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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1,19-2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25)
오늘 복음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한 가족의 슬픔에서 시작됩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달려가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에는 믿음과 아쉬움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왜 더 일찍 오시지 않으셨는지 이해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우리도 삶에서 같은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주님, 왜 조금만 더 일찍 도와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왜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나도록 두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왜'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으시고,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압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당시 많은 유다인들이 믿고 있던 부활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녀의 희망은 마지막 날, 먼 미래를 향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희망을 한 걸음 더 깊은 곳으로 이끄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부활은 먼 훗날에만 기다리는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이미 시작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죽음 이후에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그 생명을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죽음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이 아니라, 죽음도 끊을 수 없는 생명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병과 실패, 이별과 눈물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우리 삶의 마지막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 곳에서는 언제나 생명이 마지막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의 부활만 믿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마르타는 모든 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오빠의 죽음이라는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예수님의 말씀도 아직 눈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을 신뢰하며 고백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믿음은 모든 의문이 해결된 뒤에 하는 고백이 아닙니다. 이해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도 먼저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 믿음 안에서 영원한 생명은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됩니다.
주님,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도 주님을 원망하기보다 먼저 주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먼 훗날의 희망만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 제 곁에 계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으며 살아가게 하시고, 그 믿음 안에서 어떤 어둠도 이길 수 없는 생명을 날마다 누리게 하소서. 아멘.
(천 사비나 수녀님)
7월29일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요한 11,19-27
저는 누군가의 신앙을 평가해야 할 때 이것만 봅니다
존 록펠러는 23세에 이미 백만 달러를 벌었습니다.
43세에 세계에서 가장 큰 독점기업인 스탠다드 오일 컴퍼니를 세웠습니다.
그의 재산은 현 시가로 따지면 500조가 넘습니다.
하지만 53세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십일조를 철저히 내는 것은 물론이요, 주일엔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좋은 신앙을 가졌다고 보아야 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는 늘 긴장하며 걱정으로 가득 찬 날들이 이어지다 보니 건강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습니다.
록펠러의 전기를 썼던 존 윙클러에 따르면 53세의 그는 “미라처럼 보였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때 그는 알로페시아(alopecia)라는 희소 질환으로 1년 시한부 인생을 통고받았습니다.
윙클러에 따르면,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 한때는 모유만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본래 록펠러는 건강 체질이었습니다.
농장에서 자랐기에 강인한 어깨, 꼿꼿한 자세, 힘차고 활달한 걸음걸이를 갖췄습니다.
하지만 “끊임없는 일, 끝없는 걱정, 끊이지 않는 비난, 불면의 밤들, 운동과 휴식 부족”이 커다란 타격을 입혀서 결국 그를 주저앉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음식을 먹을 수 없어 일주일에 백만 달러를 벌었지만, 식비는 2달러도 지출하지 않았습니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비록 십일조를 하고 기도하고 교리 교사 봉사하더라도 신앙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익이 생겼을 때는 모자를 바닥에 던지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지만, 손해를 보면 곧바로 병이 났습니다.
돈의 노예였던 것입니다.
한번은 오대호를 거쳐 4만 달러어치의 곡물을 실어 나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곡물에 보험을 들지 않았습니다.
150달러 정도의 비용이 추가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이리호에 풍랑이 일었습니다.
파트너였던 조지 가드너가 아침에 사무실로 가보니 록펠러는 화물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록펠러가 가드너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너무 늦은 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보험을 들 수 있나 알아보게. 어서 빨리!”
가드너는 서둘러 도시 외곽까지 달려가 보험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록펠러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그사이 화물이 안전하게 도착했다는 전보가 온 것입니다.
록펠러는 150달러를 낭비했다는 이유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결국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한 해에 50만 달러가 넘는 돈을 벌던 그가 자기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데 쓰이는 150달러를
아까워했다는 말은 그가 진정한 신앙인이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는 즐거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근심과 걱정, 두려움 속에서 돈만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죽는 게 두려웠는지 신앙생활은 열심히 했지만, 그 신앙이 그의 감정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감정을 바꾸지 못하는 신앙은 거짓 신앙입니다.
나중에 한 아이에게 수술비를 지원해 주며 이후 40년을 더 살게 되었지만, 그 이전까지는 그의 신앙이 그의 감정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음이 확실합니다.
그러니 신앙인이 아니었습니다.
감정을 바꾸지 못하는 신앙은 가짜입니다.
오늘은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축일입니다.
셋은 자매입니다.
라자로의 죽음으로 마르타는 예수님을 원망하는 말을 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에도 자신만 일하며 동생은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마르타의 근심을 덜어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이 믿음이 마르타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오빠가 죽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하였을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당연히 우리 감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걱정, 근심, 두려움, 불안이 사라지고 감사와 기쁨과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아직 예수님을 만난 게 아닙니다.
성당에서 나갈 때 우리 감정을 살펴봅시다.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미사를 의미 없게 한 것입니다.
한 소녀가 산길을 걷다가 나비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버둥대는 것을 발견하고는
가시덤불을 제치고 들어가 거미줄에 걸려있던 나비를 구해주었습니다.
나비는 춤을 추듯 훨훨 날아갔지만, 소녀의 팔과 다리는 가시에 찔려 붉은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그때 멀리 날아간 줄 알았던 나비가 순식간에 천사로 변하더니 소녀에게 다가왔습니다.
천사는 자기를 구해준 은혜에 감사하면서 무슨 소원이든 한 가지를 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그때 천사는 소녀의 귀에 무슨 말인가를 소곤거리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소녀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결혼해서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도록 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 있었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녀를 사람들은 부러운 눈빛으로 우러러보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예쁜 소녀가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 임종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할머니가 죽기 전에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웃으시며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소녀였을 때 나비 천사를 구해 준 적이 있지, 그 대가(代價)로 천사는 나를 평생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 주었어….그때 천사가 내게 다가오더니 내 귀에 이렇게 속삭이는 거야.
‘구해주어서 고마워요. 소원을 들어 드릴게요.
무슨 일을 당하든지 감사하다고 말하면 평생 행복하게 될 거예요.’
그때부터 무슨 일이든지 감사하다고 중얼거렸더니 정말 평생 행복했던 거야.
사실 천사가 내 소원을 들어준 게 아니야.
누구든지 만족한 줄 알고 매사에 감사하면, 세상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이 말을 끝으로 눈을 감은 할머니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평온함이 가득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을 만났습니다. 손과 발과 옆구리에 상처를 지니고 계셨지만 분명 살아계셨습니다.
그 모습은 우리 미래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을 만난 이의 모습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두려움이 사라지고 기쁨과 열정이 넘쳤다는 것입니다.
우리 감정을 바꿔놓지 않는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이 우리 감정을 바꿀 수 없다면, 그것도 지금 당장 바꿀 수 없다면 기도는 헛한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순간, 성체를 영하는 순간 기쁘고 행복해져야 합니다. 이것은 의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아직은 부활이요 생명으로 만난 것이 아닙니다.
기분을 바꿔주지 못하는 건 신앙이 아닙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강론>
(2026. 7. 29. 수)(요한 11,19-27)
<부활이며 생명이신 예수님>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19-27)>
1)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요한 11,5).” 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친구 라자로’ 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요한 11,11).
루카복음에는 마르타가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 들여서 접대하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있고(루카 10,38-42), 요한복음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요한 12,1-8).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실 때면
마르타의 집을 숙소로 삼으신 것으로 보입니다(마르 11,11).
그 세 사람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르타의 신앙고백입니다(요한 11,27).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도 중요합니다(요한 11,38-44).
이처럼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는 복음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들인데, 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루카복음 8장 1절-3절의 ‘예수님의 활동을 도와드린 여자들’의 명단에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름이 없습니다.
<루카복음 8장 3절에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도 마르타와 마리아는 ‘다른 여자들’에 포함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 있었던 여자들의
명단에도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름이 없습니다.
라자로의 경우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는 왜 라자로를 사도로 뽑지 않으셨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당시 상황을 잘 모르지만, “성소는 사람마다 다르게 주어진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처지와 환경과 형편에 따라서,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섬깁니다.
<라자로의 경우에는 “몸이 약해서 사도로 뽑히지 못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떻든 마르타는 온 삶으로 주님을 섬기고, 또 중요한 신앙고백을 한 신앙인이고, 마리아는 말없이 행동으로 주님을 따르고 섬기면서 증언한 신앙인이고, 라자로도 역시 자신의 온 삶으로 주님을 증언한 신앙인입니다.
2)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신앙고백들 가운데에서 중요한 고백을 네 가지로 꼽을 수 있습니다.
(1)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베드로 사도의 이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는 고백이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출발점이 되는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습니다(마태 16,18).
(2)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어떤 백인대장의 이 신앙고백은,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시는 분’이라고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고 믿는다는 고백이고, 사실상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백인대장을 칭찬하셨습니다.
(3)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마르타의 이 신앙고백은, 겉으로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과 같은데, 뜻이 다릅니다.
마르타의 신앙고백은 바로 앞에 있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에 대한 응답이고,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마지막 날의 부활을 ‘막연하게’ 믿고 있었는데, 마르타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권한을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다고 명확하게 고백했습니다.
(4)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토마스 사도의 이 신앙고백은 모든 신앙고백을
종합한 것이고, 최종적인 신앙고백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3)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심판하는 권한’ ‘의인들에게 생명을 주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권한들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생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나중에’가 아니라 ‘지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요한 5,25).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7월29일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복음: 요한 11,19-27: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1. 복음 말씀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절)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마르타의 대화를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25절)이라고 선포하시는 장면을 보여 준다. 마르타는 인간적인 슬픔 속에서도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이는 단순히 먼 훗날의 희망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주어지는 구원에 대한 고백이었다.
2. 교부들의 묵상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마르타의 믿음을 이렇게 해석한다. “마르타는 죽음의 현실 앞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였다. 그녀는 눈앞의 죽음을 보면서도 생명의 주님을 고백하였다.”(Hom. in Ioannem 62,1 의역) 성 아우구스티노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죽은 이들을 일으키시는 분이다. 죄 속에서 죽은 영혼을 지금 여기서 되살리시는 분이며, 마지막 날에는 우리의 육체까지 일으키실 것이다.”(In Ioannem Tractatus 49,15 의역) 이 가르침은 구원이 단순히 미래의 약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3. 교회의 가르침
교리서는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당신 성령과 성사들을 통해 이미 당신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다. … 마지막 날에 이 생명은 충만하게 드러날 것이다.”(1000항 요약) 사목 헌장도 이렇게 가르친다. “사실 인간은 오직 육화하신 말씀 안에서만 인간 존재의 신비를 참으로 깨닫는다. …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새 생명을 열어 주셨다.”(22항 요약) 즉, 부활은 단순히 종말론적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지금 체험되는 현실이다.
4. 오늘의 메시지
예수님은 마르타에게 말씀하신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23절). 이 말씀은 단순히 라자로를 위한 약속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약속이다. 부활은 현재의 체험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누리는 구원인 것이다. 믿음의 고백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그분의 말씀을 살아내는 삶을 말한다.
5. 삶의 적용
우리도 믿음의 고백을 일상에서 실천해야 한다. 마르타처럼 고통과 죽음의 현실 속에서도 “주님은 그리스도시다.”라는 믿음을 고백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구원을 체험하는 것이다. 매일의 기도와 성사 안에서, 그리고 이웃 사랑을 통해 지금 여기서 구원의 은총을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부활 신앙이라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작은 희생과 자기 부정의 삶에서 이미 부활의 신비를 맛보게 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세상에서 부활 신앙의 증거자가 된다.
6. 결론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 성 라자로의 삶은 신앙, 사랑, 그리고 부활의 증언을 보여 준다. 우리도 “예, 주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절)라는 고백을 삶으로 드러내며,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 신앙을 살고 증언하는 제자가 되어야 하겠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