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년
11 안세영
겨우내 언 땅을 헤치며
푸른 꿈은 날이 다르게 자라났다
공활한 하늘에 닿겠노라며 자라난 꿈은 마디마디 흔적을 남겼다
곧게 자란 푸른 꿈나무 속이 빈 대나무에 등을 맡기며 어머니는 추억에 젖었다
“내가 느이 아부지 만나기 전에, 니 딸래미만코롬 쪼꼬마할 때 얘기다. 울 어무이가 해주셨었재.”
대나무는 수명을 다하기 직전까지 자라난다 꿈에 닿지 못한 채 좌절하며 붉은 꽃이 된다고 어머니는 눈물 지었다 그깟 꿈이 뭐라고 60년을 자라냐며 어머니는 우셨다
발밑에서 죽순이 깨고 있었다
──────────────────────────────────────────────────────────
사고
10 김희선
“그러니까요 선생님…….”
‘아아, 이제 시작이로군. 왜 다들 저런 말로 시작하나 몰라.’
성민은 상담사였다. 고등학교 시절 딱히 뛰어난 장기 같은 것도 없고 공부도 중간이었던 성민은 진로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물론 다른 애들도 다 같았겠지만 성민은 스트레스성 탈모가 나타날 정도로 심각했다. 이런 모습을 본 부모와 선생들은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어떻겠냐며 권장했고 성민은 상담소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성민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상담사의 모습에 상담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군대를 갔다 온 뒤 성민은 인터넷으로 공부를 하며 상담사 자격증을 땄고 바로 자신이 상담 받았던 상담소에 들어갔다. 상담소 소장과 친했기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성민은 다른 사람보다 상담사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며 공감하는 능력이 컸던 것이다. 이런 성민의 재능에 많은 사람들이 성민을 찾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민은 상담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상담사가 되었다. 상담소에서 보통 한 상담사당 손님은 많으면 세 명이었다. 성민만이 유명세를 타 손님이 많았다. 하루에 여섯 명까지 받아본 적이 있었다. 오늘이 그랬다. 이 여자 손님이 여섯 번째다. 상담소에 자주 찾아오는 손님이었다. 무슨 불만이 그리 많은지 올 때마다 한 시간씩 이야기를 하고 갔다.
“……이렇게 됐어요. 어떡하죠?”
여자의 말이 끝났다.
‘무슨 말을 했더라……. 아.’
“일단은 계속 지켜보세요. 무작정 의심하는 것보다는 시간을 두고 지켜봤다가 확실해지면 그때 결정을 해도 되요. 한순간의 의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순 없잖아요.”
이번 고민은 남자친구 때문이었다. 남자친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나 뭐라나 사실 성민은 이런 고민을 자신에게 말하는 것 자체가 웃겼다. 그리고 자신의 말에 수긍하며 자리를 뜨는 여자를 보며 실소를 흘렸다. 성민은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게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군대를 갔고 제대한 후에는 집에서 혼자 공부를 하다가 상담소에 들어오게 된 성민은 그 사이 여자를 만날 일이 없었다. 여자가 나가고 퇴근 준비를 했다. 막 자신의 부적인 군번줄을 챙겼을 때 성민은 갑작스런 소장의 호출에 소장실로 향했다. 소장 실엔 소장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웬 여자와 함께 있었다. 그녀는 성민의 또래쯤으로 보였다.
“아 왔는가. 그래 이 시간까지 상담을 하고 있었나?”
“아, 네. 손님 가시고 이제 막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 잘됐군. 나와 저녁이나 함께 하지.”
소장은 성민과 여자를 근처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다. 식사를 주문하고 나자 소장이 여자를 소개했다.
“이쪽은 내 딸이라네. 소영아, 이쪽이 내가 그렇게 말하던 성민군이야.”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식사가 끝나고 소장의 앞으로 자주 함께 식사하자는 말을 들으며 헤어졌다. 그 후로 소장과의 식사자리가 정말로 잦아졌고 그때마다 소영이 함께 했다. 소영과 성민은 서서히 소장 없이 둘이서만 만나는 시간이 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기 시작했다. 소영은 생각보다 괜찮은 여자였다. 상담사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그런 진 몰라도 생각이 깊었고 순했다. 딱 천상여자라는 말이 소영을 위한 말 같았다.
솔직히 상담사라는 직업은 많은 사람들의 고민을 듣다보니 육체적으론 힘들지 않지만 정신적으로 많이 힘든 직업이었다. 실제로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도 많았다. 성민에게 소영은 정신적 피로를 해결해주는 의사 같은 존재였다.
그날도 소영과 데이트를 한 날이었다. 성민은 차가 없었다. 소영과 데이트를 하고 데려다 줄때 불편하긴 했지만 그 이외에는 크게 불편한 게 없어 사지 않았다. 성민은 소영을 데려다 주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성민은 신호등 아래 섰다. 그 순간 성민의 기억은 끊겼다.
눈을 뜨니 보이는 것은 소영과 가족들의 얼굴이었다. 다들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괜찮아?”
“응, 괜찮아”
빈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가 여기 왜 있는 거야?”
“기억 안나? 나 데려다 주고 가는 길에 교통사고 당했어.”
“아……. 그랬구나.”
아직까지 성민은 정신이 멍했다.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 정신이 좀 들자 나를 친 사람이 궁금해졌다.
“누구야?”
“응?”
“나 친 사람. 누구야?”
“아직 몰라.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갔을 땐 성민씨 혼자 쓰러져 있었대.”
뺑소니였다. 범인이 누군지 모른다니. 성민은 화가 났다. 어떤 양심 없는 사람인지 그 얼굴을 꼭 보고 싶었다. 이윽고 성민은 자신의 군번줄을 찾기 시작했다. 항상 갖고 다니던 것이었다. 성민이 정신없이 두리번거리자 소영이 물었다.
“왜 그래? 뭐 찾아?”
“응 내 군번줄.”
“아 그 부적이라는 그거?”
“응.”
“사고 났을 때 떨어졌나? 여기엔 없는 것 같아. 내일 다시 가서 찾아봐.”
군번줄은 성민에게 있어 그 어느 것보다 효력 있는 부적이었다. 군 시절 가장 힘들 때를 함께 한 것이었다. 군번줄의 부재에 성민은 매우 불안해했다.
성민은 바로 다음 날 퇴원했다. 의사의 말로는 몸에 아무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후유증이 있을지 모르니 이상이 생기면 꼭 오라는 의사의 말과 함께 병원을 나왔다. 성민은 바로 사고 장소로 향했다. 사고 현장엔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해가 질 때까지 찾다가 못 찾은 성민은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하루정도 쉬고 다시 상담소로 출근했다. 평소와 똑같이 방에 들어가서 손님 명단을 봤다. 오늘은 저번보다는 사람이 적었다. 세 명. 성민은 손님을 방에 들였다. 그 여자였다. 저번 남자친구와의 일은 잘 풀렸을까. 여자는 어제도 찾아왔었다면서 성민이 출근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성민은 몸이 좋지 않았다고 간단히 대답했다. 여자는 저번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말했다. 역시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남자친구와의 이별이야기를 했다. 성민은 여자에게 다른 좋은 사람이 생길 거라고 서로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한 것이라는 입에 발린 말을 한 후 여자를 돌려보냈다. 이 후 두 명의 상담역시 간단히 대답하며 끝냈다. 성민의 일이 끝나자 소영이 찾아왔다.
“괜찮아?”
“응”
어제의 반복이었다. 소영은 한 시간마다 물어봤다.
“괜찮다고!”
성민의 처음 보는 역정에 놀란 소영이 울음을 터뜨렸다. 성민은 자신을 자책하며 소영을 달랬다. 그 날 소영과 찝찝하게 헤어졌다. 이후 이런 날이 반복됐다. 소영은 성민을 두려워했고 성민은 자신을 자책했다. 성민은 자신이 이상하게 변했다고 느껴 병원을 찾아갔다.
“전두엽에 손상이 온 것 같습니다. 근래에 들어 자주 화를 내셨다고요? 앞으로도 그럴 지도 모릅니다. 치료가 불가능한건 아니나 시간이 좀 오래 걸립니다. 계속 정신과, 신경과, 재활의학과 등을 다니시면서 복합적인 치료를 하셔야 합니다. 완치되지 않는 경우도 있으나 완화는 됩니다.”
성민은 의사의 말이 청천벽력으로 들렸다. 상담사에게 있어 감정조절 불능이란 치명적인 것이었다. 성민은 상담소로 가 소장을 만났다.
“자네 요즘 소영이와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소영이의 표정이 좋지 않던데…….”
“제가 이제 상담소를 못 나올 것 같습니다. 소영과의 만남도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아니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성민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설명을 요하며 말리는 소장에게 죄송하다는 말만 남기고 상담소를 나왔다. 소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영은 울고 있었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성민은 바로 경찰서로 가서 뺑소니 범을 찾아달라고 신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현장에 현수막이 걸렸다. ‘00일 11시경 뺑소니 사고 목격자를 찾습니다.’ 백수가 된 성민은 몇날며칠동안 현수막 주위를 맴돌았다. 범인은 사건현장에 다시 나타난다. 그렇게 생각하자 사고현장을 떠날 수 없었다.
그 날도 성민은 현수막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지나가는 남자와 부딪혔다. 순간적으로 성민은 울컥했다. 도대체 눈을 어디다 달고 다니는 건지. 성민은 다짜고짜 그 사람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남자는 간단히 성민을 제압했다. 아무리 싸워본 적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순간적으로 휘두른 주먹을 쉽게 막다니 성민은 남자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신 뭐야? 눈을 어디다 달고 다니는 거야. 사람이 서 있으면 피해갈 줄 알아야지. 뭘 믿고 그대로 와서 부딪히는 건데?”
주먹을 휘두르고서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는 성민에게 남자는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했다. 성민은 남자가 순순히 사과하자 뭔가 자신이 굉장히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아닙니다. 길 한복판에 서 있던 제 잘못이죠. 죄송하다니요.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갑자기 바뀐 성민의 태도에 남자는 당황했다. 남자는 성민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저기,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네? 그건 갑자기 왜 묻죠?”
“아니 저번부터 계속 이 근처에 계시는 거 같아서요. 처음엔 우연인가 싶었는데 여기 지나갈 때마다 보여서요.”
성민은 주위사람에게 못한 자신의 일을 얘기했다. 사고가 일어난 것부터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까지. 남자는 성민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전직 복싱 선수였는데 복싱을 배워보시는 게 어때요? 운동을 하면 아무래도 정신적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을까요? 게다가 감정제어를 못하시는 거라면 특히나. 다른 애먼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보다 복싱경기에서 합법적으로 싸워보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남자의 말은 꽤 그럴듯했다. 더욱이 성민은 할 일 없이 현수막 주위를 배회하는 것에 슬슬 회의감이 들고 있었다. 성민은 남자의 제안을 승낙했다. 마침 남자는 근처에서 복싱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는 관장이었다. 성민은 병원에서 치료를 병행하며 복싱을 배웠다. 결과는 좋았다. 성민의 부모님도 만족했다. 성민은 울컥하는 감정을 표출하기 위해 거의 하루 종일 체육관에서 보냈다. 기본 체력을 키우기 위해 하루에 4km씩 달리고 줄넘기를 500번씩 뛰었다. 남은 시간은 체육관에서 스파링을 하며 실력을 키웠다. 네 달 정도 되자 성민은 어느새 체육관에 오래 다니던 사람들만큼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관장은 성민에게 시 대회 아마추어 복싱 대회에 나가보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성민은 당연히 받아들였다. 상담사를 천직이라 여기던 성민은 복서로 사는 것도 멋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성민의 훈련 일정은 경기에 맞춰 더 빡빡해졌다. 달리던 거리를 2km 늘리고 줄넘기를 1000회씩 했다. 성민은 제일 튼튼하다는 라이터 웰터급 선수였다. 게다가 상담사라는 전직 덕분에 사람을 관찰하고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성민은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살려 쉐도우 복싱을 하고 경기에 출전했다. 결과는 당연히 승리였다. 미리 상대방의 경기를 봐둔 후 쉐도우 복싱을 한 보람이 있었다. 그렇게 성민은 한 경기 한 경기 이겨나갔다. 물론 성민에게도 위험했던 순간은 있었다. 상대방이 내지른 잽에 코를 맞아 코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제 기능을 잃은 전두엽 덕분에 성민은 오기로라도 승리했다. 마지막 결승전 날, 충분한 쉐도우 복싱과 스파링으로 생각보다 쉽게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다. 성민은 체육관 식구들과 맘껏 승리의 기쁨을 맛봤다.
다음날 병원을 찾아간 성민은 좋은 소식을 접했다. 많이 치료되어 곧 있으면 완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지금은 큰 충격만 주지 않으면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제 복싱을 그만 둬도 될 것 같았다. 다시 상담소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민은 계속되는 호외에 소영의 생각이 났다. 큰 충격에 도망치듯 끊은 소영과의 관계. 희망을 되찾자 다시 연결하고 싶었다. 성민은 간만에 일하던 상담소를 찾아갔다. 소장은 갑자기 나타난 성민을 흘끗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성민은 자신이 마지막에 예의 없이 나와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멋지게 틀렸다. 멀리서 웃으면서 상담소로 오는 소영이 보였다. 그녀의 옆에는 다른 남자가 서있었다. 소장은 어서 가라는 듯이 성민을 쳐다봤다.
체육관으로 돌아온 성민은 미친 듯이 샌드백을 쳤다. 모든 게 그의 잘못이었지만 소영이 미웠고 소장이 미웠다. 체육관을 떠날 생각은 멀리 달아났다. 아직까지 그에게 복싱이 필요했다. 문이 열리며 어딘가 익숙한 여자가 들어왔다. 누구지 하는 순간 아차 싶었다. 그 여자였다. 매번 상담소로 와 이런저런 얘기들로 성민을 귀찮게 하던 여자. 시선이 자연스럽게 관장실로 사라지는 여자 뒤를 따라갔다. 주위에서 하는 말을 들어보니 그 여자는 관장의 딸 같았다. 이름은 소정이었다. 뭔가 신기했다. 그렇게 찾아오던 사람이 관장의 딸이면서 소영과 이름이 비슷하다니 세상이란 생각보다 좁구나 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관장실에서 나온 소정은 성민을 발견하고 반가워했다.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상담소에 갔는데 안 계시더라고요. 말도 없이 사라지셔서 얼마나 서운했는지 몰라요. 저 이제 상담소 안 다니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니 정말 반갑네요.”
성민은 소정의 말이 이해가 안 됐다. 그래봤자 직업적으로 만난 사이였다. 소정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성민은 그랬다. 그런데 서운하다니 반갑다니 인간이란 참 쉽게 관계를 맺는 존재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정이 체육관을 방문하는 횟수가 많아지더니 요즘엔 매일 방문하고 있다. 아버지가 일하는 곳에 찾아오는 것이니 이상할 게 없었지만 그녀는 오면 오직 성민의 옆에만 붙어 수다를 떨었다. 체육관에서는 소정과 성민이 사귄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별 관심도 없고 신경도 안 쓰던 성민은 소정의 계속되는 대시에 결국 소정과 연인관계가 되었다. 소영이 의사라면 소정은 매니저 같았다. 시원한 물과 수건을 들고 성민의 옆을 따라 다녔다. 자신의 상황에 필요한 사람과 연인이 되는 것을 보고 성민은 자신이 생각보다 여자 복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소정 또한 소영처럼 잃게 될까봐 두려웠다. 이제 성민의 뇌는 다 치료됐다고 볼 수 있었다. 더 이상 병원에 다니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앞으로 관리만 잘하면 됐었다. 소정마저 잃을 수 없다고 생각한 성민은 자기관리에 투철했다. 열심히 복싱을 하며 지내던 어느 날 관장이 경기 일정을 또 가지고 왔다. 성민은 이번에 한 번 더 우승하면 프로 복서 경기에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경기 일정에 맞춰 훈련을 했다. 예전보다 더 힘들게 일정을 짰다. 그런 성민의 곁에는 항상 소정이 있었다.
경기 날이 되었다. 저번 경기와 마찬가지로 쉐도우 복싱과 스파링을 한 성민은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리고 실제로 첫 번째 경기를 이겼다. 문제는 다음 경기였다. 성민이 또 다시 상대방의 잽에 코가 무너져 내리고 이가 나간 것이다. 전두엽의 기능이 거의 원래대로 돌아온 성민은 육체적 충격으로 인해서는 상대방을 한 번에 녹다운 시킬 수 있는 괴력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성민은 복서가 되고 나서 첫 패배를 맛봤다. 복서가 된 후 한 번도 지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했지만 그만큼 자신감이 붙었던 성민은 큰 실망을 했다. 복서가 된 후 느끼지 않았던 절망감이 찾아왔다. 그건 옛날 교통사고를 당하던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교통사고. 그러고 보니 아직도 범인을 잡았다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경찰서에 연락을 다시 해봐야겠어.’
성민은 코가 나을 때까지 휴식 기간을 가졌다.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경찰서를 찾아갔다. 경찰서 제일 구석자리, 앞에 앉은 사람에게 호통을 치고 있는 담당형사가 보였다.
“저기…….”
“아, 잠시 만요. 야 이 새끼야. 버텨봤자 너만 손해라고. 빨리 말해 같이 한 자가 누구야 공범 있잖아!”
형사는 성민을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의 일을 하느라 바빴다. 성민은 휴게소로 가 커피 한잔을 마시며 가만히 경찰서 밖 풍경을 바라봤다. 커피를 다 마시고 다시 형사에게 돌아가자 어느새 앞에 앉아있던 사람은 사라지고 형사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저기 형사님.”
“네, 아, 김성민씨. 어쩐 일로 오셨어요?”
“사건 해결이 얼마나 됐나 싶어서요. 아직도 범인은 못 찾은 건가요?”
“네, 거 봤다는 사람이 몇몇 있었는데. 다 신고비 노리고 거짓 제보를 하는 사람들뿐이어서요. 아직 정확한 목격자도 없고 범인도 못 찾고 있습니다.”
“아아 네에”
필요한 정보를 얻지 못한 성민은 형사와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눈 후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부모님이 보고 계셨다. 성민은 간단히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성민의 병이 나은 후 부모님은 성민에게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성민 역시 부모님의 그런 태도를 별 생각 없이 넘어갔다. 그저 아직도 윤곽조차 나타나지 않은 범인 생각에 답답할 뿐이었다. 저녁이 되어 식사시간이 되자 다들 식탁에 모여 앉았다.
“그래 코는 어떠냐?”
“그럭저럭 괜찮아요. 이제 다 나아가요.”
“그러게 잘 다니던 상담소를 왜 그만두니 그냥 병가만 냈어도 됐잖아. 에휴, 그 뺑소니 범이 누군지 그냥 잡히기만 해봐라.”
“어허, 이제 그만해. 당사자는 얼마나 답답하겠어. 계속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식사시간에 나누는 대화는 그리 밝지 않았다. 다들 쉬쉬하고 있던 일이 이렇게 다치고 들어오기만 하면 화제가 되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잘 먹었습니다.”
“아니, 다 먹지도 않았는데 일어나니?”
“배불러요.”
성민은 급하게 자리를 떴다. 뒤에서 어머니를 탓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에 들어와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컴컴한 창 밖에서 범인이 쳐다보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싹함에 빨리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이 되어 체육관에 갔다. 아직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다음 경기 일정을 찾아봤다. 두 달 뒤, 제법 시간이 있었다. 이 때쯤이면 코는 다 나아있을 것이다. 관장에게 이 경기를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우승한다면 프로 복서가 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성민은 상담소에 찾아가 소영의 모습을 보는 순간부터 상담사로 돌아갈 생각을 버렸다. 오로지 복서로만 남아있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챔피언 이라는 자리가 탐났다. 아직 아마추어 복서인 자신이 답답했다. 얼른 프로 복서로 챔피언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이제 성민에게 따로 시합용 훈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매일이 시합을 위한 훈련이었다. 성민의 모습을 보며 관장은 만족했고 소정은 걱정했다. 성민은 소정에게도 소홀하지 않았다. 이미 한 번의 아픔을 겪은 성민은 자신의 일도 일이지만 소정도 무척이나 챙겼다. 소정은 그런 성민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
성민은 곧 소정과 결혼할 사이가 됐다. 이미 양가의 부모님들은 서로를 잘 아는 사이였으니 상견례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성민은 자신의 군번줄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있었으면 소정에게 줬을 텐데…….
소정과는 이번 아마추어 복싱 경기가 끝나면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이번엔 꼭 이겨야 했다. 성민은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경기에 임했다.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다시 시작해서 매일 스파링을 했다. 복싱 경기는 이겨나갔다. 물론 또 다칠 뻔도 하고 시간이 오래 지속돼서 지치기도 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소정을 생각하며 버텼다. 마지막 결승전 날 성민은 비장한 표정으로 링에 올랐다. 상대는 일전에 성민이 한 번 싸웠던 사람이었다. 예전과 많이 달라진 상대를 보며 성민은 긴장했다. 여러 번 잽과 스트레이트가 오가고 서로의 기운이 다 빠졌을 때 성민의 훅으로 경기가 끝났다. 성민과 소정은 매우 기뻐했다. 성민은 이제 프로 복서로 데뷔할 수 있게 되었다. 복싱 경기가 끝나고 한 달 후 소정과 성민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을 한지 두 달 정도 되자 소정이 아이를 가졌다. 성민은 소정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프로 복서로 데뷔하는 것을 늦췄다. 체육관에서 복싱 사범을 하며 장인을 도와 일을 했다. 소정은 예전처럼 성민의 옆에서 서포트 해주는 것을 하지 못하고 집에서 집안일을 하며 몸을 돌봤다. 소정이 청소를 하다가 책장 서랍을 뒤지자 옛날 성민이 상담사였을 때의 사진이 나왔다. 성민이 집으로 돌아오자 소정은 그동안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왜 갑자기 상담소를 안 나오기 시작했는지, 왜 체육관에서 복싱을 배우고 있었는지. 성민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말해줬다. 소영과의 일만 빼고. 소정은 성민의 말에 놀라며 괜찮냐고 성민을 달래줬다. 그런 소정의 품이 편안했다. 성민은 소정과 결혼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범인은 잡았어요?”
“아니, 아직.”
“벌써 삼년이 다 되가는데 아직도 예요?”
소정의 말을 들으니 깨달았다. 벌써 삼년이 되가는 구나. 이제 곧 뺑소니 범의 벌금형이 사라질 기간이다. 뭔가 억울했다. 꼭 잡고 싶었다. 벌금형에 처하진 못하더라도 처벌은 받게 하고 싶었다. 아직 일 년이 남아있었다.
“꼭 잡고 싶어.”
성민의 말에 소정이 쳐다보았다. 약 다섯 달 쯤 되자 소정의 배가 눈에 띄게 불어났다. 성민은 그런 소정의 배를 보는 게 신기하고 좋았다. 뺑소니 범의 공소시효는 이제 여섯 달 남았다.
소정의 배가 다달이 불러올 때마다 성민은 아버지가 된다는 기쁨과 공소시효가 끝나간다는 초조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소정은 성민이 안타까웠다.
소정이 아이를 낳기 한 달 전 쯤 되었을까. 경찰에서 연락이 왔다. 뺑소니 범을 잡았다는 것이다. 성민은 기뻤다. 드디어 삼년간의 삶을 파란만장하게 만든 범인의 얼굴을 볼 수 있다니 처벌할 수 있다니. 성민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에 들어선 성민은 담당형사 앞에 서 있는 관장의 모습을 보고 의아했다.
‘아니 범인은 어디 가고 장인어른이 서 있는 거지?’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 때 담당형사가 점점 앞으로 다가왔다.
“이 자가 범인입니다. 그런데 호적을 보니 장인어른 되시네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처벌하실 겁니까?”
성민은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잘 해주고 새로운 길을 열어준 관장이 범인이라니 내 은인 같았던 관장이 범인이라니 무엇보다 만삭의 배를 가진 사랑하는 아내의 아버지라니.
관장을 처벌할 수는 없었다. 성민은 그 동안 자신이 혈안이 되어 찾고 있던 범인의 존재를 알아차리자 굉장한 허무함과 배신감에 휩싸였다. 장인과 함께 경찰서 밖으로 나왔다. 장인은 경찰서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지금까지 말이 없었다.
“처음부터 알고서 저에게 접근하신 겁니까? 그 때 제게 일부러 부딪힌 거였어요?”
“미안하네. 미안해. 사죄를 하고 싶었어. 자네에게 다가가 바로 사죄하고 싶었다네. 그런데 자네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보고 그럴 수가 없었어. 체육관 사정도 어려운데 뺑소니 벌금에다가 자네의 병원비까지 부담해야 한다니……. 그건 정말 힘들었네. 미안해. 미안해.”
장인은 계속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소정이는 알고 있는 겁니까?”
“아니 모르네. 제발 소정이에게는 비밀로 해주게나. 알면 충격받을거야.”
당연히 소정에게 말할 수 없었다. 소정은 만삭의 산모였다. 당장 며칠 후면 아이가 태어날 터였다.
“말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충격이 좀 크네요.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성민은 바로 집으로 들어왔다.
“다녀오셨어요?”
소정이 반겼다. 소정의 얼굴을 밝은 얼굴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나 피곤하니 먼저 잘게.”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소정은 식탁에 앉아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잘하셨어요. 아버지. 이건 평생 비밀이에요. 그이가 알면 안 돼요 아셨죠?”
소정은 웃으며 말했다. 손에는 KA 98-73048415 기ㅁ 서ㅇ 미ㄴ 이라고 쓰여 있는 군번줄이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