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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와 회복
신 30:1-10
1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2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4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네게 다시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적군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를 내리게 하시리니
8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9-10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30:1-10 / [회개하면 새 복이 따른다] 나는 이제까지 여러분에게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멸망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들이 앞으로 여호와의 계명을 어기고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벌을 받아 세계 만민 가운데에 흩어지게 되면 여러분은 거기서 제정신을 차리게 될 것입니다. 2) 그래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여러분의 후손들과 함께 마음을 다 쏟고 정신을 다 기울여 주께 순종하며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명령한 대로 살아가면 3)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분을 포로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이며 주께서 이미 여러분을 흩어 보내셨던 그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다시 데려다가 고국 땅에 모아 놓으실 것입니다. 4) 비록 여러분이 세상끝에까지 흩어져 있어도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거기서도 데려다가 모아놓으실 것입니다. 5) 그러면 여러분이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서 그 땅을 다시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더 주셔서 여러분의 조상들보다 더 번창하게 하실 것입니다. 6) 주께서 친히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후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주셔서 여러분이 마음을 다 쏟고 정성을 다 기울여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죽지 않고 살아 남을 것입니다. 7) 그리고 이 모든 저주는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미워하며 압제하는 원수들에게 내리실 것입니다. 8) 그러나 여러분은 주께로 다시 돌아와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한 주님의 모든 명령을 지키며 살 것입니다. 9) 그때에는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넘치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많은 자녀를 둘 것이고 여러분의 가축이 번성할 것이며 여러분의 농경지에서도 많은 수확을 거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복 주시는 것을 기뻐하셨던 것처럼 다시 여러분에게 복 주시는 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10)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이 율법책에 기록된 주님의 계명과 규정을 모두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다 쏟고 정성을 다 기울여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이방 민족에게 사로잡혀 갔을지라도 회개하고 뉘우치면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에 할례를 받기 원하십니다.
마음을 돌이키시는 하나님(1-4) 신명기 28장에는 순종할 때 받을 복과 불순종할 때 받게 되는 저주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현실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돌이키십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포로 생활로부터 돌이켜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흩으신 모든 백성 중에서 그들을 다시 모으십니다. 그들이 비록 하늘가에 잡혀가 있을지라도 그들을 모으시고 고국 땅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처음부터 온전하게 순종하면 좋겠지만 불순종하던 자들이 뉘우치고 회개하여 돌이킬 때 하나님도 마음을 돌이키십니다. 실패에 대해 돌아갈 수 있는 기회까지 주시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네게 복을 주시리라(5-10)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그들에게 행하실 겁니다. 회복한 그들이 고국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다시 차지하게 하십니다. 단순한 회복을 넘어 하나님은 심지어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 번성케 하십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베푸시는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 향했던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잘라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중심이 바르게 섭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경고하셨던 저주는 그들을 미워하고 핍박했던 자들에게 내리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적용: 하나님과 말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습니까?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시나요? 어떻게 회복해야 할까요?
700번이나 실험에서 계속 실패한 한 과학자가 '700회의 실험으로 내가 아는 방법이 성공적이 아님을 증명했다.'라고 긍정적으로 웃으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절망은 절망을 불러오고, 희망은 희망을 불러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일에 매달린다면 성공은 빨리 찾아오는 법입니다.
< 설 교 >
순종과 복
신 30:9 / 강성찬 목사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전제 조건으로 무엇보다 '순종'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에 의한 무조건적이고 단독적인 역사이지만, 한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은 자신들이 행한 모든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하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순종과 불순종에 대해 반드시 보응하십니다.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시나니 (욥 34:11)라고 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잠 24:12)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롬 2:6) 라고 합니다
행위대로 갚으시는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복으로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신 28:2) 라고 합니다.
이 시간 순종과 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말씀대로 순종합시다
어느 날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달려나와서 주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계명들을 지키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이런 계명들이니라. 주여 그런 계명들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다 지켜 왔나이다 그런데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온전하기를 원할진대 네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라 그리고 난 다음에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막 10:22)고 합니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막 10:23)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까지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요셉도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갈렙도 온전히 하나님을 좇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7년 대기근에서 중동사람들을 구원해낼 수 있었으며, 갈렙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1장 19-20절에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 을 먹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따를 적에 하나님께로부터 큰 복을 받게 되어집니다.
명령대로 순종합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 할 것을 교훈합니다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신 30:8)고 합니다.
미국의 한 청년이 군대를 마치고 돌아왔으나 직장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청년이 생각다 못하여 큰 회사 사장을 찾아가 "사장님, 나에게는 강한 체력과 고동치는 맥박이 뜁니다. 나에게 어떤 일을 시켜도 할 것이니 일은 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하면서 말했습니다. 사장은 그 용기와 의욕은 마음에 들었으나 "그랬으면 좋겠으나 당장에는 자리가 없으니 이력서나 두고 기다려 보게나!" 했으나 이 청년은 "아닙니다. 지금 당장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이러고 나섰습니다.
사장은 "정말 그러는가? 그러면 이리 오게나, 여기 이 벽돌들을 저쪽 마당으로 옮겨 쌓겠나" "네! 알았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하루종일 다 옮겨 쌓았습니다. 그 다음날 나갔더니 사장은 말하기를 어제 옮겼던 벽돌을 다시 제자리로 옮겨 쌓으라고 합니다. 아마 웬만한 사람 같으면 "여보시오 사람 놀리는 것입니까? 하고 그만 두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하라는 대로 무조건 순종하며 의욕적으로 부지런히 했더니만 사장의 마음에 흡족하여 특채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언약 백성의 삶에 있어서 순종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측정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신 30:11) 하셨으니 순종할 때 복이 되어 질 줄 믿습니다.
어느 나라에 왕이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보기 위해 길 한가운데 큰 돌을 굴려다 놓고 누가 그 돌을 치우는가 멀리 숨어서 보고 있었습니다. 한 상인이 지나가며 "어, 쓸모없는 돌아 굴러 나왔어" 하고는 지나가 버렸습니다. 한 관리가 지나가며 "어떤 고약한 작자가 이 돌을 여기에 버렸지?"하고 그대로 지나갔습니다. 또 한 젊은이가 지나가다 힐끗 보며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참으로 실망이었습니다. 그러자 한 농부가 채소를 싣고 시장에 가다가 그 돌을 보고 아무 말 없이 그 돌을 들어서 치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돌이 있던 곳에 무슨 주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안을 살펴보니 많은 돈과 한 통의 편지가 들어있는데 여기 이 돈은 누구든지 돌을 치우는 사람의 것이라는 내용의 왕의 편지였습니다.
(숨겨진 복)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신앙생활을 할 때 그런 장애물과 같은 고통이 있고 어려움이 있다해도 그 고통 뒤에 숨어있는 하나님을 복이 함께 함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심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복이란 위로부터 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에게는 따로 특별히 복을 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와 그에 따르는 축복은 유기적인 함수 관계가 있습니다.
참된 복은 인간이 추구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이것은 곧 순종에 기반을 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 성립'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복이 땅에서 솟아나는 줄 알고 땅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빚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멧돼지 한 마리가 가을에 나무 밑 낙엽 틈바구니에서 도토리를 찾아 먹었습니다. 그 도토리가 땅에서 솟아나는 줄 알고 주둥이로 땅을 파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파도 도토리가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쓰러지고 그 멧돼지도 쓰러지는 나무에 깔려서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여우 한 마리가 어느 날 포도원 옆을 지나가다가 포도가 익어서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먹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높다란 울타리가 처져있었는데 그 틈 사이가 촘촘해서 끼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리저리 찾아보니 까 그 틈 사이가 좀더 벌어진 곳이 있어서 그곳으로 비집고 들어 가려했는데 도무지 들어갈 수가 없어서 사흘 간 단식을 하여 살을 뺀 다음에야 그 틈 사이로 포도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포도를 실컷 따먹고 배가 부르자 다시 그 틈 사이로 나오려하니까 나올 수가 없어 또 사흘 간 단식을 하고서야 나올 수 있었는데, 포도원 밖으로 나온 다음 그 여우는 결국 뱃속은 들어갈 때나 나갈 때나 일반이로구나 라고 탄식을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차피 빈손 들고 왔다가 빈손 들고 가는 존재인데 하나님 앞에 갈 때 무엇을 가지고 가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물질의 복을 누리게 될 때 하나님이 주신 은혜임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선하게 사용하다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복이란 단순히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어떤 유익의 단계를 넘어 바로 하나님 자신이 참된 복의 근원이요, 복 그 자체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임하여 말씀하기를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 15:1)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하십니다.
영적인 열매에 대한 가르침입니다만 육적인 열매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좌절감에 깊이 빠진 사람이 담임 목사를 찾아가 신앙 상담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교육도 많이 받지 못했고 부모님께 받은 상속 재산도 없고 몸도 건강하지 못합니다. 저는 항상 열등 의식과 좌절감, 자학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천한 저에게 무슨 복을 주시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목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어느 날 미국 시카고의 한 호텔에서 노신사 한 사람이 접수원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보시오, 이 호텔에서 제일 값이 싼 방을 안내해주시오." 그런데 접수원이 이 노인을 보는 순간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당대 유명한 거부 록펠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록펠러씨가 아니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 접수원은 "아니, 당신의 아들은 우리 호텔에 오면 언제나 제일 비싼 방을 구하는데 어떻게 당신은 제일 싼 방을 구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록펠러는 안경 너머로 접수원을 바라보더니만 "내 아들에겐 나 같은 부자 아버지가 있지만 나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없다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목사님은 "형제님은 자신을 비천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당신 아버지가 얼마나 부자인줄 아시오?"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아니, 우리 아버지가 부자라고요."하며 놀랐습니다. 형제님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 "형제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요." "네, 부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얼마나 부요하시고 존귀하신 분이십니까. 형제님은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입니다."(생)
그렇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행 3:6) 담대히 외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따라서 말씀에 대한 순종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복이 되어 주신 데 대한 의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진정 성도가 추구하여야할 복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는 영적이고 내세적인 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픔도 있기 마련입니다
인도에 의료선교사로 가서 나병환자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던 폴 브랜드 박사는 언젠가는 자신도 저 나병에 걸려 죽겠구나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불안해하고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강권하시는 명령이라 생각하고 충실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나병환자를 치료하던 그는 발뒤꿈치가 무감각해진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이제 올 것이 왔구나 라고 하며 실험실에 가서 주사바늘로 그의 발목 부분을 찔렀습니다. 어찌나 아픈지 닭똥같 은 눈물이 마구 쏟아졌습니다. 그 순간 그는 너무 기뻐서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가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아픔을 `축복된 아픔'이라고 했습니다.
(축복된 아픔)
문둥병과 같은 죄가 우리의 영혼을 감염시켰을 때 하나님은 경고의 아픔을 주십니다. 얼마나 축복된 아픔인가요?
이 아픔은 그 영혼이 살아있음을 알게 해 주는 아픔이요,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계심을 알게 하는 아픔이며, 죄의 감염을 방지하라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이 축복된 아픔을 통한 기쁨과 감사를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 라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고후 1:19) 하십니다.
"그가 아들이시라 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히 5:8-9)셨다고 합니다.
순종의 본을 보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이 명량에 순종하며 금년의 표어대로 "전도인의 일을 하며 직무를 다 하라"(딤후 4:5)는 모두가 되어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을 아름답게 누리시기 바랍니다.
다시 돌아오면 다시 축복하리라
신 30:8-9 / 김원효 목사
혹시 영화 자주 보시는 편입니까? 이제까지 본 영화중에 특별히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면 무슨 영화입니까? 얼마 전 저와 저의 집사람이 대화중에 “옛날에 본 영화중에 뭐가 있나?“ 하고 물어보면서 각자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제가 본 영화중에는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벤허, 쿼바디스, 로미오와 줄리엣, 사대천왕, 미워도 다시 한 번“
특히 ‘미워도 다시 한 번’이란 영화는 지금으로부터 53년 전 1968년에 개봉된 영화로 당시 상당히 흥행에 성공한 영화입니다. 내용은 뻔합니다. 남녀가 사랑을 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남자는 가정이 있는 유부남입니다. 여자는 어린 아들의 장래를 위해 아들을 유부남인 아버지에게 보냅니다.
그러나 어린 아들은 그 집에서 적응을 못하고 엄마를 그리워합니다. 결국 아이는 엄마를 찾아가려다가 길을 잃고 맙니다. 날은 어두워져 밤이 되고 비가 내립니다. 아이는 처량하게 어느 집의 문 앞에서 “엄마. 엄마." 하고 애타게 엄마를 부릅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이 영화를 볼 당시 제 나이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열두 살 정도였습니다.
지금 50년이 지나도 어릴 적에 본 그 장면이 떠오릅니다. 여러분, 영화감독이 이 장면을 촬영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요? 남녀가 살면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위기가 있더라도 어린 자식을 생각해서 미워도 다시 한 번 사랑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 이혼한 분이 있으면 상대방이 밉더라도 어린 자식을 생각해서 다시 한 번 합쳐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제목이 ‘미워도 다시 한 번’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렇게 ‘미워도 다시 한 번’과 같은 스토리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호세아서에 나오는 호세아와 고멜의 스토리입니다.
둘이 결혼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고멜이란 여인과 결혼을 하라고 해서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짝지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둘이 영 맞지 않습니다. 남편 호세아는 믿음의 사람이요, 아내 고멜은 바람기가 많은 세상 여자입니다. 그러나 살다 보니 애가 셋이나 생겼습니다. 아들 둘, 딸 하나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애들은 엄마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믿음 없는 엄마 때문에 애들도 믿음을 갖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불운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이게 웬일입니까? 하루는 남편 호세아가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가 없습니다. 어린 아이들만 덩그러니 있습니다.
“엄마 어디 갔니?” “몰라요. 배고파요.” “아니, 이 여자가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애들 나두고...“ 남편이 급히 애들 밥을 차려주고 난 후 집안을 살펴봅니다. 그러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아내의 옷이나 물건들이 없습니다.. ”뭐야, 이거? 집 나간 거야?“ 갑자기 호세아는 머리가 띵- 해집니다.
며칠이 지났지만 집 나간 아내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나중에 수소문해서 아내의 소식을 들어보니 옛날 애인이 그리워서 집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옛 애인한테도 버림을 당하고 결국 빚을 크게 지고 창녀촌에 팔려갔습니다. 아니, 애가 셋이 있는 여자가, 그것도 하나님을 믿는 남편이 있고, 그래도 믿음의 가정인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그런데 이런 뉴스가 마을 사람들에게 금방 퍼졌습니다. 호세아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쑥덕쑥덕 댑니다. 아- 창피해 죽겠습니다. 그러나 호세아가 정신을 차리고 애들을 위해서라도 ‘미워도 다시 한 번’ 아내 고멜을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옵니다. 물론 그녀가 진 빚도 모두 갚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용서해주고 다시 사랑해줍니다. 이 스토리를 보고 있으면 완전히 ‘사랑과 전쟁’에 나오는 개막장 드라마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 개막장 스토리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들이 바로 남편을 버리고, 아이들조차 버리고 떠난 저 음탕한 고멜이란 여인처럼 나를 버리고 떠나지 않았느냐? 그래서 너의 신세가 처량해지지 않았느냐? 그러나 나는 너를 다시 사랑해주겠다. 그러니 너는 다시 내게로 돌아오라.“
“돌아와- 돌아와- 집을 나간 자여 돌아와- 돌아오라.”(찬525장) 여러분, 혹시 집 나가 본 경험이 있습니까? 그런 분은 한번 손들어 보면 안 되겠지요? 저는 집 나가 본 경험이 있습니다. 중학교 때 친구랑 며칠 동안 학교도 안가고 싸돌아 다녔습니다. 영화도 보러 가기도 하고, 당시 여름철이라 밖에서 자다가 모기에 실컷 물려도 보고...
결국 돈이 떨어져 배도 고프고 어디 갈 데도 없고 해서 다시 집에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씩- 웃으십니다. 어머니는 “애야, 배고프지!” 하고 맛있는 음식을 차려줍니다. 아- 집에 다시 돌아오니 참 좋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집 나가면 고생인 줄 알고 더 이상 집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집 나간 둘째 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가 아직 죽지도 안았는데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리고 집을 나갑니다.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떠납니다. 거기서 자기 멋대로 삽니다. 허랑방탕하게 지냅니다. 그러다 돈이 다 떨어지고 거지가 되었습니다.
배가 너무 고파서 죽을 지경입니다. 염치없지만 거지꼴을 하고서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집 나간 둘째 아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며 지내다가 아들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반갑게 맞이합니다. 큰 잔치를 벌입니다. 아들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켜줍니다. 돌아온 아들에게 새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줍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자가 있느냐? 그래서 마귀에게 조롱을 당하고 힘들게 지내고 있느냐?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러면 그가 너를 다시 회복시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번 COVID-19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오랫동안 하나님 성전을 등지고 하나님을 떠난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합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아6:13) 본문 말씀입니다.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명령을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30:8-9)
누구에게 다시 복을 주신다고요? 다시 돌아오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는 겁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55:7)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다 나라가 망하여 70년간 고달프고 힘든 바벨론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고생 속에서 그들이 다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겸손히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을 보다 잘 믿었습니다.
그러다 또 다시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또 다시 나라가 망하여 1900년간 온 세계에 흩어져 심한 고생을 했습니다. 히틀러로부터 600만 명이 학살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대로 그들을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들도 이번 COVID-19 때문에 본의 아니게 성전을 오랫동안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돌아와서 무너진 마음의 성전을 다시 건축해야 합니다. 먼지 낀 마음의 성전을 다시 털어내고 다시 아름답게 가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다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사람을 다시 축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성경은 말씀합니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라.“(미7:19)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시71:20)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다시 우리를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너그럽게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고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멀리 너무나 오랫동안 떠난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학교를 결석한 학생이 다시 학교로 돌아가려고 하면 왠지 내키지 않고 불안하고 겁도 나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 집인 교회를 오랫동안 떠난 분이 다시 교회로 오려고 하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의 인생은 결국 아주 망하고 맙니다. 나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만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니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1900년 만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니 또 다시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면 하나님은 다시 우리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십니다. 다시 우리를 축복해 주십니다. 고로 우리들의 축복은 하나님께로 돌아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로 날마다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또 다시 그 분과 사랑을 나누고 행복을 나누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바꾼 생명
신 30:6-8, 행 20:22-25 / 이성희 목사
옛날 엿장수를 기억하십니까? 동네 골목길에 엿장수 가위소리가 들리면 활기가 찹니다. 집집에서 냄비, 고무신, 구리전선, 헌책, 머리카락 등을 가지고 나와서 엿을 바꿔 먹습니다. 당시에는 간식이라는 게 별로 없던 터라 엿 바꿔 먹는 재미는 생활의 활력이었고 큰 재미였습니다. 물건을 가지고 와서 엿과 바꾸면 서로 이득을 봐야 합니다. 엿장수는 고물로 돈을 벌어야 하고, 바꿔먹는 사람은 엿 맛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그런데 한 쪽은 손해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손해를 봅니까? 대개는 고객이 손해를 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생명을 바꾼다고 생각해 보세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한번밖에 없는 생명입니다. 연습이 없는 인생입니다. 얼마 전 서해에서 또 남북 간의 교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휴전이 아니라 정전이라고 합니다. 전쟁은 연습이 없습니다. 항상 훈련을 실전처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습니다. 생명이 있을 때 재산이고, 지식이고, 명예이지 생명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 어느 것이 더 귀합니까? 생명이 더 귀합니까?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훨씬 더 귀합니다. 생명과 바꾸고 하나님의 나라를 얻은 사람이 이득입니다. 생명만큼 귀하면 바꾸지 않습니다. 생명보다 더 귀해야 바꿉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과 비교가 안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감추어진 보화의 비유’나 ‘진주장사의 비유’를 보세요. 가장 귀중한 하나를 발견한 사람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 이것들을 삽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고 살 수 있는 가치를 발견한 것입니다. 희생할 만한 가치가 하나만을 선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생명과 바꾼 사람들을 순교자라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의 하나였던 스데반이 최초의 순교자였고,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는 야고보가 첫 순교자였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무수한 순교자가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를 바꾸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보세요. 승리의 장면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우편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안을 보는 승리자입니다. 스데반뿐만 아니라 순교자 모두가 승리자입니다.
생명을 누가 주었습니까? 생기를 불어넣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도행전 17:25에는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창조하시고 공급하셨는데 그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 있다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길 이유가 없습니다.
현대과학은 생명까지 복제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양의 복제 성공률은 3-5% 밖에 되지 않습니다. 양 복제 성공률로 봐서 인간 복제의 성공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합니다. 만일에 성공한다고 해도 기형아, 정신장애아 등 심각한 결함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양 복제의 성공률을 근거로 계산할 때 복제 인간 한 명이 탄생하려면 일천 번의 임신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중 9백99번은 유산, 조산, 사산, 기형아 등이 되어 탄생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에는 복제 이야기가 쑥 들어갔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아무리 보조 장치로 연장한다고 하더라도 채 100년을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원이란 시간에 비해보면 50년이든 100년이든 모두가 일순간이고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과 무시간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영원히 사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귀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를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생명을 바꾼 용기는 지혜와 믿음에서 나옵니다. 이 용기, 이 지혜, 이 믿음을 소유하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환난 가운데 얻는 나라입니다.
사도행전 20:23에는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라고 합니다. 바울이 무엇 때문에 결박과 환난을 당해야 합니까? 25절을 보세요.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만 아니면 결박이나 환난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경력으로 봐서 권세를 누리고, 지위를 가지고, 학문을 자랑하고, 가문의 영광을 누리며 살 바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으로 꽉 찬 나라입니다. 왠지 아세요? 생명을 버려야 얻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 나라에는 생명이 꽉 차 있습니다. 생명을 버리는 고통, 생명을 위협 당하는 환난, 생명을 빼앗으려는 핍박, 이것이 없이는 못 얻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생명을 낳는 일, 생명을 버리는 일은 다 극한의 고통입니다.
바울은 ‘성령에 매여’라고 합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토 프뉴마티’인데 ‘by the spirit’라고 해석할 수 있는 말입니다. “성령에 매여”라는 말입니다. 또한 ‘in the spirit’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전의 성경처럼 “심령에 매임을 받아”라는 끗입니다. 바울을 어쨌든 심한 마음의 고통을 표현합니다. 투옥과 극심한 환난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고통과 환난 가운데서 얻어지는 법입니다.
사도행전 21:10-14에는 아가보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예언합니다. 바울의 결박을 미리 안 것입니다. 그 때 성도들은 바울에게 가지 말라고 말립니다. 바울은 왜 울어서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고 하면서 결박이 아니라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가지 말라고 하여도 바울이 함을 받지 아니함으로 성도들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면 결박과 환난을 당할 이유 없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나사로가 병든 장면이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유대로 가시려고 합니다. 그 때 도마가 나서서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합니다. 예수님도 환난을 당하시지만 오신 목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기 위한 사명을 죽음도 막지 못했습니다. 수시로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였고, 어떻게 하시는가 항상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헤롯이 야고보를 참수한 후에 교회에 대한 환난 때문 성도들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흩어졌다고 교회가 망했습니까? 교회는 더 흥왕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넓히시는 하나님 방법이 환난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6-7에는 참 묘한 말씀이 있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받는 환난은 절대 손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안식과 바꿔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바꿔주십니다.
가치 있는 것은 고통과 환난 가운데 얻어집니다. 에덴동산에서 실패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벌을 주십니다.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을 주시고, 남자에게는 생산의 고통을 주십니다. 해산하는 고통 가운데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납니다. 땀을 흘리는 생산의 고통을 통하여 소산을 먹습니다. 고통 같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생명이 가치 있게 하시고, 소산이 가치 있게 하십니다.
위대한 문화, 예술, 업적은 고통과 장애를 극복한 힘겨운 분투에서 탄생합니다.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은 곱사등이었습니다. 그리스의 유명한 웅변가 데무스테네스는 원래 말더듬이였습니다. 그의 첫 공식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그를 비웃으며 야유했습니다. 고대의 서정시인 호머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악성이라고 하는 음악가 베토벤은 청각장애인이 되었을 때 불후의 명작을 작곡하였습니다. 성경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받는 환난은 절대 손해가 아닙니다. 안드레 지드는 “마귀의 도움이 없이는 위대한 작품이 나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술도 그러한데 하물며 신앙의 세계에서 환난은 위대한 신앙의 열매를 얻게 하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환난 가운데서도 이런 신앙을 지키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핍박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생명조차 귀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0:24에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합니다. 바울에게는 생명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자신의 사명인 복음을 증언하는 것은 생명을 바쳐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주를 위한 충성의 결과가 결박과 환난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의 바울의 태도는 현실에 대한 거부감이 아닙니다. 자신의 수고에 대하여 고통을 주신 하나님께 불평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당한 감사와 생명을 바칠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순교자 주기철목사님의 ‘일사각오’를 아시지요? 복음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삽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일제의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나 대의를 위하여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버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초개란 풀과 겨자를 말합니다. 풀이 얼마나 잘 탑니까? 금방 타서 사라지는 풀처럼 생명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금방 타서 없어지는 풀같이 자신을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버릴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살도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자살과 자결은 다르게 사용됩니다. 자신을 위하여 죽으면 자살이라고 합니다. 국가나 정의나 대의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 자결이라고 합니다. 신앙을 위하여 나 스스로가 목숨을 버립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손을 통하여 죽습니다. 이것을 순교라고 합니다.
전통적인 자살의 나라라고 하면 일본입니다. 옛날 사무라이는 긴 칼로 배를 가르는 활복을 많이 했습니다. 어떤 사무라이가 아들과 함께 시장을 갔습니다. 떡집 앞을 지나가는데 떡집 주인이 사무라이의 아들이 떡을 훔쳐 먹었다고 합니다. 사무라이는 아들에게 떡을 훔쳐 먹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훔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인은 계속 아들이 훔쳐 먹었다고 하자 사무라이는 칼로 아들의 배를 갈라서 아들의 뱃속을 보여주었습니다. 뱃속에 떡이 없자 사무라이는 떡집 주인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런 유의 사무라이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프랑스도 자살을 잘 하는 나라입니다. 프랑스의 존경받던 정치인인 베레고부아는 노동자 출신으로 장관과 총리를 지난 존경받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우리 돈으로 1억5천만 원을 빌렸다가 갚았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스캔들로 법정에 섰습니다.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그는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살했습니다. 자기 결백의 표현이었습니다. 자신의 명예나 인격이 생명보다 더 귀하다고 생각하면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명예나 인격 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전 인류 역사에 온 세상에 예수님보다 더 억울한 사람이 있습니까? 바울만큼 인정 못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아무 잘못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욕적인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옥에 갇히고, 매 맞고, 죽을 뻔하고, 40에 하나 감한 매를 5번 맞고, 3번 태장으로 맞고, 1번 돌로 맞고, 3번 파선하고, 1주야를 깊은 바다에 있었고,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과, 수고하고 애쓰고,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고 합니다. 이런 얼울하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바울은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얼마든지 다 바칠 수 있지만 생명을 스스로 버려 복음을 전하지 못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큼 당하지 안 했거든 절대로 억울하단 말하지 마세요. 바울만큼 당하지 안했거든 내세우지 마세요.
토마스 머튼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사랑뿐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사랑 때문에 우리의 생명도 버릴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5에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을 잃어야 얻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을 잃으면 생명을 얻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잃어서 얻었습니다. 많은 얻은 사람들이 지금도 죽어서도 그 이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숨어 있던 제자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당돌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빌라도에게 가서 반역죄로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는 것은 생명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살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 베드로와 요한을 보세요. 사도행전 4:19에는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과감하게 유대 관원들에게 말합니다. 생명을 건 복음전파가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과 바꿀만한 가치 있다는 것을 알면 누구나 이렇게 됩니다.
결 론
사도들은 자신들을 복음의 증인이라고 자처했습니다. ‘증인’이란 말의 헬라어는 ‘마르투레스’입니다. 이 말은 순교자라는 말도 됩니다. 말씀의 증인이 되는 것은 순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생명을 거는 일입니다.
사도들은 한 결 같이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복음을 생명과 바꾸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안드레는 스코틀랜드에서 X자 십자가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스페인에 가서 전도하다가 참수를 당하여 제자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빌립은 러시아 남부 스키티아에서 전도하였고 히에라폴리스에서 전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에서 전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도마는 인도에까지 가서 전도하다가 창에 찔려 순교하였습니다. 마태는 카스피해 아래에서 전도하였고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시리아에서 전도하였고,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다대오는 시리아와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에서 전도하다가 시리아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시몬은 터키와 북 아프리카와 아르메니아와 영국 런던 등을 두루 다니며 전도하다가 페르시아에서 톱으로 켜서 순교하였습니다. 가룟유다 대신 뽑힌 사도 맛디아는 대신 뽑히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 뽑혀서 아르메니아에서 전도하였고 이디오피아에서 두 눈을 뽑히고 순교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참수를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는 오로지 요한만이 에베소에 가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살며 마지막 까지 남아서 복음을 전하다가 자연사하였습니다. 조지 폭스의 ‘순교자 열전’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해 죽은 사람들은 결코 우울함 속에서 순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기쁘게 하나님의 나라를 얻은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의 복음에 대한 그 열정을 가집시다. 생명을 바치면 생명을 얻습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생명을 바칠 줄 알고, 생명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돌아오게 하사
신 30:5 / 강성찬 목사
세파에 시달려 한 깡마른 사람이 직업소개소에 찾아와 일 할 곳을 소개해 달라고 하자 소장은 그의 사연을 듣고 삶에 지친 그의 모습을 보고 우선 달이 가장 크게 보이는 곳을 알아 오는 일이 있다고 하며 찾아서 알아 오라고 합니다. 얼마의 비용을 받고 천문대를 찾아보니 세계적으로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는 그런 곳이 없다 합니다. 이곳저곳 찾아보았으나 알 길이 없었습니다. 소개소에 들려 미안 하지만 알아보지 못했다고 풀이 죽어 말하는 그에게 소장은 빙그레 웃으며 지치고 메마른 마음을 포근히 감싸주는 고향이 달이 가장 크게 보이는 곳이라고 말해 줍니다. 그러나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됩니다.
생물의 세계에 돌아가는 본능이 있어 이를 귀소성(歸巢性) 회귀성(回歸性)이라 말들 합니다. 해안의 바위에 붙어사는 패류의 어떤 종류는 낮에는 여기저기로 이동하나 저녁이 되면 일정한 바위 그늘로 같은 개체가 되돌아오는 것이 있다합니다. 꿀벌 ·비둘기 ·연어 ·송어 등의 대이동은 태양컴퍼스라 하여 태양의 위치 이동을 목표로 행하여진다 합니다.
꿀벌이 꽃의 꿀을 따려고 날아간 다음 집을 옮기면 본래 집이 있던 곳에 떼 지어 모입니다. 이것은 집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음을 표시한다합니다.
비둘기는 1분간에 약 1km를 날며, 제집을 찾아 돌아오는 귀소본능(歸巢本能)이 있어 일찍부터 통신용으로, 특히 진중에서 전신용으로 많이 사육하여 왔습니다. 유선 ·무선 등의 각종 통신 장비가 없었던 시절은 물론, 이런 장비들이 상당히 갖추어진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만 해도 1,000km 정도 떨어진 곳과는 이를 이용한 통신 연락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진중에서 통신연락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습니다. 비둘기 집을 중심으로 귀소를 학습시키고 점차 그 반지름을 넓혀나가면, 매우 먼 곳에서도 되돌아오는데, 이것은 학습과 귀소성이 함께 작용한 것이라 합니다.
연어나 송어는 태어난 곳에서 가까운 해변으로 오게 되면 강물에 포함된 물질로 후각이 자극되고, 그 기억에 의하여 태어난 곳뿐만 아니라 부화지까지도 찾을 수가 있다합니다.
사람들은 고향을 그리는 향수심이 있습니다.
홈커밍데이라는 귀향의 날을 정하고 함께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준비하며 수고하신 모든 분들 참여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귀향은 고향으로 돌아옴입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으로 이 땅에 태어난 육신의 고향 신앙을 심어준 교회 앞으로 돌아갈 천국 본향이 있습니다. 그 고향을 찾아가 보고 돌아가 보고 싶어 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돌아오게 하사 회복의 은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고향은 이해해주고 사랑해주고 도와주는 인정이 넘치는 곳입니다.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글이 있습니다.
오래 전 아직 우리가 동심이었을 때는 시내마다 맑은 물이 흘렀고 우리 마음에도 순수가 넘쳐흘렀지 까만 꽁보리밥 한 주먹에도 배불렀고 빛바랜 무명옷으로도 얼마나 멋이 있었던가? 달빛타고 스며드는 아카시아 향내만으로도 우리들의 사랑은 아름다웠고 고물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일일연속극에 온 동네 사람들이 웃고 울며 삶을 나누었다. 식어버린 고구마 까맣게 재가 묻은 감자 몇 개만으로도 우리들은 시간의 흐름을 잊을 수가 있었으며 흐릿한 등잔불 아래에서도 부지런히 시를 써 내려 갔고 아름다운 소설들을 읽으며 추억을 만들어 갔었다. 지금 우리들의 얼굴에 주름살이 늘어가면서 시내마다 검은 물이 흐르고 우리들의 마음엔 어두운 욕망들로 가득하다. 몇 십만 원 짜리 식사로도 배부른 줄을 모르고 이태리제 수제양복을 입어도 멋을 모르지 않는가? 샤넬 향수를 뿌려도 우리들의 사랑은 썩은 냄새만 나고 최신식 대형TV를 가지고도
드라마나 보며 외롭게 죽어 가고 있다. 기름이 흐르는 음식들 달콤하게 유혹하는 술 냄새로도 외로움을 달랠 수는 없으며 화려한 샹들리에가 밤을 낮 같이 밝혀도 우리들의 지식은 삭막해지고 냄새나고 썩은 이야기들만 쌓여가고 있다. 우리들은 그렇게 사랑도 잃어버리고 낭만도 상실한 채 핏발 선 눈으로 밤새 컴퓨터 안을 검색하며 보내고 있다. 죽음을 향해 달려드는 하루살이처럼 술에 취하고 향락에 취하여 내일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돌아가자 그 시절로 돌아가자 가진 것이 적을지라도 조금은 불편할지라도 소박한 사랑과 낭만이 있고 우리의 추억들이 숨 쉬는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사는 엘리멜렉이라는 남자와 결혼하여 살았습니다. 자녀를 낳다 보니 아들만 둘을 낳았습니다. 이 가정에는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엘리멜렉은 그래도 그 지역의 유지요, 남들보다는 물질이 풍족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흉년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이끌고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갑니다. 갈 때는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많은 물건을 싣고 많은 돈을 가지고 모압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모압에 가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가진 재물도 다 써버린 뒤 알거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남편 엘리멜렉은 아마 결혼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몸이 약하다는 것을 짐작하게 되는 이유는 아들을 낳자마자 그 아들의 이름을 지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큰 아들의 이름을 '말룐'이라고 했고, 둘째 아들의 이름을 '길룐'이라고 했는데... 말룐이란 뜻은 '병자'라는 뜻이고, 길룐이란 이름의 뜻은 '허약'이란 뜻입니다. 귀한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의 이름을 첫째는 병자라고 이름을 짓고, 둘째를 허약이라고 지은 것은 히브리 사람이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보는 대로 사실화합니다. 야곱의 아내 라헬이 둘째 아이를 낳으면서 고통 중에 그 아이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괴로운 자식', '가엾은 자식', '고통 중에 낳은 자식'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오미는 두 아들의 이름을 '병자', '허약'이라고 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쁜 마음에 두 아들들을 서둘러서 장가를 보냈습니다. 큰 아들은 '오르바'라고 하는 모압 처녀에게 장가를 보냈고, 둘째 아들은 '룻'이라는 모압 처녀에게 장가를 보냈습니다. 오르바는 '작은 사슴'이란 뜻이고 룻이라고 하는 뜻은 '선한 벗'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압 땅에 간 지 얼마 안 되어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설상가상으로 두 아들도 연달아 죽습니다. 그 이름 그대로.... 첫째 아들 병자는 비실비실하다가 병들어 죽고, 둘째 아들 허약이는 마르고 빈약하여 빌빌하더니 죽었다 할 것입니다. 결국 나오미와 두 자부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고향을 기억했습니다. 때마침, 고향의 소식을 들었는데, 그곳에 흉년이 그치고 풍년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치없고 부끄럽고 자존심도 상했지만 무조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결심했습니다. 고향에 돌아갔을 때 마을 사람들이 알아보고 나오미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뭐라고 말합니까?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뜻인데, 자기를 '나오미'(희락, 기쁨)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괴롭다, 쓰다)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된 것이 다 자신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임을 겸손히 고백합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하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돌아오자 하나님은 그녀를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염치없고 부끄럽지만.... 자존심을 버리고 용기를 내어 찾아 왔더니... 뜻밖에도 고향 사람들이 따뜻하게 맞이합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며느리 룻이 이삭을 주우려 찾아간 곳이 신기하게도 나오미 가문을 위하여 기업을 무를 자인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기업을 무른다'는 말은.... 어떤 가문이 망하면 제일 가까운 친족이 책임을 지는 관습을 말합니다. 후손이 없으면 남은 여인과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주고, 재산도 보상해 주는 것입니다. 바로 '보아스'라는 사람이 이 가문의 기업을 무를 사람인데, 마침 신앙도 좋고 큰 부자였습니다. 결국 이 보아스와 며느리 룻이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 쓰러진 가문이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니까, 온 동네 사람들이 따뜻이 맞아 줍니다. 도와줍니다. 살길이 열립니다. 기업을 되찾게 됩니다. 자손의 복을 받습니다. 복에 복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함께 축하해 줍니다. 입을 크게 벌리며 기뻐하는 나오미의 모습을 상상해 그려봅니다. 모든 것이 회복되었습니다. 고향이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성도의 고향은 출신 교회입니다. 신앙의 고향 모 교회에서도 서로 도와주며 함께 사는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교회를 통하여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신앙을 회복하며 서로 축하하며 함께 기뻐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모두가 됩시다.
돌아오게 하사 영원한 본향 천국의 소망과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팥죽 한 그릇에 에서의 장자권을 사서 이삭을 속여 축복을 받은 형 에서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집을 떠나 의지할 곳이 없게 된 야곱은 부모가 지정해 준 하란 땅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 에서에게 쫓기는 몸으로 거의 뛰다시피 해서 벧엘에 이르렀습니다. 야곱은 하란까지 가야 하는 머나먼 여행길에서 동반자도 없었고 쉴 곳도 없었습니다. 벧엘에 이른 야곱은 날이 어두워지자 한 곳에서 돌로 베개 삼아 들판에서 잠을 자면서 외롭고 슬픈 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 밤에 야곱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정든 집을 떠나 절박한 상황 속에 처해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꿈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외로움과 고뇌에 지쳐 있는 방랑자 야곱에게 하나님의 계시는 엄청난 위로와 기쁨이었습니다. 벧엘의 꿈의 내용은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다리가 있었고 그 위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있었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의 미래를 보장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기업의 축복을 야곱에게 하셨고, 후손을 티끌처럼 많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야곱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생애 처음으로 하나님의 편재하심과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하나님은 정한 장소 외에서도 어디서든지 나타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지배한 큰 감격의 순간이며 신앙적 독립의 순간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거처하는 곳으로 이곳을 하나님의 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베개 하였던 돌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자기 생애에 있어 잊을 수 없는 하나님에의 체험을 야곱은 이같이 기념하였던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보호와 일용품의 공급과 인도하심을 간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시리라고 확신하면서 참된 예배와 성전 건축과 십일조를 드리기로 서원하였습니다.(창 28:10-19). 그는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봉사하면서 자식과 많은 재산을 소유한 후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많은 부를 쌓았으나 그 곳은 영원한 거주지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거기에는 이방인들의 시기와 질투만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야곱에게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얻을 곳이 가나안뿐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택함 받은 자들의 영원한 소망은 하늘나라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롭다고 해도 그 곳은 죄와 미움과 불신의 곳일 뿐이며 참된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야곱 귀향 사건은 영적 가나안인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삶의 목표를 확실히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향을 통하여 육신의 고향이 있음같이 영적인 고향 천국이 있음 을 교훈 받게 됩니다. 성도의 삶은 이 세상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림자요, 나그네일 뿐입니다. 성도의 삶이 갖는 목적과 목표는 오직 영적 천국,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고향에 돌아옴 같이 장차는 천국 집에 가게 됩니다.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부르셀 병원에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존경받는 지성인이 폐수종으로 입원해 있는 한 달 동안 문자 그대로 발악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를 아내에게도 묻지 못했고 아내조차도 그의 병명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소리치며 괴로워하고 있는 남편의 곁에서 위로조차 하지 못하고 지켜보아야만 했던 이 불쌍한 여인과 그 사람! 그런데 그 사람처럼 글로써 현대인에게 깊은 감동을 남긴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한 세기에 가장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말로였습니다. 1980년 4월 16일, 그는 입원한지 한 달 만에 병원에서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사르트르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각 언론이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떤 독자가 한 신문사에 이런 기사를 투고했다고 합니다. "그는 아마도 비그리스도인 이었는지 모릅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습니다.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디럭스바이불)
아프리카에서 일하던 어느 선교사님은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열정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배에는 휴가를 얻어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미국의 대통령이 타고 있었습니다. 배가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되었을 때 은은하게 울리는 군악대들의 예포소리와 함께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부둣가에 나와 있었습니다. 배에서 대통령이 내려올 때 거기에는 붉은 주단이 깔렸고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을 맞이하였습니다. 대통령이 지나가자 붉은 주단은 걷히고 군악대의 나팔소리도 멎었습니다. 그 뒤를 선교사 홀로 고독하게 내려왔습니다. "사냥을 갔다 오는 대통령은 저렇게 환영을 받는데, 큰 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부인마저 잃고 선교를 하다가 돌아오는 나를 맞이하는 환영객은 아무도 없구나"하는 생각으로, 고독감과 실패감을 느끼면서 정신없이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내 아들아! 네가 아직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군악대의 나팔 소리가 문제가 아니라 하늘의 천군 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내가 맞이해 주마. 붉은 주단이 문제가 아니라 황금의 유리 길을 깔고 내가 친히 너를 마중 나오마. 사랑하는 아들아 끝까지 충성하라!" 이 말씀을 들은 선교사는 그동안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충성을 다하지 못했던 죄를 회개하고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충성을 다하였습니다.(예화뱅크-마지막 고향)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개천절 노래 가사의 첫 부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난 근본이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고향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
우리는 육의 근본인 고향과 가정이 있고 영의 근본인 신앙의 터전 되는 교회가 있습니다.
헨리 위드 비처는 "예수는 어떤 그림도 그리지 않았지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걸작품들은 거의가 예수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들이다. 예수는 단 한 줄의 시도 쓰지 않았으나 단테, 밀턴 등 세계적으로 위대한 시인들도 그에게 감화를 받았다. 예수는 단 한 곡의 음악도 작곡하지 않았지만 하이든, 헨델, 베토벤, 바하, 멘델스존 같은 음악가들은 그를 칭송하려다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인간이 보여 준 위대함은 이 겸손한 나사렛 목수로 인하여 그 풍성함이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자라도록 도와 준 모 교회가 있습니다. 그 모 교회를 전주 동부 교회로 하는 수많은 심령이 있습니다. 여러 형편 처지를 따라 모 교회를 떠나 생활하는 심령들과 함께 교제하는 시간을 갖도록 허락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교회 봉사와 사업과 직장 개인 사정 등 여러 가지 여건 속에서도 모 교회를 기억하고 함께 하기를 원하여 참여 하는 모든 이들이 아름다운 교제의 사간이 되고 선교의 장으로 발전하여 열매 맺고 종국적으로는 천국에서 만나냐 합니다.
장학일 목사님의 사모님이 임종 예배 까지 드린 상황에서 얼마후 깨어 나셨는데 그 동안 지옥 구경을 하셨는데 놀랍게도 지옥에 섬기는 교회의 권사님이 계시더랍니다. 그래서 사모님이 목사님에게 목회 똑바로 하라고 하시면서 우시시더랍니다. 천구에서 만나야 합니다.
모세는 마지막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찬 가지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사 회복의 은총 주시고 천국에 돌아오게 하사 천국의 가업으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부흥의 언약
신 30:1-10 / 피영민 목사
율법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에 기록된 율법이라는 단어는 한 가지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율법을 주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제사를 어떻게 지내는가에 관련된 제사법, 둘째는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도덕법, 셋째는 그 도덕법을 사회에서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법입니다. 그러나 사회법은 도덕법에 대한 사회적인 실현이기 때문에 결국 율법은 크게 제사법(의식법)과 도덕법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레위기를 통해 모세는 제사법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5대 제사와 7대 절기를 다룬 책이 바로 레위기입니다. 반면 신명기에서는 주로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도덕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대에 도덕법을 따라 살라’는 명령이 기록된 책이 신명기입니다.
신약시대에 언급된 율법에는 의식법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의 영원한 희생제사로 구약의 제사가 말하는 모든 실체를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의식법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는 구약의 제사의식을 시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에 나오는 율법은 제사법을 제외한 도덕법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강조한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도덕법은 영구불멸의 항존법(Standing Low)입니다. 신약시대라고 해서 십계명을 무시하거나 도덕법이 폐하여졌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도리어 신약시대에는 십계명과 하나님의 도덕법이 더욱 굳게 세워집니다.
신약을 자세히 살펴보면 십계명의 말씀이 모두 반복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상숭배 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도적질 하지 말라 등의 말씀들은 신약에도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교훈들입니다. 이처럼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도덕법은 구약시대이거나, 신약시대이거나 언제든지 타당하게 적용되는 항존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5:19)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31)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계명 중 하나라도 버리거나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계명은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요, 도덕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축복을 받느냐, 저주를 받느냐 하는 문제는 사실 의식법에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도덕법에 관련된 것입니다. 예언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망한 이유를 우상숭배와 간음과 도적질 등의 도덕적, 사회적 부패로 진단합니다. 신명기에 기록된 도덕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재앙을 당하고 결국 포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도덕법을 지키지 않으면 재앙이 임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항존 하는 도덕법을 따라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덕법을 가르치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할 것임을 먼저 예견하고 있습니다.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1절)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덕법에 순종해서 축복도 받았지만, 반면에 불순종해서 저주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는 이처럼 축복과 저주가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축복과 저주가 섞이면 축복이 빛을 잃어버리고 저주만 남게 되어 쫓겨 간 모든 나라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자인 찰스 스윈돌(Charles R. Swindoll) 목사님께서 저술한 책을 보면 이런 일화가 소개됩니다. 1978년에 영국에서 월급 인상을 요구하는 소방관들의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정부는 할 수 없이 육군을 동원해 소방관들의 업무를 대신하게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런던에 사는 한 할머니가 소방대에 전화를 해서 자신의 집에 불이 났는데, 기르던 고양이가 안방에 갇혀 있으니 구해달라고 신고를 하였습니다. 임시 소방관들은 군인정신을 발휘해서 불 가운데 있는 고양이를 건져냈습니다. 고양이의 주인이었던 할머니는 따듯한 차를 소방관들에게 대접하였고,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떠나는 소방관들을 마중하였습니다. 그런데 소방관들이 소방차를 몰고 그 집을 떠나려던 순간, 그만 불 가운데서 구해냈던 고양이를 치어서 고양이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런 우스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미국 사람과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이 식인종에게 잡혔습니다.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생각했는데 갑자기 식인종이 세 사람에게 과일을 열 개씩 따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제일 처음으로 미국 사람이 사과 열 개를 따서 식인종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러자 식인종은 “네가 사과 열 개를 이 자리에서 다 먹되 웃거나 운다면 내가 너를 잡아먹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 사람은 열심히 사과를 먹었지만 아홉 개 째를 먹는 도중에 그만 힘들어서 울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사람은 식인종에게 잡아 먹혔습니다. 조금 있다가 한국 사람이 도착했는데 한국 사람은 딸기 열 개를 구해 왔습니다. 식인종은 이번에도 똑같이 딸기 열 개를 다 먹되 웃거나 울면 잡아먹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한국 사람은 마음속으로 ‘딸기 열 개 먹는 게 뭐 어려운 일인가? 이제 살았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딸기를 먹는데 아홉 개 째를 먹는 순간 그만 크게 웃고 말았습니다. 식인종에게 잡아먹힌 한국 사람이 천국에 도착해서 먼저 죽은 미국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미국사림이 묻습니다. “나는 사과 열개를 먹기가 너무 힘들어서 울었는데 당신은 딸기 열개 먹는게 뭐 어려워서 그렇게 웃다가 죽게 되었습니까?” 그러자 한국 사람이 대답합니다.
“내가 딸기를 9개째 먹고 있는데 저기 멀리서 일본 사람이 수박 열 통을 들고 오는 모습을 보고 그만 웃음보가 터져서 웃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딸기 열 개를 먹는 축복을 누리다가 그만 웃어서 죽고 말았습니다.
축복과 저주가 섞이면 결국 축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저주만 남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들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섞이면 좋은 것은 별로 빛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1. 율법의 한계
율법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은 옳은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지만 그 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지는 못한다는 점이 바로 한계입니다. 그것은 율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죄성의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법이 거룩하고 옳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스스로 범하여 실패를 자초합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고 탄식하였습니다. 잠언 7장에는 간음을 하면 집안이 망하고 인생을 망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소가 푸줏간으로 끌려가는 것처럼 이방 여인의 색에 홀려서 끌려가는 소년의 이야기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인간은 쉽게 거짓말을 합니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와 같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지면 가질수록 더 탐욕과 탐심을 내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율법이 거룩하고 그것을 지키면 축복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율법을 거역하고 저주를 초래하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갑니다.
모세가 신명기에서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으니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해서 생명을 택하라. 축복을 택하라”고 끊임없이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망과 저주를 택하여 길을 선택합니다. 신명기 이후의 역사적인 기록에 이 사실이 잘 나타납니다. 그래서 결국 주전 721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포로가 되고, 주전 586년에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비극적인 역사를 맞게 되었습니다.
2. 도덕적 실패와 국가적 운명
이스라엘이 도덕적으로 실패하는 것과 국가적인 운명은 그 맥을 같이합니다. 하나님의 도덕법에 순종하여 살면 개인도 축복을 받고 나라도 축복을 받습니다. 나라의 부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십계명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여 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한다면 개인과 국가는 함께 저주를 받게 됩니다.
제가 지난주에 필리핀 바기오에서 사역하시는 한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필리핀의 바기오는 고산지대라서 습도도 낮고 사시사철 시원합니다. 이렇게 기후가 좋기 때문에 필리핀의 부자들과 외국인들이 그 곳에 별장을 세우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인들도 바기오로 관광을 많이 갑니다. 그래서 바기오의 시내 중심가에는 한때 부패하고 타락한 환락가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해 전에 바기오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희한하게도 지진의 여파로 환락가들이 밀집한 땅들이 땅 속에 파묻혀서 환락가가 모두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기오 사람들은 이 사건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깨달았고, 지금 바기오에서는 개신교의 부흥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바기오에 가서 설교할 때도 주민들이 3,000명이 몰리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바기오에서 부흥이 일어난 것은 바로 죄악을 징벌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그들이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국가적인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정치는 국민 다수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경제에도 큰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매스컴은 북핵의 위협에 대해서 연일 보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았지만 이 축복이 과연 지속될 것인지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 대해 우리는 정치인과 경제인들의 부패, 혹은 교육의 실패를 탓합니다. 그러나 근본원인은 성도들의 도덕적 부패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치인들, 혹은 경제인들에게 손가락질을 해보십시오. 한 손가락은 그들을 가리키지만 세 손가락은 우리를 가리킵니다. 세 배 더 잘못했다고 탓합니다.
저도 말씀을 준비하면서 우리 성도들의 도덕적 부패가 결국 나라의 패망과 위기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묵상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법에 불순종하여 교회가 부패하고, 성도들이 부패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축복을 거두시고 저주를 내리실 것이라는 사실을 두려운 마음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허물과 나의 잘못과 나의 죄악이 크다는 사실을 생각하니까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벽 3시까지 예레미야서를 모두 읽으면서 모세가 신명기서에서 그렇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했던 하나님의 도덕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고 어겼기 때문에 포로 되고 고통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3. 실패한 이스라엘이 행할 두 가지
인간이 이와 같이 율법을 지킬 수도 없고, 실패하며 저주받는 방향으로 가는 존재라면 모세는 무슨 이유로 신명기를 통해 율법을 열심히 교육했을까요? 무슨 이유로 하나님의 거룩한 도덕법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선포했을까요?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바에 따르면 인간이 실패하는 현장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 옳은 것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실패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실패한 현장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 살아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를 돌이키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축복받는 위치로 다시 돌이켜 놓으실 것입니다. 모세는 실패하고 포로 된 현장에서 두 가지를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신 30:1)
말씀을 기억하라(Remember)고 명령합니다. 모세가 신명기에서 반복해서 선포한 말씀을 머리로만 알았었다면 이제는 그 사실을 체험하게 되었으니 마음으로 기억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포로 된 현장에서 ‘우리가 어쩌다가 이 꼴이 되었는가? 왜 우리가 이런 저주를 받아야 하는가? 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이방 나라에 와서 포로생활을 해야 되는가?’라고 탄식하더라도 그 마음으로 모세가 가르친 신명기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이 운동을 배울 때도 처음에는 이론을 배웁니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하게 이론을 배웠다고 할지라도 현장에 가서 막상 운동을 하면 실수를 범하기 마련입니다. 거기서 실패를 하면 비로소 ‘선생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구나’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머리로만 아는 것은 별 소용이 없습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가슴으로 내려와서 깨달아질 때, 그것이 마음으로 기억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에 고통스러운 위기가 찾아온다면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저주가 온다더니 바로 이것이었구나. 도덕적으로 실패한 삶을 살면 개인적, 국가적인 실패가 찾아온다고 하더니 바로 이것이었구나. 간음하면 재앙이 온다더니 이것이 재앙이구나.’
그러나 그 기억으로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 2절에 보면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해서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즉시 하나님께 돌아오라(Return)는 말씀입니다. 돌아오되 몸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함께 돌아와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예언서를 읽다 보면 반복되어 나오는 내용이 있습니다. 시내산 언약인 도덕법을 따라 살면 축복이요, 도덕법을 어기면 저주라는 말씀입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도덕법을 어겨 우상숭배하고 간음하고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풍재와 깜부기 재앙과 염병과 메뚜기 재앙 등 갖가지 재앙을 내리셨다고 꾸짖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분노의 날, 이방 백성들에게 포로 될 날이 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은 그 날을 가리켜 ‘여호와의 날’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여호와의 날’이 임하였기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은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그는 그 곳에서 예레미야서와 신명기를 읽다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포로된 것은 모세가 그렇게 가르친 신명기의 말씀을 범했기 때문이구나. 그러나 이 포로생활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70년 후에는 다시 돌이킴을 받게 되겠구나.’ 그래서 다니엘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곧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 가운데 기록된 맹세대로 되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단 9:11).
우리 대한민국이 살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대통령이 통치를 잘하거나 경제가 성장해야 대한민국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을 기억하고 다시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께 돌아와야 대한민국이 삽니다. 기억하고 돌아와야 우리가 다시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매우 부패했습니다.
술집에 가서 ‘집사님’을 부르면 거기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 절반이 뒤를 돌아볼 것이라는 어떤 분의 농담 같은 진담을 들으면서 저는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부패하면 국가적 위기와 재앙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이 선포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명령이 시행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4. 하나님의 약속 세 가지
우리가 기억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Restoration)시켜 주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너의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찌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열조가 얻은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너로 다시 그것을 얻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로 네 열조보다 더 번성케 하실 것이며”(신 30:3-5). 이것이 회복입니다. 포로에서 돌이켜 국가를 회복시키시고, 열조의 땅을 회복시켜서 열조보다 더욱 번성케 되는 경제적 회복을 주십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법을 기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는 고구려 땅을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북한 공산주의가 무너지며, 남북한이 자유와 민주와 신앙으로 통일될 날이 올 것입니다. 쓰러져가는 대한민국의 경제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회복을 얻기 위해 우리는 내 허물로 실패와 재앙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기억하면서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도로, 말씀으로 하나님의 법을 다시 존중하면서 돌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갱신(Renewal)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 30:6). 우리가 돌이키면 영적인 갱신, 마음의 갱신, 정신적인 갱신, 신앙적인 갱신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참된 부흥입니다. 부흥은 성도들의 심령이 새로워져서 하나님을 다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앞에 다시 나와서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새벽기도회와 철야기도회 등 기도할 수 있는 모임에 여러분들의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하십시오. 어떤 분들은 집이 멀어서, 차타는 시간이 아까워서 나오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럴 때는 차타는 시간을 기도의 시간으로 사용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제가 미국 배톤 루지라는 곳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제가 공부했던 뉴올리언스신학교에서 배톤 루지까지의 거리는 약 80마일(130km)이었습니다. 왕복하는데만 대략 세 시간이 걸렸는데, 저는 이 시간을 기도의 시간으로 확보하였습니다. 차 안에서 혼자 주여 삼창을 하던지, 조용히 기도하던지 방해할 사람도 없으니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오며 가며 차 안에서 시간 낭비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차를 타는 시간까지 기도의 시간으로 삼으십시오. 우리가 기도하다 보면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갱신하면 체험과 이적도 저절로 따라오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체험과 기사와 이적만 원하면서 이것이 참된 부흥인양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체험과 기사와 이적만 원하면 악한 사단의 역사가 개입되고, 가짜 방언, 가짜 예언, 가짜 능력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내적인 갱신이 이루어질 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고 참된 체험, 참된 이적, 참된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억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Rejoicing).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 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30:9-10)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가정 문제, 경제 문제, 자녀 문제, 교회 문제, 국가 문제가 모두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참된 부흥, 내적인 부흥을 열망해야 합니다.
결 론
한국의 기독교는 이제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평양 대부흥도 달리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주의 종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어겨서 부패하였던 죄악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고백하고 기도했을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께서 폭팔적으로 역사하셔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남의 탓을 하지 말고 내 자신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대개 50년 주기로 부흥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평양 대부흥 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난 2007년에는 하나님께서 다시 부흥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기억(Remember)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Return),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Restoration)시키시고, 갱신(Renewal)시키시며, 기뻐하실 것(Rejoicing)입니다. 숫자적인 성장이 부흥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과 가정과 국가가 모두 회복되는 대각성(Great Awakening)이 찾아와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변화되면 세상은 반드시 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우리의 허물을 깨닫고 기도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2007년에는 우리나라에 평양 대부흥의 역사가 다시금 새롭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역전하는 인생
신 30:1-10 / 김필곤 목사
우리 교회 로비에 보면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그 나무를 자세히 보면 창 밖으로 많이 자라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골고루 자라라고 돌려놓아야 합니다. 그대로 놓아 두면 계속 창밖으로만 나무가 자라납니다. 이런 성질을 향성이라고 합니다. 학교 다닐 때 다 배운 것입니다. 식물이 자랄 때 자극이 오는 방향으로 자라는 성질을 말합니다. 빛이 오는 쪽으로 자라는 것을 주양성이라고 하고 중력이 작용하는 쪽으로 자라는 것을 주지성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식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도 향성이 있습니다. 술좋아하는 사람 끝없이 술을 좋아합니다. 위장이 썩어가는데도 별 수 없습니다. 노름 좋아하는 사람 전답 달 팔아도 노름하고 나중에는 아내까지도 파는 것이 노름이라도 하지 않습니까? 손자르면 발로 하고 발 자르면 입으로 하는 것이 놀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강원도 카지노에 가면 타고 온 차까지 맡기고 놀음하다 모든 것 탕진하고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쪽으로 향하면 도저히 바꾸려 하지 않고 계속 그 쪽으로만 치닫는 것을 봅니다. 사람에 대하여 한 번 미운 감정이 들으면 그 사람은 무엇을 해도 밉게 보기 쉽고 한 번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되면 무엇을 해도 좋게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며느리 한 번 미워하면 어떻습니까? 끝까지 미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식과 이혼할 때까지 미워합니다. 제가 아는 분 어머님이 권사님이신데 아들이 같은 교회 자매와 교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이 그 자매를 무척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죽자 사자 좋아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좋다는데 어떻게 합니까? 결국 결혼했습니다. 결혼했는데도 여전히 권사님은 그 며느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집에 와도 본체 만체 합니다. 얼마나 며느리가 분노가 쌓였겠습니까? 나중에 그분은 목사님이 되셨고 며느리는 사모님이 되셨는데도 시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가시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이 아무리 중재를 하려 해도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결국 목사님이 아내와 이혼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저 아는 친구 목사님에게 상담하러 서울로 올라왔답니다. 친구 목사님이 절대 이혼은 안된다고 말했더니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느냐고 항변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조폭 마누라"라는 영화가 상영되었답니다. 어떤 영화인지는 구경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200만 명이나 보았다니까 한 때 영화에 손을 대었다가 실패한 서세원씨가 35억원이나 투자하여 만들어 그의 인생을 역전시킨 영화인 것같습니다. 그날 그 영화 보고 시골에 내려가 아직까지도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화해하지 않았지만 부부는 이혼하지 않고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한 번 가던 길을 반전하는 것 쉽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번 품은 마음 쉽게 바꾸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릇된 길에서 어떻게 역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1.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2,10)
한쪽으로만 자라던 화분은 돌려놓으면 됩니다. 세상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하나님께 돌리면 됩니다. 죄악으로 가던 발걸음을 선한 길로 돌리면 됩니다. 패배의 길로 가던 마음을 승리의 길로 돌리면 됩니다. 차를 타고 가다 잘 못 갔으면 가장 빨리 유턴하면 되는 것입니다. 망설이면서 조금 가면 다른 길이 있겠지 하면 결국 시간과 물질, 건강만 손해가 됩니다. 빨리 돌릴수록 좋은 것입니다. 실패의 길로 가면 결국 그 실패의 포로가 되어 버립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그들은 범죄로 말미암아 포로가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1,3,4). 포로의 생활 얼마나 비참한 생활입니까? 단지 전쟁에 패하여 포로가 되는 것만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는 습관의 노예가 되는 것도 비참한 것입니다. 죄악의 노예가 되는 것도 비참합니다. 마약에 포로가 된 사람들, 놀음에 포로가 된 사람, 술에 포로가 된 사람, 유흥에 포로가 된 사람들 얼마나 인생이 비참해집니까? 달콤합니다.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과 같습니다. 지글지글 타고 있는 장면을 보면서도 그 불속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승리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돌아오면 되는 것입니다(2, 10). 2절 10절을 읽어 보십시오. 집 나가 아이는 부모님 품으로 돌아 오면 되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집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술집에서 술심부름 하면서 역전의 인생을 살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님께 돌아오는 것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코카콜라의 창업자인 아사 G 캔들러는 알코올 중독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항상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캔들러는 의지력이 나약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금주 선언을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어느날 술에 취해 귀가하던 그는 벼락같은 마음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자신의 본능적 요구를 거절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캔들러는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답니다. 아내는 바로 그 시간에 남편의 `금주'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부부는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캔들러는 아내의 기도를 통해 영혼의 안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알코올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그는 그 때부터 수입의 10%를 철저히 헌금하며 사업에 열중하는 열정의 사람이 되어 코카콜라를 오늘과 같은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었습니다. 역전하는 인생을 살려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습관으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습관, 사고 방법으로부터 돌아 서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던 발걸음을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입니다(3).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입니다.
(2) 우리를 포로에서 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3). 문제를 나 홀로 풀려고 하지 마십시오. 풀리지 않습니다. 더 올무에 매이게 됩니다.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면 하나님이 그 포로에서 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지역적으로 모든 백성 중에서 지역적으로 모든 백성 중에서(3) 거리적으로 하늘 가에 있을 지라도(4) 우리 하나님께서 그 올무에서 풀어 주십니다.
(3)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6). 준비해 놓고 우리가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는 하나님이십니다.(어서 돌아 오오 어서 돌아 만 오로 )
헤밍웨이의 단편 중에 아버지를 떠난 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페인에 어느 엄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사사 건건 충돌을 합니다. 결국 아들은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가출을 해서 몇 해 동안 방황을 합니다. 아들을 내보내고 나서 아버지는 괴롭습니다. 아버지는 신문광고를 냈습니다. 짤막하게 "파코, 화요일 정오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 예정한 시간, 정오에 호텔에 가보았더니 무려 800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이 모였더랍니다. 파코라는 이름이 아주 흔한 이름이라서 파코라는 이름으로 집나간 아이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조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제 2001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진정 우리가 역전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길은 우리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죄악의 포로로 묶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까? 올해가 가기 전에 정리할 것 정리하십시오. 끊을 것 끊고 절제할 것 절제하십시오. 풀지 못한 미움과 증오가 있습니까? 다 풀어 버리십시오. 내년까지 그것 가지고 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것이 복이고 우리의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 첩경입니다.
2. 순종하는 것입니다. (2, 9-10)
돌아 오는 것은 역전의 인생의 출발입니다. 역전의 인생의 열매는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아버지 집에 돌아 오면 아버지의 말씀을 잘 따라야 합니다. 어떤 일에 성공하려면 아마추어의 말이 아니라 전문가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전문가는 누구이겠습니까? 내가 아는 것 보다 나를 잘 알고 나의 인생 전부를 섭리하시는 분이 누구이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말씀 따르는 길이 실패의 자리에서 성공하는 첩경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처방보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을 역전 시킬 가장 좋은 처방입니다. 하나님의 처방전을 보십시오. 8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9절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공이고 승리입니다. 말씀 따르다 가난하게 살도 말씀 따르다 어려움 당한다 해도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승리인 것입니다. 억울해도 좋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래도 말씀이면 따르는 것입니다. 말씀이 가라는데까지 가고 멈추라는 곳에서 멈추어 보는 것입니다. 용서하라하면 용서해 보고, 사랑하라하면 사랑해보고, 소망을 가져라 하면 소망을 가져보고, 끈으라 하면 끈어보고, 절제하라 하면 절제해 보고, 기뻐하라 하면 기뻐해보고, 걱정을 주님께 다 맡겨라 하면 맡겨 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인생 역전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던 일들이 우리 하나님이 해 주시는 기적적인 일들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의 역전을 보십시오. 그는 형제들에게 인신 매매되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자신의 인생을 뒤집을 절호의 찬스가 왔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가 자신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 중년 아줌마가 젊은 요셉이 탐이 났는가봅니다. 그 때 이 아줌마의 유혹에 모른체 하고 넘어가면 인생 역전이 될 수 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합니까?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 39:9)" 그는 과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감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감옥행이 노예의 신분에서 죄수의 신분에서 총리가 되는 인생 역전의 도화선이 된 것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왕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 감옥에서 왕 주변에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당장 눈 앞에서 이익이 없을 것 같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순종할 때 역전의 드라마는 펼쳐지는 것입니다. 모세가 자신 힘 믿고 혈기 부릴 때는 실패하고 도망자가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이스라엘의 민족 지도자가 된 것을 봅니다. 홍해를 건너라 하면 이해가 가지않고 두렵다해도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을 돌라고 하면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역전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요즈음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무슨 생명력이 있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 세상에서 배운 지혜로 하면 잘 살고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손해만 올 것이라고 합니다. 이익만이 영원하니 이익이 되는 곳에 순종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약간 거짓말 하면 당장 이익이 오는데 어떻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냐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하면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치원 생에게는 텔레토비 인형 사준다고 해야하고, 초등학생에게는 여자 짝궁으로 자리바꿔준다고 해야 하고 중학생에게는"왕따" 안 시키고 "짱"시켜준다고 해야 하고, 고등학생에게는 내신성적에 반영해야 한다고 하고, 대학생에게는 취업추천서 써준다고 하고 국회의원에게는 다음에 또 찍어준다고 해야 하고 아저씨에게는 정력제 준다고 하고 아줌마에게는 자리 양보해 주어야 한다고 할 때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한 해가 지나갑니다. 역전을 향한 인생을 살기 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역전의 인생 드라마를 만드는 첩경입니다. 미국은 2002년을 전쟁의 해로 선포한다는 뉴스도 보았습니다. 세상의 지혜로 복잡한 인류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습니까? 말씀으로 돌아 가는 운동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인류에게는 희망이 있고 가정이나 교회도 개인도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덴마크를 아실 것입니다. 국토라야 남한의 반도 안되는 땅이요 인구라야 461만 이니 서울시 인구의 약 1/3쯤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1600년대는 바이킹으로 유럽을 휩쓸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에 의해 바이킹족은 패전하고 말았습니다. 전쟁 배상으로 가장 비옥한 땅인 '딕'이라는 지역과 '홀스타인'이라는 지역을 하나는 독일에서 다른 하나는 오스트리아 내주고 말았습니다. 비옥한 땅은 적군에 넘어갔고 남은 땅에서 모래땅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돌아온 병사들은 술먹고 도박하고...그냥 허송세월 보내고 있습니다. 지하자원도 없습니다. 자연 기후도 좋지 않습니다. 토지도 사막뿐입니다. 사람들이 아궁 동성으로 하는 말, "이제 우리는 끝났다."고 합니다. 이 때 전쟁에서 돌아온 패잔병중 공병상사 "마이즈 갈라스"라고 하는 청년이 한손에 성경들고 한손에 괭이들고 군중앞에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호소하기 시작합니다. "친애하는 덴마크 국민 여러분, 칼로 잃어버린 우리의 조국 괭이로 찾읍시다. 해적질로 잃어버린 도덕, 성경을 통해 찾읍시다." 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누구하나 거들떠 보질 않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홀로 그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나무 심어 안되면 저나무도 심어보고 저 나무 심어 안되면 또다른 나무 심어보고....그러다가 어느 산골에 있는 이름없는 나무를 심어 조림하고 조림하니 그 땅이 옥토로 변해, 옥토가 되니 그 땅이 초원이 되어지고, 초원따라 낙농을 해서 소를 먹여 세계적으로 우유와 빠다와 치즈를 만들어 당시 세계에서 가장 소득 높은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2)"
성경을 보십시오. 9절 이하를 보십시오.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에게 펼쳐지는 역적의 드라마입니다. 레위기 26장을 보십시오.(레위기 26 : 1-13) 순종하면
(1) 비를 주시되 때에 맞게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4). 이것은 불순종할 때에 되던 19,20과 대조가 되는 것입니다. 와야 할 때에 비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에 순종하면 비를 주시되 시간까지 맞추어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신 11 : 14, 28 : 12).
(2) 곡식을 여유있게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5,10).
(3) 평화를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6). 그런데 형편이 달라져 혹시 전쟁이 있다 하더라도,
(4) 수를 초월한 승리를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7,8).
(5) 하나님께서 그들을 싫어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11).
순종 안 하면 (레위기 26:14-20) (1)힘들여 지어 놓은 농산물을 대적이 와서 먹게 된다고 하였습니다.(레위기 26 : 16, 신 28: (2)하늘이 철과 같이, 땅이 놋과 같이 굳어져 비가 안 오니 헛농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레위기26 : 19,20, 신 28: 23,24). (3)메뚜기가 와서 그 잘된 농작물을 다 갉아먹으니 헛농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신 28:38). (4) 일군이 죽도록 고생하여 번 삯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게 되니 헛수고가 된다고 하였습니다(학 1 : 6).
말씀 대로 따를 때 역전의 인생드라마는 펼쳐 집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해도 말씀을 따를 때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버리는 아픔은 잠간입니다. 아픔이 있다고 해도 버릴 것 버리고 순종할 때 최상으로 것으로 선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존 파이퍼가 쓴 하나님의 숨은 미소(hidden smile of God)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데이빗 브레인우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분은 예일대학에 갔다가 퇴학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잔 파이프는 그것이 데이빗 브레인우드에게는 축복이었다고 합니다. 예일대학에서 쫓겨나지 않았으면 데이빗 브레인우드가 절대로 인디언 선교사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인디언 선교를 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는 선교사의 영적 아버지가 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고통을 설명하면서 'Lose the good and Gain the best'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좋은 것을 가져가시고 대신 최상의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 가져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최상의 것을 주시기 위해 그 좋은 것 거두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만나면 내가 좋아하는 것 가장 최상의 것을 받기 위해 버려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미키 마우스의 월트 디즈니를 아실 것입니다. 1920년 그는 실패와 좌절 가운데 방황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낙심하고 있느냐? 출판사에 만화 원고를 들고 찾아가서 취직을 구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하였습니다. 저는 이제 가망이 없나 봅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교회 창고에서 지내도록 했습니다. 그러면서 격려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버려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고 용기를 가지십시오" 그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허름한 창고에서 그 말씀 붙들고 꿈을 키웠습니다. 창고에는 쥐가 많았습니다. 그는 쥐를 아름다운 쥐로 새롭게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그림이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는 미키 마우스가 된 것입니다.
세상 그 어떤 것으로 사람을 이렇게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노벨 문학상 받은 작품, 조폭 마누라, 엽기적인 그녀, 무엇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역전의 인생 드라마를 살게 만들겠습니까? 대부분의 세상의 책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머리만 복잡하게 합니다. 이상한 생각을 하게 합니다. 허무하게 만듭니다. 그 책의 메시지데로 따르면 따를수록 더욱 인생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생명을 살립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6-17)
역사상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을 보십시오.아브라함, 요셉, 모세, 링컨, 헬렌켈러. 칼빈, 루터, 처칠, 워싱턴 모두다 좋은환경 좋은 조건을 갖추고 태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형들의 미움을 받고, 초라한 목동으로, 살인자로, 우상 장사의 아들로, 불구자로, 국민 학교도 못 갈 정도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고,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고 조롱 받을 정도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적인 특징은 그들은 일평생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인생의 역적 드라마를 만들어 낸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을 아실 줄 압니다. 가난하게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아홉 살때 죽었습니다. 학교는 겨우 6개월 다녔습니다. 22세에 사업에 실패했습니다. 그는 시골에서 잡화점을 경영하다 파산했습니다. 그 빚을 갚는 데 15년이나 걸렸습니다. 23세에 주 의원 낙선하였습니다. 24세에 또다시 사업에 실패했습니다. 26세 때 사랑하는 여인을 잃었습니다. 27세에 신경 쇠약과 정신 분열증으로 고생하였습니다. 29세 때 의회 의장 선거에 낙선하였습니다. 31세 때 대통령 선거에 낙선하였습니다. 34세 때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하였습니다. 39세 때 국회의원 선거에 또 낙선하였습니다. 46세 때 상원의원, 47세에 부통령, 49세에 상원의원 낙선하엿습니다. 그러나 그는 드디어 51세에 대통령이 되었고 지금까지 미국인의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남아있습니다. 그가 포기하지 않고 역전의 인생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어머님이 물려 주신 말씀입니다. 링컨의 어머니는 유산으로 자식에게 자신의 성경을 물려 주었고 그 말씀대로 살 것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링컨을 말씀을 읽으며 자신의 인생을 역전의 드라마로 만들었습니다. 링컨 "세상의 교육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없다. 오직 성경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의 실패를 해피엔딩으로 바꾼‘인생역전’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이제 2001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가 역전의 인생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에는 보이지 않은 것 같지만 놀라운 역전의 드라마가 우리 인생을 통하여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신명기 30:1-10 / (작성: 정요셉)
찬송가 273장 “나 주를 멀리 떠났다”
너를 다시 기뻐하사
모세는 신명기 27장에서 29장까지의 내용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복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림으로 인해 저주 가운데 놓여 있는 상황을 전제로 저주와 징계의 상황 가운데 있을지라도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 여호와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설교합니다.
기억이 나거든(1-2)
1-2, 1.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2.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1절의 상황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림으로 저주를 받아 징계 가운데 다른 나라의 포로가 된 상황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내가 네게 진술한”의 의미는 모세가 신명기 27장, 28장, 29장에서 복 받을 행위와 저주받을 행위에 대해 언급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는 이스라엘이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다가오게 될 미래에 복 또는 저주가 임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키지 않아 저주 받은 상황을 가정하여 설교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에 의해 포로 신세가 된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자신이 설교한 복과 저주에 관한 내용이 기억나거든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촉구합니다. 비록 너무 멀리 와서 돌이킬 수 없다 라고 생각될지라도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나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모두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은 가지고 나간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큰 흉년을 만나게 됩니다. 탕자는 고통 중에 아버지의 집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아들의 사랑으로 맞이합니다. 탕자가 회복되는 시작점은 바로 아버지를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고통 가운데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호와께 돌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회개를 뜻합니다. 회개는 길과 방향을 돌이키고 바꾸는 것입니다. 말씀을 저버린 삶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던 삶의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감정에 의해 눈물을 흘리고, 입술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삶의 변화로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고백과 행동의 변화가 있는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긍휼히 여기사 (3-5)
3-5, 3.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4.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5.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네게 다시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돌이키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사 포로 신분에서 다시 언약의 백성으로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4절에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이스라엘이 지리적으로 먼 곳에 흩어져 있는 상황과 그들이 지은 죄의 심각성, 무서운 징계로 인해 도무지 이전 상태로 회복될 수 없을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모으시고, 심한 징계로 인해 도무지 회복될 수 없을 것 같은 이들을 포로 된 곳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에게 다시 땅을 허락하시고, 이전보다 더 번성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회복의 은총을 허락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회복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이스라엘이 회복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겨주심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내 의와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은총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의 긍휼하심 가운데 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마음의 할례 (6-7)
6-7, 6.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7.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적군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를 내리게 하시리니
할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징표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다시 할례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언약의 갱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할례는 이전에 육체에 행하던 할례가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베푸시겠다고 하십니다. 육체의 할례와 달리 마음의 할례는 외적인 표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까지 이르게 됩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게 되면 외적인 동기가 아닌 내적인 동기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보이는 모습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내적 변화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중심이 없다면 외적인 표식은 그저 내용 없는 빈껍데기와 같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내적인 변화가 일어나면 외적인 변화는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됩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사랑이 가득차 흘러 넘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마음의 할례를 베푸신다고 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하고 그 생명을 소유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원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육체의 할례가 이스라엘에게 국한된 언약의 징표였다면, 마음의 할례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언약의 징표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할례 받은 자로서 하나님이 세우신 새로운 언약 안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외형을 붙들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날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새로운 생명을 공급받아 그 넘치는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7절의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를 내리게 하시리니”에서 핍박하던 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 사용한 도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공의로운 심판을 수행하도록 명령 받았지만 하나님을 거스르고 공의가 아닌 잔인함으로 이스라엘을 대우하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바르게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돌아오면 (8-10)
8-10, 8.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9.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돌아오라고 말씀하신 후 그들에게 가장 먼저 요구하시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범죄하여 비참한 징계 상황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의 시작 지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들은 말씀을 그들의 삶 가운데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될 수 없을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고 회복된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며 기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러한 회복의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지금도 허영의 시장 한복판에서 서성이느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져 버린 분들이 계신다면 속히 그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기었노라 선포하신 주님과 동행하며 담대히 진리와 생명의 길로 향하는 은총의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 속에 주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지키는 일에 힘쓰게 하시고, 혹여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길에서 벗어나 있다면 속히 돌아와 주의 말씀을 청종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합니다. 메마른 심령 가운데 마음의 할례를 베풀어 주시고, 하나님을 향한 새 마음을 허락하사 형식에 갇힌 신앙인이 아닌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오늘도 내가 이기었노라 선포하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진리의 길을 걸으며 천성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은총의 하루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억나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2.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나는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3.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4. 진실한 회개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나의 삶 속에서 회개가 필요한 영역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신 30:1-10
신명기는 출애굽 제40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평지에 머무고 있을 때 광야의 신세대들을 대상으로 모세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는 백성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유언과 같은 설교를 하였습니다. 신명기의 주제는 ‘하나님의 명령을 잘 듣고 순종하라 그리하면 네가 살고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가 오래도록 복을 받을 것이다’는 내용으로 요약이 됩니다. 모세는 이 말씀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복이고, 불순종은 저주와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고 분명하게 경고합니다. 특별히 신명기 28장은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과 불순종할 때 받을 저주에 대하여 대조적으로 선포된 말씀입니다.
지난 주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은혜를 기억하고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들을 잊지 말라.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조상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을 것이다.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 풍성한 양식으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기 살며 우양이 번성하고 은금이 증식되며 소유가 풍성하게 될 때에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두렵다. 내 능력과 손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을 얻었다 할까 두렵다’고 경고합니다.
40년 광야여행을 함께 하며 자기 백성의 목이 곧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모세는 그들의 장래를 크게 염려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얼마 못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할 것을 미리 내다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신 것은 너희가 의롭거나 너희 마음이 정직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나안 사람들의 악하기 때문에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신 것이다.그 땅을 너희에게 주신 것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시기 위함이니 교만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모세가 앞서 예언한 것처럼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 살 때 하나님을 잊고 배반하여 가나안의 우상들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백성을 징계하여 각종 질병을 재앙으로 내리실 것이고, 이방 민족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하실 것이며 결국은 땅을 빼앗기고 포로가 되어 만민 중에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신 28장).
그러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회복의 길이 있음 또한 알렸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간 모든 날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1-3절)
오늘 본문의 주제는 ‘돌아옴’이며 신명기에서 강조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명령입니다.‘하나님께 돌아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긍휼히 여기시고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며 너희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처럼 너희를 기뻐하여 너희에게 복을 주시리라’약속하십니다.‘돌아옴’은 앞으로 우리가 읽어나갈 여러 선지서들의 공통 주제가 됩니다.하나님은 언약을 깨뜨리고 이방의 신들을 섬기며 하나님을 떠나간 이스라엘을 심판하여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정복당하게 하십니다. 심판에 앞서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경고하시며 돌아오라 부르셨지만 이스라엘은 끝내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고 경고의 말씀도 무시하여 멸망으로 향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도 죄인들을 불러 회개케 하심이었습니다.하나님의 아들이 다윗의 자손으로 유대 땅에 오셨지만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였고 도리어 그를 핍박하였으며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행7:52).사도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사도들의 설교 중심 메시지는 십자가에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을 받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행3:19).‘돌아옴’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흐르고 있는 간절한 사랑 고백입니다.‘돌아옴’은 소망이 없는 죄인들에게 주시는 또 한 번의 기회입니다. 이 부르심에 바르게 응답하고 계십니까?
문화비평가이며 전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이어령 교수가 늦은 나이에 예수를 믿고 78세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고 2년이 되었을 때 그의 회심기라고 할 수 있는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출간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통해 영적인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모 일간지에 실렸던 대담 내용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그에게 ''한 인간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물었을 때 "기독교의 목적은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예수님은 우리에게 ''나처럼 되어라''는 미션을 주셨습니다.우리가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이 땅의 가치와는 전혀 다른 생명의 떡,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습니다.그 길은 자기 부인의 길입니다.돌이키는 길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세례를 받은 이후 네 가지 유형의 크리스천이 있음을 발견했답니다. 첫째, 발로 믿는 사람입니다.교회에 가면 제일 눈에 많이 띄는 부류인데,교회에는 부지런한 사람이 많더랍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그들은 기도나 봉사에 언제나 열심을 냅니다. 마르다와 같은 유형인데이런 분들은 행위를 중시하는 교인들입니다.
다음으로는 가슴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이른바 ''마리아 유형''입니다.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감동하는 사람도 교회에 많습니다.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그들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할렐루야''와 ''아멘''을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머리로 믿는 사람입니다.그는 이 유형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자신이었다고 토로했습니다. 발로 걸어보지도 않고, 가슴으로 받아들이지도 않고 머리를 ''굴리며'' 생각을 거듭하는 사람입니다.물론 지성의 작용은 중요하지만 머리로만 믿을 경우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한 몸으로 믿는 사람입니다.발로만, 가슴으로만, 머리로만 믿어서는 부족하고 모든 것이 합쳐져 온전한 몸을 이뤄야 합니다."온 몸으로 믿는 사람이 온전한 신자라고 봅니다.예수님이 전형이시지요. (교회에 대한) 여러 부정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희망인 것은 이런 몸으로 믿는 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는 어떤 유형의 크리스천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는 세례 이후에 경험하고 있는 일들을 솔직하게 말하였습니다. “세례를 받고 오히려 내 외적인 상황은 악화되어 갔습니다. 세례 받고 나서 일일이 외부에 말 못할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남들은 나보고 ''이제 세례까지 받았으니 더 행복해 질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하는데 나에게는 거꾸로 박해가 시작된 것 같았습니다.”문화 비평가로 평생 무언가를 비평하며 살아온 자신이 이제 거꾸로 비평을 받는 자리에 섰다는 고백입니다. 그의 회심과 세례를 축하하며 함께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온갖 비난과 비웃음으로 그를 비평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이 세례를 받은 것은 세속적 의미의 평화를 구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고 합니다.오히려 자신의 해체를 기대했습니다."생각해보니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이 좁은 문 아닙니까? 그분이 가신 길은 만사형통의 길이 아니라 좁은 길입니다.예수님이 말하시는 행복과 성공은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를지 모릅니다. 요즘은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요.진실로 그분의 길을 걷고 싶습니다."
"기독교에서 약속의 성취는 바로 내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약속은 세대에서 세대를 이어 성취됩니다. 내일 성취되지 않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입니다.''오늘 믿으면 내일 잘 된다''는 것은 자판기지 종교가 아닙니다. 자판기 같은 종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세상 일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이 있습니다. 기승결(起承結)이 아닙니다.과학은 기승결일 수 있습니다.그러나 문학이나 문화, 종교는 기승전(起承轉)이 있어야 결(結)이 나옵니다. 반드시 그 프로세스 가운데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원인이 있고 바로 결과가 나오면 믿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행로에는 반드시 전(轉), 즉 전환이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되지만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결국 결(結)로 갑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지요."(이상 국민일보에서 발췌)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돌아온 작은 아들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짧은 이야기 가운데 시문학이나 소설에 사용되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조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달라 요청하여 모든 재물을 모아가지고 먼 나라로 가버렸습니다.아버지를 떠남, 이 부분이 이 이야기의 기(起, introduction)에 해당한다면, 승(承, development)은 그 아들의 방탕생활과 실패의 부분입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가 없는 먼 나라,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먼 나라에서 마음껏 즐기며 자유를 누렸습니다. 가진 돈으로 허랑방탕하며 얼마 가지 못하여 그 재산을 다 허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으니 하는 수 없이 그 나라 사람들에게 붙여 살며 겨우 돼지 치는 일을 맡았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허기진 배를 채우려 했지만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어 굶주려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돼지우리에서 처참한 신세가 되어 돼지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한 자신을 본 아들은 비로소 아버지가 생각났고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가 기억났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돌이켜 말하기를,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으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하고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죄를 깨닫고 돌아감 이것이 이 이야기의 전(轉, turn)에 해당합니다.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는 아직도 거리가 멀리 떨어졌음에 불구하고 멀리서 상거지꼴로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아들을 알아본 아버지는 아들을 불쌍히 여기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아들은 아버지께 제가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 하였지만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하여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는 신을 신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베풀었으며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 하고 이웃들과 함께 즐거운 잔치를 벌였습니다.
방탕한 생활을 하다 뻔뻔하게 돌아온 동생이 싫었던 형은 극진히 환영하는 아버지의 처사에 분노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큰 아들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았고 잃었다 얻었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는 말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아버지의 환영과 용서가 이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방탕한 작은 아들이 돼지우리에서 죄를 깨닫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 즉 소설의 구조에서 ‘전(轉, turn)’의 과정이 없었다면 아버지의 환영과 용서, 기쁨이라는 결과(結, conclusion)도 나오지 못하였을 겁니다.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 아버지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는 순간 이전에 행하였던 나의 모든 잘못이 아버지와 하늘에 얼마나 큰 죄악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기억하고 깨달았으면 이제 돌아옴이 따라와야 합니다.
모세의 예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나라의 포로가 되어 거기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될 때에 비로소 자신들의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게 될겁니다. 모세는 말합니다.‘이 일이 네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그들이 남의 나라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거든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라고 합니다.오늘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도 마음을 돌이켜 너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너희를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며 너를 흩으셨던 모든 백성 중에서 다시 모으실 것이라. 쫓겨난 내 백성이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거기서 너희를 모을 것이며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에게 약속하신 그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거기 살면서 너희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이 곧 회개입니다.돌아옴과 돌아섬이 없이 현재의 삶, 나 중심의 삶,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지금의 방식을 고집하며 하나님의 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그 길은 좁은 길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절대 편하고 재미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참 행복의 길입니다. 그 결과는 생명입니다.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결과물이 없고 변화가 없는 것은 ‘돌아옴’ 이라는 전환의 과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고 싶으나 믿어지지 않는 것은 전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단절과 고립됨, 잃는 것이 두려워 돌아서지 못합니다.잃어야 얻고, 죽어야 사는데 그 결단이 어렵습니다. 자기 부인과 자기 해체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자기 존재가 없어진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두려운 사람은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녀도 예수가 구주로 믿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삶의 전환, 사고의 전환은 신앙생활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돌아섬이 없이 참 신앙은 불가능합니다.흔히 개종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단순히 종교를 기독교로 바꾼 것이 하나님께 돌아옴은 아닙니다. 전에 하나님을 몰랐을 때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살았던 삶의 방식을 떠나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모양으로 숨김없이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자세가 요구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의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약속의 땅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십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명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었습니다.하늘 높이 있고 바다 밖에 있어 누군가 우리를 위하여 거기로 가서 가져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실행하도록 해야 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30장11절-20절에 하신 말씀처럼, ‘그 말씀은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으니 네가 이것을 행할 수 있다’ 하셨습니다.‘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으니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라.그를 가까이 하며 의지하고 따르라.그는 네 생명이시며 너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그 땅에서 너희가 오래도록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약속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생명을 얻을 것인지 그 결말은 분명합니다.그러나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잊고 그 말씀을 떠나 하나님보다 다른 신들을 더 사랑하다가 세상의 죄와 사망의 포로가 되어 고민하며 신음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 돌아와야 합니다. 그 길만이 살 길이며 복된 길입니다. 돌아오는 작은 아들을 문 앞에서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도 날마다 문을 열어놓고 집을 나간 자식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리십니다.아버지 집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평화와 기쁨과 안식이 있습니다.
실패와 성공
신 30:1-10
인간을 생각할 때마다 인간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도 같이 병행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을 같이 생각하지 않고 인간만 생각하면 필시 인간을 최고로 여겨버리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이 하나님인양 행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배후에서 일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항상 겸손함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어떤 일도 자신의 업적으로 가로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입니까?' '하나님,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세상 사람들과 같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 있는 인생입니까?' 이렇게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묻고 자신의 인생을 점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겸손이며 하나님이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신자입니다.
신자가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만드시고 나서 팽개쳐 버리고 '너희들 마음대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드실 때부터 하나님이 원하시고 계획하신 바가 있기 때문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 당연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을 생각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을 점검할 때도 '하나님께 물으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고 붙잡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며 사는 것이 신앙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점검했다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고 산다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 하나하나를 하나님께 묻고 살아갈 때 내 인생 깊숙이 세밀하게 개입되어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내 힘으로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없고 모두가 하나님의 뜻아래서 진행되어지고 있는 인생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발 앞에서 조용하게 무릎 꿇으면서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고백하는 그 말 한마디가 신앙의 진수이며 겸손과 온유함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 멋대로, 자기에게 유익 되고 편리한 대로 처리하면서 하나님께 묻지를 않습니다.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하면 하나님의 뜻이고 유리하지 않으면 뜻이 아닌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간 중심으로 존재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중심으로 존재하는 신은 거짓된 신이며 우상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중심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창조주를 무시하고 모독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뭔가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여러분에 필요에 의해서지 만들어진 피조물의 요구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따라서 만든 자는 자신에게 필요 가치가 없어진 것은 언제라도 버려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고 인생이라는 것을 살아가고 있으며 이런 일 저런 일을 겪게 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피조물의 입장에서는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무엇인가 뜻이 있어서 하신 일이라면 담담하게 따르는 것이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힘든 일을 겪으신 분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당신이 당해보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하지 한번 당해봐라 그런 말이 나오나'라는 반발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목사인 나는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신자로서 바른 삶이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결국 '당신도 한번 당해봐라 그런 말이 나오나'라고 하는 것은 아직까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살고 있는 증거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저 역시 힘든 일을 겪게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저에게 가르쳐 주시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사랑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삶속에서 세밀하게 개입하시고 일하시는데 정작 우리들은 그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어떤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혹 소경으로 귀머거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도 우리들의 인생에 개입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고 해서 행여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성공한 인생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개입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을 피조물 중심으로 존재하는 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자기 밖에 모르고 자기 중심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시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괴로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것은 나의 소원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에 세상 사람들은 참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생각하는 신이란 자기들의 인생을 도와주는 역할로서의 신을 생각할 뿐이지 신의 뜻과 계획을 가지고 자기 인생 속에 뛰어드는 신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가지고 우리 인생에 개입하신 분입니다. 이것은 아예 우리가 지음 받고 세상에 존재할 때부터 '내 인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세상에 펼쳐 내기 위해서 부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애당초 '내 인생'이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인간 자체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고 허수아비나 로보트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아서 노골적으로 거부할 수밖에 없는 말이라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렇게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피조물에게 있어서 자기 주권이나 자기 권리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에게 오로지 존재 이유만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에 의해서 존재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가장 정확한 분석이며 결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염려하고 걱정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고 삶에 대해서 고통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려고 하지만 자신이 원하고 추구하는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모습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은 저마다 부자로 살고 싶어하고 부자로서 세상에 존재하고 싶어하지만 부자로 존재할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여건이 없는 것입니다. 돈 많은 부모를 둔 것도 아니고,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고, 세상에 높은 지위를 가진 것도 아니고, 한 마디로 말해서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부자로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숨을 쉬고 신세를 한탄하면서 하늘을 원망하기도 하고 근심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인생살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신자는 스스로 존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되어져 살아갈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존재하고자 힘쓰는 것이 아니라, 현재 주어진 여건과 환경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재되어져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주신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고 무엇인가 뜻이 있고 계획이 있어서 지으셨다면, 나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과 여건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포석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국 현재의 환경에서 벗어나서 좀 더 나은 모습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것보다는 주어진 것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물론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 중심을 벗어나지 못한 인간으로서 이렇게 산다는 것이 힘들고 불가능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신자라면 이것이 신자로서 바른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러한 삶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것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약속의 땅에서 쫓겨날 것을 미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어떻다는 것을 미리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을 염려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을 미리 내다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쫓겨났을 때 다시금 이스라엘을 불러모으실 것에 대해서 미리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29장의 이야기와 연결 지어 생각해야 합니다. 29장에서 하나님은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언약에 참예하여 살아갈 것을 말씀하십니다(29:12). 언약에 참예하여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약이 구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구원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농사도 짓지 못하고 헤매고 다녔지만 옷이 낡아지지 않고 신이 해어지지 않았으며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았던 것과 같이 은혜가 우리를 감싸고 인도하고 있음을 알고 언약을 믿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할 때 그들에게서 보여지는 우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고 분노와 질투의 불로 그 위에 붓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 내어서 다른 나라에 던져 버리신다고 하십니다(29:28). 그렇게 되었을 때 쫓겨 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흩으신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겠다(30:2,3)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로 쫓겨간 가운데서 다시금 여호와께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이 일이 마음에 기억 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다른 나라로 쫓겨가는 징계를 받았다고 해도 그 가운데서 '이 일'이라는 것을 마음에 기억하지 못할 때는 여호와께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셨던 일은 29장에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언약의 내용들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어떨 때 복을 받고 어떨 때 저주를 받을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이 언약에 참예 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힘을 믿고 살 때 그들을 약속의 땅에서 뽑아 내어서 다른 나라로 던져 버리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실제로 다른 나라로 쫓겨감을 당했을 때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건너기전 하셨던 말씀을 기억한다면 자신들이 쫓겨남을 당하고 다른 나라로 던짐을 받게 된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기억함으로서 자신들의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다시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기대하는 것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지 않는 인간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언약도 잊어버리고 땅의 풍족함에 빠져서 살아가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기대를 걸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왜 쫓겨나야 하는지 그 이유를 미리 말씀하심으로서 쫓겨났을 때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자기 죄를 알고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이스라엘을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는 것은 말씀을 잘 지키는 인간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말씀을 새기는 인간이기를 원합니다. 실패한 경험을 토대로 해서 말씀을 새기라는 것입니다. 실패하기 전에 말씀을 대하는 느낌과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 상태에서 다시 한번 말씀을 들여다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말씀은 자신의 실패를 낱낱이 고발하고 실패 속에서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만을 노래하는 참된 이스라엘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명기의 말씀이고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구원이란 우리 쪽에서 대충 말씀을 지킴으로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실패한 자리에서, 인간 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만 모든 희망을 두고 사는 것이 참된 백성이며 구원받은 자입니다. 따라서 말씀에 실패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마음에 두고 산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지킬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서 어느 정도는 지켜야 한다'고도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자기에게 편리한 대로 적당히 조절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라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어느 정도는 성공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결국 자기의 종교적 행동을 높이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를 곤란하게 하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면'이라는 말씀입니다. 2절에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이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3절에서 말씀한 대로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다시 모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또 8-10절까지의 말씀도 '돌아와 다시 말씀을 순종하고 명령을 행하면 복을 주겠다'고 말씀합니다.
말씀에 실패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로 쫓으셨는데 말씀이 기억나거든 다시 돌아와서 말씀에 순종하라는 이 말씀이 어찌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보고 행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11-1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고 하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행할 수 있는 조건은 말씀이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명령을 행하라고 할 때 우리는 고민을 합니다. '어떻게 행할까?' '할 수 있는가?'라고 고민하지만 하나님은 명령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다 밖에 있는 것도 아니라 우리의 입에 있으며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즉 말씀이 입에 있고 마음에 있는 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뜻을 깨달을 수가 있고, 그 말씀이 마음에서 행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이 마음에 있게 되는 것은 누구의 일입니까?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말씀을 두시고 그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고, 깨달음을 따라 살아가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의 말씀이 스스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말씀이 내 마음에 있으면 율법 하나하나를 행할 수 있다는 뜻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율법이란 하나하나를 실천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함유하고 있는 정신을 우리에게 말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사랑이 없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것이 바로 말씀에 대해서 실패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인정하지 못하신다면 자신의 삶을 세밀하게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과연 사랑이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웃을 하나 만나도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만나져야 합니다. 과연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삶에서 과연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비쳐지고 있습니까? 결국 우리들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삶은 말씀에 실패하고 있는 모습만 잔뜩 안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우리 속에 말씀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이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실패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기를 보지 않고 예수님을 보게 되어 있으며 그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오직 말씀을 자신의 생명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과연 무엇을 생명으로 여기고 살아가는가를 점검하는 것을 도와줍니다. 내가 무엇을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는가를 우리들의 삶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돌아볼 때 자신의 실패를 발견하게 되고 실패의 자리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에 대해서 눈이 떠지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여러분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입니까? 말씀입니까 아니면 세상입니까? 무엇을 원하십니까? 말씀이 여러분의 입과 마음에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부자 되는 것입니까?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들여다보시고 다시금 사랑 없음을 한탄하면서 통회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정과 자유의지
인간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철학적으로 결정론이라 하고 신학적으로 예정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예정하고 작정한 성도를 의지적으로 버리거나 누군가에게 빼앗길 수 없도록 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성도의 견인」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선택하고 구원하신 성도를 반드시 이끄신다는 말입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 그러나 이런 성도의 견인에 대한 이해는 운명론으로 이해되어서 소극적이고 모순적인 신앙을 낳기도 했습니다. 운명론적 신앙은 삶에 있어서 추구해야 할 믿음의 가치를 상실하고 무력하게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예정의 반대편에 인간의 「자유의지」 가 있습니다. 율법을 준 것은 하나님이고 그것을 지키거나 지키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유의지입니다. 물론 강력한 법의 형태이므로 지키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불순종과 불법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인생이 하나님에 의해 원천적으로 프로그래밍된 것이라면 모세가 그토록 순종을 위해서 웅변을 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지 않을 의지, 지키지 않을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예정과 배치되고 인간의 불순종이 성도의 견인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사랑과 인격이라는 체계 안에서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이 성도의 삶을 견인해야 할 때 그 견인의 과정에는 징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징계라는 것이 결코 기계적이거나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堅忍)은 자동차를 견인(牽引)하는 강제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징계는 견인을 이루는 한 부분입니다. 강제하는 것이 아니고 깨닫게 하는 인격적 방법이 징계라는 것입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 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 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브리서 12:5-11」
부모의 사랑은 불완전한 것이어서 자녀를 교육할 때 비인격을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부모에게 있어서 징계는 궁극적으로 자녀에 대한 지도의 방편입니다. 부모가 훈육의 의지를 버리고 방치하는 것을 인격적 교육이라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징계의 형태와 경중은 다양하겠지만 징계는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사랑을 위한 인격적 방법입니다. 징계를 통해 죄를 뉘우치게 되는 참된 인격성이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신명기는 짧은 본문 안에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께 돌아오라」 고 세 번을 반복해서 호소합니다.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를 가지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