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유_5조_완성본_수정.pptx
한국문화유산의 이해
발표 5조 (오동우 윤원영 최은영 홍준표)
저희 조는 성왕의 대통사 건립 목적과 관련된 크게 세 가지 학설을 전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덧붙여, 대통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공부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바를 교수님, 그리고 다른 학우들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5분간 대통사 관련 전설, 유적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언급하고, 이후 7~8분간은 3가지 학설에 대해서 정리한 후, 발표를 마치기 전까지는 각 학설에 대한 우리 조의 의견과 오늘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바를 전하는 것으로 발표의 흐름을 정리해보았습니다.
1. 대통사
(1) 전설 :
백제시대 때 봉황산 밑에 한 스님이 살고 있었다. 꿈에 산신령이 현몽하여, “큰 절을 봉황산 밑에 세우되 정성껏 기도를 올려야 한다.”고 하였다. 스님은 봉황산에 제단을 차려 놓고 매일 밤 목욕재계를 하며 백일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웅대한 대통사라는 절을 지었다.
대통사는 수백 명의 스님이 묵을 만큼 큰 절이었다. 아침과 저녁으로 염불소리가 골짜기를 메웠다고 한다. 백제 웅진시대에 공주의 가장 큰 절이었다. 대통사의 대통다리가 지금도 공주시내 제민천 위에 놓여 있다. 또 유적의 하나로 현 반죽동 301번지에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남아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 문화유물 :
1. 당간지주 => 외부에서 옮겨옴, 통일신라의 것
2. 석조 2기 => 일단 백제의 것으로 볼 수 있음
3. 각종 기와 암막새, 숫막새, 연목와, 망새기, 인각와 중
소판연화문 숫막새기와만이 대통사 관련 표지적 유물로 간주.
(참고문헌 :
백제 대통사지와 그 출토유물, 이남석(NamSeokLee), 호서고고학회, <호서고고학> 6,7권 0호. 2002 pp.275-294)
2. 세 가지 학설
(1) 기존 견해
백제 대통사는 성왕이 양나라 황제인 무제를 위해 지은 절이다. (삼국유사)
그 근거로 ‘대통’은 양무제가 쓴 연호였음을 들 수 있다.
(2) 다른 견해 1 (교수님 말씀 참조)
백제 대통사는 성왕이 아버지 무령왕의 명복을 빌고 새로 태어날 창왕을 위해 지은 절이며,
성왕은 대통사를 지으면서 백제가 법화경의 전륜성왕의 혈연적 계보처럼 자신의 아들이
대통불이 되고 자신의 손자가 석가불이 되는 불교의 나라 건설의 뜻을 이루려 하였다.
(참고문헌:
특집 : 백제의 불교문화 ; 백제 웅진 대통사(大通寺)와 대통신앙(大通信仰), 조경철,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백제문화> 36권 0호. 2007 pp.31-43)
(3) 다른 견해 2
백제 대통사는 성왕이 삼국유사에 실린 대로 양나라 황제인 양무제의 연호를 따서 지은 것이긴 하나, 단순히 찬양이라기보다는 외교적 신뢰를 쌓는 목적이 있었다. 더 나아가서 정치적 사상적 기반을 다지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근거) 백제는 정치적차원에서 뿐 아니라 문화적인 관계에 있어서도 양과 활발한 교류를 가짐(무령왕과 성왕이 양나라에 사신파견하여 책봉을 받으며 우호관계를 돈독히 함,
불교적 이상군주인 전륜성왕을 지향(아침저녁으로 불경 강연, 불교적 성왕으로서의 모습을 국내외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대규모 불교적, 정치적 행사 개최)한 양 무제의 영향을 받았을 것,
(참고문헌:
百濟 熊津時期의 정국과 大通寺 창건, 朴賢淑, 한국사연구회, 한국사연구 155, 2011.12, 171-196 (26 pages)
3. 5조가 생각한 대통사
(1) 학설에 대한 생각.
단순히 양나라 황제를 위해 지었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는 기존 학설을 제외한 나머지 두 학설은 성왕이 백제를 좋은 나라로 만들기 위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자주적으로 대통사를 건립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서로 배치되기 보다는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즉, 첫 번째 학설은 성왕이 양 무제를 위하여 절을 지었다는 점에서 백제를 양나라의 영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시각을 견지한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학설과 세 번째 학설은 비록 세부 사항에서는 큰 차이가 있으나, 성왕은 백제를 진흥할 것을 제 1의 목적으로 하여 대통사를 건립했다는 의견을 공유합니다. 그리고 이 의견은 백제를 양나라에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설령 양나라의 문물을 많은 부분 받아들였다고 해도, 비판적으로 수용한 자주적인 존재로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것입니다.
(2) ‘대통사’와 오늘날의 ‘우리’
크게 두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는, 지금까지 소개해드린 바와 같이 대통사란 절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어떤 시각을 취하느냐에 따라, 백제라는 한 나라를 해석하는 관점이 상당히 달라지게 됩니다. 만일 기존 학설과 배치되는 두 번째, 세 번째 학설이 없었더라면 백제는 영원히 수동적이고 양나라의 아류 문화로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기존 시각에 얽매이지 않는 것,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왕이 설령 양 무제의 연호를 따서 대통사를 건립하였다고 하더라도, 성왕이 ‘백제 부흥’이라는 소망을 지닌 이상, 그 자체가 부정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남의 것을 수용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자주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답사 때, 양 나라의 영향을 90%이상 받은 무령왕릉을 보고 백제는 양 나라를 무비판적으로 ‘따라했다’라는 생각이 앞서 실망하였습니다.
하지만 대통사를 조사한 후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어떻게 하느냐’보다 ‘어떤 소망을 지니고 하느냐’가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성왕이 ‘백제 부흥’이란 소망을 지닌 이상, 양 무제의 연호를 딴 대통사 건립은(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소망을 이루기 위한 최선의 방책을 찾는 과정 중 나온 하나의 방법일 뿐이지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였을 겁니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꿈을 이룬다는 절실한 소망을 지닌 이상, 내가 만드는 새로운 길이 아니라 남들이 기존에 닦아 놓은 길을 갈지라도 그것의 가치는 퇴색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성왕이 집권하는 동안 백제는 안정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대통사를 건립하며 성왕이 새겼던 간절한 소망의 효과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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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 위 취지대로 준비하면 되겠습니다. 고생많았어요^^
수동적인 학설, 자주적인 학설이라고 하면 은연중 능동적인 학설을 지지해 달라는 의도가 보인다. 문제는 어떤 학설이 더 근거가 있고 논리적인지 보완하면 좋을 듯. 각 학설의 단점과 장점을 보완하면 좋을 듯.
수정본 잘 읽어보았습니다. 발표할 때 대통은 연호일 가능성이 높은지, 아니면 부처일 가능성이 높은지 답변도 준비해 주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