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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에서 말씀과 함께 하는 헌금(연보)에 대하여
- 성경적 헌금 원리를 따르는 개혁교회의 헌금 -
사도행전 4장 32-37절 / 32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34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36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위로의 아들)라 하니 37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고린도전서 16장 1-4절 / 1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교회 헌금의 원리를 제시해 주는 초대교회의 헌금
사도행전 4장 32-37절은 신자의 삶, 또는 교회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원리적으로 알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이 해 나갈 일을 알려 주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성령님의 권능으로 해 나갈 것이었지 사도 개인의 힘으로 해 나갈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자신들이 듣고 본 것인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했으며 성령께서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게 하심을 따라서 앉은뱅이를 낫게 하는 이적도 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이 모든 일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 3천명(행 2:41), 5천명이 되었다고 하는 것(행 4:4)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우리는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가지고 우리를 예수님의 몸과 연합시켜 한 몸이 되게 하여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신데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해서,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그때부터 새로운 사회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 새로운 사회는 유대인이 갖는 사회의 모습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유대인이 갖는 사회의 특징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하나님을 공경함이 없는 죄에 내려질 심판을 처분 받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모습은 실상 하나님이 없는 온 세상의 이방인이 처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하나님으로서 그들 중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난 자들에게 영생을 베푸실 것인데, 그 영생은 하나님의 자비로 베풀어질 것임을 알게 해 주시기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이름을 주시고 믿음으로 따르게 할 것을 율법의 계명은 의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율법은 메시야 언약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사랑을 정신으로 담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로 전혀 새로운 사회를 형성한 무리들이 등장하였으니 다름 아닌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그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누구 하나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없이 모든 것을 공유(公有)하며 함께 사용하는 특색을 띠었습니다. 사도들은 주 예수의 부활을 담대하게 증거하였고 신자들은 서로 뜨겁게 사랑하였습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왔으며 사도들은 그것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기에 모범적인 사람으로 요셉이 소개가 되고 있는데 그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권위자 –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별명인 바나바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자기 소유인 밭을 팔아서 마련한 돈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한 것에서 신자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 속에서 주께 붙어 있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기록해 주시고 있는 것은 지금 이런 일이 어떻게 있게 되었는지를 알게 해 주는데 있습니다. 지금 이런 일이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유대인 사회는 공유하고 통용하는 것이 그들의 민족의식 구조입니다.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은 그들이 땀 흘린 수고의 결실로서가 아니라 여호와이신 하나님께서 주심으로써 소유가 되어집니다. 그들의 광주리가 복을 받고 성읍이 복을 받음에 있는 것은 그래서 입니다. 이렇게 해서 소유한 것에 대해서 그들은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받은 기업을 나눕니다. 기업이 없는 레위인을 섬기고, 절기에 쓰일 비용을 대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돕는 십일조를 하는 것은 그래서 입니다. 이 십일조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있는 정신에 담겨 있는 ‘여호와의 것’은 이스라엘의 절기에서 안식일인 매 칠일에는 노동을 쉬고, 안식년인 매 7년에는 땅을 쉬며, 희년인 매 50년에는 땅을 부득이 담보로 잡히고 팔아야만 했던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줄 뿐만 아니라, 가난함으로 남의 집에 종 되었던 자들도 그들의 집으로 돌려보내줍니다. 이 규정에는 모두 가난한 이를 보살펴 돌보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열 한 지파에게 각각 기업으로 주셨으나 그러나 그 땅이 누구의 것인가 하는 것에서, 그리고 동족의 집에 의존하여 사는 남종과 여종이 누구의 백성인가 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소유케 한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땅을 언제까지 자기의 소유로 주장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나는 모든 수확물에서도 항상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일부를 남겨 놓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에서 유대인들이 가진 공동체 의식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업으로 주셨으나 자기 소유의 개념이 아닌 항상 공유와 통용의 개념을 띠고 있었습니다.
이는 후에 바울을 통해서는 고린도후서 8-9장에서 헌금의 원리로 가르쳐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어떻게 은총을 베푸셨는지를 알려주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요케 하신 은혜를 가난한 자들에게 도움으로 베푸는 것을 통해서 가난한 자들을 부요케 하고 이는 훗날 그들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 다시 그들이 그를 돕는 도움으로 돌아옴으로써 서로 필요한 것을 함께 나누어 평균케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일을 하는 헌금을 ‘봉사의 직무’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에서 ‘많이 거둔 자도 남는 것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헌금의 원리를 가르치기 전에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먼저 이를 성령의 은사로 다루었습니다. “하찮게 여기는 지체를 특별히 소중히 여기고 남에게 보이기 흉한 지체를 더욱 조심스럽게 보호하는 것, 그래서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되는 지체가 더 귀중하게 다루어지도록 몸을 만들어 주신 것은 지체들이 행복하게 되고 그 지체가 서로 돌보아 주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서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들이 함께 고통을 당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즐거워하는 것이 되는 것처럼 신자는 모두 함께 모여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한몸을 이룰 수 있는 것이며 이들 모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따로 떨어져 있으나 모두가 몸에 없어서는 안 될 지체들로서 서로를 섬기도록 하기 위하여 각 사람들에게 은사[능력/재능]을 주셨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성령이 임하시기 전의 유대인 사회는 이를 충실히 행하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탐욕에 가득 찼으며 돈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나오는 힘으로 공동체란 집단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곳으로 삼았습니다. 여기에서 힘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고 이를 즐겼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신 후의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서 부요하여서 거만하고 가난하여서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라 부요한 자도 남지 않고 가난한 자도 부족함이 없는 평균케 하시는 은혜가 공유와 통용의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공유와 통용의 삶을 살았다는 것은 그 누구도 자기의 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았다는데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주시라 부르는 자들에게서 그 누구도 소유에 대한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유의 권리는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하고 참 생명인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재물만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목숨도 그렇습니다. 자신들이 사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그러기에 재물을 관리하고 이를 사용하여서 먹고 마시고 하는 모든 것에서 자신들 생각에 좋은 대로 임의로 하거나 다른 사람의 지시와 명령을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지시와 명령을 받아서 해 나갔습니다. 이를 믿는 자 안에 거하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하십니다. 여기 바나바는 그에 대한 실증적인 사례입니다. 그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밭을 팔아서 마련한 돈을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사도들에게 내놓았습니다. 바나바가 이렇게 사도의 지시와 명령을 받아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가 섬기는 주로부터 직접 지시와 명령을 받아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는 주께로부터 받은 부요한 재물을 평균케 하시는 은혜를 따라서 그리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온 지체가 부족하지 않게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가난으로 인해서 훼방을 입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한 사람이 바나바 한 사람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어떤 한 사람에 의해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지체에 의해서 운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이 바나바 한 사람에 집중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의 경우가 다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데서 그 소유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모든 믿는 자들의 마음과 자세가 그러했습니다. 주께서는 각 신자의 사정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은혜의 분량을 따라 평균케 하시는 은혜를 보여주는 일들을 하게 하십니다. 다만 바나바가 주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서 봉사하여 나간 실증적인 사례로 등장시키고 있을 따름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사회적인 조직의 구조에서 이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하나 된 몸의 생명체라고 하는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인데 여기에서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를 원리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우리가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주께서 어떻게 간섭해 나가시는지, 즉 우리가 주의 지시와 명령을 받아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보여 나가는 것이 교회란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이미 보고 있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인간의 의식주와 돈(재물)에 대한 이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신 산상설교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라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생존해 나가는데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재물(돈)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의식주(衣食住)와 관련이 있습니다. 돈을 사용해서 먹고 마시며 입고 거주하는 집을 얻기 때문에, 돈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의식주(衣食住)를 가져나가는데 사용되는 필요한 돈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사람의 생명을 보존해 가시는 방편으로 주신 자비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창1:29) 라고 하신 말씀에서 보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은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17:25),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행17:28)라는 말씀에도 분명하게 증거되고 있습니다. 해서, ‘돈’이라고 하는 재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하는 방편(수단)이나, 이는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기업으로 약속해 주시고, 마침내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해서는 그 땅을 열 두 부족에게 분배하여 그 땅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열 한 지파에게는 땅 분배로, 그리고 한 지파인 레위지파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땅에 세운 성막에서 일하는 것의 보수로 열 한 지파가 분배 받은 땅에서 수확하여 얻은 소득의 십일조를 그들이 받을 분배의 몫이 되게 하여 양식으로 삼게 하는 것에서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민 18:21, 24).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의해서 그들의 생명이 유지되게 하였기에 자신들이 소유한 땅과 그 땅에서 주어진 것에 자신들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 25:23) 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땅은 하나님의 것인 까닭에 땅과 그 땅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의 소유권은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해서, 땅의 주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땅을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그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으며 그 땅으로부터 얻은 소득의 모든 것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창 3:17-18) 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평생에 얼굴에 땀을 흘리는 수고에 있어 그 소산을 먹음에 있으나 자기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땅의 관리인인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는 자기의 몸에 대한 생각에서도 그러하였습니다. 해서 욥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인간이 먹고 살아갈 수 있도록 양식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이스라엘 밖에 있는 이방인들이 살아가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상반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과는 달리 땅이 자기 것인 줄 알고 땅의 소산을 자기 것으로 삼아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심지어는 남의 소유하고 있는 것을 거짓 증언, 해꼬지와 살인을 하여 강탈해서라도 자기 소유화하려고 하며, 그것을 지키려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합니다. 그럼에도 자기 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는 분한 마음에 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되찾으려고 하며 자기 목숨을 끊기까지 합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돈에 대한 바른 정립은 우리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제자들과 우리들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은혜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소유하고 있는 돈에 대하여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그 돈을 맡기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선용하면서 살아갈 마음과 생각을 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우리들은 의식주와 그에 필요한 돈은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하시는 것과 관련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같이 자기 자녀들을 돌보시는 은혜에 깊은 감사의 정신을 갖고서 양육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배우고 이를 몸으로 익혀 자신들 또한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의지함 속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위해 자신을 드려 섬김에 있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는 헌금 정신이 이러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고후12:14) 라고 하신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 원하시는 것은 주께 가진 믿음에 있는 우리 자신이며, 그러한 우리를 받으심에서 또한 우리의 헌금도 받으심에 있습니다. 이를 아벨의 제물에서 배웁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3-4).
개혁교회가 가져온 교회 섬김에 있은 헌금(연보)
이제 개혁교회가 가져온 교회 섬김에 있은 헌금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에서 행해져 온 헌금은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3-47),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에서 각각 보는 공유와 통용의 원리에 의해 ‘위로의 아들’로 불리는 바나바에게서 보는 바인 재산의 기증, 그리고 신자의 헌금에 의해서 있어 왔습니다. 재산의 기증은 부요한 자들에게서 있어왔으나 극히 간헐적으로 있었고, 신자들이 매주 드리는 헌금이 교회재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헌금은 부자의 책임이 아니라 모든 신자의 의무였습니다. 교회의 감독들은 헌금에 의한 예측 가능한 수입을 기초로 빈민과 궁핍한 자들을 비롯한 구제의 봉사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교회의 헌금이 여기에 나타내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본의적 정신을 잃어버리고 교회의 세(勢)를 과시하는 방편으로 전락함으로, 중세교회에서는 십일조를 중심으로 헌금이 더욱 다양하게 분화되어 나타나면서 교회가 타락하는 부패한 현상에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재정과 관련되어 가장 큰 폐해 사례로 등장한 헌금은 면죄부를 위한 참회의 헌금(참회금)입니다.
종교개혁 후 개혁교회는 예배를 통해서 교회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다고 보았습니다. 헌금은 그 예배에서 한 순서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설교에서 증거되는 말씀과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과 함께 하는 기도, 말씀과 함께 하는 찬송, 말씀과 함께 하는 성례, 그리고 말씀과 함께 하는 헌금입니다.
그런데 예배에서의 헌금은 두 가지 형태로 행해졌습니다. 하나는, 예배 의식에 의해서 하는 헌금으로 가난한 자를 위한 헌금이라고도 하고, 구제를 위한 헌금이라고도 하며, 자비 사역을 위한 헌금이라고도 하는 헌금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예배 순서에 의한 정해진 헌금 시간에서 헌금하는 것이 아닌 성도들이 예배당에 들어오면서 헌금함에 헌금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38문에서 제4계명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이런 내용의 답이 있습니다. “주의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례를 사용하며, 공적으로 주께 간구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예물을 드리며(to give Christian offerings to the poor)....”.
성도는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통해 그분과 하나 된 몸을 이룸에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나타내 보이신 하나님을 사랑할 것과 또한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할 것의 실천을 하나님의 백성을 돌봄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따라 교회의 지체인 성도를 섬김에 있습니다. 이 헌금은 정해진 헌금에 의해서 가져나가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자기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하나님께 바친 것을 모은 대로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산에 의해서 집행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헌금이 다름 아닌 ‘주일 헌금’입니다. 주일 헌금은 언제나 목적이 있는 대내 및 대외 구제를 위한 것입니다. 곧 집사들의 자비의 사역을 위한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을 바울은 ‘봉사의 직무’라고 했습니다. 이 헌금은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롬 15:26)와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1-5)라고 하는 것에서 보는 바인 마게도냐의 교회들이 행한 것이며, 또한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그리고 고린도교회에 요구한 것입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 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1-2). 개혁교회에서는 이 헌금을 ‘자비의 직무’라고 합니다. 이런 까닭에 보통 예배시간 중에 행해지는 이 헌금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과, 그리스도의 연민과 자선이 집사를 통해 보일 수 있는 가치 있는 다른 곳들을 위한 것이므로, 헌금으로 모여진 그 돈은 절대 교회 건물을 유지하는 데에나, 목사의 생활비나, 난방비를 위한 것에나, 연합회의 회비 등에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자비 사역을 위해서만 성도의 헌금이 필요로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운영 - 교회 예배당의 사용에 따른 운영비를 비롯한 목회 사역과 목사의 사례 등 - 을 위해서도 재원의 확보를 위한 헌금을 필요로 합니다. 이는 일 년의 예산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산이 세워진 만큼 헌금이 요청되므로 성도의 책임 있는 의무가 따릅니다. 개혁교회가 행하여 오고 있는 헌금의 실상을 잘 알고 계신 분의 증언에 의하면, 이 헌금은 성도들의 자원하는 정액 헌금으로 행해지며, 개혁교회에서는 이 헌금은 교회 운영위 앞으로 바로 보내져 관리됩니다. 한편, 개혁 교회에서는 이 외에도 교회 입구에 여러 헌금함이 있는데, 그 모두는 교회를 존재해 나가게 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교회와 관련된 것으로 학교, 선교, 신학생 등을 위한 목적 있는 것에 쓰이며, 이는 주일에 드리는 헌금과 구별됩니다.
이렇게 구별되는 헌금에 있는 것을 통해서 개혁교회에서는 가난한 자를 돕는 자선과 관련된 일들은 ‘집사회’에서 하고, 교회의 건물 유지비나 기타 운영비용과 관련된 일들은 ‘운영위원회’에서 담당합니다. 이러한 전통은, 구제하는 일은 성경이 명하는 일이므로 직분자가 감당하는 중요한 일이고, 교회를 운영하는 일은 단순히 필요에 의한 일이기 때문에 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성경에 기초한 직분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헌법 해설 헌금 항목에서 헌금은 “가난한 자를 위한 헌금”, “교역자를 위한 헌금”, “주님의 일을 위한 헌금”으로 나눠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신약적 헌금의 본질은 “자의적 헌납”임을 소개합니다. 이 자의적 헌신을 토대로 신자로서 의무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참여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십일조는 헌금의 최소 기준이며 은혜 받은 대로 더 많이 하도록 훈련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 헌금에 대해서 예배모범에 말하기를, “목사마다 자기 교회가 감심으로 (감사함으로) 헌금하도록 습성을 배양하는 것이 마땅하니, 신도마다 다소를 물론하고 자기 힘 있는 대로 바치게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18장 4항). 이것은 성경에 근거한 규정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전파를 통해 신자가 되고 교회의 구성원이 됨은 헌금의 원리와 그 이해를 가지고서 헌금이 사용되는 목적을 알기에 신자의 본분에 의한 의무를 행합니다. 신자로서 바른 신앙에 의해 교회 섬김에 있는 헌금을 해 나가고자 한다면, 성경적 헌금의 원리를 따라서 개혁교회가 해 온 헌금을 참조하여 자신이 행하여 나갈 헌금을 어떻게 가져나갈 것인지를 잘 정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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