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없이 이 글을 읽을 수 있다면 지금도 뭇 사람들의 가슴속이 너무나 무정하고 정(情)이 메말라있다고 할 것이다. 아니면 눈물을 멈추는 눈물샘 장치(裝置)가 고장이 나서 멈춰내지 못하고 계속 흐르고 있어 슬픔이라는 것이 이런 것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세상(世上)을 살아가면서 예기치 못한 슬픔이 찾아 올 수도 있고 육체적인 아픔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으며 병원치료를 요구하기도 한다.
또는 오랜 시간 힘들게 통원(通院)치료를 받아도 차도가 없거나 수술을 받고도 병(病)이 완쾌되지 않아 많은 시간 병원신세를 지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래 슬픔이 있어 넘쳐흐르는 눈물이 아픔의 전부는 아니다. 오랜 병원생활에 지처서 가슴으로 흘리는 눈물이 말라 짠맛을 갖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쁨과 슬픔이 넘쳐도 눈물샘을 자극하여 많은 눈물을 쏟아내지만 그 색깔과 실제 가지고 있는 눈물의 맛에 농도는 틀림없이 다른 것이다.
우리주변에서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볼 수 있는 장애우 들의 슬픈 사연(事緣)을 그리고 그들의 어려운 환경(環境)에서 얼마나 많은 아픔으로 고통 받고 살아가고 있는가? 때론 그런 장애(障碍)우 들을 길거리에서나 차안에서 만나 비틀어지는 몸을 힘들게 움직이려고 온몸이 말을 듣지 않아 몸 따로 마음 따로 움직이며 땀 흘려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미어지는 그들의 심정(心情)을 정상적으로 생활하는 우리들이 얼마나 아린 가슴으로 진실을 알고 있을 런지가 큰문제다. 말로만 듣는 그 비참(悲慘)한 생활에 단면이 부셔지고 망가지는 앙금(鴦衾)에 생명의 씨앗이 찌그러들고 흩어지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여야 하겠는가! 말이다. 오직 일어나야한다. 살아야한다. 그 하나의 집념을 가지고 인간으로서의 한계(限界)를 뛰어넘고 정상인보다 더 열심히 사는 미국의 레슬링선수를 떠 올려본다.
팔과 다리가 하나도 없이 오직 할 수 있다는 집념 하나로 성조기(星條旗)를 자기가슴에 덮어 진하게 눈물을 흘리는 광경을 TV 화면으로 보았을 때 코끝이 찡하게 가슴을 노크하는 소리를 틀림없이 들었을 것이다. 그는 결코 눈으로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이 아니라 했다.
해냈다는 승리(勝利)에 감격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뿐이라고 했다. 육신을 통해서 얻어진 감정(感情)을 정신적으로 느끼는 기쁨은 바로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하는 젊은 나이의 더-스틴 토마스 카터의 인내심에는 무엇보다도 감동(感動)이 뒤범벅이 되어 그 자리까지 오면서 격은 역경(逆境)을 머리에 그려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참 부모에 사랑으로 귀여움을 받으며 아주 곱게 성장해야할 다섯 살의 어린아이가 갑작스런 박테리아(곰팡이)의 감염으로 죽을 고비를 맞아 기적으로 생명은 건졌지만 불행하게도 팔다리를 모두 절단(切斷)해야만 하는 불행의 늪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그런 신체적인 조건을 가지고 좌절(挫折)하지 않고 현재 미국 오하이오 주 변두리 조용한 시골 체육관에서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운동에 전념(專念)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려서 받은 충격적 신체적장애가 인생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게 슬퍼져있는 마음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어떤 것이 기쁨인지 전혀 느끼지 못하며 순전히 주위사람들에 배려로 일어나고 쓰러지고 또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정신력으로 살아온 세월이었으니 말이다.
뭐가 인생의 낙(樂)인지를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직 자기에게는 혼자서 일어날 수도 혼자서 먹을 수도 없어 무엇이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 그는 혼자서 일어나는 법을 터득하기까지 걸린 그 많은 시간 10년 동안 눈물을 받아낼 수 있는 큰 그릇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것이 오늘의 그를 훌륭한 선수로 길러낸 것이다.
미국 레슬링 계에서 유망선수가 되기까지 그의 집념(執念)과 인내력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우리는 알아야한다. 생(生)을 포기하겠다는 그를 설득한 것도 부모와 형제들의 피나는 이해와 도움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시간을 외롭게 홀로 싸워야하는 그가 꼭 이루고 말겠다는 집념(執念)으로 일반인도 이뤄내기 힘든 성공적 신화(神話)를 써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큰 박수를 쳐 축하를 해주어야할 일이 아닌가! 인간이 어떤 것에 도전하는 데는 물론 한계(限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제한되어 있는 선을 넘을 수 있다는 각오가 현실에서 충족(充足)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기쁨은 보통 것보다 몇 백배 더 크게 가슴에 와 닿게 되는 것이다.
부셔진 육신과 마음에 흠집에서 깨어나기 위해 걸린 많은 시간과의 싸움도 더 큰 인내가 동원(動員)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큰 선수들은 얼굴에 도전(挑戰) 정신은 있어도 아무런 그늘이 없다는 것이다. 깨끗하며 맑기만 하다고 생각하는 고운 심성이 그가 설정한 목표치에 빠르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든 영광이 뒷받침이 되는 것이다.
더-스틴 토마스가 남긴 일화 중에 그 말 한마디가 명언(名言)의 대열에서 불행한 장애우 들의 감동적 지표(地表)로 삼을 정도라 한다. *당신 주위에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무엇을 도와줄 것인가를 생각해주신다면 나도 당신도 행복(幸福)이란 길에 한 발 다가설 것입니다.* 라고 그 얼마나 애절(哀切)한 호소력을 말하는 것인가!
누구든 인생을 살아가는데 행복한 순간과 위기(危機)의 순간이 여러 번 닥쳐온다는 것이다.
그 다가오는 주기(週期)가 더 빠르게 아니! 늦을 수도 있으며 잠시 멈춰있는 시간이 길고 짧을 뿐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잘못 살아온 사람들과 생활에 부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느낌으로 감지(感知)할 때는 이미 늦은 후해를 한다. 헬렌 켈러의 말을 인용하면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여러 번의 성공기회가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회가 찾아와도 그것을 미처 인지(認知)하지 못하고 기회를 놓치거나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 다음에 오는 기회는 그만큼 시간이 지나 성공(成功)이나 치료기회가 늦어진다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에서 너무나 먼 거리에 떨어져있어 치유한다거나 어떤 처방을 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늦어 치료 가능한 때를 놓친다는 것이다.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그 굴곡에서 빠져나와야하는 절대 절명의 기회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이 “불가능은 없다.” 라고 한말은 자기가 설정한 목표치의 욕심이 숨어있어 원(願)하는 것을 쟁취하기위한 말이었고 행동이었다면 더-스틴 토마스의 생에 승리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가능하게 이루고자하는 인간 승리의 기본적 욕구를 일궤 낸 환희(歡喜)의 표본이다. 자기 의지(意志)와의 싸움에서 이겨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자기가 할 수 있다는 투지(鬪志)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겨내겠다는 끈기에 도전장이었고 마음을 자기가 뜻하는 대로 다스렸다는 승리의 말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불편하기 이를 때 없는 반쪽보다 못한 생명체라 불리는 신체적 조건에서도 좌절(挫折)하지 않고 일어서서 당당하게 삶에 한 부분을 차지하는 그를 보면서 성한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쉽게 포기(抛棄)하고 간단하게 귀중한 생명을 경시(輕視)한다는 것이다.
향락(享樂)만을 추구하는 지금을 사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이글을 쓴다.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에게 주어진 명(命)을 다 소진하고 생(生)을 마감하는 것도 커다란 복(福)이 되는 것이다. 살아오는 과정에서 기대하는 가치(價値)를 충족시키지 못했거나 어떤 행위에 의하여 생(生)을 중도에서 포기하는 그런 잘못된 생각은 버려야한다.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어떤 상황(狀況)이 닥쳐온다 해도 살기위해 헤쳐 나가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눈물을 씻어내는 상대적 고통에서 좌절(挫折)을 이겨내는 막강한 힘이 되는 것이다. 용기(勇氣)가 된다.
(이규석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