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27대 선덕 여왕과 마복자의 비화
신라 27 대 선덕여왕 632-647 년 재위15년
신라 24 대 진흥왕은 첫째부인의 아들을 폐위하고 둘째부인의 아들을
신라 25 대 진지왕으로 왕위를 계승케했다
진지왕은 태종 무열왕(김춘추)의 할아버지다
진지왕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여색만을 탐해
이복형의 아들 신라 26 대 진평왕에게 왕위를 물려줘야했다
진평왕은 아들을 없었고 천명,덕만,선화 딸만 셋을 두었고
진지왕은 아들 용수,용춘,비형,셋을 두었다
용수와 용춘은 같은 어머니고 비형은 죽은 진지왕의 혼령과 결혼한
도화라는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비형은 마복자 일수도 있구 아님은 예수님 처럼 태어난 인물이다
진평왕 부인은 천명에게 오촌아쩌씨 되는 용수와 용춘중에 누가 더 좋으냐? 고 묻자
천명이 용,,,,하고 말끝을 흐리자 당년히 첫째 용수인 줄 알고 결혼을 시켜 버렸다
천명은 용수보다 용춘을 더 좋아 하였는데 원하지 않은 용수의 부인이되어
부부사이는 원만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들 춘추를 낳았다
둘째 덕만은 용춘과 경혼하고 셋째 선화는 서동요 작가인 백제 무왕에게 시집을 갔다
형인 용수는 자기부인 천명이 용춘을 더 좋아하는 것을 알고
동생 용춘에게 천명과 부부연을 맺어라고 하였으나 용춘은 거절했다
용수가 죽음에 이르러 동생 용춘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천명은 아들 춘추를 데리고 시동생 용춘에게 시집갈 수 있었다
덕만과 용춘사이에는 자식이 없어 용춘이 진평왕에게 사정하여
천명과 아들 춘추를 데리고 궐 밖에 나가서 덕만과 별거 생활을 했다
덕만은 언니 천명에게 용춘을 양보하고 몇명의 대신들과 살았지만
자식을 낳을 수 가 없었다 밤이면 수많은 건장한 사내들과도
침수를 같이 했지만 역시 헛빵이였다
진평왕이 붕어하자
진덕은 신라 27 대 선덕여왕으로 등극하였다
제왕은 무치 (부끄러움이 있는 사람은 왕이 될 수 없다)
선덕여왕은 왕위에 오른후 궐 밖에 나가사는 첫번째 남편 남푠을 불려
세남자와 함께 살았으며 그것도 모자라 밥이면 건장한 청년과
신라와 무역하는 희랍인들과의 잠자리도 마지하지 않았다
재위 15 년을 끝으로 선덕여왕이 붕어하자
선덕여왕 사촌 여동생인 신라 28 대 진덕여왕에게 왕위가 계승되었고
진덕이 붕어하자 신라 29 대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왕위를 이었다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 문희와 김춘추의 관계
김유신 장군의 여동샌 문희는 결혼도 하지않고 김춘추와 관계를 맺어
임신을 하였을 때 김춘추는 이미 딸 하나를 둔 유부남이였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첫부인이 운명하자
문희가 왕비가 될 수 있었다
동생에게 꿈을 잘못 팔아 뒤전으로 쳐졋던 언니 보희도
결국은 김춘추의 부인이 되었다
김춘추와 문희의 사이에 태어난 하나뿐인 고명딸은
나이많은 외삼촌 김유신의 부인이 되었어니 화랑도의 정신과 부부인연은
별개 였던 시대였다 (화랑도 정신 계승 주위보)
신라시대에는 세계 어느나라에도 없었던 마복자(磨腹子) 제도가 있었다
마복자는 배를 문질려서 만든 아이
국가나 조직의 대빵이 부하의 부인이 마음에 들었을 때
임신한 부하의 부인을 자기부인으로 만들어 뱃속의 아이와 인연을 맺는제도
자기부인 배 안아프게 아 맹그는 훌륭한 지혜가 마복자인지?
왕과 귀족의 마복자가 되면 출세가 보장 되기 때문에 왕과 귀족의 마복자가 되기를
자기부인에게 권했다고 전해짐,,,
첫댓글 선덕여왕 남편이 세명이고 그외에 젊은 청년과 희랍의 상인들과 자고 자기 남편을 언니에게 양보 하기도 하고 ㅎ ㅎ ㅎ
모계사회였으니 정상이죠.
그런 풍습이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졌어야 하는데.. ㅋㅋㅋ
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