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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스케치
나는 왜 그렇게 대만에 가고 싶었을까.
해외여행을 하자는 의견이 있을 때마다 “고궁박물관이 그리 좋단다.”하며 대만을 추천 했지만 이왕 가는 김에 멀리 가자는 게 대세여서 번번이 묵살 당했다. 그래서 가까스로 가게 된 이번의 대만여행은 정말 기대가 많았다.
구름이 잔뜩 낀 추운 겨울날씨였지만 구름위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고 눈부신 햇빛은 기내에서 흘러나오는 애절한 곡조의 중국음악과 어울려 마음을 설레게 했다.
중정 국제공항에서 만난 가이드는 대만을 고구마모양의 땅이라고 했다. 작은 땅에 2천3백만 인구로 인구밀도가 매우 높으며 40여개의 높은 산이 있고 제일 높은 옥산은 3952미터로 한라산의 두 배 높이가 된다니 기울어 진 국토의 표면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동쪽이 고산지대이고 서쪽이 평야지대이니 고구마 모양이 맞는 말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내 눈에는 대만 영토 모양이 한 장의 나뭇잎 같게만 보였다. 바다를 떠돌다 이제 막 거대한 중국 옆을 지나가는 한 장의 나뭇잎. 그래서 약하고 외로워 보이는 작은 섬, 대만.
대만은 96년의 역사만을 가진 나라로서 1911년 중화민국으로 시작하여 1940년대만으로 이동한 후 지금에 이르렀으니 오직 근대사만 있는 나라이다.
중국과의 분쟁으로 국제사회에서 통하는 국가명이 없는 불행한 나라가 되었으며 아테네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가 자국의 국기를 쓰지 못하고 지방기를 올리고 울었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과거를 생각게 해서 듣는 이도 눈시울이 뜨거웠다.
대만은 본토수복의 과제를 가진 것이나, 작은 나라라는 점, 국민소득 14000불정도, 효를 중시하고 교육열이 높으며 장례문화가 복잡하다는 등이 우리와 많이 닮아 정이 가는 나라이다. 시차도 1시간의 차이 뿐이다.
대만은 또 북경어를 사용하며 2명당 1대의 오토바이 이용인구로도 유명하다고 했다. 날씨가 덥기 때문에 15분이상의 거리는 무조건 오토바이를 사용한다고 했다. 덕분에 교통체증은 없었다.
수도 대북의 거리를 보고 있자면 도무지 미관을 생각하지 않은 듯하고 외국관광객을 의식하지 않은, 내실을 쫓는 그들을 잘 대변하는 듯 했다. 모든 건물은 쓸 수 있는데 까지 쓴다며 일제가 남겨놓은 건물을 아직도 국가 관공서로 사용하고 있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우중충한 건물과 새 건물이 함께 어울려 있으며 도심 복판에 폐가 같은 아파트에 빨래가 나부끼고 있기도 했다
“저 귀신같은 집은 40년이 넘었고요. 그런데도 잘 살고 있고요. 대만은요. 태풍이 잦고 연간 강수량이3000미리로 벽을 칠해도 금방 벗겨져서 보통 건물은 아예 칠도 하지 않아요. 그리고 여기는 경제만 신경 쓰고 관광에는 신경 안 쓰지요.”우중충한 도시를 마음에 안 들어하는 우리의 말을 듣고 가이드가 하는 말이었다.
“하기야. 중국 사람들은 실속만 챙겨 내실이 있잖아요.”누군가 대답했다.
대만관광은 고궁박물관, 충렬사 교대식, 공자사당, 중정기념관관람, 등으로 이루어져있었다.
고궁박물관은 중국 5천년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박물관으로서 그 규모는 작으나 소장물의 수로는 세계 4대박물관 중의 하나라고 했는데 소장한 유물이 모두 ‘자기네 것’이라는데 의미가 있고 모든 전시품이 궁전에서 중국황족들이 쓰던 것이라는데 매력이 있는 것이다.
1933년 일본군의 침략으로 보물의 도난과 국외유출을 우려한 국민당은 이 보물들을 약 2만 상자에 나눠 담고 남경을 통해 상해로 옮겼다가 전쟁이 계속되자 이 보물을 전국에 분산 보관했다가 1945년 2차 세계 대전의 종료와 함께 다시 베이징으로 모았지만 1949년 국민당이 중국공산당에 패하고 대만으로 퇴각하는 길에 보물을 모두 옮겨와 1965년 임시 국립고궁박물관을 세운 것이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많은 보물을 남쪽으로 운반하여 대만까지 오는데 드는 인적 희생과 고생을 듣고 보니 대만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선견지명을 가진 지도자를 두었다고 생각되었다. 그들이 인명의 큰 희생을 무릅쓰고 옮겨온 숫자는 70만 여점으로 너무나 방대한 물량이라 한꺼번에 전시 할 수가 없어서 중부 고산지대 중턱 지하에 보관해 두고 일년에 만점씩 돌려가면서 공개한다고 하니 70만점을 모두 관람하려면 70년이 걸려야 한다는 말이다. 바로 지금 전시된 품목은 70년 후에나 또 세상에 나온다는 것이니 그 대단한 수량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북경에도 고궁박물관이 있다지만 수량이나 가치로 보아 이곳과 비교할 수 없고 중국사를 연구하려면 이 곳을 꼭 찾아야 한다니 관광객유치를 위해서 몸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곧 국립 고궁박물관은 대만의 자존심이다. 이러한 유추가 가능하다.
중국사에 대한 식견이나 고미술에 대한 식견이 좁은 내가 어떻게 그 아름다움과 정교함,신비로움을 다 말로 표현 할 수 있을까? 큰 것은 크게, 작은 것은 한없이 작게, 정교함의 극치를 이루어낸 작품들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청동화로 안에 새겨 진 글자의 완벽함. 뼈에 새긴 그림. ‘하와야’라고 불리는 배추모양의 옥 조각품, 수많은 서화, 향나무로 만든 조각. 3대에 걸쳐 완성했다는 작품, 이루 말 할 수 없는 진기한 미술품을 보고 필력으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나는 눈으로 보고 가슴에 그림으로 그려놓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중국도자기’하면 언듯 울긋불긋한 화려한 색체를 연상하지만 사실은 15세기 청나라 이후부터 도자기에 색체가 들어갔다는 얘기며 중국도자기의 15세기 전후를 비교한 서양 사람들이 도자기의 변화에 놀라 중국을 차이나로 부르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충렬사는 우리의 국립묘지와 비슷한데 내전당시 희생된 영령들을 모신 사당이었다.
마침 우리가 도착 했을 때는 사병들의 교대식이 있었는데 나라마다 교대식은 흥미있는 볼거리지만 충렬사의 교대식은 총을 다루는 행동이나 절제된 행동 등이 매우 이채로웠다. 관광객들이 사병들의 발자국을 그대로 밟아가며 웃기도하고 같은 모션으로 걷기도 하면서 위패가 모셔진 사당건물까지 따라갔다. 관광객들이야 생각 없이 웃으며 지껄이며 가고 있지 만 총을 멘 젊은 사병들은 조국수호의 결의로 얼굴이 얼마나 굳어있는지 판문점에 선 우리의 아들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애잔했다. 돌덩이만한 영토에 살면서 거대한 바위 같은 본토를 수복하겠다는 힘겨운 과제를 가진 어린 청춘들이 안스러웠다.
대만에서 공자님을 모신 사당은 고장마다 있다고 했다.
아직 방학을 하지 않은 대만 중학생들이 공자 사당 앞뜰에 모여 우리의 단소와 닮은 악기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장난을 치는 모습이나 우리일행을 보고 히죽거리며 웃는 모습이 우리 아이들과 꼭 같아서 이쁘게 느껴졌다.
공자님 초상화 뒤편에는 '有敎無類'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모자란 실력으로 해석을 해보니 가르치는 데 있어서 부류를 두어서면 안 된다. 곧 아이들을 가리지 말고 가르쳐라. 요사이 교육용어로 말하면 누구에게나 학습권이 있어야한다는 말이라고 생각하니 천년을 두고 상용되는 교육철학을 가진 공자님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으며 이웃나라에 와서도 내 직업을 망각않는 고삐가 되었다.
역사가 짧은 그들에게는 손 문 과 장 개석만이 위인이라고 하는데 중정 기념관은 장개석 기념관으로 7만 8천 5백 평의 대지위에 국민의 성금으로만 지어진 건물이며 개인 기념관으로서는 세계에서 제일 크다고 했다. 관람하면서 장 개석이 손 문을 만나 힘을 기르고 대만에 정부를 수립하기까지의 이야기나, 대단한 가문의 딸 송 미령을 부인으로 맞이한 계산 섞인 로맨스를 듣는 일도 흥미로웠다.
대만정부가 수립되기까지 과정에서 생각에 따라서는 장 개석장군에 대한 반감이 있을 만도 한데 대만인들은 그를 위인으로 받들고 있다고 했다. 생전에 그는 독재를 했지만 검소하였고 부정을 일소하는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무엇보다 국민들을 배부르게 해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송미령도 그랬다. 당대의 최고가문에서 본처들을 밀어내고 들어왔지만 양귀비 이래 이어온 ‘정족문화’에서 여자들을 해방시키고 사회활동을 열어주고 남녀평등 시대를 열어준 공을인정 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기념관을 지을 성금이 모금되고 정부에서는 국민의 성금으로 지은 기념관이라고 자국민에게는 일절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니 그 국민에 그 정부다. 작은 땅에 살지만 대국의 혈통으로 그들의 기질은 규모가 크고 시원시원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의 기질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건물이 있었다. ‘일공일’빌딩이라고 하는데 이 건물은 층수가 101층이나 된다. 송곳처럼 서 있는 이 건물의 높이는 508미터로서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이라고 한다.
불이 들어온 일공일 빌딩은 외벽에 '101'을 그리며 밤에 더욱 위용을 들어냈다.
“고궁박물관, 중정기념관, 일공일 빌딩. 뭐 한다고 하면 확실히 합니다.”
대만의 최고만 짚어내면서 가이드가 말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는 부지런히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여기 사람들은 도박을 좋아해요. 겨울에는 한국을 많이 가죠. 강릉에 가서 눈을 보고 스키를 즐기고 동대문시장에 가서 에누리하면서 물건 사는 것을 재미있어 해요. 여기는 에누리가 없어요. 물건을 사고는 워커힐에 가서 몇 시간씩 도박을 하고 웬만큼 잃어도 꿈적도 안 해요. 참, 손님들 로또 복권 사 보셨어요?”
일행 중에는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여기 사람들은 누구나 다 사죠. 많이는 주4회 정도 까지 사는 사람도 있어요.. ”
그리고 계속하여 결혼 풍습에 대해 가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결혼은 남자 측에서 돈 주고 여자를 사오는 수준이며 딸이 곧 효녀여서 딸이 많은 집은 부모들이 혼수걱정은 안하고 시집 보낸 후 딸들이 돈 갖다 주어서 좋아한다고 했다.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으니까 아침 식사는 죽으로 하며 그것도 집에서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날씨 탓이려니 생각했지만 집에서 기름을 많이 쓰면 벌레가 생긴다는 이유라고 했다.
먼 산에 있는 공동묘지를 보고 장례문화에 대해 물었다.
“그들은 사후 세계를 믿어요. 그래서 7일장으로 하고 49제를 반드시 지내며 부장물에 아주 돈을 많이 들 여서 정성껏 하지요. 부장물이 많아야 조상이 저세상에서 기죽지 않고 지낸다고 믿거든요.”
상여도 아주 화려하며 음식도 매우 푸짐하게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여행은 그들의 역사를 짚어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사람 냄새나는 야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대만의 야시장은 먹자판이다.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저녁 식사거리를 준비 하는 주인은 구경하는 우리에게 사 먹어보라는 눈길 한 번 안준다.
“저래서야 어디 장사가 되겠나.” 하고 빈정거렸지만 전날 말한 가이드의 말이 생각났다.
여기의 장사는 호객행위를 안한다. 에누리도 없다. 사라고 권하지도 않는다. 주인이 있으니까 손님이 오는 거다. 그래서 손님이 왕이 아니라 주인이 왕이라는 거다.
어릴 때 시내에 설탕, 밀가루, 계피 같은 조미료를 파는 중국집이 있었는데 그 집 중국인 아저씨도 그랬다. 팔짱을 끼고 서서 우리가 들어가든 말든 보고 있다가 살 것을 말해야 몸을 일으켜 팔았다. 그 시간에 그 아저씨 생각이 났다.
야시장은 밤인데도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아침을 죽으로 때우는 이유를 여기서 찾았 다. 저녁을 먹고도 밤늦게 야시장에 나와서 야참을 사 먹으니 아침에 식사를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또 밤늦게 까지 장사한 사람이 잠 안자고 아침 장사를 준비하기 어려워서 생긴 문화라 짐작이 된다. 이들은 하루 식사가 네 번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솥에서 나오는 건 빨래 빼고는 다 음식이 된다니 포장마차에 내 걸린 먹거리도 별 별것이 다 있었다. 못 보던 물고기, 알, 자라, 거북이 등등. 특히 많은 건 뱀이었다.
손가락만한 뱀부터 기둥 같은 뱀 까지 크기도 가지가지 색깔도 가지가지! 아주 등이 조여들면서 근질근질 하여 혼이 났다.
“뱀 드셔 보셨어요? 처음 보는 젊은이들이 미팅을 하고 바로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다가 뱀 먹으로 가죠. 여기서는 남녀노소 아주 다 먹어요. 이들은 이것을 아무도 혐오식품이라고 안 해요.”
찡그리며 다니는 우리들에게 가이드가 사탕수수 즙을 사 주었다. 제자리에서 즙을 짜서 주는데 시원하고 맛이 아주 좋았다. 사탕수수나무를 말 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것도 처음이었고 달콤한 맛을 느끼는 것도 처음이었다. 뱀이 우글거리는 유리 상자를 두어 발 옆에 두고 사탕수수 즙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다. 바로 여행의 맛이었다.
이 곳은 우리와 반대로 교회는 산에 지으면서 절은 시내 복판에 있었다.
용산사는 270년 되는 웅장한 사찰이었다. 이곳사람들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용산사를 찾는다고 했다. 알록달록한 과자와 과일 빵 같은 것을 정성껏 준비해서 신문지 위에 차려놓고 불가를 부르며 향 일곱 개를 두 손으로 모아 쥐고 수없이 절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커다란 향료에 던져서 꽂는다. 그러고는 반달처럼 생긴 나무패가 소복 담긴 통을 정성스럽게 흔들다가 하나를 밖으로 나오게 던져서 그 패에 쓰인 숫자를 보아두었다가 기도가 끝난 후 서랍이 많은 궤짝에 가서 아까 본 숫자와 같은 숫자가 씌여진 서랍을 열어서 그 속에 있는 종이에 적힌 풀이를 읽어 재수를 점치고 있었다. 자기 점을 자기가 보는 것이다. 주로 로또복권을 사 놓고 당첨될까 안 될까를 점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일확천금의 꿈은 나라를 가리지 않나보다.
대만은 넓지는 않지만 사람들의 품이 넓은 것 같았고 자연이 아름다웠다.
유황가스가 안개처럼 피어나는 양명산 국립공원에는 백퍼센트를 자랑하는 유황 온천이 있고 폭포와 호수를 품고 있으니 철쭉 피어나는 봄이나 신록 우거지는 여름의 절경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간다.
대만의 국립 야류해양공원은 침식 작용에 의해서 생긴 진흙 바위들의 세상이다. 기암괴석이 많으며 오랜 세월을 두고 물이 지나면서 바위를 갉아내어 흡사 새 송이버섯을 수없이 세워놓은 것처럼 보여 신기 했다. 그 중에는 높고 긴 모자를 쓴, 오똑한 코에 긴 목의 여자 모습을 하고 있는 돌이 있는데 그 모양이 이집트의 여왕 네페르티티를 닮았다고 하여 ‘여왕바위’라고 한단다. 대단한 조각가가 마음먹고 만든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순전히 침식에 의한 것이라니...... 돌에다 어떻게 여왕의 온화하고 우아한 기품까지 불어넣었는지 자연의 힘이 정말 기막히고 오묘하여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약하고 외로워 보이는 한 장의 나뭇잎 같은 대만의 실상은 속이 차고 베짱이 있는 통 큰 대국의 몸짓을 하는 나라였다. 경제적 여유가 있지만 쓸 수 있는 것은 버릴 때까지 쓰면서 활용하고, 필요한 것은 받아들이되 내 것은 ‘내 것’이라는 이유로 소중하게 키우는 나라. 남을 의식하지 않고 속으로 속으로 꽉꽉 채우는 나라. 일본식 건물을 아직도 활용하며 생활에서는 편리한 서양풍속을 받아들여 편하게 지내면서 전통적인 자기네 관습은 소중하게 지키는 나라. 땅은 작지만 베짱 크게 사는 나라. 2박 3일간 발견한 대만 이었다.
첫댓글 은배초님 덕분에 앉아서 대만 구경 잘 했습니다요. 감사!
대만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주신 은배초님, 흠미로운 곳이 많네요! 새로운 곳의 신선함을 느끼는 여행 멋지네요^^
"우와!" 멋진 글월에,마치 대만을 여행하는 착각에 빠져봅니다.오랫만에 들어보는 "장개석"장군의 일대기도 흥미진진 하구요. 고운 '글월' 잘 보았습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