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닷컴] (글=이동진) ‘하얀 리본’(Das Weisse Band)을 보고 있으면 숨이 턱턱 막힌다. 오스트리아 출신 감독 미하엘 하네케의 이 걸작은 물 한 방울 샐 것 같지 않은 스타일에서 완벽하고, 결말을 열어둔 채 끝나면서도 주제의식이 더없이 형형한 화술에서 강력하다. 모호하게 느껴지는 순간조차 관객을 압도하는 ‘하얀 리본’은 클래식이 되는 운명을 타고난 작품으로 보인다.
1913년 독일의 작고 평화로운 마을. 말을 타고 집으로 오던 의사가 누군가 고의적으로 설치해놓은 줄 때문에 낙마해 크게 다친다. 이어 방화 사건과 실종 사건에서 한 아이의 눈이 도려내지는 사건까지, 누가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끔찍한 일들이 연이어지면서 마을은 불안과 두려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스릴러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하얀 리본’에서 기이한 사건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참혹하게 증폭되어간다. 관객들의 관심은 범인이 누구인지에 집중되지만, 사실 그와 관련된 미스터리는 극의 동력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하네케가 정말로 관심을 두는 것은 ‘누구’가 아니라 ‘왜’와 ‘어떻게’이기 때문이다.
2009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 작품이 과거의 사건들을 회고하는 외지 출신 교사의 내레이션을 통해 진행되는 이유는 텍스트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하네케가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에는 기괴한 사건들의 한복판에서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바깥의 시선’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얀 리본’은 단숨에 달려들어가 뜨거운 가슴으로 몰입해야 하는 작품이 아니라, 몇 발짝 물러나 차가운 머리로 되짚어봐야 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해인) 1938년이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해인) 1913년을 시대배경으로 삼고 있는 까닭은 명백해 보인다. 하네케는 포연과 잿더미 사이로 나 있는 현대의 진입로에서 지금 이 시대의 불안과 공포의 근원을 숙고한다. 그리고 이 우화는 단지 나치즘만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담고 있다.
말하자면 ‘하얀 리본’에 등장하는 마을은 일종의 사회학적 실험실과도 같다. (그 점에서 하네케의 방법론은 ‘도그빌’에서의 라스 폰 트리에의 경우와 흥미롭게 대비된다.) 이 참혹한 이야기 속에서 하네케는 필사적으로 교훈을 얻으려고 한다. (극중 화자가 교사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계급갈등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 문제들이 농축되어 있지만, 여기서 특히 하네케가 중시하고 있는 것은 세대간의 교류 방식이다. 극중 엄격한 부모인 목사 부부가 잘못을 저지른 자녀들을 매질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아이의 신음 소리가 새어나올 뿐 굳게 닫힌 문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그렇게 닫힌 문 뒤에서 이전 세대가 스스로도 믿지 않는 가치를 교육과 계도의 미명 하에 다음 세대에 억압으로 강요할 때, 감독은 테러와 전쟁이 횡행하는 현대 비극의 진원을 발견한다. 그리고 ‘하얀 리본’은 밀폐된 환경에서 이상 증식된 증오가, 도덕적 명분으로 위장한 폭력을 통해 엉뚱한 출구에서 분출할 때 발생하는 참극에 대한 영화다. (아이들이 팔에 두르는 하얀 리본은 강요된 도덕과 순수의 상징이다.)
크리스찬 버거의 촬영은 형식적 측면에서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엄격하고, 역설적으로 느껴질 만큼 아름답다. 독일 사진작가 아우구스트 잔더의 작품들에서 모티브를 따온 ‘하얀 리본’의 비주얼은 간결하면서도 동시에 탐미적이다. 자잘한 테크닉을 거의 쓰지 않는 하네케는 이 영화를 흑백 화면에 담음으로써 색깔로 초점이 분산되지 않는 밀도를 만들어냈고, 이야기에 시대적 맥락을 확실히 부여했다.
음악조차 거의 쓰지 않아 한없이 고요한 이 기품 넘치는 작품은 종종 실내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악한 사건의 클로즈업을 보여준 후 곧바로 야외의 탁 트인 전망을 롱쇼트(멀리찍기)에 담아 이어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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