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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호
말로만 아니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단양팔경길에 나섰다. 지역마다 경관 좋은 곳이 많은데 그 좋은 곳들이 하나같이 '팔경'이어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이름 있는 팔경 중 가본 곳이라고는 관동팔경 경포대와 죽서루뿐이라서 내게 '팔경' 갈 일은 아직도 하고 많다.
'팔경'을 검색해 보니 브리태니커의 '팔경도'가 뜨고 팔경도란 "승경(勝景)을 주제로 하여 그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8폭에 나누어 그린 그림"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팔폭병풍에 들어갈 정도의 빼어난 경치, 그러니까 10경 12경이 아니라 8경이 된 연유의 결정적 단서는 그 팔폭 그림 병풍이 아닐까 하는 '억측(?)'으로 결론을 냈다.
브리태니커 팔경도 설명을 다 읽고 나니 이만하면 팔경에 대한 기본 소양은 갖췄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양팔경도 누군가 그림으로 남겼을 법하지만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으로 봐서 이름 있는 작품은 없는 모양인가?
그림이 없으니 내 스스로 그 경승 속에 들어가 자연과 하나가 되어 보리라.
옥순봉
단양팔경 구경은 충주댐 충주나루에서 출발하는 유람선을 타는 게 제격이다.
충주호는 충주 본 댐에서 출발하여 도담삼봉에 이르는 남한강 상류지역의 인공호수로 단양팔경뿐만 아니라 월악산
국립공원, 송계계곡, 청풍문화재단지, 고수동굴, 구인사, 수안보온천, 노동동굴, 등 수 많은 관광지가 펼쳐져 있다.
단양팔경의 단양은 그곳 사람들은 '단고을'이라는 감칠맛 나는 우리 말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충청북도의 최북단이며
동에서 남서로 뻗어 있는 백두대간을 따라 이어진 준령 산악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태백산에서 발원한 푸른 남한강 물과 금수산, 도락산, 황정산, 소백산, 수리봉 제비봉 등 명산의 기암괴석의 풍광이 연출하는 천혜의 절경지이다.
예부터 제 2의 외금강이라 불릴 만큼 곳곳 발길 닿는데 마다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어 선현들의 발자취가 끊이지
않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명승지 여덟 곳을 명명하기를 그 이름 하여 하선, 중선, 상선암 세 곳과 구담봉, 옥순봉,
도담삼봉, 석문, 사인암, 다섯 군데이다.
남한강
그 중 옥순봉과 구담봉은 단양의 종착나루인 장회나루 다 가서 스쳐 지나며 볼 수 있는데 깊고 푸른 물그림자에 비치는 모습이 한 폭의 동양화에 다름 아니다. 옥순봉은 희고 푸른 옥빛 바위들이 대나무 순 모양으로 힘차게 우뚝 솟아 오른
모양이라고 해서 옥순이라 부른다.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 선생이 석벽에 '단구동문(丹口洞門) 이라 새겨 넣었다.
퇴계 선생이 그때까지 청풍부사 관할이었던 옥순봉을 보고 청풍부사를 찾아가 단양으로 떼 달라고 성가시게 졸라댄
끝에 청풍부사가 '내가 가져다 줄 수는 없으니 군수가 알아서 해보라'고 흘린 말에 용기를 내서 단행한 거사였단다.
구담봉은 기암절벽의 바위 모양이 거북 형상이고 물 속 바위에 거북 등 무늬가 있다고 해서 구담이라 했다.
부근의 제비봉과 어우러진 수려한 경관은 충주호 수상관광 코스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경관의 하나이다.
오늘따라 하늘은 맑고 바람은 잔잔해서 사람들은 선실에 가만있지 못하고 삼삼오오 뱃머리나 갑판에 나와 있다.
청풍나루/다문화 아이들
한 편에서는 갑판 노래자랑이 열리고 갖가지 안주거리를 펼쳐 놓고 즉석 선상파티가 한창이다. 우리 같은 동호인 단체가 있는가 하면 무슨 향우회 노인들도 흥이 나 봄날의 향연을 즐긴다. 체험학습 나온 학생들도 많고 어느 지역 다문화 가족 문화체험이라는 이름의 단체여행객들로 5백 명이 정원이라는 유람선은 만원이다.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이 나라로 시집 온 젊은 여인들이 제각각 아장아장 뒤뚱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기념
사진을 찍는다. 인형처럼 예쁜 이 아이들을 누가 다문화 가족 아이들이라 따로 구분할까? 이들도 귀한 내나라
아이들이다. 이젠 단일민족이라는 말 자체가 생경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치솟는 사교육비 부담 등으로 아이 낳기를 두려워한다.
이대로라면 2050년에는 이나라 인구가 반으로 줄지 모른다는 분석이 나돈다.
농촌 총각들이 동남아 여러나라 신부들을 맞아 들이는 것 자체도 탓할 일이 아니라 장려할 일이다. 국토가 나라의 터전일진데 이 국토에 살 사람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랴!
갑판 뒷전에는 대형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인다.
다문화 아이들도 소중한 저 태극기 앞에 하나인 것을...
유람선
이윽고 11시에 출발한 배가 중간에 청풍나루에서 잠간 멋췄다가 한시가 넘어서야 장회나루에 닿았다.
배를 내려 나루가 식당에 들어가 잡어 민물매운탕에 막걸리 한잔을 곁들여 점심을 먹는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이 닥치니 말 그대로 배고픔을 면할 식사일 뿐 훈훈한 인정같은 것은 기대 할 수 없다.
옛날 같으면 나루터 주막에서 운치 있는 국밥을 먹었을 터였다.
옛 나루는 재래시장처럼 사람나는 냄새가 물씬 했었다.
신경림의 목계 나루는 어떤가?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 하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하네
장회나루
목계 나루터는 같은 남한강 줄기, 충주 댐을 지나서다.
충주댐에서 나온 남한강 물 흐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목계교가 옛 나루터일 것이다.
그곳에서 팔당호 상류인 양평에 이르는 강변길은 서울근교에서 가장 호젓한 강변길로 손꼽힌다.
서울과 중부권 어디에서나 하루길로 무난한 드라이브코스다. 장호원에서 충주로 들어가는 목계교에서 길을 바꾸어 강변길로 접어들면 차량은 물론 인적마저 뜸한 강변 오솔길을 이어달려, 문막에서 흘러 들어오는 섬강 물줄기와 만나는 부론면 법천교에서 강변길을 마감하게 된다.
길과 나란히 흐르는 물길은 대부분 강폭이 넓게 열리고 물살이 빠른 여울목들이 이어져 강돌 수집가들이 즐겨 찾을 뿐, 나지막한 야산자락에 들어앉은 마을집들도 인기척이 별로 없는 적적한 분위기는 안개가 약간 덮히기라도 하면, 영락없는 한 폭의 산수화나 다름없다.
한마디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조용한 드라이브코스로 혼자서 외롭게 달려보는 코스로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물안개가 잔잔히 덮힌 초여름과 철새들이 무리지어 나는 초겨울 강변풍경이 한결 더 볼만하다. 주변 볼거리들도 조용히 관조할 만한 것들로 이어진다.
지금은 발길 뜸한 오지이지만, 그 옛날 남한강 물길이 각도에 닿던 시절은 서울과 왕래가 수월하여 크게 번창하였던 고장이었다고 한다. 그 흔적은 남한강변의 청룡사와 법천사지 등 폐사지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맑은 숲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들 절터의 화려한 석물들을 하나하나 들러보는 재미는 나들이길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식사를 마치고 이젠 버스편 육로 길이 시작된다.
육로 초입에 상선 중선 하선암은 주마간산이다.
서둘러 휘휘 둘러보고 나오는 이런 게 난 마뜩찮다.
도담삼봉
이제 마지막 이날의 하이라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저만치 늘 사진으로 보아왔던 도담삼봉이 푸른 강물에 잠겨있다.
그러고 보니 저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의 호가 삼봉이 아니었던가?
단양팔경중 제 일경으로 치는 도담삼봉. 사람들은 그냥 삼봉이라 부르기가 모자라서 가운데를 중봉 장군봉,
남쪽 봉우리를 첩봉 딸봉. 그리고 북쪽 봉우리를 처봉 아들봉이라 부른다. 장군봉 중턱에는 당초 영조 42년에 지은 정자삼도정이 있어 삼봉의 운치를 더한다.
퇴계 선생이 만산홍엽의 가을날 석양무렵의 도담삼봉 절경을 그냥 지나칠리 없었을 것이다.
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
석양의 도담삼봉에 저녁노을 드리웠네
신선의 땟목을 취벽에 기대고 잘적에
별빛 달빛 아래 금빛 파도 너울 지더라
정도전이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는 도담삼봉에는 정도전의 흉상과 비가 있다.
도담삼봉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왼쪽 산 중턱에는 무지개 모양의 석문이 나타난다.
산 하나가 뻥 뚫린 것 같은 형상의 '석문' 사이로 푸른 강물과 강마을 풍경이 가히 팔경에 들법하다.
석문 마지막 팔경은 사인암이다. 마지막이자 팔경의 으뜸으로 친다.
푸른 계류를 끼고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바위 절벽 위에는 노송이 또한 푸르다.
사인암 밑을 휘감아 흐르는 그 수려한 절경을 구름과 신선이 노니는 곳이라 해서 운선구곡(雲仙九曲)이라 부른다. 사인암이란 명칭은 고려후기 역동선생 우탁이 사인(舍人)벼슬에 재직하고 있을 때 경치 좋은 이곳에 자주 와서 쉬다
갔다는 전설에서 유래하며, 조선조 성종 때 단양군수에 부임한 임자광이 그를 기려 이 바위를 사인암이라 불렀다.
사인암 앞 냇가 바위에는 바둑판과 장기판이 음각돼 있는데 오랜 세월 비바람에도 열아홉 졸이 지금도 선명하다.
사인암 아래 평평한 마당에는 ‘역동우선생기적비(易東禹先生紀蹟碑)’와 우탁이 지은 ‘탄로가(嘆老歌)’의 가사가 적힌 자연석 시비가 서 있다.
한손에 가시를 들고 또 한손에 막대를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랴 터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사인암
단양팔경 사인암에 와서 난 우탁 선생이 되어 이 탄로가를 읊고 있지 않은가? 우탁 선생은 1263년에 나서 1342년까지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근 80세 장수를 누린 분이다. 선생이 이 노래를 읊은 때도 내 나이 쯤은 됐을런지...
청춘 홍안을 네 자랑 말아라 덧없는 세월에 백발이 되누나 천금을 주어도 세월을 못사네 못사는 세월을 허송을 말아라.
아니다. 아니다. 청춘가를 불러도 모자랄 판에 탄로가라니. 그러나, 그러고 보니 찬로가도 청춘가도 오는 백발을 한탄키는 매 한가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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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경도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관동팔경도(關東八景圖)·관서팔경도(關西八景圖)·송도팔경도(松都八景圖)·한양팔경도(漢陽八景圖) 등이 있다. 소상팔경은 중국 후난 성[湖南省] 양쯔 강[揚子江] 남쪽의 샤오수이 강[瀟水], 샹장 강[湘江]이 합류하는 지점의 아름다운 경치를 가리킨다. 소상팔경을 처음 그린 사람은 북송대의 송적(宋迪)으로 알려져왔으나, 10세기 5대10국 시대에 이성(李成. 919-967)이라는 사람이 처음 그렸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소상팔경도는 산시청람(山市晴嵐)·연사모종(煙寺暮鐘)·원포귀범(遠浦歸帆)·어촌석조(漁村夕照)·소상야우(瀟湘夜雨)·동정추월(洞庭秋月)·평사낙안(平沙落雁)·강천모설(江川暮雪)로 이루어졌다. 소상팔경은 처음에는 실경을 바탕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으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정형화되어 아름다운 경치의 대표적인 예로 간주되었고 승경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소상팔경은 고려시대 이래 문인들의 소재로 즐겨 사용되었으며 이를 모방하여 개성의 8곳 명승을 소재로 한 송도팔경도를 그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유행은 지속되어 봄·여름·가을·겨울의 경치를 이른 때와 늦은 때로 나누어 계절마다 2폭씩 8폭에 그린 사시팔경도를 비롯하여 대관령 동쪽의 명승을 담은 관동팔경도, 신도(新都)인 한성의 경치를 그린 한양팔경도 등이 그려졌다. 관동팔경도는 평해 월송정(月松亭), 통천 총석정(叢石亭), 강릉 경포대(鏡浦臺), 고성 삼일포(三日浦), 삼척 죽서루(竹西樓), 양양 낙산사(洛山寺), 간성 청간정(淸澗亭), 울진 망양정(望洋亭)으로 이루어졌으며 진경산수화에서 많이 다루어졌다. 관서팔경은 강계의 인풍루(仁風樓), 의주의 통군정(統軍亭), 선천의 동림폭(東林瀑), 안주의 백상루(百祥樓), 평양의 연광정(練光亭), 성천의 강선루(降仙樓), 만포의 세검정(洗劍亭), 영변의 약산동대(藥山東臺)를 말한다. 팔경도의 전통은 민화에서 보다 강하게 나타나며 관북팔경(關北八景)과 금강팔경(金剛八景)을 주제로 한 그림도 전한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안견(安堅) 작품으로 전칭되고 있는 〈소상팔경도〉와 〈사시팔경도〉가 유명하다./브리태니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