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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1923년 9월 간토 조선인 학살 100주기,
우리가 마주해야 할 과제들
2023년 9월 1일은 간토(關東) 조선인 학살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수천의 조선인이 참살당한 이 비극은 아직까지도 사죄는커녕 진상규명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학살에 정부가 관여했다는 증거를 부인하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며, 한국 정부도 해방 후 지금까지 일본에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하지 않고 외면했다. 해마다 돌아오는 9월 1일에 추도문 한번 발표한 적이 없었다. 간토대학살은 긴 침묵 아래 덮여 있다.
민병래 작가와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가 공동 기획하여 출간한 이 책은 지난 수십 년간 간토대학살의 진실을 규명하고 알리기 위해 노력해 온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은 각각 진상규명, 희생자 추모, 기록과 기억, 반성, 사죄와 배상, 계승과 재현 등의 영역에서 간토대학살 문제에 다가갔다. 이들의 삶과 활동은 간토 조선인 학살의 실체와 의미를 우리에게 전하며 그 일을 왜 지금 기억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이제는 간토대학살에 대한 침묵을 깨야 한다.
👨🏫 저자 소개
민병래
1960년 강원 출생. 생업에 종사하면서, 1998년부터 한글을 모르는 노인과 이주민을 상대로 문해교실과 다문화도서관을 운영하는 시민단체 ‘푸른’의 이사를 맡고 있다. 2016년 촛불 광장에서 역사의 거대한 흐름은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 나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의미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오마이뉴스》에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호암미술관에 있는 아름다운 우리 문화재』, 『민병래의 사수만보』, 『송환,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 목차
들어가며_ 100년 동안의 침묵을 넘어서
간토 조선인 대학살의 진실을 밝히다 | 강덕상
학살당한 조선인의 추모를 위한 한평생 | 니시자키 마사오
영상으로 기록된 피맺힌 증언과 참상 | 오충공
일본을 위해서 조선인 학살의 책임을 묻다 | 야마모토 스미코
간토특별법을 향하여 | 김종수
미래의 평화를 준비하기 위한 싸움 | 가토 나오키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기다리다 | 간토의 유족
예술과 랩으로 저항하고 기억하다 | 이이야마 유키
학살 현장을 기록하는 순례의 길 | 천승환
부록_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다크투어 안내서
추천의 글_ 간토 조선인 학살, 계속되고 있는 현실
📖 책 속으로
어쩌면 ‘간토 조선인 대학살’은 극우로 향하는 일본의 급소가 아닐까? 국가범죄이고 집단학살인 이 역사를 사죄하게 함으로써 침략주의로 향하는 발걸음을 주춤거리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만으로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을 막을 순 없으나 자그마한 버팀목은 되지 않을까?
--- p.8
간토 조선인 대학살은 결코 흥분한 자경단이 벌인 예상치 못한 범죄가 아니라는 것. 수백만의 이재민이 반정부투쟁에 나설까 두려워 아먀모토 곤베에(山本權兵衛) 내각이 직접 ‘조선인 습격설’을 퍼트리고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위기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것. 이것이 간토대학살의 진실임을 강덕상은 사료와 연구를 통해 밝혀냈다.
--- p.19
그는 100주년은 특별하지만 일본 정부의 태도가 바뀌지 않을 것이기에 100주년을 넘어 이 활동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추도모임’의 이사 신민자 씨가 말하듯, “죽이지 말자, 죽임을 당하지 말자, 죽이게 하지 말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재일조선인인 한 회원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나와 내 아이, 내 손자가 죽으면 안 되기 때문에 나는 이 일을 한다고.
--- p.78
다가오는 9월 1일 간토 조선인 대학살 100주년은 기념식을 잘한다고 만족할 일이 아니다. 오늘날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의 국가범죄를 부정하며 사죄하지 않고 있기에 100주년 이후에도 ‘역사투쟁’ ‘기억전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 p.108~109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같은 역사수정주의 세력이 나타나고 아베를 비롯한 극우파가 자민당을 움켜쥐면서 이들의 압력으로 교과서가 수정되었다. 조선인 대학살을 놓고 ‘학살’이 ‘살해’나 ‘수난’으로, 학살의 책임자가 ‘군경’에서 ‘자경단’으로, 살해된 숫자도 수천 명에서 ‘○○명’같이 모호하게 바뀌었다. 그뿐 아니었다. 일본의 한반도침략이 진출로 바뀌고 강제동원을 부정하고 거리에선 헤이트스피치와 혐한 발언들이 쏟아져나왔다.
--- p.135
가토 나오키는 간토대학살을 일본의 가장 큰 오점으로 바라본다.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에서 시작된 침략주의는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쳐 조선에 대한 강제합병으로 이어졌다. 거듭된 승리로 일본 제국주의는 오만해지고 조선인에 대한 멸시는 쌓여 갔다. ‘감히 대일본에 저항하는’ 조선인에 대한 적개심 또한 깊어졌다. 조선인 대학살은 바로 정한론이 나온 이래 수십 년간 쌓인 차별의식, 제국주의 의식이 분출한 사건이다.
--- p.182
8·15해방 후 강제징용과 강제징병자 등 많은 동포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유족은 잠시나마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이도 잠시, 해방 후의 격동과 한반도의 내전 속에서 간토의 희생자를 찾고 기리는 일은 요원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진 반공독재정권 아래서 유족은 모일 수 없었고 일본의 죄과를 묻는 일은 탄압받았다. 그러는 사이 간토의 비극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흐릿해졌다. 희생자와 그 유족 또한 잊혀 갔다. 그러나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고 그 참변을 어떻게 기억할까? 유족 2세인 김대원과 조팔만, 유족 3세 권재익, 조광환, 홍동선의 사연은 가슴 아픈 가족사이면서 우리의 현대사 그 자체다.
--- p.186~187
간토 조선인 대학살 사적지 방문과 기록 작업은 국외 사적지 역사지도의 내용을 더 알차게 채우는 의미도 있었다. 간토 일원에 있는 유적지의 제대로 된 주소와 사진이 없다는 게 천승환의 투지를 불태웠다. GPS주소만 정확하면 누구나 참배하고 아픔을 기릴 수 있으련만, 제대로 된 사진 기록물이 있다면 연구자건 시민운동단체건 풍부하게 활용할 수 있으련만 그렇지 못해 안타까웠다. 그래서 2017년의 140일 여행 이후 1,829일 만에 배낭을 메고 떠나온 것이다.
--- p.244
🖋 출판사 서평
간토대학살은 왜 잊혀졌을까
1923년 9월 1일, 도쿄와 요코하마를 포함한 일본 간토 지방에 진도 7.9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사망자가 10만 명에 이르고 행방 불명자가 4만이 넘었으며, 이재민은 무려 340만 명에 달했다. 일본 역사상 최악의 재해인 간토대지진이다. 그런데 이때 간토 지방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조선인들에게는 더 무서운 재앙이 닥쳤다. 조선인들이 지진의 혼란을 틈타 방화, 약탈, 살인, 강간을 저지르고 있다며, 자경단만이 아니라 경찰과 군대까지 나서서 조선인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1923년 당시 학살 피해를 조사한 이재조선동포위문반은 6,661명이 죽었다고 보고했다.
이 간토대학살은 식민지 시기의 가장 참혹한 비극이지만, 안타깝게 한국 땅에서는 잊힌 사건이 되었다. 살아 돌아와 이 일을 알린 이들도 적었으며, 그마저도 총독부가 입을 막았다. 해방과 전쟁으로 인한 혼란 속에 피해자 조사는 요원한 일이었고, 그 후 군부독재 시기에도 피해자들은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시간이 흐르며 학살을 직접 경험하거나 들은 이들은 모두 사망했고, 그 결과 간토대학살은 피해자의 정확한 수도 학살당한 이의 이름도 모른 채 유언비어에 의해 빚어진 비극으로 기억되었을 뿐이다.
최근에서야 언론과 방송에서 간토대학살이 조명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것이 알려지지 않았다. 100주기인 올해 이전까지 한국 작가가 쓴 간토대학살 관련 대중서는 전무했고, 모두 일본에서 나온 책의 번역서였다. 추모비만 해도 일본에는 20개가 넘게 있는 반면, 한국에는 한 개도 없었다. 이제부터라도 간토대학살은 더 많이 이야기되고 논의되어야 한다.
간토대학살과 관련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책은 간토대학살의 전모를 다각도로 보여 주기 위해서 한국과 일본에서 조선인 대학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 9명의 이야기를 엮고 있다. 그들 각자의 삶과 활동은 다양한 결을 갖고 있지만 모두 간토대학살의 아픔을 드러내고 일본의 국가책임을 묻는 것으로 모아진다. 이제는 그들의 성과를 이어받아 한국 사회가 나서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 어떤 일을 해왔고, 앞으로 남은 과제는 무엇일지 하나씩 살펴보자.
① 학살의 진상규명
일본은 학살 직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국가의 책임을 부정하고 있다. 학살은 유언비어에 휩쓸린 민중의 우발적 범행일 뿐, 정부의 관여는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이런 발뺌을 깨뜨리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이 재일사학자 강덕상이다. 그는 일본 정부와 군대의 자료를 파헤쳐 일본 정부가 유언비어의 유포부터 학살에 이르기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밝혀냈다. 일본 정부는 지진이 일어난 바로 다음 날인 9월 2일에 ‘조선인 폭동설’을 명분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출동시킨다. 그리곤 각 지방에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낸다.
도쿄 부근의 지진을 이용하여 조선인들이 각지에 방화하고 불령(不逞)의 목적을 수행하려고 하며 현재 도쿄 시내에서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부어 방화하는 자가 있다. 이미 도쿄부에서는 경계령이 시행되고 있으므로 각지에서는 충분하고도 면밀한 시찰을 더 하고 조선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한층 더 엄밀히 단속할 것. -26쪽.
이런 지시와 함께 군대와 경찰이 직접 조선인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당시 출동한 한 병사는 이런 회고를 남겼다.
9월 2일 정오 조금 전, 식량과 말먹이, 실탄 60발을 지급받아 질풍처럼 지바 거리를 달려갔다. 가메이도(龜戶)에 도착해 행동개시로 먼저 ‘열차검색’을 해 조선인을 모두 끌어내렸다. 칼날과 총검 아래 그들은 차례차례 거꾸러졌다. 일본인 피난민 가운데서 환호의 소리 ‘원수! 조선인은 모두 죽여라’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 연대는 이것을 ‘피의 잔치의 시작’으로 하여 그날 저녁부터 밤중까지 본격적인 조선인 사냥을 했다. -23쪽
이렇게 정부가 조선인을 ‘적’으로 규정하니 일본 민중들은 지진으로 인한 불안과 원망을 조선인을 향한 증오심으로 바꾸고 자경단을 조직해 각지에서 ‘조선인 사냥’에 나섰다는 것이다. 분노한 민중이 천황제 등 체제에 반기를 들까 두려워 조선인을 희생양을 삼았다는 게 강덕상의 결론이다. 강덕상의 선구적인 연구는 후속 연구가 이어지면서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여전히 학살 관여에 대해 입을 닫고 있고, 학살을 단순히 유언비어 탓으로 돌리는 경향은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여전하다. 간토대학살을 일본의 국가범죄로 인정케 하는 일은 남은 이들의 몫일 것이다.
② 학살을 왜곡, 부정하는 이들과의 싸움
일본에서 우익 세력이 힘을 얻어가면서 과거사에 대한 일본 사회의 기류가 변화했다. 간토대학살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이전까지는 우익이라도 학살 자체는 인정했지만 차츰 학살은 없었고 과장됐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조선인이 실제로 폭동을 일으켜서 대응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교과서의 기술도 ‘학살’이 ‘살해’나 ‘수난’으로, 학살의 책임자가 ‘군경’에서 ‘자경단’으로, 살해된 숫자도 수천 명에서 ‘○○명’같이 모호하게 바뀌었다. 일본의 논픽션 작가 가토 나오키는 이런 변화를 우려하며, 극우 세력의 역사 왜곡과 맞서 싸우는 최전선에 섰다. 그는 2013년 재특회(재일조선인의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모임)의 혐한 시위를 보고 반대 행동에 나서는 한편, 간토대학살의 진상을 알리는 블로그를 개설하고 학살의 실제 기록을 바탕으로 글을 올렸다. 이 글들은 『9월, 도쿄의 거리에서』라는 책으로 나와 현재까지 2만 부가 팔렸다. 한국에서도 2015년 번역 출판되었다. 그는 학살부정론을 정면으로 논파하는 『트릭 ‘조선인 학살’을 없던 일로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라는 책도 냈으며, 도쿄 요코아미초 공원에 세워진 조선인 추도비를 철거하려는 이들에 맞서 추도비를 지키는 활동도 하고 있다.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사실을 알고 추모하는 가나가와현 실행위원회’의 대표 야마모토 스미코는 1939년생으로, 수십 년째 간토대학살의 진상을 알리고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는 활동을 해왔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야마모토는 요코하마시 교육당국에 조선인 학살을 교과서에 수록하고 아동과 청소년에게 가르치고, 학교에서 조선인 차별을 몰아내는 프로그램을 시행하라고 요구했다. 학계와 시민사회의 이런 노력 덕분에 1980년대에는 일부 교과서는 학살의 주체가 ‘군경’이고 그 원인은 일본의 ‘배외주의’ 때문이라고 기술했다. 학살을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가 득세하고 있는 지금도 야마모토는 꾸준히 증언과 증거를 수집하고 일반 시민들에게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③ 일본에 국가의 책임을 묻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오래전부터 일본 정부에 책임을 추궁하고 사죄와 배상을 요구해왔다. 그 덕분에 국민들도 이 두 문제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간토대학살의 피해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죽은 이들은 말이 없고,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땅의 유족들도 자신이 유족인지조차 모른 채 평생을 살다 죽었다.
현재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종수 목사는 간토대학살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의 시민운동을 일깨운 선구자다. 2000년대 초부터 전국 각지를 돌며 간토대학살을 알리는 전시회를 열었고, 2020년에는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을 세워 진상규명 운동의 진지로 삼았다. 그는 지금은 정치권과 협력해 ‘간토대학살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이 법이 제정되면 한국 정부는 일본에게 진상조사와 책임 추궁에 나서고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유족 지원을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만 한다.
한편 학살 희생자의 유족 2, 3세들은 현재 일본 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준비 중이다. 비록 100년이나 지났지만, 제노사이드와 반인도적 범죄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건 반드시 처벌하고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이 재판에서 유족이 승소하면 인류의 평화에 기여하고 제노사이드 범죄를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④ 기록과 기억, 그리고 계승
일본의 집요한 은폐 작업에도 간토대학살의 진상이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끈질기게 기록하고 기억을 이어간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감독 오충공은 다큐 영화 [감춰진 손톱자국]과 [불하된 조선인]에서 학살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을 육성으로 담았다. 그전까지 일본인이 글로 남긴 수기와 회상은 많았지만 학살에 관해 자기 얼굴을 드러내고 말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올해 100주기를 맞아 오충공의 세 번째 영화인 [1923 제노사이드, 조선인 학살 100년의 역사 부정]도 개봉될 예정이다.
조선인 희생자 추도모임에서 활동하는 니시자키 마사오는 1980년대 한국에 와 아직 생존해 있던 생존자들의 증언을 담아 갔으며, 최근에는 도쿄에 남겨진 모든 학살 관련 증언을 모아 『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의 기록―도쿄지구별 1,100가지 증언』이라는 책을 펴냈다.
일본의 젊은 예술가 이이야마 유키는 조선인 래퍼 FUNI와 함께 학살의 충격으로 미쳐버린 조선인 정신병자를 다룬 영상 작품을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간토대학살의 역사는 새로운 세대들의 손으로 재창조되고 있다. 아마추어 사진가 천승환은 일본 간토 지방 곳곳의 학살 관련 사적지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국내에 소개하는 작업을 했다. 학살 현장, 추도비, 묘지 등 모두 70여 곳을 촬영했으며 그곳들을 구글 지도에 표시해 관심 있는 사람이 찾아갈 수 있게 안내했다.
학살의 기록과 기억은 앞으로도 계승해 가야 할 중요한 작업이다. 지금까지는 소수의 개인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져 왔지만 앞으로는 사회적인 지원과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간토대학살은 일본의 극우화를 막는 급소다
1923년 간토 조선인 대학살은 제국주의와 식민 통치에서 비롯된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적대감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일본 내에서, 민간인이며, 당시 일본 제국의 국민인 조선 사람을 상대로, 군대, 경찰, 자경단이 합세해서 저지른 식민지 시기 최악의 범죄였다. 일본인들도 이를 부끄러워하며 추모와 진상규명에 나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한 일본 정부도 외면하고 회피할 뿐 학살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증거가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간토대학살이 ‘극우로 향하는 일본의 급소’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현재 일본은 과거사를 부정하고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간토대학살은 일본인도 부끄러워하며, 부정하지 못하는 명백한 범죄다. 간토대학살의 비극을 일깨움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의 그릇됨을 알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는 걸 막는 데 도움이 되리라.
야마모토 스미코는 “나는 이 일을 조선인만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일본인을 위해서 합니다. 사죄하지 않으면 불행이 반복되니까요”라고 이야기한다. 가토 나오키는 간토대학살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반성하는 것이 일본의 역사를 바로잡는 첫걸음”이라고 바라본다. 이처럼 간토대학살은 미래의 평화를 위해 한일 양국의 시민들 모두가 기억해야 할 역사다. 100주기를 맞아 나오는 이 책이 학살의 진상을 알리는 목소리가 커져 나가는 데 일조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