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법 홍보책자 표지 | 경기도 광명에 사는 직장인 임 아무개(44, 여) 씨는 어제(13일) 저녁 퇴근해서 낯선 우편물을 하나 접했다. 문제의 우편물은 임 씨의 모친이 당일 낮에 우편함에서 수거해온 것이었다. 겉봉에 발신자는 나와 있지 않았으며, ‘금천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었다. 발신일은 12월 3일자.
우편물을 뜯자 그 속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홍보 만화책자가 나왔다. 책 제목은 <참 좋은 인연입니다>. 표지그림이나 책자 상단에 별도로 ‘법보시용’이라는 문구로 볼 때 불교 쪽에서 만든 것으로 짐작됐다. 표지 포함 총 44쪽에 달하는 이 만화책자는 그림 솜씨나 책자의 지질, 화려한 편집 등을 감안할 때 제법 공들여 만든 것이었다.
2~3쪽에 실린 ‘들어가며’에는 박근혜 후보를 비롯해 선대 박정희-육영수 부부가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 박 후보가 어려서부터 법구경 등 불교경전을 읽으면서 자랐다는 얘기서부터 정치에 입문한 계기가 불교경전 때문이었으며, 국회에서 문화재보호 기금법안을 발의한 얘기 등 박 후보와 불교와의 친밀감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내용 가운데 몇을 간추려 보면,
박정희-육영수 부부가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새 무늬를 배경으로 앉은 그림을 싣고는 박 전 대통령이 “조국 근대화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던 때에도 한국 전통문화의 뿌리가 불교였음을 인식했다”고 밝히고는 “전통사찰의 불사를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문화재관람료 제도를 통해 스님들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며 박 전 대통령의 불교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극찬했다.
|
박정희-육영수 부부와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며 박정희가 불교에 큰 배려를 했다고 소개햇다. |
또 육 여사에 대해서는 “첫 수확한 통일미를 도선사 부처님께 공양물로 올릴 만큼 독실한 불자였다”며 “1963년 10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도선사로 하루 7시간씩 3번, 7일간 기도를 드리러 갔다가 청담 대종사로부터 대덕화(大德華)라는 법명을 받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1975년 조계종 천간사에 육 여사 추모송덕비를 세운 사실도 덧붙였다.
책자는 박 후보 부모 대부터 불교와의 인연을 맺어온 사실을 강조한 후 “아버지가 못이루신 매듭을 내가 묶어내자 ”며 박 후보가 정계로 뛰어들었다고 소개했다. 그 후 정계에 입문한 후에는 “불교는 국회의원 박근혜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갈 길을 알려주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아울러 박 후보가 문화재보호 기금법안을 대표발의한 것도 소개했다.
또 책자에는 박 후보는 “국부(國父)로 칭송받는 박정희 대통령에게서는 전륜성왕의 덕과 지혜, 용맹을 배웠으며, 자비심이 많았던 육영수에게서는 관세음보살의 온화함을 배웠다”고 극찬햇다. 특히 대선 출마 후 ‘준비된 여성대통령’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있는 것과 관련해 신라시대 선덕여왕을 박 후보와 연관을 짓기도 했다. (참고로 박 후보의 천주교 세례명은 율리아나, 불교 법명은 ‘선덕화(善德華)’로 알려져 있다.)
“성군(聖君)인 진평왕의 딸로 태어나 가르침을 배웠기에 선덕여왕은 이름 그대로 선(善)과 덕(德)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다. 박근혜 의원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딸로서 태어났기에 부모님을 일찍 여의는 슬픔을 감수해야 했지만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에게서 지도력을,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에게서 자비심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
박근혜 후보를 선덕여왕에 빗대 찬양하고 있다 |
이 책자를 봤다는 김두환 불교환경연대 사무국장은 14일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후보를 좋아하는 마음은 이해되지만 그 정도가 지나쳐서 보기 불편했다”며 “불교의 상징인 보살, 전륜성왕 등은 불교의 이상적인 존재인데 이를 말많은 현실 정치인에게 대비시킨 점은 불교인들에게 모욕감을 주고도 남을만 하다”고 비판했다.
투표일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대체, 누가 불법 선거홍보 책자를 만들어 배포했을까? 말미의 ‘편집후기’에 그 답이 나와 있다. 편집후기 필자는 ‘깊어가는 가을날 안산 자락에서 청파대오(靑波大悟) 정병국 합장’이라고 나와 있어 책자 제작시기는 11월 전후로 추정되며, 엮은이는 정병국(61) 씨로 밝혀졌다. 발행처는 ‘불교위원회’로 돼 있다.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과 동명이인인 정 씨는 경남 울산 태생으로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전두환 신군부가 만든 민정당 초기 시절 권익현 전 의원 보좌관을 지낸 정 씨는 전직 국회의원 보좌관들의 친목모임인 국회입법정책연구회 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에 오랫동안 몸담으면서 고향에서 공천을 받길 바랬으나 여태 꿈을 이루지 못했으며, 현재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불교본부 총괄단장을 맡고 있다.
|
지난 10월 25일 출범한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불교본부 발대식 |
박근혜 후보 중앙선대위 불교본부는 지난 10월 25일 오후 새누리당 중앙당사 2층 강당에서 유정복 직능총괄본부장, 장윤석 새누리당 불자회장(국회 예결위원장), 김장실 당 대외협력위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중앙선대위 직능총괄본부 불교본부 임명장 수여식 및 발대식을 가졌다. 불교본부장에는 당내 불교통으로 꼽히는 주호영 의원(대구수성을, 전 특임장관)이 임명됐으며 실무책임은 총괄단장인 정 씨가 맡았다.
정 씨는 편집후기에서 ‘책자 발간에 도움주신 분’들의 이름을 거명하였다. “우정석님을 비롯한 세봉스님, 최상화, 이기흥, 유윤순, 이보경, 강태진, 김원곤, 박충식, 백승진, 송기호, 장세동, 손정관, 김상길, 이한규, 김기태, 정인악, 김길태, 이수덕, 정혜윤, 박태임, 이재성, 최미일, 김상규 도반 여러분과 근사회 회원님께 감사드리며...”. 이들 가운데 강태진 김원곤 박충식 백승진 씨 등은 정 씨 밑에서 실무 팀장을 맡고 있는 인물이다.
본지는 정 씨에게 문제의 책자를 펴낸 목적, 배포시기와 수량, 대상지역 등에 알아보기 위해 14일 오후 2시34분부터 총 7차례에 걸쳐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통해 연락을 시도했지만 답을 해오지 않아 해명을 들을 수 없었다.
한편, 정 씨가 주도해 만든 이 책자는 현행 공직선거법에 저촉되는 불법 선전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해당 조항을 따져보면,
제82조의5(선거운동정보의 전송제한) ① 누구든지 정보수신자의 명시적인 수신거부의사에 반하여 선거운동 목적의 정보를 전송하여서는 아니된다.
제93조(탈법방법에 의한 문서·도화의 배부·게시 등 금지) ① 누구든지 선거일전 180일부터 선거일까지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하여 이 법의 규정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정당 또는 후보자를 지지·추천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거나 정당의 명칭 또는 후보자의 성명을 나타내는 광고, 인사장, 벽보, 사진, 문서·도화, 인쇄물이나 녹음·녹화테이프 그 밖에 이와 유사한 것을 배부·첩부·살포·상영 또는 게시할 수 없다.
|
보살에 비유된 박근혜 후보 | 위 관련조항의 내용을 요약해 설명하자면,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선거 관련 공보물을 일방적으로 보내선 안되며, 선거 6개월 전부터는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불법 홍보물을 배부·첩부·살포·상영 또는 게시해서는 안된다. 특히 특정 정당이나 후보의 이름을 명기해선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의 만화책자는 ‘12월 3일’ 일방적으로 발송됐으며, 책자 속에는 박근혜 후보의 얼굴그림과 이름이 수도 없이 많이 나온다. 게다가 박 후보를 일방적으로 고무, 찬양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어 특정후보 ‘지지·추천’으로 볼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따라서 선관위의 조사가 시급히 이뤄져야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중앙선관위 지도1과 관계자는 14일 오후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미 선관위에 제보가 들어와 파악하고 있는 사안으로, 공직선거법 93조 위반으로 보고 있다”며 “현재 이 책자를 누가, 언제, 얼마나 배포했는지를 탐문중이며, 파악 되는대로 경기도 선관위에 이첩해 조사를 진행시킬 방침”이라고 밝혔다.
본지에 이 내용을 제보한 임 씨는 “집주소를 어떻게 알고 이 책자를 보냈는지가 궁금하다”며 “명백한 불법선거운동으로 선관위에 고발하겠다”고 밝혔다. 임 씨가 페이스북에 책자 관련 내용을 올리자 정웅기 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 운영위원장은 “이게 **님 집에 까지 갔으면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뿌렸다는 이야기네요... 참으로 부끄럽네요.ㅠㅠ”라는 댓글을 달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