, 본당
4층 현관, 성가대실, 화장실, 기도실(10), 유아실(3), 본당
5층 현관, 성가대실, 장로실, 방송실
6층 현관, 화장실, 목사실, 청년부실, 재정부실, 쎄미나실, 유년부실
7층 현관, 화장실, 웨딩홀
8층 현관 방(12)
9층 현관 조리실 웨딩홀
10층 전망대
11층, 12층.
한 곳에 두 명씩 일주일에 한번 정도 청소를 맡아서 하면 예수님의 몸이 깨끗할 것입니다.
나는 신문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평범한 공무원의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구청에서 근무하는 김 기문 씨 이야기입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알리지 않고 혼자 하려고 하였는 데.....> 하면서 신문 기자 인터뷰에 임한 기사입니다.
안양 수리산 관모봉 꼭대기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7년 되도록 항상 깨끗한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태극기 관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몰래 조사하여 보았습니다.
8년 전 그가 산에 올랐을 때 태극기가 찢어져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한 달에 한번씩 태극기를 새로 갈아 꽂았습니다. 지금까지 7년을 꾸준히 그렇게 하였습니다. 70 번 가량 올랐습니다. 때로는 태극기를 사느라고 점심을 굶을 때가 있었습니다. 출근하여야 하니까 새벽에 올라 갔다 오는 적도 있었습니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일을 왜 그렇게 꾸준히 하였습니까?>
기자가 물었습니다.
<혼자 즐거웠고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기에 내가 하였지요.>
이제는 모든 이들이 알고 그를 존경하고 국가에서는 그를 표창하였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궂은 일같지만 꾸준히 하는 이에게 세상 사람들은 칭찬하고 알아 줍니다.
세익스피어 이야기입니다.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청소부가 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세익스피어에게 몰렸습니다. 그리고는 싸인을 부탁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아우성이었습니다. 청소부가 바닥을 닦던 걸레를 집어 던지며 신세타령을 하였습니다.
<나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그 때 세익스피어가 다가가서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지요. 나는 붓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당신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깨끗이 닦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요. 자부심을 가지세요.> 이 말을 듣고 청소부는 걸레를 다시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닦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씻어 드린다는 심정을 가지는 교회 청소를 누구에게 맡기지 말고 우리 스스로 한다는 보람을 가져야 합니다.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 박물관 직원에 채용되었습니다. 처음 맡겨진 일이 청소였습니다. 박물관 바닥을 걸레질하는 것을 보고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청소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그가 말했습니다.
<내가 보통 건물을 닦나요? 박물관 바닥을 닦고 있지요.> 그는 박물관 바닥을 닦으며 박물관을 사랑하였습니다. 후에 그는 박물관장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이야기 더 드리고 싶습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 한 처녀가 수도원장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도 못 나온 사람은 수녀도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수도원에 청소부로 취직을 하였습니다.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의 성실성에 모두가 놀랐습니다. 그의 꿈이 수녀인 것을 알고 모두가 그를 수녀로 받아 주었습니다. 워낙 성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 수녀 생활을 제일 모범적으로 하였습니다. 수녀 원장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수녀 원장을 다시 뽑아야 했습니다. 그가 수녀 원장으로 뽑혔습니다. 드디어 그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청소를 잘 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가 사용하려던 물개가죽을 하나님이 필요하시다고 할 때 드렸더니 40년 동안 신발이 해지지 않았고 옷이 낡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필요한 물개가죽을 조금 드리고 40년 동안 기적을 신고 다녔습니다. 축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오늘 중요한 두 가지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1. 1225명 전도 동참 결단
2. 한 분이 한 곳에 일하기 결단
물개가죽의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영국에서 1759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영국군 장교가 북을 치면서 군에 지원할 군인들을 모집하고 있었습니다. 옆에 모라비안 교도인 청년이 서있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군인이 되고 싶지 않은가?>
그가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미 군인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대장 이름은?>
<네. 나는 매우 용감하고 생명을 바칠만한 대장을 모시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생명을 그 분에게 맡겼습니다. >
<자네 대장 이름이 뭐야?>
<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대장 되신 예수님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군사로 `100% 지원하여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 모두가 100% 동력화되기를 주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신 29:5-6 / 김원효 목사
한 5년 전쯤에 제가 월마트에 가서 마음먹고 구두 두 켤레를 새로 샀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제 이 두 켤레로 죽을 때까지 신어야겠다.” 그런데 웬걸요. 그 구두들이 어느새 밑창이 다 닳고 말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구두 바깥쪽이 더 많이 치우쳐 닳았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구두 밑창만 수리해서 신으면 되겠다는 마음도 먹었지만 뭐 구두가 월마트 구두라 그리 비싼 것이 아닙니다. 수리비나 새로 사는 거나 그게 그거겠다 생각이 들어 좀 아깝지만 새 구두를 샀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또 몇 켤레의 구두를 더 사야 되겠는가?”
여러분, 사람이 일생동안 몇 켤레의 신발이 필요할까요? 그리고 옷은 몇 벌이 필요할까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일단 신발도, 옷도 낡아지고 해어집니다. 더 이상 신을 수도, 입을 수도 없습니다. 이때 돈이 많이 있으면 다시 새것으로 사면됩니다. 그런 것 가지고 일일이 걱정할 필요 조금도 없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으면 어떡합니까?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 노예생활을 하다가 급히 출애급하여 광야로 나왔습니다. 뭐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여벌의 옷도, 여벌의 신발도 없습니다. 그 광야에서 신발과 옷을 살 가게도 없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이 있어도 신발과 옷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길이 잘 닦여진 도로가 있고, 자가용이 있어 여분의 신발도 따로 필요 없는 좋은 환경도 아닙니다. 글자 그대로 광야고, 그 광야를 터벅터벅 계속 걸어야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발이 닳아지고 옷도 해어집니다. 아- 참 난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주님이 40년 동안 옷도 낡지 않게 하시고, 신발도 해어지지 않게 하셨다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간 만나를 먹이셨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40년간 옷도 낡지 않게 하시고, 신발도 해어지지 않게 하셨다는 것은 잘 모릅니다. 여러분, 옷과 신발이 40년간 낡지 않고 해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환경이 중요합니다.
온도도, 습도도 이상적으로 맞아야합니다. 한국의 경우는 여기 캘거리보다 습도가 상당히 높습니다. 그러다보니 옷도 곰팡이가 잘 끼고, 구두도 썩기 쉽습니다. 반면 여기 캘거리는 날씨가 드라이합니다. 습도도 낮습니다. 그러다보니 집을 나무로 많이 짓습니다. 그렇게 나무로 집을 지어도 썩지 않습니다. 나무로 지은 집이 100년은 거뜬히 갑니다.
저희 교회 건물도 체육관 쪽이 50년대 6.25 때 지은 건물이고, 대성전 건물이 60년대 지은 건물입니다. 벌써 70년이 되었어도 여전히 튼튼합니다. 새 건물 같습니다. 환경이 받쳐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식적으로 환경이 최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낮에는 날씨가 더우니까 구름 기둥으로 그늘을 만들어 시원하게 인도하시고, 밤에는 춥고 캄캄하니까 불기둥으로 환하고 따뜻하게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40년간 만나를 내려 그 많은 백성들이 한 사람도 굶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옷과 신발이 낡거나 해어지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어디서나 사람은 다 살게 마련이라는 말이 있지만 알고 보니 하나님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세밀하게 역사하셨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내가 잘나서가 이니라, 내가 능력이 많아서가 아니라, 알게 모르게 뒤에서, 앞에서, 옆에서, 안에서 하나님이 세밀하게 역사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광야에 있으면서 그곳에서는 농사도, 목축도, 어업도, 사냥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떡도 먹지 못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 만큼 그곳은 척박하고 황량한 광야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수백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먹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40년간 변치 않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이 역사해주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좀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어서 죽을 지경에도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내주셨습니다. 즉 반석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살리는 생수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저히 마시지 못할 쓴물도 한 나뭇가지를 물에 던지니 쓴물이 단물로 변했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그렇게 쓴물이 단물로 바뀐 장소가 ‘마라’라는 곳입니다. ‘마라’라는 뜻은 ‘쓰다. 괴롭다.’라는 뜻입니다. 즉 쓰디 쓴 우리들의 인생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나무를 던지니 멋있는 인생, 괜찮은 인생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캘거리에서 밴쿠버로 차로 여행을 하다 보면 레벨스톡을 지나서 켈로나로 가는 길에 ‘마라’라는 조그만 마을이 나옵니다. 도로 옆에 강이 있는 마을입니다. 저는 그 마을을 지나면서 항상 성경에 나오는 ‘마라의 쓴물’ 사건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주여, 저의 쓰디 쓴 인생이 예수님 안에서 행복한 인생으로 바뀌게 하소서.”
여러분, 우리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를 하다 보면 그들이 모두 다 믿으면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꺼려할까요? 예수님에 대해서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들은 종종 전도인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수 믿으면 밥이 나와요? 돈이 나와요? 피곤한 인생 괜히 더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나 좀 내버려둬요. 내가 알아서 잘 살 테니까.”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보니 예수님 안에서 밥이 나옵니다. 돈이 나옵니다. 생수가 나옵니다. 만나가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메추라기 떼도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고기도 실컷 먹습니다. 하나님이 옷도, 신발도 낡지 않고 해어지지 않게 역사해줍니다. What else? 그 밖에 또 무엇이 있습니까?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그 안에 치료도 있고, 평안도 있고, 기쁨도 있고, 행복도 있고, 영생도 있고, 천국도 있습니다. 그리고 돈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토록 찾고 바라던 좋은 것들이 예수님 안에 다 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했지 않습니까?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7-11)
여러분, 이 외국 땅 캐나다에서 누가 나에게 돈을 줍니까? 누가 나에게 행복과 보람과 기쁨을 줍니까? 주님은 말씀합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주시지 않겠느냐? 그리고 예수님이 재차 말씀합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내가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기 전에는 이 사실을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 “아- 피곤하게 왜 그래?” 하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면 결국 예수님만 좋고, 교회만 좋고, 목사님만 좋은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괜히 바쁜데 시간만 낭비하고, 몸만 더 피곤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직접 체험해보니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 믿으니까 가장 먼저 내가 좋고, 내 가정이 좋고, 내 자녀가 좋고, 내 부모가 좋고, 내 형제 자매가 좋습니다. 그냥 적당히 좋은 것이 아니라 최고로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그것을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그냥 도덕과 윤리를 통해 인격 수양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헌금하는 것은 그냥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하는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어떤 때는 헌금을 하면서 “교회는 이 돈 가지고 다 뭐하나?” 하는 의구심도 생기고 반감도 생겼습니다.
그리고 교인들끼리 서로 ‘님‘자 붙이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보면 “에이고, 저것들 위선 떨고 있네.” 하고 좀 삐딱하게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이 제대로 자라지 못했습니다. 어머님이 교회 가자고 하면 마지못해 따라 가기는 가는데 영- 내 취미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군 제대 후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에서 금식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아- 하나님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을 분명히 믿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해 눈물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저주와 사망이 철폐되고 불행한 내 인생, 저주받은 내 인생이 행복한 인생, 축복된 인생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내 생명보다 더 사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세상 그 어떤 일보다 가장 좋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주님의 종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나 같은 못난 것을 주님의 종으로 만들어주시고 오늘날까지 사용해 주시니 감사하고 죄송할 뿐입니다. 좀 더 충성하고, 좀 더 기도하고, 좀 더 잘해야 되는데... 하는 아쉬움이 늘 있습니다. 제가 25살 때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이런 음성을 들었습니다.
“다 주었느니라. 알파와 오메가를 주었느니라. 선물도 주었느니라.” 저는 그때 군 제대 후 제 인생의 앞길을 놓고 기도했습니다. 나름대로 이거저것을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음성으로 응답하신 겁니다. “다 주었느니라. 알파와 오메가를 주었느니라. 선물도 주었느니라.”
저는 이 응답을 받고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가 보니 이 음성을 들으면서 성령도 같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즉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아낌없이 다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미 다 주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알파와 오메가 되시고, 처음과 나중이 되시고, 시작과 끝이 되신 독생자 예수님까지 주셨다는 겁니다. 성령도 선물로 주셨다는 겁니다. What else? 그리고 또 무엇이 필요하니?
그것도 다 주신다는 겁니다. 너의 행복을 위해서는, 너를 살리기 위해서는 옛날도, 지금도 아낌없이 주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없는 것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유일한 분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나의 친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나를 이토록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돌봐주시고 있습니다. 그 분은 내가 이 땅에서 살면서 신발이 몇 개 필요한지 알고 계시며,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입어야 할 옷이 몇 벌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며, 내가 장차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미 예비해 놓았고, 예수님 안에서 가져가라고 이미 허락해 놓으셨습니다. 고로 필요한 것을 각자 하나님께 달라고 하십시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자녀들에게 이미 좋은 것을 준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지금도 유효합니다.
아니- 지난번에도 달라고 했을 때에도 주셨는데 또 달라고 하면 하나님도 모자라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줘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여전히 풍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무리 줘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그토록 사랑받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입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사십시오. 가장 행복하게 사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이 그 누구보다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내 행복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면 행복도 멀어지고 맙니다. 고로 우리가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가까이 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예수님과 함께 오늘도 내일도 계속 행복해지기를 축원합니다.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를 주소서
신 29:2-6 / 피영민 목사
신명기 29장의 내용은 1절의 말씀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사 모압 땅에서 또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이 이러하니라” 다시 말해 신명기 29장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가데스바네아에서 벌을 받을 때에 20세 미만이었던 사람들과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 즉 신세대들과 모압 땅에서 세우신 언약의 말씀입니다. 이 언약은 40년 전에 그들의 부모가 호렙산, 즉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과 내용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호렙산에서 맺은 언약을 모압에서 갱신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언약의 6대 구조 가운데 ‘언약 당사자이신 하나님께서 역사적으로 무슨 은혜를 베풀어 주셨길래 언약체결을 요구하시는가’와 같은 역사적 서문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서문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 저러한 은혜를 주셨고, 그들이 이적과 기사를 목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기 원하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참으로 낙망되는 해석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4절) 이것은 언약체결을 하면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에 대해 고백하는 개인적인 느낌과 해석입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 말씀의 내용을 설명하고 적용을 해나가는 과정 중에 가끔 개인이 느끼는 느낌을 섞어서 이야기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설교를 듣는 분들이 다른 내용은 잘 기억하지 못해도 이 부분만큼은 잘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그렇게 느꼈다는 점을 은연중에 동의하며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큰 은혜와 이적과 기사를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깨닫지 못하고, 보지 못하며, 듣지 못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그와 같은 깨닫는 마음을 주시지 않은 것이로구나”하는 해석을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말씀은 어렵거나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을 주시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백성들이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며 탄식합니다. 모세는 신명기 30장 11, 13절을 통해서도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고 역설합니다. 모세는 행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알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받으며 살 수 있는 원리는 간단하고 쉬운 것입니다.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닫는 마음이 없고, 보는 눈이 없으며, 듣는 귀가 없다면 쉬운 진리도 알 수 없고,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어 그 진리를 실천하여 축복받는 삶을 누릴 수가 없게 됩니다.
1. 동일한 문제의 지속
이와 같은 문제는 모세 시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사야가 예언하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사6:9).
또한 동일한 문제가 예수님의 공생애 시대에도 지속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막4:11-12). 언뜻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외인들이 돌이켜 죄사함을 받을까봐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이 사실은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사함과 깨달음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의 예수님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수님과는 조금 다른 분입니다.
이와 같은 문제는 사도들이 살던 사도행전 시대에도 계속됩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가르칠 때 사람들이 도무지 믿지를 않자 바울은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행 28:26-27)고 말합니다.
사람이 들어도 알지 못하고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주지 않으셔서일 수도 있고, 사람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스스로 눈을 감고 귀를 닫아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과 귀를 닫게 하시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사람이 고침 받고, 죄사함 받고, 구원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동일하게 사랑하시고 예외 없이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D.L.무디식, 빌리 그레함식의 복음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예수님은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전한 복음과는 다른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구원 받지 못하도록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고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으셨다는 그 말씀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2. 이 문제의 고통
사람이 깨닫거나 알지 못한다고 해서 무슨 큰 문제가 있느냐고, 혹은 무슨 고통이 따르겠느냐고 반문하실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그리고 촉각 등 오감을 가지고 외부세계와 접촉합니다. 사람의 오감 가운데 하나라도 장애가 생기면 그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감기 걸려서 코만 막혀도 냄새를 맡기가 힘들고,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장애인들도 가끔은 장애체험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눈을 가리거나, 귀를 가리고 한 두 시간만 생활해 보세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편해서 살 수가 없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장애체험을 하고 나면 주어진 오감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어제 저는 수레바퀴 선교회를 이끄시는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처음 뵙는 분인데 저를 소개하니까 대뜸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뭐가 고마우시냐고 물었더니 강남중앙침례교회가 장애우들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만들어줬다는 소문을 듣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장애를 가지고 있으니까 장애우들에 대한 약간의 배려에도 매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어느 사회든지 선진국이 되려면 장애우에 대한 배려지수가 높아야 합니다. 장애우를 고려하지 못하는 사회는 후진국입니다. 장애우들을 배려해 줄 수 있는 마음과 물질의 여유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멀쩡한 육체적인 오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육신의 눈은 떴지만 영의 눈은 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귀로는 모세의 말씀을 다 들었지만, 영의 귀로는 듣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오감은 멀쩡했지만 영의 오감이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사람의 육신에도 오감이 있듯이 영에도 오감이 있습니다.
영적인 오감에 관해 사람은 세 종류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영의 감각기관이 완전히 죽어 있는 불신자입니다. 불신자들은 아무리 지성이 뛰어나고 똑똑할지라도 영이 죽어 있기 때문에 복음을 들어도 믿지 않습니다. 성경말씀도 우스꽝스럽게취급합니다. 영이 죽어서 영의 감각기관이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예수님을 믿고 영이 살아나긴 했지만 영의 눈이 어두운 사람들입니다. 영의 눈과 귀가 어두워 잘 보고 듣지 못합니다. 또 잘 깨닫지도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영적으로 어린 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영의 눈과 귀가 밝아 깨닫는 마음도 큰 사람들입니다. 이번 부흥회를 통해서 영이 죽어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을 믿고 살아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영의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밝게 뜨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육신의 오감이 멀쩡하다고 해도 영적인 오감이 죽어 있거나 기능이 약하면 영적인 세계를 올바로 감각하지 못합니다. 영적인 세계를 올바로 감각하지 못하면 영의 진리를 바르게 분별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시다. 바알과 아세라, 몰록과 같은 우상들을 가짜다. 우상을 따라가면 망한다. 하나님을 따라가라. 위급할 때 마시는 우황청심환처럼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만 하나님께 와서 도와달라고 하지 말고 모든 것이 잘될 때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따르라.” 그러나 모세가 아무리 외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잠깐 사이에 우상을 만들고 따라갔습니다. 영의 감각기관이 아주 어둡거나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모세는 그들이 마귀의 유혹을 따라가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반복하여 가르쳤습니다.
전 어려서 잔소리를 싫어했는데 부모가 되니까 어느새 잔소리를 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밥 먹을 때는 똑바로 앉아라. 운동 열심히 해라. 교회에 가서 기도도 열심히 하고 예배도 정성껏 드려라.” 자녀들은 듣기 싫을지 몰라도 부모들이 잔소리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자녀들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주의 길로 가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신명기에서 보듯이 끊임없이 잔소리를 계속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이스라엘 백성의 현실
거듭되는 모세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의 눈과 귀가 닫히고 깨닫는 마음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체험치 못한 이방인이 아닌, 하나님께서 택하셨으며 40년 동안 날마다 하나님을 체험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와 같이 행했다는 사실에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직접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보았고, 갈라진 홍해를 건너갔습니다. 애굽의 군대가 홍해에 빠져죽는 것을 목격했고,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40년 동안 따라다녔습니다. 비록 빵은 먹지 못했지만 반석에서 솟아나오는 생수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었던 백성들이었습니다. 아마 세상 모든 백성들 가운데 이처럼 밝은 빛을 받은 백성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적 감각기관이 모두 죽어 버렸기 때문에 모세가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체 옆에 환한 빛을 비추거나 라디오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다고 해도 시체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이미 죽어서 빛과 소리를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놀라운 빛을 주셨지만 시체처럼 그들의 영적인 눈이 감겼기 때문에 그빛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인간이 영적으로 타락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는 인간의 전적타락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면에서 전적으로 무능합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사업을 잘 이끌어나가며 정치적으로 출세를 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영적인 세계를 감각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빛을 전혀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둠을 택했다면 수긍이 가지만 이스라엘과 같이 큰 빛을 받고도 어둠을 택한 경우에는 그들의 영안이 멀고, 영적으로 죽게 되었다는 말 외에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우리 교회에서 부흥회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부흥회에 참석할 때, “하나님, 제게 은혜를 주시려면 주시고 말려면 마세요”라는 자세로 나오면 절대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는 영적으로 무능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저는 축복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는 자세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기도할 때에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목사라도 교만하면 망합니다. 목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는 목사라고 할지라도, 교회가 컸다고 거들먹거리고 어디 가서 어른인 체 하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그 목사는 망하기 시작합니다.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고 기도하지 않고 성경 연구도 하지 않는 목사도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교만하여 기도 하지 않고, 성경 읽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은 고꾸라집니다. 그러므로 이번 부흥회를 통해 ‘하나님! 제가 영적으로 무능합니다. 저의 영안이 닫혔습니다.
저를 불쌍히 보시고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진리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너희로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6절),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9절)고 선포하였습니다. 모세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형통하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자기가 신인체하는 존재들, 잡신, 우상, 악신, 귀신들도 많지만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시지만 한 분이신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만이 오직 참 하나님이신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면 행복하고 형통하며 축복받는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합니다. “너희가 죄인이니 예수님을 믿어라. 예수님을 믿고 내가 너희에게 준 거룩한 법을 따라 살아라.” 그게 십계명입니다. 부모를 학대하거나 살인하는 사람이 잘 될 수 없습니다. 간음하고 도적질하는 사람들의 가정이 행복하고 자녀들이 잘 되는 경우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분명하고 쉬운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 입 안에도 있고 마음에도 있습니다. 머리로는 분명하게 압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닫지 못한다면 문제입니다.
영의 감각기관이 약하거나 죽어버리면 아무리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설교도 많이 듣고 말씀도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적 감각기관은 늘 소생되어야 합니다. 영의 감각기관이 어두우면 어두움에 방황하다가 결국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악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결국 파멸과 저주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생생한 증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감각기관이 죽어 있다 보니 가나안 땅에 살아도 전쟁과 기근이 그치지 않고 결국 포로가 되어 열방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4. 영적 감각기관의 소생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영의 눈을 뜰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9장에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침으로 진흙을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바른 후, 실로암 못가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소경이 실로암 못가에서 눈을 씻자 갑자기 육신의 눈이 떠지고 빛이 감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이 놀라운 기적 앞에 깜짝 놀라며 예수님을 경외하기는커녕 안식일에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는 사실로 예수님께 트집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소경 되었던 사람이 깨달은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32-33).
소경의 고백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소경된 자가 자신들을 가르치려 한다며 도리어 눈뜬 이를 꾸짖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눈을 떠서 구원 받고 축복 받을 수 있다는 태도로 예수님께 맞서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의 눈이 감긴 사실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영의 눈을 뜰 수 없습니다. 영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영의 눈이 어둡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 자기에게 죄가 있다고 자백하는 사람, 진리를 알지 못하므로 가르쳐 달라고 겸손하게 고백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아무리 은혜가 임한다고 해도 눈과 귀가 닫힌 사람들은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술주정뱅이에게 술 취했냐고 물어보면 대개는 취하지 않았다고 발뺌합니다. 도둑질한 사람에게 물어봐도 자기는 도둑이 아니라고 오리발을 내밉니다. 재판 현장에 가보면 판사가 죄가 있느냐고 물어볼 때에 죄가 있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입니다. 죄가 있다고 고백하면 판사가 정상을 참작하여 형량을 줄여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못 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눈을 뜨게 하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인정하지 않으면 문제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제자훈련을 많이 합니다. 목사들이 선생이 되어서 많은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아무리 제자훈련을 한다고 해도 지성에만 호소하면 깨달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우리의 영성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영적인 은혜를 받고 살 수 있습니다. 이번 부흥회를 통해서는 영적인 깨달음이 넘치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 론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의 영적 감각기관을 소생시켜 주십니다. 아무에게나 주시는 은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택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 예수님은 염소들을 위해 죽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못 보면서도 본다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겸손하게 고백하고 불쌍히 여겨달라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영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엘리사가 수종드는 게하시의 영안을 열어주었듯이 오늘 영안이 열리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빌립 집사가 성령의 소리를 듣고 영의 귀를 열었듯이 영의 귀가 열리는 역사가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바울이 깨달은 마음으로 가르쳤듯이 우리 성도들의 마음에도 깨닫는 역사가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눈을 떴는지 그렇지 못했는지, 귀가 열렸는지 그렇지 못했는지도 모르는 분들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냥 무조건 엎드려서 ‘하나님 은혜를 주십시오. 영안을 열어주십시오. 영적인 은혜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이번 부흥회를 통해 은혜 받기를 결단하십시오. 무엇보다 영적 감각기관을 회복하는 성령의 은혜를 받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는 복
신명기 29:2-4, 마태복음 13:14-17 / 이성희 목사
최근 트랜드에 미인의 조건 1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피부입니다. 이것 하나만 봐도 시대의 변화를 실감합니다. 이전에는 눈, 코, 입, 이마 등이 미인의 조건이었는데 이제는 착한피부가 미인의 조건이라고 합니다. 예쁘고 잘 생긴 사람은 눈과 귀, 코와 입이 제대로 제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이목구비가 뚜렷하다고 합니다. 잘 생겼다는 것은 얼굴에 균형을 이룬 상태를 의미합니다.
눈과 귀가 형태적으로 제 자리에 있는가 라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눈과 귀가 기능적으로 제 자리에 있나 라는 것입니다. 눈과 귀가 제대로 기능을 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자입니다. 눈은 눈의 기능을 하고, 귀는 귀의 기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눈과 귀가 가치를 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보게 하시고, 귀로 듣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듣고, 귀로 보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눈으로 들으려고 하고, 귀로 보려고 하면 안 되고 할 수도 없습니다.
기네스북에는 세계 진기한 기록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구나무서서 오래 걷기’도 있고 최근에는 보니 ‘눈으로 우유 멀리 쏘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발로 걷지 물구나무서기로 걷습니까? 눈으로 보면 되지 왜 눈으로 우유를 쏩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의 삶에 무슨 유익이 있지요? 제가 별나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런데 별로 흥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신체마다 그 기능을 주셨는데 그 기능 외에 다른 것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능과 시간의 낭비입니다. 그것에 공을 들이는 시간에 인류를 유익하게 하는 것을 위해 노력했으면 얼마든지 길이 있을 것입니다. 신체의 모든 장기는 제 기능을 제대로 하게 하는 것이 나와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삶입니다.
성경의 사람 욥은 보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고난을 다 겪은 후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은 듣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을 때에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라고 하나님께 응답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보는 복, 듣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북한 병사가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순하였습니다. 우리 측 막사에 와서 노크할 때까지 우리 군은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노크귀순’이라고 금방 이름을 지었습니다. 초병들도 있었을 것이고, cctv도 있었을 터인데 다들 모르고 있다가 노크할 때 알았다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뒤에 보고하는 것을 보니 cctv가 설치는 되어 있었지만 작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cctv가 있다고 하더라도 기능을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cctv는 눈과 귀의 역할을 하라고 설치한 것인데 기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눈과 귀가 있으면 무엇 합니까? 눈이 있으면 보아야 하고, 귀가 있으면 들어야 합니다. 보지 못하는 눈과 듣지 못하는 귀는 있으나 마나입니다. 그런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은 복 없는 자입니다. 성경대로 하면 저주 받은 자입니다.
사람이 보고도 믿지 못하고, 들어도 순종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말씀을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믿지 못하면 기적을 보아도 마음에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으로 먹은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의 기적으로 병이 나은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사람들과 한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들어도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산상보훈과 비유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한 두 사람이겠습니까?
신명기 29:4에는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애급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시기 위하여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 것을 보았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도 보았습니다. 이런 엄청난 기적을 보고도 그들은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수없이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눈과 귀를 주시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모든 기관이 제대로 기능하고 조화하고 균형 있게 발전하는 것은 건강한 상태입니다. 우리 눈과 귀가 밝고 영혼과 육체가 늘 건강하여 복 있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눈은 봄으로 복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16에는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고 합니다. 눈은 보는 기능을 합니다. 눈이 보는 기능을 제대로 하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눈이 많다는 뜻입니다.
산 사람의 눈을 뽑았다는 것은 가장 큰 상처요, 굴욕이요, 패배입니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는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눈이 뽑히고, 머리카락이 잘렸습니다. 힘센 삼손에게는 굴욕적인 일이었습니다. 또 시드기야왕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이 침공했을 때에 느부갓네살왕은 시드기야의 눈앞에서 아들들을 죽이고, 눈을 뽑고 바벨론으로 데려갔습니다. 유다 왕에게는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신화에도 눈을 뽑은 이야기가 나오고 기독교 역사에도 눈을 뽑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졌습니다. 로마 교황 레오 3세는 성상숭배를 반대하던 비잔틴의 레오 10세와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레오 10세는 성상을 파괴하라고 하였고 성상파괴를 반대하던 교황 레오3세는 비잔틴에 의해 눈이 뽑히고, 혀가 잘린 채로 알프스를 넘어갔습니다. 이 때 비잔틴은 이슬람의 ‘아빠쇼’왕조의 침공으로 싸울 능력이 없었으므로 영원히 로마와 결별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생겨난 그리스정교회입니다. 보는 것은 복이며 중요한 기능인데 눈을 뽑았다는 것은 그 복과 기능을 빼앗은 것입니다. 눈이 뽑힌 것은 복도 기능도 상실한 상태를 말합니다.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120만개의 섬유조직이 눈에서 뇌까지 정확하게 순서를 맞게 붙여야 가능합니다. 많은 섬유조직이 맞지 않으면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모든 조직이 맞아야 하나님이 보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조직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애급으로 팔려간 다음에 보디발의 집에 종살이를 하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옥살이하는 중에 바로 왕의 꿈을 해몽하여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꾼 꿈도 아닌데 그 꿈을 보았고 해석도 하였습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 꾼 다음 자신이 꾼 꿈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다니엘은 자기가 꾼 꿈도 아니지만 그 꿈을 보고 해몽하였습니다. 사도요한은 다른 사도들이 순교하였지만 홀로 생존해 있었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어 환상 가운데서 하늘나라를 보고 증거하였습니다. 그는 하늘나라를 보며 “내가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라고 합니다. 하늘나라를 눈으로 보고 기록하였습니다. 그가 쓴 계시록을 통하여 우리는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하늘나라를 본 듯이 알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이들이 봄으로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요한이 봄으로 우리가 보는 복을 받았습니다. 요한에게 보게 하신 것,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복입니다.
조카 롯이 떠난 후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는 눈을 들어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니 하나님이 보라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라는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하나님의 계시가 보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합니다. 보는 것만큼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그 땅은 지금까지 이스라엘백성이 사는 땅입니다.
우리 옛 속담에는 “살림에는 눈이 보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썰미가 있어 한번 본 것은 잊지 않고 꼼꼼히 잘 챙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 보는 것은 그 자체가 복입니다. 봄으로 얻는 복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업가로 태어난 사람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눈만 뜨면 돈 벌게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안이 밝으면 온천지에 하나님의 모습, 계시가 보이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복입니다. 시편 123:1에는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고 합니다. 눈을 주께 향하면 주님이 보입니다. 눈을 돌리면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산에 올라가 도를 닦아서 드디어 도통하였습니다. 그는 다섯 가지 신통을 가지게 되었는데 눈으로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을 다 볼 수 있고, 땅 속의 보배도 훤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왕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대신에게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이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우리나라에 머물면서 내 창고에 보물이 많이 쌓이게 할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어리석은 대신은 그의 두 눈을 뽑아 가지고 왔습니다. 대신은 왕에게 “신이 그의 눈을 뽑아왔습니다. 이제 그는 절대 어디로 가지 못하고 항상 이 나라에 있을 것이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왕은 “그를 여기에 있게 하려는 것은 땅 속에 모든 것을 보려고 한 것인데 눈을 뽑았으니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보는 눈이 있어야 하지만 눈만 있어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눈이 우리 몸에 있어야 하고, 몸이 우리의 생각과 일치해야 보입니다. 우리에게 보는 눈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봄으로 복된 눈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16 하반절에는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고 합니다. 아무리 외쳐도 듣지 못하면 답답함을 넘어 저주스러울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들으라”고 끊임없이 외쳤습니다. 선지자들이 아무리 외쳐도 백성들은 듣지 않고 깨우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하여 백성들을 깨우치고 홍수로 멸망시킬 것을 말했지만 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에 천사의 말을 듣고 사위들에게 소돔을 피해 나갈 것을 권했지만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버릇은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잘 들으세요!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이 말은 농담이 아닙니다. 절대 농담으로 듣지 마십시오.
잠언 13:10에는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5:24에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합니다. 25절에는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합니다. 듣는 귀는 복이 있습니다. 듣는 귀는 ‘지혜’ 정도가 아니라 ‘살아나리라’고 합니다. 듣는 것은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은 오프라 윈프리라고 합니다. 오프라는 1985년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오프라 윈프리 쇼’는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 중의 하나입니다. 그녀의 성공비법은 ‘경청’이라고 합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오프라는 허리를 구푸려 듣는다고 합니다. 그녀가 들을 때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프라에게 듣기는 성공이었습니다.
듣기는 가장 어려운 작업입니다. 아이들이 질문을 할 때는 들어주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비난을 받을 수는 있지만 말을 많이 듣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 예는 없습니다.
자연주의자들은 자연의 소리를 듣습니다. 꽃이 피는 소리가 난다고 합니다. 싹이 돋는 소리도 들린다고 합니다. 산이 부른다고 합니다. 바다는 부른다고도 합니다. 영성가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 하늘의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귀신의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엉뚱한 소리가 들리는 환청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말에 “귀가 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귀가 먹으면 저절로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귀가 먹으면 세상의 소리 대신 내면의 소리가 들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말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기 때문에 오래 사는 것입니다.
저는 사고로 여러 곳을 다친 경험이 있습니다. 운동을 하다 눈을 다쳐 못 보기도 하고, 성대 결절이 생겨 수술한 후에 말을 못하기도 하고, 다리를 다쳐 한 달 동안 다리를 절기도 했습니다. 귀를 다쳐 귀가 먹지는 않았지만 우리 몸의 기관이 닫혀 있을 때 어떤지는 조금 압니다. 눈을 다쳐 보이지 않고, 성대를 다쳐 말하지 못하면 생각이 굉장히 단순해집니다. 내면에 알 수 없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바깥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하늘의 소리가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하늘의 소리가 더 잘 들립니다.
욥기 34:16에는 “만일 네가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합니다. 영혼의 귀를 기울이면 영혼의 소리가 들립니다. 들을 줄 아는 것은 지혜입니다. 아무나 다 듣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듣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어렵기 때문에 설교자가 설교하면서는 안 조는데 교인들은 설교를 들으면서는 좁니다. 설교자는 설교 끝나고 좁니다.
성경은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듣기를 권합니다. 들으면 깨달음이 있습니다. 들으면 변화가 있습니다. 들으면 구원과 생명과 성장이 있습니다.
일전에 텔레비전에 보니 사람 소리 흉내를 내는 앵무새와 코끼리가 나왔습니다. 코끼리는 사육사를 따라 “좋아, 좋아” 라는 말을 잘 하고, 주인이 잘 쓰는 일곱 마디 말을 한다고 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소통을 의미합니다.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꾸 듣다보면 말도 합니다. 말을 한다는 것은 친근감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듣다보면 하나님의 말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실 말씀을 내가 하게 되는 법입니다.
요즘에 ‘브라우니’는 인기 절정입니다. 놀이의 대상을 찾는 인간의 의식 때문에 봉제완구인 브라우니가 인기를 누리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브라우니가 광고도 촬영했답니다. ‘개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가 브라우니입니다. 지난 주간에는 정여사가 “죽 쒀서 개 줬네”라고 합디다. 자기보다 브라우니가 더 인기가 올라가서 하는 말입니다.
알아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브라우니에게 환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말을 못 알아듣고, 못 하니 더 재미있어 합니다. 전혀 소통이 안 되지만 정여사가 할 말을 다 해줍니다. 듣지 못하지만 다 들으면서 표현하지 않는 것으로 캐릭터를 설정해 놓으니 더 재미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브라우니는 완구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사람과 항상 말을 들어주고, 말이 통해야 합니다.
탈무드에는 “말을 많이 해서는 안 된다. 말하는 것의 두 배는 듣도록 하라”고 합니다. 사람은 말 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배나 많아야 합니다. 말을 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을 듣는 자가 복되기 때문입니다.
결 론
학교에 가지 않으려는 모르데카이라는 유대인 소년의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가 여섯 살 되었을 때 그를 학교에 억지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울면서 저항합니다. 엄마가 나가면 곧장 줄행랑을 쳐서 학교에서 도망을 쳤습니다. 여러 날 동안 훈계하고 설명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당근과 채찍이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포자기한 부모는 그를 랍비에게 데려가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랍비는 그 부모에게 “만약 말을 듣지 않는 상황이 생기면 그를 제게 데려 오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후 부모는 아이를 랍비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랍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이에게 다가가 오랜 시간동안 아이를 가슴에 품어주었습니다.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놓아주었습니다. 침묵의 포옹이 말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내고야 만 것입니다. 모르데카이는 학교에 가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후에 위대한 학자이자 랍비가 되었습니다. 눈으로 볼 생각도 않고, 귀로 들을 생각도 안 할 때 보고 듣게 하는 복이 있게 만들어줘야 합니다. 하나님의 품은 보고 듣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자마다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이 복을 누리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
신 29:1-9 / 김성광 목사
설교개요
A. 형통에 대하여
1. 형통 / 성공
2. 본문 배경 설명
B.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
1. 말씀을 지켜 행하면 모든 일이 형통한다 - 말씀, 순종(신 29:9)
2. 여호와께 간구하면 형통케 하신다 - 기도(대하 26:4~5)
3.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한다 - 성전, 교회, 사랑, 충성(시 122:6)
4. 공평과 의리를 행하면 형통한다 - 공평, 의리(렘 22:15~16)
C.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충성하며,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서, 형통하는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자
A. 형통에 대하여
1. 형통 / 성공
형통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입니까? 좋은 의미입니까? 여러분과 연관이 있었으면 좋겠습니까? 만약 형통을 싫어한다면 그 반대는 불통입니다. 만사가 불통하면 살맛이 나지를 않습니다. 삶의 의미도 없어집니다.
그런데 형통케 되는 축복을 받으면 모든 것이 다 잘됨으로 인생의 보람을 느끼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모두 형통케 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적극적인 사고의 힘』이라는 책을 쓴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 1898~1993)의 마케팅 고문이자 종교 신문사의 편집국장을 지낸 리차드 게일로드 브릴리(Richard Gaylord Briley)는 한 권의 책으로 수십억을 벌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사서 읽었겠습니까? 그 책의 제목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영적 비결』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성공에 대한 책을 쓰셨다. 그 책의 이름은 성경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 성공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견해서 책을 쓴 것입니다. 그 비결 중 한 가지는 하나님의 목적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큰 역사를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공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행복도, 건강도, 장수하는 것도, 자손이 번창하는 것도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성공하는 것까지 축복하셨습니다.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본 결과 직장인의 76.7%가 꿈을 접고 산다고 합니다. 아침에는 출근하고 저녁이 되면 퇴근하고, 그저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월급만 받고 살지 꿈은 없습니다. 그래도 학창시절이나 젊었을 때에는 꿈이 있었는데 지금은 젊은 시절의 자신의 꿈과 희망과는 다른 엉뚱한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고, 이제는 꿈을 접고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꿈이 있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꿈을 가지고 실천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20~30% 밖에 안 되고, 또 그 꿈을 실천하는 사람은 3~5% 밖에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한 사회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그 3~5% 안에 드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꿈을 가지고, 또 그 꿈을 실천할 때 3~5% 안에 들어가는데, 우리 성도 여러분은 모두 3% 안에 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형통하는 방법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시편 128편 1~2절 말씀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교회만 왔다 갔다 한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심에 하나님을 섬겨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 말씀을 듣고 행동에 옮길 때에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복만 받아도 좋은데 하는 일마다 다 잘된다고 하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게 구체적으로 가르쳐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 형통 못하면 그것은 모두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치 않기 때문에 형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재산이 많지 않고 배운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여러분의 삶은 반드시 잘 되고 형통하며 복 되도록 변화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형통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행하는 길이 형통합니다.(창 24:42) 하는 일이 형통합니다.(신 29:9) 어디로 가든지 형통합니다.(수 1:7) 자손이 형통합니다.(시 128:5~6) 행사가 다 형통합니다.(시 1:2~3) 집안이, 가문이 형통합니다.(욥 8:6) 범사가 형통합니다.(요삼 1:2)
2. 본문 배경 설명
오늘 본문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언약의 말씀을 지켜서 행동하면 하나님께서 그 민족을 또는 개인을 형통케 하시고 성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해서 10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베푸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제사장 국가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국가와 민족으로 약속을 하시고 축복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렘 11: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정탐하고 난 뒤 그 땅에는 거인이 살고 있다며 겁을 먹고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고, 기적도 허락하셨는데, 그들이 의심하고 불평했기 때문에 40년 동안 광야에서 연단을 시키셨습니다.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래서 불평과 원망을 다 제거하시고, 불신앙을 다 버리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에게 신앙과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압 분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다 모아놓고 그 언약과 약속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나라가 번창하고 창대케 되는 것을 축복으로 약속해주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공하고, 형통하고, 행복하게 되는 축복을 주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히 하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 그들은 죄를 짓게 되고, 악하게 되고, 방탕하게 되고, 교만하게 되어서, 질병으로 고생하고, 망하게 되고, 불행하게 되고, 절망에 처하게 됩니다. 그 사람들에게 오늘 이시간도 주께서 성경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경고하고, 다시 한번 희망과 용기를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알아보고, 어떻게 살아야 형통하고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는지, 함께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말씀을 지켜 행하면 모든 일이 형통한다’고 하셨습니다. 둘째, ‘여호와께 간구하면 형통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셋째,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한다’고 하셨습니다. 넷째, ‘공평과 의리를 행하면 형통한다’고 하셨습니다.
B.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
1. 말씀을 지켜 행하면 모든 일이 형통한다 - 말씀, 순종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신 29:9)
하나님의 말씀은 ‘언약의 말씀’,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서 약속을 하셨습니다. 본문말씀의 언약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십계명을 가리키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말씀이 언약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말씀을 다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하는 일이 형통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형통’은 히브리어로 ‘사칼’이며, 번창하고 성공한다는 뜻입니다. 즉, 형통한다는 것은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장 3절 말씀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 왕이 솔로몬에게 한 유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Abraham Lincoln ; 1809~1865)은 그의 평생에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과,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고난과 고통을 당해도 그는 성경말씀을 읽고 위로와 용기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더니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영국의 계몽주의 선구자 존 로크(John Locke ; 1632~1704)는 청교도적인 경향을 가진 국교도 집안에서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자랐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배운대로 『인간오성론』이라는 책을 써서 유명한 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주신 가장 위대한 축복들 중의 하나이다. 그 말씀은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축복을 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그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 말씀을 지켜서 행하면 형통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박찬선이라는 여자 성도는 주일학교 때부터 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그만 결혼을 믿지 않는 사람과 하고 말았습니다. 남편의 비위를 맞추느라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고, 신앙도 잃어버렸습니다.
시집가서 6개월 만에 남편의 회사가 부도가 났습니다. 그들은 회사의 빚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사를 가는 곳마다 도둑이 들어 그나마 있는 것도 자꾸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소화도 안 되고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남편이 그 아내를 보니 아내가 꼭 미쳐서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데리고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부부는 40일 새벽예배를 작정하고, 교회 예배 시간은 빠지지 않고 모두 참석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부부의 마음속에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가 말라기 3장 10절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는 말씀을 주셔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정성을 다해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부도난 회사가 다시 살아나고, 얽히고설킨 재정 문제가 해결이 되고, 남편의 회사가 품질경영우수상, 품질명장상, 대통령상을 받고 점점 번창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물질의 축복을 받고, 우울증에서 고침 받고, 큰 아파트도 구입하고,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복되고 풍성하게 채워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더니 축복을 받았습니다’라고 간증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만 왔다 갔다 한다고 축복받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순종을 해야 합니다. 새벽기도도 드리고, 십일조도 드리고,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열심히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형통케 하는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여호와께 간구하면 형통케 하신다 - 기도
“웃시야가 그 부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대하 26:4~5)
남 유다의 10대 왕 웃시야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웃시야 왕을 통해서 나라를 축복하셔서 영토도 확장되었고, 무역과 목축과 농업이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부요했습니다. 또 군사 정책도 잘 정비하여 강대국이 되어 주변 나라에서 조공도 받고, 애굽에까지 그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런데 형통하게 되자 그만 웃시야 왕의 마음속에 교만이 들어갔습니다. 성공하고 난 뒤에, 축복받고 난 뒤에는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그 말씀에 불순종해서 결국 그는 문둥병에 걸려서 별궁에서 지내다가 68세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열왕의 무덤에도 묻히지 못하고, 근처 땅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순종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고 형통케 하시지만, 불순종할 때에는 하나님의 축복에서 이탈되어서 비참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에 웃시야 왕이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형통케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찾아가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동안에는 형통케 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저버리고, 돈과 명예, 권세, 세상을 따라가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욥기 8장 5~7절 말씀에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욥이 고난당할 때에 수아 사람 빌닷이 와서 욥에게 한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부지런히 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정직하고, 인정받으면 형통케 하여 주십니다. 고난과 역경을 당해도 다시 복구하게 하시고, 낮아졌다고 할지라도 다시 높여주시고 창대하게, 번창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부지런히 구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결국 승리합니다.(출 17:11) 지혜와 총명을 주십니다.(왕상 3:11~12)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시 21:1~2) 자녀가 복을 받고(시 147:11,13), 귀신을 내어 쫓고(막 9:28~29), 교회를 부흥하게 하고(행 2:42,47), 병을 치료합니다.(약 5:16)
기도의 시작은 번영의 시작이지만 기도를 멈추는 것은 번영을 끝내는 것입니다. 기도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의 건강도, 축복도 함께 멈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삼성의 창업자 고(古) 이병철(李秉喆) 회장에게는 ‘세계를 보는 망원경’이라고 칭찬을 할 만큼, 똑똑한 참모가 있었습니다. 바로 신라호텔의 이길현 사장입니다. 그는 아주 독특한 경영철학으로 신라호텔을 최고의 호텔로 만들었습니다.
이길현 사장은 ‘초서비스 경영’을 “슬리퍼를 신고 로비에 나온 손님에게 정중하게 구두를 신으라고 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능한 직원은 객실의 키를 받아 손님에게 구두를 직접 건네준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지혜의 원천은 바로 매일 드리는 새벽기도와 묵상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새벽기도를 통해서 지혜를 터득하고 믿음을 가지고 성공하고 형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기도를 통해서 여러분의 믿음이 더욱 커집니다. 하나님께서 더욱 크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서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한다 - 성전, 교회, 사랑, 충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시 122:6)
이스라엘 성인 남자들은 1년에 세 번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모입니다. 일손을 놓고, 가족을 두고, 오랜 시간에 걸쳐, 멀고 위험한 길을 걸어 성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순종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적극적인 순종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형통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형통한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솨르바’, 즉 번성하고 풍부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야 더 번창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자는 형통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애정을 가지고 교회를 사랑하는 자는 범사에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하시고 승리하게 만드시고, 성공하게 만드시고, 노년을 편안히 살도록 재물의 축복도 허락하여 주십니다.
역대하 31장 21절 말씀에 “무릇 그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 하나님을 구하고 일심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고 하셨습니다. 히스기야 왕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열심으로 나와야 합니다. 체면을 차리기 위해서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은 형통케 하십니다. 예배도, 봉사도 열심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성전을 사랑한다는 것은 성전 건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축 35:21) 또 봉사해야 합니다.(대하 31:21) 성전을 위하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시 69:9) 성전에 거하는 것을 좋아해야 하고(시 84:10), 성전에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행 2:46)
유명한 토리 박사는 “승리하는 하루를 살고 싶은가? 새벽에 성전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했습니다.
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 1879~1955) 박사는 “나는 교회에 큰 찬양을 드린다. 이는 교회만이 진리 안에서 자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릴 때,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희망과 용기와 축복을 허락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이 계시는데 이 장로님은 아주 건강해서 보통 사람들보다 10~20년은 더 젊어 보이고 아주 정정하십니다. 또 자녀들도 다 잘 되었고 재물의 축복도 많이 받았습니다. 교회에서 좋은 일도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드립니다. 영적인 축복을 받아 얼굴에는 항상 은혜가 충만하고 전도도 많이 합니다.
그래서 그 장로님에게 그 비결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장로님께서 “건강의 복은 끊임없는 봉사에서 받았고, 자녀의 복은 주의 종들을 잘 섬김에서 받았고, 물질의 복은 주일 성수와 십일조 신앙에서 받았고, 영적인 복은 기도와 말씀에서 받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충성한 대로, 봉사한 대로, 열심을 다한 대로, 30배, 60배, 100배로 채워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교회의 김 장로님은 회사의 사장이고 교회에서 가장 존경받고 큰일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의 아버지가 목수였는데, 어렸을 때 너무 가난해서 한강 백사장 옆에 텐트를 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에 “아들아, 내가 교회에 피아노가 없어서 피아노를 바치기로 서원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죽는구나. 네가 내 대신 내 빚을 갚아다오.” 하고 유언을 했습니다.
김 장로님은 ‘돌아가시려면 그냥 돌아가시지 빚까지 얹어주고 가시는구나.’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유언이라 피아노를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당장 피아노를 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궁리하다가 남대문 시장에 가서 헌 재봉틀을 한대 구입해서, 원단을 사다가 내의와 잠옷 등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만든 것들은 어머니가 내다 팔았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피아노를 사서 교회에 바쳤습니다.
그런데 점점 장사가 잘 되어 직원을 한명, 두명 채용하게 되고, 재봉틀도 더 구입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500여명이 일하고 있는 큰 회사가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아버지가 빚진 것이 축복의 길로 안내한 것입니다.
4. 공평과 의리를 행하면 형통한다 - 공평, 의리
“네가 백향목으로 집 짓기를 경쟁하므로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비가 먹으며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공평과 의리를 행치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2:15~16)
이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여호야김 왕이 악을 행하고 우상을 숭배하자 경고한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야김 왕은 경고하고 또 경고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전쟁 중에 포로로 끌려가서 전사했습니다. 여러분, 성경말씀을 통해서 경고할 때 들어야 합니다. 경고를 해도 계속해서 듣지 아니하면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야김 왕에게 화려한 궁전을 짓는다고 왕의 권위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야김의 아버지, 선한 왕으로 명성 높은 요시야 왕은 공평과 정의로 나라를 다스려서 나라가 부강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요시야 왕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선한 정치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시야 왕의 삶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지식을 얻고, 지혜를 얻고, 용기를 가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사람에게 형통케 하는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26장 7절 말씀에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의롭게 사는 사람이 축복을 받습니다.
공평과 의를 행한 자는 건강의 축복을 받고(출 15:26), 후손이 복을 받으며(신 12:28), 땅을 기업으로 받고(신 16:20), 형통하게 됩니다.(욥 8:6) 재물의 축복을 받고(잠 8:20~21), 평안하고 안전하게 됩니다.(사 32:17)
여러분, 우리가 잘 되기 위해서, 재물을 얻기 위해서 죄를 짓고, 불법, 탈법, 비리를 행한다면 결국엔 비참하게 죄의 값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루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 121~180)는 “정의의 길을 따르는 것이 성공의 비결임을 명심하라.”고 말했습니다.
강철왕 카네기(Andrew Carnegie ; 1835~1919)는 사업을 통해서 크게 축복을 받고 재물도 얻어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한 경영자 모임에서 그의 사업 성공 비결을 묻는 질문에 “사업에 속임수를 쓰면 반드시 망합니다. 피와 땀을 흘려 공평하게 일하는 사업가만이 결실을 거둡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은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당합니다. 또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하면 자신도 불행하게 됩니다. ‘남의 눈에 눈물나게 하면 자기 눈에서는 피눈물이 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오늘날 우리 주변에 정치가로서 불법, 탈법, 비리를 행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총을 쓰는 사람은 총에 망하고, 칼을 쓰는 사람은 칼에 찔려 죽습니다. 뇌물 쓰는 사람은 뇌물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축복과 부요는 의로운 가운데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나라가 월드컵 16강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 16강에 들어가는 데에 아주 큰 역할을 한 히딩크 감독을 두고 다각도의 조명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간관계 3대 원칙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았습니다.
첫째는 기초체력을 다지는 것입니다. 원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공평과 의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종전까지는 실력이 아니라 뇌물이나 인맥, 학맥 등으로 선수를 채용했었습니다. 그런데 히딩크는 철저하게 실력위주로만 선수를 발탁했습니다. 셋째는 팀워크입니다. 이 정신에 위배되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소속팀으로 복귀시켰습니다.
여러분, 정치도 바로 되고, 경제도 바로 되야, 나라가 바로 되고 선진국가가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국가들은 다 선진국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형통케 하는 축복을 받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C.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충성하며,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서, 형통하는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자
말씀을 지켜 행하고, 또 하나님께 간구하고,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공평과 의리를 지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형통케 하여 주십니다. 그 회사를 형통케 하시고, 그 가정을 행복하게 하시고, 그 나라를 부강케 하여 주십니다.
우리나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15년 동안이나 갑상선 이상으로 인해 달걀만한 혹이 목에 나있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병원에 다니며 약도 먹고, 병이 낫는다면 무엇이든지 다 했는데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교회 나가는 친구가 있어서 친구에게 하나님께 기도하게 교회에 데려다달라고 얘기하고 교회를 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나온 첫날부터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데 목에 있는 혹은 없어지지 않고 갑자기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재물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갑상선을 고쳐달라고 새벽기도도 하고, 수요일, 금요일, 예배라는 예배는 빠지지 않고 열심히 출석했는데, 혹은 없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식당에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정신없이 바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친구가 와서는 “어? 없어졌네. 혹이 사라졌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목에 있던 혹이 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했더니 자기도 모르게 병도 낫고 재물의 축복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여 주신 것입니다. 믿는다고 결심을 했으면 철저히 믿어야 합니다.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고 더 크게 번창케 하십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만사 형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
신 29:1-29 / 양인국 목사
1. 29장부터 30장까지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모압 땅에서 주신 언약의 말씀들이다. 모세는 이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해 주기 전에 먼저 그들로 하여금 역사의 회고를 통하여 언약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도록 했다. 이것은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새로운 교훈을 전해 주고자 할 때마다 사용한 방법이다. 즉 모세는 하나님께 받은 새로운 말씀들을 전하고자 할 때마다 언제나 무엇보다 먼저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말해 주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말씀해 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도록 함으로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모든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야 말로 믿음의 삶과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2.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어떤분이신지 말해 줄 때 무엇보다 먼저 그들을 애굽의 종 됨으로부터 이끌어 내신 분이심을 말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29:2,3)” 이 말씀에서 “애굽 땅에서 행하신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 됨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바로 앞에서 행한 열 가지 이적들을 말한다. 바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크고 두려운 이적들을 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이스라엘을 놓아 주려고 하지 않았다. 바로가 이처럼 마음을 완고하게 할수록 하나님은 더 큰 이적을 행하심으로 결국은 바로를 굴복 시키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됨으로부터 구원해 주셨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은 세상의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됨으로부터 구원해 주고자 하셨기 때문에 애굽 왕 바로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됨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죄의 종됨으로부터 자유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자 뜻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종으로부터 자유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과거 이스라엘이 이 은혜를 잊어버린채 살았던 것처럼 오늘의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 은혜를 잊어버린 채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은혜를 잊어버린 채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29:4)”
다음으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기업이 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여기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신다는 것은 환경을 초월하여 언제나 그들의 필요를 보장해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가르쳐 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출애굽 후 광야에서 어떻게 사십 년 동안 살 수 있었는지 돌아보도록 하였다.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너희에게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29:5,6)” 출애굽 후 사십년의 생활을 돌아본 다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의지하고 있는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생존을 위한 환경으로서 가장 열악한 광야에서 한 민족이 사십년 동안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너희로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에서 “떡” “포도주” “독주”들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일상적으로 먹던 음식들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양식들은 수고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수고해도 양식을 구할 수 없는 광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심으로 이와 같은 양식 자체를 구할 수 없도록 하셨다. 이것을 본문은 “너희로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다”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생존할 수 있도록 하셨는가?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주심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면 어떤 환경에서도 안전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와 같은 사실을 배우도록 하신 것은 환경에 의존하여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도록 하려 하심이었다. 즉 하나님을 기업으로 믿고 살 때 변하는 환경 가운데서도 샬롬을 누릴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속의 유혹으로부터 자유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광야를 허락해 주신 것이다(29:6). 이런 의미에서 광야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교육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대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보장해 주시는 분이심을 가르쳐 주었다. 특별히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헤스본 왕 시온과 바산왕 옥과 싸워서 어떻게 승리했는지 돌아보도록 했다. “너희가 이곳에 올 때에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우리와 싸우러 나왔으므로 우리가 그들을 치고 그 땅을 차지하여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나니(29:7,8)” 민수기21장 21-35절은 이스라엘이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 어떻게 싸워 승리했는지 말해 주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들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다만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향해 가기 위하여 그들의 땅을 통과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스라엘의 요청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군사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치러왔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고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해 주심으로 인하여 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 전쟁이 주는 교훈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에 순종하여 약속의 땅을 향해 나갈 때 그것을 방해 하는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승리하게 해 주셨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의 탈출과 광야의 생활 그리고 대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이 역사는 언제나 이스라엘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에 순종하여 약속의 땅을 향할 때 어떻게 인도해 주시는지 그리고 약속의 땅을 향해 나갈 때 그 길을 방해 하는 대적들에 대하여 어떻게 행하시는지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 역사를 기억할 때마다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었고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이 요청 될 때마다 이 역사를 기억해야 했던 것이다.
모세가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가르친 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도록 하려 함이었다. 13절은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 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여기 “그는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라”는 말씀은 내용으로 볼 때 29장의 키워드(Key word)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29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고 의지하며 살도록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원하셨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며 살기 원하신다는 의미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이 어떤 뿐이신지 알아야 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주셨을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언급한 것처럼 모든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하여 요청되는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아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됨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분이시고 환경을 초월하여 언제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시고 모든 대적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싸워 승리하게 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들이 하나님을 이와 같은 분으로 알고 있다면 세상에 사는 동안 두려워하거나 염려해야 할 일이 있겠는가? 그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 숭배에 빠지거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는 일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다. 그래서 모세는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을 준 것이다. 즉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고 죄를 범하고도 무감각하여 회개할 줄 모르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야말로 복된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황폐하게 하는 것들이다(29:21). 이와 같이 사실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복된 삶은 땅에 의존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의존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막에 거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신다면 그곳에서도 복된 삶을 살 수 있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거할지라고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지 않으신다면 황폐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언제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약속의 땅일지라도 죄로 인하여 오는 황폐함은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욱 깊이지게 해 주시고 이로 인하여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아멘
은혜 그리고 감사
신 29:1-19 / 양인국 목사
1.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할 것을 요청하신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주제를 “은혜 그리고 감사”라고 한 것이다. 여기 “감사”라는 말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원한다면 감사라는 말과 대립적인 말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빛을 이해하기 위해 어둠을 생각해 보는 것과 같은 이치(理致)이기 때문이다. 감사와 대립적인 말은 무엇일까? 믿음의 사람으로서 이 물음에 대해 자연스럽게 나오는 대답은 “원망과 불평”일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의 사람들에게 언제나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여정을 볼 때 감사와 원망은 언제나 대립적인 관계로 표현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하여 출애굽 한 후, 약속의 땅으로 향하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모든 여정은 감사할 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원망과 불평을 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그들은 넘어졌다. 여기 그들이 넘어졌다는 것은 감사해야 할 그들이 오히려 원망하고 불평함으로 약속된 축복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의미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여정에서 감사와 원망은 언제나 대립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와 대립적인 말을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원망과 불평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감사와 대립적인 말을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언어적으로 감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한 것만은 아니고, 감사와 원망이 우리의 삶 가운데 가져다주는 결과를 생각하기 위함이다. 경험적으로 볼 때 사람들 가운데 감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할수록 그들 자신과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는 더욱 아름답게 세워지지만, 원망과 불평의 말을 많이 사용할수록 그들과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는 황폐해 간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감사할 것을 권고하신다. 그러므로 이 권고의 말씀은 우리의 복된 삶을 위하여 주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을 복된 삶으로 세워주는 감사가 하나님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하여 본문을 통해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
2. 본문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에게 주신 두 가지 법도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파종한 곡식이 결실할 때 그것들 가운데 맏물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것이다. 여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곡식 중의 맏물과 소득의 십일조는 모두 은혜에 대한 감사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곡식 중의 맏물과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자들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해 주신다는 약속은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자들을 축복해 주신다는 약속이다. 이와 같은 약속들은 우리가 동일한 환경에 있을지라도 감사의 유무에 따라 복된 삶을 살기도 하고 넘어지는 삶을 살기도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실제로 동일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은 시간이 더해 갈수록 보다 더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지만, 원망과 불평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황폐해 간다.
어째서 감사의 유무가 우리의 삶에 이토록 큰 영향을 주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들 가운데 무엇보다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감사를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감사하는 자들에게 축복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살펴볼 때 거기에서 발견하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무엇이 필요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째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시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도록 하려 하심이라는 것이다. 여기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또한 창조의 목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바울의 고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 즉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 때 우리가 지금 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그 은혜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진정한 감사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신앙의 고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기를 요구하시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고 이로 인하여 창조주로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산다는 것은 베풀어 주신 은혜들을 감사하며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째서 감사의 유무가 우리의 삶에 이토록 큰 영향을 주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감사 자체가 우리를 복된 삶으로 이끌어 주는 은혜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감사는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고, 이웃이 베풀어 주는 은혜들을 알지 못하고는 이웃에게 감사할 수 없다는 의미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한 이웃에게 감사하고 있다는 것은 이웃이 베풀어 준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받은 은혜를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에 들이 않는 것들을 생각함으로 원망하고 불평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고의 전환이 없으면 감사의 생활화를 가져올 수 없다. 이 말을 반어적으로 표현한다면 감사가 생활화 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나 이웃들에 대하여 언제나 먼저 베풀어 주신 은혜들을 생각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처럼 베풀어 주신 은혜들을 먼저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우리의 이웃뿐만 아니라 모든 환경 즉 형통한 환경과 시련의 환경들까지 모두 합력하여 우리의 삶을 아름답고 온전하게 세워주기 위한 은혜의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감사가 있는 곳에는 모든 것들의 존재 자체의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 모두는 더불어 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감사는 우리를 복된 삶으로 그리고 더불어 사는 삶으로 이끌어 주는 은혜의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은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을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은혜를 생각하기보다는 탐욕에 끌려 자기중심적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런 상태로는 시간이 더해갈수록 우리의 삶은 세워지기보다는 황폐해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을 바꾸어 이웃이 내게 베풀어 준 호의와 도움을 먼저 생각하고 그것에 대하여 감사하며 산다면 우리와 사회는 시간이 더해 갈수록 보다 더 아름답고 온전하게 세워져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원망과 불평하는 삶을 감사의 삶으로 바꿀 수 있는가? 본문을 통하여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는다면 그것은 베풀어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곡식의 맏물과 십일조를 요구하시며 어째서 그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도록 하셨다(26:5-10).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예물을 드릴 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한 마음이 생길 때 예물을 드림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물은 언제나 우리에게 감사의 표식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주시는 말씀을 충분히 이해했다면 동일한 환경 가운데 살고 있을지라도 감사의 유무에 따라 복된 삶을 살기도 하고 넘어지는 삶을 살기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이다. 이후로 우리 모두 감사의 생활화야 말로 우리와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 더 나가서는 세상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보다 더 아름다운 곳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감사의 생활화를 위하여 힘쓰기 원한다. 특별히 예물을 감사의 표식으로 삼고 은혜에 감동이 있을 때 예물을 드림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말씀에 따라 예물을 드릴 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자.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대로 우리와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보다 더 복되고 아름답게 세워 주실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의 삶 가운데 감사가생활화 되게 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