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연휴와 이런저런 일로 리듬이 깨지고, 마음자리를 잃어 버렸었던지 몇일 몸이 불편했습니다. 오늘 산에 오르니 그동안 산색이 많이 변했더군요. 단풍나뭇잎은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물이 들기 시작했고, 아직 푸른 잎들도 색이 바래 마르고 있었구요. 내려오는 길에 밤을 까먹는 아기 다람쥐를 만났는데, 어찌나 귀여운지 밤 하나를 다 먹는동안 구경을 하고 왔습니다.
엊그제는 오랫만에 하얗게 밤을 새기도 했습니다. 그러려고 그런것이 아니라 실수로 그 전날 오후 4시쯤 우연찮게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게 되었는데 별 생각없이 마신 커피가 날밤을 새게 만든거지요^^ 오후에 커피나 차를 마시면 잠자는데 애로사항이 많았던것을 깜빡하고 마셨던거죠. 자리에 들어 11시가 되었는데도 잠이 안오고 말똥말똥해져 이상하다 하고 생각해보니 그 커피가 원인이더군요. 꼼짝없이 새벽까지 뜬눈으로 날을 밝혔답니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그리고 삽질의 정부라고 해야할까요 지금의 이 정권을 겪으면서, 종의 차이보다 같은 종인 인간사이의 차이가 더 크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위록지마는 여반장이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면서도 큰 소리 치는 사람들을 매일 접하면서, 저럴수도 있구나 하며 나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새삼 사람사는 일을 배운답니다. 천성의 차이야 어쩔 수 없겠으나 그보다는 욕심으로 인해 그렇게도 큰 차이가 생기는것 같습니다.
민주주의의 역사도 오래되고 그 결과 민주적인 역량이 축적된 나라인 영국에는 양당제가 확립되어 있습니다. 가진자들을 대변하는 보수당과 상대적으로 무산계층을 대변하는 노동당이 그것이지요. 가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보수적이고 없는자들은 현재의 질서가 변하기를 바라니 자연스레 진보적이 됩니다. 하지만 지금 삽질의 정부에 몰려드는 인간들을 이런 구도속에서의 보수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자칭 진보쪽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나, 이상돈 교수같은 진정한 보수들은 그들을 보수꼴통이라 부릅니다. 보수가 표명하는 건전한 가치가 있는데 이들은 그런가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천박한 물욕만을 채우려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보수꼴통들 처럼 스스로의 욕심에 눈이 멀어 호머 사피엔스라는 종중에서도 돌연변이가 된 부류는 제외하더라도, 세상에는 (지혜의 사랑인) 철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런 철학은 이해하기 힘들뿐 아니라 추상적이며, 무엇보다도 아무런 현실적인 가치도 지니지 못한것일테니까요! 그들에겐 그저 모호하고 애매한 넌센스에 불과할 따름일겁니다. "철학이 밥먹여주냐, 혹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고 있네!" 이런말을 자주하는 사람들이 아마 그 범주에 들겁니다. 인류 역사상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어느시대에나 많이 있어 왔습니다, 마치 사변적인 사유와 명상을 통해 계시되는것을 가장 중시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어 왔듯이 말입니다.
예를들어 초기 힌두사상에선 이런 상반되는 대조적인 관점이 동물우화와 우파니샤드에 나타납니다. 판차탄트라(Panchatantra)의 동물우화는 생존하는데 필요한 현실적인 법칙과 지식을 다루는데, 이것은 인생을 논리적이고 계산적인 관점에서 보아 그 가능성과 결과를 냉정하게 평가합니다.
강한자든 약한자들 가리지 말고
친구를 사귀고, 친구로 만들어라:
사로잡힌 코끼리가 생쥐의 도움으로
풀려났음을 기억하라.
우파니샤드의 신비적인 메시지와는 대조적으로 매우 명쾌한 조언입니다! 인간의 생존에 관계된 문제와 해법을 얼마나 명료하게 정리하는지요- 그에 반해 사물의 궁극적인 본성을 밝히려 애쓰는 우파니샤드의 표현은 대조적으로 매우 불명료하고 애매모호합니다:
모든것을 아는 자아는 태어난 것이 아니며 죽지도 않는다:
그것은 무로부터 나왔으며, 무는 그것으로부터 나왔다.
이와같은 부류의 단절은 초기 그리이스 사상에서도 엿보입니다. 이솝의 우화는 판차탄트라가 말하고자 하는바와 같이 계산을 통해 나온 실질적고 현실적인 교훈을 줍니다; 반면에 헤시오드의 'Theogony'(신의 계보) 는 보다 근본적인 관점을 제공하지만 역시 모호합니다.
두 번째 성향이 강한 사람은 멀리있는 별은 보지만 바로 발아래의 웅덩이는 못보고 빠지는 사람일테고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을 말하자면 좀 설명이 필요하지요. 호랑이에 쫓기다 절벽에서 떨어지게 된 사람이 간신히 칡넝쿨을 잡고 매달려 있는데 아래는 악어가 입을 벌리고 있는 상황이라지요. 그에 더해 흰쥐와 검은쥐가 번갈아 넝쿨을 쏠고 있는 와중에서도 벌꿀에 탐닉하는 사람이랍니다.
사람의 성향은 천성과 환경, 또 나이에 따라 변하는데, 어떤 성향의 사람이든 상대성향으로 부터 배우는것은 필수적입니다. 좀 더 현실적이 되든지, 아니면 좀 더 이상적이 되든지...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제자들의 성화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은 두 관점에서 보는 가치를 모두 언급하시지만, 두 번째 관점의 가치를 먼저 말씀하시는군요! 본래 신앙인이라든가 종교인들은 두 번째 경향이 농후한 사람일겁니다. 종교가 세속화되고 제도화되면서 기복신앙으로 변질되고 입신양명이라든가 건강장수가 마치 목적인듯이 우선순위가 바뀐 것일뿐이지요.
하이데거는 첫 번째의 태도가 계산적인 사유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반면 두 번째의 태도는 관상적인 사유라 했고... 두가지 사유형태중 인간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사유는 관상적인 사유인데 요즈음 시대는 오로지 계산적인 사유만 존재하는 사회라 하면서 그 위험성을 논했지요.
잠시 멈추어 주위를 살펴보면, 이 계산적인 사유의 형태는 사회는 물론이고 교회내의 기도생활까지 지배하는듯 보입니다.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논리적이고 계산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요...다행히 근래 들어서 관상기도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고 보급하려는 노력을 많이 보게됩니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도 '신비적 죽음' 을 통한 '신비적 탄생' 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가 말했던 신비적 죽음은 무엇보다 먼저 기도하기 위해 모든것으로 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기도하는 그 시간을 위해 그 순간만큼은 모든것을 포기하는것이지요. 그것은 평신도에게도 가능한 일일 겁니다, 훈련이 필요하지만!
무엇을 하기에도 좋은 시절, 하루 한 시간 기도 삼매경에 들어 봅시다
-강원도 양양 오상영성원 강철훈수사님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