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하이데거에게 묻는다. "존재, 너는 대체 누구냐?"
-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대한 시학적 접근-
<悳泉> 나 병 훈
1. 여는 글
본고는 예술(좁은 의미의 詩)은 이성· 감성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라는 전제하에서 출발한다. 이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에 대한 최초의 물음은 플라톤의 『국가』에서 주장한 <시인 추방론>을 통해 그 함의를 더듬을 수 있다. 추방론의 고갱이는 결국 예술(詩)은 이상적으로 존재하는 이데아<Idea>를 이중, 삼중의 가공과정을 모사模寫해 놓은 것에 불과하므로 詩人 즉, 理性이 아닌 感性은 추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존의 전통적 사유 즉, 순수 이성적 사유로서는 지금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새로운 철학적 물음이 파스칼 등에 의해서 제기 되었다. 그 논지는 현실적으로 감성이 제거된 상태에서 예술행위(창작)는 근원적으로 불가하다는 것이며 따라서 현실은 이성· 철학의 시대가 아닌 문예(文·藝)의 시대로서 감성, 끝없는 자기창조, 자기표현이 사유의 뿌리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그의 견해는 지금은 예술창작(詩)을 위해서 기존 이성의 폭을 넓히면서 감성의 깊이를 정련시키는 가슴의 논리에 충실한 섬세정신이 필요하며, 이는 감성회복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감성은 모든 상상력의 모태(母胎)이며, 사고활동 및 예술활동의 원동력으로써 이성보다 사실 및 대상 인식에서 앞선다는 것이다. 따라서 감성이 제거된 상태에서는 예술활동 (좁은 의미의 詩) 창작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이성理性은 예술 즉 ‘감성感性의 사생아’라 할 수 있다는 것이 전통적 사고에 대한 비판의 핵심 논리라 볼 수 있다. 그 새로운 철학적 물음의 중심에 하이데거가 있다.
본고에서는 그러한 하이데거의 시각에서 시의 본질인 이미지의 실체를 존재론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그가 말하는 '특별한 인간'으로서의 시인의 임무가 어떻게 굴절되고 분산되는가를 시학적 측면에서 조망해 보고자 한다.
2.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대한 시학적 접근
가. 하이데거의 존재와 詩
위와 같이 순수 이성적 사고에 반기를 든 시문학과 관련한 하이데거의 철학적 물음의 중심에는 '존재'의 문제가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사고의 바탕위에 시적 상상력으로서의 이미지(image)가 어떠한 연관을 지니고 교융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견해는 시학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인식의 길잡이가 되기에 충분하다. 먼저 하이데거의 예술활동(좁은 의미의 詩)에서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는 예술(특히 詩)과 철학을 등위시킴으로써 예술에 대한 물음은 곧 ‘존재’에 관한 물음으로 보고 있다. 그는 예술이 ‘존재’ 일반이라는 본질에 대한 통찰에 이르는 탁월한 길을 제시하기 위하여 철학사에서 사유 된 바 없는 존재-사유를 제2단계로 제시하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예술과 함께하는 철학을 정립하고자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의 ‘존재’의 개념은 무엇일까? 일상 현실세계에서 보는, 만나는, 소유하는 그런 무엇이 아니라, 그런 존재자들을 존재하게끔 떠받치는 것이 존재자로서 '자리할 수 있도록' 자양분을 제공하는 것이 곧 ‘존재’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존재는 모든 사유의 최종 근거이자, 최상의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적 상상력이 가능한 존재-사유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그의 견해는 아직 존재가 사유로 설립되지 않아 우리가 이를 '창조'해 내야만 하는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즉, 하이데거의 존재는 이미 어딘가 있는 무엇을 차후에 "발견이나 재현'하는 일과 다른 일종의 '발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詩'에 대한 기본 생각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즉 시인은 지성, 이성과는 다른 능력, 즉 인식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곳 그 너머에 존재 하는 '존재'를 새로운 형태의 사유능력으로 창조해 내는 상상의 능력, 말하자면 감성과 느낌의 능력을 회복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나. 하이데거의 ‘존재’와 詩人
하이데거는 “사유에 의해 창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한다. 그가 시인은 ‘특별한 인간’이요 ‘시인철학자’로 명명하고 있는 인식의 논거다. 왜, 특별한 인간인가? 시인은 ‘존재’를 이해하는 말하자면 감성과 느낌의 능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 그렇게 함으로써 시원의 언어를 탐구 해 내므로 ‘특별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감성과 느낌을 통하지 않고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드러냄과 감춤의 발현 양상을 감지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존재’는 감성적인 것이지 결코 이성(사유에 의한 창조)에 의해 축조되거나 이해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존재가 인간에게서 밝혀지고 공유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성'이 필요하다는 의미 일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존재의 의미와 진리를 이해하고 파악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특별한 인간'에 해당한다고 지칭하여 이를 바로 '현존재'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즉, ‘현존재’는 목자요 경작자인 '특별한 인간'인 예술가들, 그 중에서도 특히 시인'이 이에 해당한다고 콕 집어서 개념화 시키고 있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특별한 인간'으로서의 시인은 '존재'에 대해 ‘감성적’으로 묻고 이해할 수 있기에 무엇보다도 시원의 언어 즉 로고스(logos)를 탐색하는 자라고 부언하고 있다. 그러니까 로고스(시원의 언어)를 드러내지 못하는 '언어 뭉치들, 작품들은 모두 '말 함의 본질'을 망각한 것들로서 잡담이요 유희거리에 지나지 않다고 보았다.
다. 하이데거의 특별한 인간으로서 시인들의 임무와 사명
이상과 같은 논지에서 하이데거는 로고스(logos) 즉, 시원의 언어를 통해 시인들은 '존재'를 '존재 자체'로 드러내 보여 주어야 할, 그럼으로써 잡담(또는 유희)으로 오염되어 가는 언어를 시원의 언어(즉 로고스)로 정화해야 할 임무와 사명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시인은 ‘존재’의 근원을 시작(詩作)을 통해 우리에게 통지함으로써 인간의 기심(機心)을 순환시켜 자연세계와의 대화를 재개시키고 경이(驚異)를 맛 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이며 시원의 언어인 로고스는 곧 '존재'의 거처요, 휴식이자 궁극적으로 '존재'가 머무를 수 있는 '집'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존재와 시원의 시어(로고스)가 짝을 이루어 창조되는 것이 바로 '詩로서의 작품'이라고 규정짓는다. 말하자면 언어 자체를 시적(詩的)으로 말하는 것이 본업인 '특별한 인간'인 시인이 그리고 묘사하는 세계는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이성이 재단하고 요리하려는 세계와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라. 하이데거 식의 시 창작
이러한 하이데거의 철학적 논지를 종합 해 보면 시작(詩作)은 세계의 시작(始作)을 밑그림 하는 작업인 동시에 '존재'의 진리를 밝히는 순간이기에 그 작업은 ‘존재의 세계’ 곧 시적세계, 자연 세계, 태초의 원시 세계에서 출발해야만 하는 것이며 비로소 '존재'를 머리로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며, 이는 詩作의 요체요 전제가 되고 있음을 유추 할 수 있다.
마. 하이데거가 꿈꾸는 시적 공간(내면세계)
하이데거는 그러한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릴케나 르네, 랭보, 휠덜린 같은 시인의 실제 시 창작 사례를 끌어 들여 자신의 주장을 구체화 했다. 오직 시인에 의해서만 ‘존재’가 사유(思惟)되고 창작(創作)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며 궁극적으로 그가 꿈꾸는 시적공간을 다음과 겉아 제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하이데거 식 시창작의 요체라 할 수 있는 시적 공간이자 내면세계로써의 ‘상상의 공간’에 대한 실체의 모습인 셈이다.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시인의 시적공간으로서의 내면세계에서 시적 대상들이 ‘존재’를 통해 어떠한 모습으로 재구성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살핌은 위와 같은 그의 주장을 담보 해 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첫째, 여여(如如)한 낙원계 (樂園界)로서의 상상의 공간을 꿈꾼다. ‘존재’와 로고스(시원의 언어)와 인간과 세계가 하나로 어우려져 交好하여 철학과 시가 탄생됨으로써 모든 인간이 존중되어야 하듯 ‘존재’가 가림 없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그런 조화로운 상상의 공간으로서의 세계를 꿈꾼다.
둘째, “상상의 공간”속에 머무르는 ‘존재’로서의 詩人의 임무를 제시한다. 詩人은 현 세계에 살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 미래에 올 세계에 거주하며, 그곳< 존재의 빛으로 충만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존재’가 시원詩源 언어(Logos)를 밝히고 진가를 발휘 할 수 있도록 시적 공간을 마련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마음공간에서의 ‘내성화’ 작업의 전제적 필요성을 강조한다. 하이데거는 “보이는 것 너머에 存在하는 불가시적인 세계를 탐문하는 작업”을 시인의 ‘내성화 작업’이라 정의한다. 따라서 시인은 여여(如如)한 낙원계(樂園界)인 상상의 공간인 마음(心情)공간에서의 내성화(耐性化)작업을 할 의무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 작업을 ‘감성의 십자가’로 짊어져야 하는 것이 곧 詩人의 운명이요 소임으로 규정하고 있다.
넷째, 로고스(Logos)는 ‘현존재’의 집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로고스는 하이데거에 있어서 현존재의 집으로 규정, 그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원의 언어 영역인 ‘로고스’ 자체를 통해야만 하는 것으로 ‘존재’는 언제나 언어의 길목에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3. 닫는 글
이상과 같이 하이데거는 詩人이 머물러야 하는 시적 상상의 공간 즉 항상 ‘존재’라는 내면화 된 공간이어야 함을 귀결 짓고 있다. 따라서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세계도 이 내면의 마음 공간에서 건져 올린 로고스 즉 시원의 언어로 구현하는 ‘존재’의 세계이어야 함을 전제하고, 시인은 이러한 마음의 공간(공간의 시학)에서 그의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해 비로소 시 창작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위와 같은 시화(詩話)의 본질은 오직 가슴(마음의 공간, 심정)의 논리에 대응하는 ‘존재’의 뜻을 세우는 내성화 작업으로 이는 형이상학의 내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며. 곧 존재(現實=色)와 현존재(像想=空 )의 내적 결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할 것이다.
끝으로 이러한 하이데거의 귀결은 바슐라르가 명명하는 무욕(無慾) 즉, 나에 집착하는 마음마저 비우는 상상력과 그 결을 같이하고 있으며, 그가 강조하는 진정한 시인은 “언어로 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언어”를 찾아내는 자이어야 하며,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표상 된 가시적인 것(實存, 觀念=色)을 마음의 불가시적인 것(想像,image=空)으로 변화(내성화를 통한 轉向)시킬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悳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