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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역이 '비공개'인 탓도 있지만, 유원지로 향하는 도로변에 위치하고 거기에 더해 군부대를 옆에 바짝 끼고 있어 이곳 온릉은 유난히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있다. 온릉은 과연 누구의 묘택일까? 온릉과 그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그보다 조금 앞선 시대의 상황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조선 제8대 임금 예종이 즉위 1년만에 승하했을 때 예종의 원자는 겨우 아홉 살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 왕위를 이어야 했는데, 원자 다음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인물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었다. 고금의 역사와 제자백가 등을 두루 섭렵했으며 성품이 침착하고 결백해 왕이 될 재목이라 평가받던 월산대군은 운명의 장난인지 당시 병중에 있었다. 세조의 비 정희왕후는 서둘러 당시 열 세살이었던 '자을산군'으로 조선의 대통을 잇게 하니 그가 바로 성종이다(이에 관해서는 성종의 장인이었으며 당시 최고 실력자였던 한명회의 계략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렇듯 조선왕조의 역대 군왕 중 명군의 하나로 손꼽히는 성종임금은 원래 임금이 될 '서열'에 있지 않았다. 상황이 이쯤 되면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 후환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성군이었던 성종임금은 형 월산대군에게 늘 마음의 빚이 있었나 보다. 성종은 형을 위해 덕수궁과 풍월정을 지어주고 종종 드나들며 위로하고 우애를 나누었다 한다. 월산대군도 모든 것을 잊고 그저 자연 속에 은둔하며 산천을 벗삼아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경치 좋은 양화도 북쪽 언덕에 있던 희우정을 개축해 '망원정'이라 부르고, 문인들과 교류하며 풍류를 노래했다. 그러나 마음의 한이 병이 되었던가. 어머니 인수왕후의 병을 간호하다가 월산대군 자신도 병이 들어 불과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성종은 형이 죽은 다음에도 더더욱 극진한 정성을 다하니 왕릉에 버금가는 월산대군묘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대군묘가 된다. 비극은 성종의 아들이었던 연산군 때에 일어난다. 월산대군에게는 박씨라는 부인이 있었는데 인물도 절색일뿐더러 성품이 따스하고 정숙했다고 한다. 연산은 지아비를 잃고 홀로 사는 이런 큰어머니 박씨에게 자신의 큰아들을 돌봐달라며 보냈다가, 아들이 자라 궁으로 들어오자 함께 불러들여 마침내 큰어머니를 범해 자결케 한다. 이런 폭군의 세상이 오래 갈 수는 없는 법. 급기야 반정이 일어나 연산을 몰아내고 새 임금을 맞아들이니 그가 바로 중종이며 이 쿠데타의 주역 중 하나가 바로 자결한 월산대군 부인 박씨의 남동생 박원종이다. 이 중종반정으로 훗날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진성대군에게는 잠저 시절부터 남달리 금슬이 좋은 부인이 있었는데, 좌의정 신수근의 딸이었다. 그런데 신수근의 누이가 폐위된 연산군의 부인이니 신수근은 새임금 중종의 장인이면서 동시에 연산군의 처남이 된다. 폐위된 왕의 인척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여긴 중종은 왕위에 오른 지 사흘만에 서둘러 자신의 부인 신씨를 왕후로 봉한다. 그러나 반정세력이라고 가만 있을 것인가.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중종반정의 주역들은 신씨를 역적의 딸이라 내세워 어서 빨리 왕비를 폐하라고 압력을 가한다. 그들의 힘으로 이제 막 왕위에 오른 중종은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내 신씨를 지극히 사랑했던 중종은 왕위를 물리면 물렸지 그럴 수는 없다고 버텨 새임금 중종과 반정 주모자들 사이에는 살벌한 긴장감이 감돈다. 이를 보다못한 왕후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니 부부는 눈물로 이별을 고한다. 왕후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인왕산 바위에 분홍빛 치마를 걸어 놓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왕후가 된지 7일만에 스스로 궁을 떠난다. 중종은 떠나간 왕후를 그리워하며 경회루에서 늘 인왕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지었다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사람의 마음도 변하는 법. 새로운 왕후와 후궁들로 인해 어느새 중종은 신씨의 일을 잊고 만다. 그 후로 자그만치 51년. 신씨는 세상을 떠나기 전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인왕산 바위에 자신이 궁중에 있을 때 즐겨 입었던 분홍빛 치마를 걸었다고 한다. 이것이 인왕산 치마바위의 전설이며 그녀가 바로 온릉의 주인공 '단경왕후'이다. 신씨는 1557년(명종 12년) 춘추 71세로 세상을 떠나 본가 선영에 묻혔다가 180여 년이 지난 1739년(영조 15년)에야 비로소 복위가 되어 시호를 단경, 능호를 온릉이라 했으며 단종의 능인 장릉의 예에 준하여 상설을 새로 만들어 설치했다.
왕후의 아버지를 죽이고 후환을 두려워하는 공신들에 의해 스무 살의 꽃다운 나이에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는 정치적 승리자인 중종을 남편으로 두었으면서도 단지 거창 신씨라는 혈연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고모인 연산군 부인 신씨와 같이 폐비라는 운명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단풍이 짙어가는 2004년 가을의 한가운데에 서서 아무도 찾는 이 없는 단경왕후의 온릉을 찾아 조용히 머리숙여 그녀의 편안한 휴식을 기원해본다. |
이 글은 [오마이 뉴스] 이양훈 기자의 글을 퍼 왔습니다.
첫댓글 오류 하나 지적~ 예종이 죽었을 때 월산대군이 9살이란 말은 잘못된 거죠. 예종은 20살에 죽었거든요. 그럼 예종이 11살 낳았다는 얘긴데 장순왕후가 예종이 12살 때 인성대군을 낳았걸랑요. 유아기에 죽었지만.
월산대군은 계비 안순왕후가 낳았고 예종 승하 당시 4살이었죠. 9살로 잘못 나온 자료가 있죠. 아마 그래서 이런 오류가 많이 통용되는 듯 싶네요.
폴리네시아님... 꼬리글에 오타 발견. 월산대군은 인수대비의 아들... 계비 안순왕후는 제안대군을 낳았다고 자료에 있어요. 확인 바랍니다.
맞아욤~! 쓰다가 착각 일으켰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