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 상황봉에서 만난 다도해의 풍경화
지난번 숯댕이눈썹님 블방의 글을 보고 완도 상황봉 코스를 가슴에 담아 두었는데, 때 마침 한 산악회에서 완도로의 산행길에 일행을 모집하고 있다. 여행과산행에 공지글을 올려 열명의 대원들이 버스를 타고 완도로의 먼 길을 떠났다. 진도 동석산에 이어 여기도 남도 그것도 해남 땅끝마을을 지나 완도섬 남쪽 끝.. 자가용으로 운전해서 가기에는 너무나 먼곳이라 이렇게 기회가 주어지면 버스에 몸을 맡기고 찾아가는 것이다.
완도의 상황봉은 완도에 있는 다섯개의 큰 봉우리들을 모두 총칭하는 말로 통한다. 다섯개의 봉우리중 가장 높은 상황봉(644m)은 완도의 진산 이다. 완도의 산에는 난대성 상록활엽수림이 가득한 것이 특징이다. 육지의 산에서는 감상하기 어려운 색다른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이 바로 이 때문 이다. 국내 최대의 난대림 집단자생지인 완도 상황봉 일대의 산지는 대부분 완도수목원에 속해 있다.
완도는 또한 조망이 좋기로 유명하다. 맑은 날이면 주변에 펼쳐진 치밀한 다도해의 풍정이 볼 만하다. 서쪽으로는 해남 달마산과 함께 두륜봉, 가련봉, 강진의 덕룡산, 주작산, 월출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섰고, 동쪽 가까운 곳에 천관산이 솟아 있다. 시계가 좋은 날은 멀리 제주도 까지도 보인다고 한다.
대구리 새동백수퍼 (12시22분)
대구미 vs 대구리
고산 윤선도 선생이 제주도로 귀양길에 산세가 수려함을 보고 뱃길을 돌려 가까이 와서 보니 후세에 대구리(大口里)로 개칭하여 부르고 있다고 한다.
아침 7시30분에 대전을 출발한 버스가 12시가 넘어 대구리에 도착을 한다. 강원도 가는 길은 늘 멀었는데, 해남 땅끝을 지나 섬의 남쪽끝으로 가는길은 설악산 가는것 보다 먼 것 같다. 집을 나서기 전에 차가운 날씨에 바닷바람을 걱정하며, 겨울셔츠를 입고 가야 할까 아니면 얇은 여름긴팔 셔츠를 입고 가야 할까 고민 하다가 여름셔츠를 입고 나왔는데, 예상과 달리 햇볕은 따뜻하고 바람은 시원 하기만 하다.
대구리 들머리에서 첫번째 봉우리인 심봉 까지는 3.3km... 몸풀 겨를도 없이 만만치 않은 해안가 600 고지를 오르기 위한 된비알이 이어진다. 오늘 산행코스중 힘든구간의 대부분이 심봉 오름길에 해당하는것 같다. 심봉을 지나도 오르내림이 몇차례 있지만, 그다지 힘든 구간은 없다. 상록활엽수가 가득히 들어선 녹색의 숲을 걷고 있노라니 마치 한 여름날 숲길을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흰색 노루귀 (?) 심봉을 오르는 길에 쪼매난 놈을 발견하고 한컷 담아 본다.
20여분 오르니 시원한 조망터가 나온다 (12시47분)
화흥포 간척지와 대구미 마을, 그리고 오른쪽 멀리 해남 땅끝이 보인다.
산자고
얼굴을 활짝 열고 긴 시간 버스를 타고 찾아온 우리들을 반겨준다.
첫번째 조망터에서 조금 더 오르니 다시 시원한 조망이 열린다. 남해바다의 옥빛물색이 참 아름다운데, 아쉽게도 늦게 도착하다 보니 바다쪽으로 계속 역광이 비친다.
식사준비를 하면서 조망을 하니... 심봉에서 뻗어내려간 지능선 뒤로 달마산이 보인다. 해안선을 끼고 달마산 오른쪽으로 두륜산 그리고 그 옆으로 주작산이 늘어서 있다.
심봉에서 점심을 하자고 하였는데, 산행출발이 워낙 늦다 보니 할수 없이 조망이 시원하고 너른곳에서 식사를 하고 간다. (13시10분)
아름다운 풍경을 에워두르고 반주도 한잔 하며 30분이 넘게 느긋하게 점심 식사를 하고 있으려니 후미에 계시던 분들까지 다 지나가시니 이제 우리팀이 가장 후미가 되었다.
심봉(왼쪽 봉긋한 봉우리), 상황봉(오른쪽)
상황봉에서 오른쪽으로 뻗어내려간 능선
다시 초록의 난대림 숲길로...
강원도 산에서 많이 보던 얼레지가 온산에 가득하다.
밧줄을 잡고 심봉을 오르고 있는 일행들
심봉을 오르며 바라본 조망이 참 근사하다
심봉 (14시11분)
상황봉 다섯 봉우리중 가장 조망이 좋다는 심봉 옛날에 나무꾼들이 쉬어가던 장소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름도 '쉰다'는 뜻의 '쉼봉'으로 지었다고 한다. 지금도 쉼봉, 쉰봉, 심봉 이처럼 여러 가지로 불리우고 있다.
쉼봉이 왜 심봉인가?
하지만, 과연 어느 누가 왜 여기 정상석을 심봉 이라고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료를 아무리 찾아봐도 이곳에 헬기를 타고 정상석을 세웠다고만 나오지 왜 남들이 다 쉼봉 이라고 알고 있는곳에 심봉 이라는 정상석을 세웠는지 알수가 없다.
추측컨데, 완도 상황봉의 다섯봉우리가 (심봉-상황봉-백운봉-업진봉-숙승봉) 모두 불교에 관련된 명칭인것으로 보아 심봉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쉬었다 가라는 쉼봉이 아닌, 불교 용어로 별도의 한자가 있을게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처럼 한글로만 적어서 청산리 벽계수를 만들게 아니라 지리산 천왕봉 처럼 정상석에 한쪽은 한글 다른 한쪽은 한문으로 새겨넣어서 불필요한 논쟁이나 중의법적 해석을 피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상석을 종교단체에서 세웠는지, 완도군청과 완도관광문화 홍보관 홈페이지를 다 찾아봐도 심봉에 대한 설명은 찾아볼수가 없다. 완도군청 홈페이지의 지도에는 쉼봉 이라고 나와있는데, 이 지역 사투리가 '쉬다 가세요'를 '시다 가세요'가 아닌 이상 쉼봉이 심봉이 될리가 없을테니 근원을 찾아다 오해를 풀어주었으면 좋겠다.
심봉에서 바라본 명사십리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신지도
심봉에서 바라본 상황봉과 죽청리 뒤로 신지도쪽 조망
그리고 그 오른쪽 조망 ~
심봉에서 바라본 파노라마 조망도 (클릭)
심봉을 지나친 일행들이 상황봉에 오르고 있다.
뒤돌아본 심봉 조망이 탁월하여... 쉬었다 가지 않고는 못배기는 곳임에 틀림이 없다.
상황봉에 오르면서 뒤돌아본 해남 땅끝과 달마산
그리고 신지도 방향의 아름다운 풍경
후미팀도 이제 심봉을 내려오고 있다
심봉에서 500 미터... 상황봉에 도착 (14시24분)
상황봉 vs 오봉산
완도의 다섯개 봉우리엔 특별한 산 이름이 없다. 다들 상황봉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별개의 다섯개 봉우리가 있느니 만큼 적절한 산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떤이들은 봉우리가 다섯개니 오봉산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합당한 역사적 근거도 미약하고 오봉산이라는 이름은 너무 밋밋하고 흔한 이름이라 적절치 않은것 같고, 오히려 일제시대에 왕이 황으로 바뀐것을 수정하여 상왕산 이라고 하는게 더 적절할것도 같다.
상황봉
옆으로 봉수대가 살짝 보인다. 완도군은 아름다운 일출을 보고 싶다면 반드시 상황봉을 찾으라고 말한다. 그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출의 장관 - 넓은 바다! 점점이 박힌 섬들 그곳을 비집고 나오는 찬란한 빛! 이것이 상황봉의 일출 이라고 하니 언제 비박을 하며 일출을 봐야만 할것 같다.
상황봉 vs 상왕봉
완도 상황봉(644.1m)은 장보고가 해상왕국을 이룩하면서 자신을 비유해서 코끼리(象)중의 왕(王) 이라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고대 중국 남방에 살면서 주변을 오가며 무역하던 뱃사람들은 이 산에 부처님의 흔적이 있다 해서 ‘상왕(象王)’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부처를 낳은 마야부인은 흰 코끼리가 배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 그래서 코끼리의 왕이라고도 하며, 불교에서는 지금도 코끼리를 신성시 한다. 그래서 원래는 상왕봉 이었는데,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상황봉으로 바뀌었다고 하니, 이곳도 원래 이름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상황봉에서 바라본 심봉
장보고 - 해신의 유래
상황봉을 오르는데 앞서가던 일행이 해신 장보고의 '해신'의 유래에 대해 한마디 설명을 덧붙인다. 일본 전국시대를 양분했던 전설적인 영웅 다께다 신겐. 구로자와 아끼라 감독이 '가게무사'란 영화를 만들 정도로 현재까지도 일본 국민들에게 추앙 받는 인물인데, 이 다께다 가문의 시조가 '신라사부로'라는 것이다. 즉 성이 '신라' 인 것이다.
일본 오츠시에는 '신라선신당'이 있고, 그 본존은 '신라명신 좌상' 인데 그것은 그곳을 담당하는 미데라의 스님들조차 볼수 없는 국보이자 비불 중의 비불이다. 이곳에는 한가지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데, 설화에 의하면 이 절을 중창한 엔친스님이 당나라로 불법을 구하러 갔다오다가 신라 인근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는데, 이 때 신라명신이 나타나 이들을 구해줬다는 것이다. 일본으로 돌아온 엔친이 자신을 구해준 해신을 형상화해 만든 것이 바로 신라명신상 이다. 그 신라 명신상은 바로 장보고를 형상화 한것으로, 엔친이 신라인 도현에게 써준 송별시에 그 해답이 있다고 한다. 엔친의 바닷길을 안내한 신라인 '도현', 그는 바로 장보고 선단의 일본측 책임자인 인데, 황해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엔친을 구해 준 신라명신과 그것의 형상화인 신라명신상. 그것은 9세기 이 바다를 오로지 지배했던 장보고의 형상 이라고 한다.
또한 주일 미국대사 라이샤워는 세계 3대 기행기의 하나인 '엔닌 일기'를 연구하면서 장보고에 대해 장을 따로 마련하여 '고대 동아시아 해상상업제국의 무역왕'이라 칭하고 있다. 또 엔닌은 일본 황실이 승려로는 최초로 자각대사라는 시호까지 내린 인물로 그 역시 '엔닌일기'에서 장보고에게 최대의 찬사를 바치고 있다고 한다.
일본 교토 인근의 히에이잔 엔라쿠지, 일본 천태종의 본산에 순례에서 돌아온 엔닌은 엔라쿠지 서쪽에 적산궁을 세우고 적산신라명신을 모셨다. 그 이후 일본 전국의 사원에는 적산신라명신을 지장보살의 화신이라 여기며 우러르게 되는데... 그는 현재에도 일본 불교의 심장부에 적산명신으로 존재 하고 있다.
일본에서 조차 바다에서 진정한 신으로 취급 받았던 해신 장보고...
상황봉에서 바라본 파노라마 풍경 (클릭)
다음봉우리 백운봉이 긴 능선 끝으로 우뚝 서있고, 그 뒤로 숙승봉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다.
뒤돌아본 상황봉과 그 뒤로 달마산
완도는 육지?
완도는 한반도 육지부의 최남단인 해남과 어깨를 맞댈 듯 이웃한 섬이다. 현재 완도는 다리로 육지와 연결되어 엄격한 의미로 보자면 섬이 아닐 수도 있다. 몇 년 전에는 ‘신땅끝’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완도를 육지로 볼경우에 완도의 남쪽 끝자락이 해남 땅끝보다 더 남쪽이어서 비롯된 일 인데, 관광사업과 관련된 지명 다툼으로 추정된다. 결국 ‘해남은 땅끝, 완도는 신땅끝’ 으로 정리하는 것으로 논쟁은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진행방향의 백운봉을 당겨 본다. 백운봉 오른쪽으로 뾰족한 바위봉인 숙승봉이 서있고, 백운봉 뒤편으로는 바다건너 두륜산이 가깝게 보인다.
상황봉에서 백운봉으로 가는 길은 참 편안하다. 길도 넓고 좋을뿐더러 아늑한게 운치가 있다.
백운봉
대야리와 대야저수지
계곡 능선 사면의 난대식물들의 이파리가 노란색을 띠는것을 보고, 다들 가을 같은 분위기라고 한다.
백운봉으로 가면서 전망 데크에서...
완도수목원이 있는 대문리와 대문리저수지 그리고 그 뒤로 바다건너 달마산
완도수목원
완도의 상황봉과 백운봉 자락에 자리잡은 완도수목원(061-552-1544)은 국내 최대의 난대식물 집단 자생지로 동백나무 붉가시나무 후박나무 황칠나무 등 난대성 희귀식물 750여종을 비롯해 모두 3500여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백운봉으로 가는 아름다운 능선
임도가 지나가는 하느재. 백운봉 방향은 하느재에서 직진의 능선길이다.
갈색 잎으로 물든 상록 활엽수림
진행방향의 백운봉
조금 당겨본 백운봉
백운봉 오름길에 3층으로 된 전망대가 있다. 비박을 하며 쉬어가기에 딱 좋은곳 같다.
백운봉 가는길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지나온 상황봉
대야리쪽 다도해 조망
대야리는 통일신라시대에 청해진의 공공기관이 있었던 곳으로 청비리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장이 열려 완도, 해남, 강진 주민들의 생필품 거래가 성행하였던 곳이라고 하며 현재도 장터라고 불리고 있다고 한다.
장도
대야저수지 오른쪽 장좌리 앞 바다에 보이는 전복 뚜껑같은 섬이 장도인데, 일명 장군섬 이다. 마을에서 장도까지의 거리는 약 180m 쯤 되고 하루 두 차례씩 썰물 때는 바닥이 드러나서 걸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의 무장 장보고 장군이 이룩한 청해진의 유적지이다.
꿈꾸는산님과 비타민님
백운봉(15시25분)
정상석을 따로 만들지 않고 큼지막한 자연바위에 음각을 해서 만들었다. 이쪽에서 보면 사람인자 형태로 속이 빈 바위인데, 다른쪽에서 보면 하나로된 통 바위다.
백운봉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다도해 풍경
백운봉에서 바라본 상황봉
상황봉 오른쪽 해남 방향은 역광 이다.
백운봉에서 바라본 풍경
백운봉에서 바라본 두륜산
두륜산 (왼쪽) 과 주작산 (오른쪽)
백운봉에서 15분 정도 가면 업진봉에 도착을 한다.
원불교 완도소남훈련원에서 말하기를 성품을 봐서 정에 들면 업이 다하여 본래 걸릴 것도 없는 청정한 자성에 드는 것이 업진봉의 뜻 이라고 한다. 업을 다 소멸 한다는 것 이다.
업진봉을 지나니 저만치 마지막 봉우리인 숙승봉이 보인다. 숙승봉 뒤로 두륜산과 주작/덕룡이 웅장한 성벽처럼 늘어서 있다.
북한산 인수봉 처럼 생겼지만, 돌이 푸석푸석 하여 암벽 등반은 불가능 하다고 한다.
숙승봉
숙승봉의 전설
숙승봉 하단부 절벽 (위로70m 지점)에 앞 산에서도 건너다보일 정도의 지름 10m 정도로 무섭게 휭 뚫린 굴 (큰 굴이라 하며 접근을 할 수 없음)이 있다. 예날 예적에 이 동굴에는 유명한 스님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나막신을 신고 가파른 절벽을 오르내리면서 살았다. 굴속에는 샘이 하나 있어 끼니마다 한 사람분의 쌀과 물이 샘에서 나왔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웃 육지 절에서 귀한 친구 스님 두 분이 찾아왔다. 저녁 식사를 대접하려 했으나 여느 때와 같이 1명분의 식량과 물만 나오므로 조금 더 나오기를 바랄 요량으로 지팡이 끝으로 생 구멍을 쑤셨더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뜨물만 뚝뚝 떨어지더니 영원히 멈춰 버리고 말았다. 수십 년 세월이 지나 호기심 많은 사람이 밧줄을 내려 굴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대단히 큰 도가니가 하나 놓여있고 그 안에 온갖 책들이 가득 차 있는데 그 책들을 살펴보려고 가까이 갔더니 사람 몸집보다 더 큰 지네 한 마리가 눈에 불을 켜고 무섭게 노려보더라는 것이다. 들어갔던 사람은 기겁하고 죽을 지경이 되어 겨우 돌아왔다고 전한다.
숙승봉에 오르면서...
숙승봉에서 바라본 업진봉과 백운봉, 왼쪽 뒤편으로는 상황봉
숙승봉
중이 앉아 명상하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잘 숙(宿)자. 중 승(僧)자를 합쳐 숙승봉이라 전해지고 있다. 원불교 완도소남훈련원에서는 숙이라는 말은 쉬라는 뜻으로, 선정삼매(禪定三昧)로 크게 쉬고 크게 쉬는 대휴대헐(大休大歇)이 숙승봉의 뜻 이라고 한다.
숙승봉에서 바라본 영흥제 저수지와 완도 청소년 수련원 그리고 해신의 신라방 세트장
최대줌으로 당겨본 해신세트장과 고마도앞 불목리와 오른쪽 끝 영풍리 불목리는 마을 위에 위치한 큰 바위가 스님이 좌선하는 형상이라 하여 불몽리라 불리다가 나중에 불목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내려오면서 당겨본 바라본 해신세트장
신라방으로 장보고가 당나라에 가서 상단의 일원이 되어 활동하던 곳이다. 최수종(장보고)과 채시라(자미부인), 수애(정화), 송일국(염장), 채정안(채령) 등 해신 장보고의 출연진들이 지금도 저안에서 살고 있을것만 같다.
장보고의 최후와 완도
문성왕 7년(845년)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왕의 차비(次妃)로 삼게 하려 했으나 군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조정으로서는 재력과 무력을 함께 갖춘 장보고가 두려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라 조정은 자객 염장으로 하여금 장보고를 암살하게 한다. 이로써 장보고는 승리자의 기록에 따라 반역자라는 호칭을 얻게된다.
이후 청해진은 염장의 지휘하에 들어갔으나 851년에 해체된다. 장보고가 죽은 지 9년 뒤의 일이다. 이후 신라 조정은 장보고의 추종세력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완도 주민들을 벽골군 (현재 김제) 으로 강제 이주시키게 된다. 청해진이 있던 중심의 완도는 반역의 땅이 된것이다. 이 때문에 완도는 고려 공민왕 때까지 500여 년 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섬으로 남게 되었다. 그로 인해 오랫동안 사람손이 닿지 않게 되어 현재 완도에 숲이 우거지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마을 눈썹이 숯댕이처럼 짙은 어떤 잘생긴님의 고향이라고 한다. ^^
산을 내려와 길을 따라 가다보면 해신세트장 마을을 지날줄 알았는데... 나오지 않는다. 어디로 숨었는지....
완도가 고향인 숯댕이님 고향 동네 형님이 운영하신다는 가게 쥔장님이 지나는 모든 님들께 막걸리 한사발씩 무료로 나눠주신다. 햐... 그맛이 어찌나 좋은지... 나중에 버스옆 주차장에서 뒤풀이 하면서 산악회서 준비한 막걸리가 목에 넘어가지 않는다. 여하튼 쥔장님께 눈썹 찐한분 아시냐고 물어보니 냉큼 알아보시고 웃으신다. 다들 홍주와 김 등을 사서 한잔 얻어마신 막걸리 값을 치루고 눈이 즐거웠던 완도 상황봉 산행을 마친다.
완도 상황봉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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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약수의 산행 포토에세이 원문보기 글쓴이: 약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