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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올로 베로네세 / 성 안토니오 의혹
Paolo Veronese, Temptation of St Anthony
파올로 베로네세 - 최후의 만찬 Last Supper, 1585년
파올로 베로네세 - 그리스도의 세례와 유혹, 1580년~1582년
파올로 베로네세 - 막달라 마리아의 회심, 1548년, 내셔널 갤러리
파올로 베로네세 -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애도 Deposition of Christ, 1547
파올로 베로네세 - 물고기에게 설교하는 성 안토니오, 1580년
파올로 베로네세 - 성 세바스찬의 순교, 1565년
파올로 베로네세 - 성 유스티나의 순교, 1556년
파올로 베로네세 - 시몬의 집에서 잔치, 1567년~1570년
파올로 베로네세 - 시몬의 집에서 잔치, 1560년
파올로 베로네세 - 가나에서의 결혼
파올로 베로네세 - 성 카타리나의 결혼, 1562년~1569년
파올로 베로네세 - 모세의 발견
파올로 베로네세 - 나일강 물에서 모세 구출, 1580년
파올로 베로네세 - 목욕하는 수잔나
파올로 베로네세 - 악덕에 대한 미덕의 승리, 1554년~1556년
파올로 베로네세 - 성 안토니오의 유혹, 1552년~1553년
파올로 베로네세 - 그리스도의 증착 Deposition of Christ, 1548~1549
파올로 베로네세 - 두 천사가 받드는 죽은 그리스도
파올로 베로네세 - 피에타
파올로 베로네세 - 십자가 처형
파올로 베로네세 -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애도
파올로 베로네세 -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그리스도
파올로 베로네세 - 그리스도의 세례
파올로 베로네세 - 동방박사의 경배
파올로 베로네세 - 양치기들의 경배
파올로 베로네세 - 이집트로 피난 중 휴식
파올로 베로네세 - 성 바바라와 아기 성 요한과 함께 있는 성가족
파올로 베로네세 - 성 가타리나와 아기 성 요한이 있는 성가족
파올로 베로네세 - 마돈나와 아기 예수 성녀 엘리사벳 세례자 요한과 성. 저스티나
파올로 베로네세 - 아이와 함께 왕좌에 앉은 마돈나, 세례자 성 요한, 툴루즈의 성 루이, 기부자들
파올로 베로네세 - 그리스도와 백부장
파올로 베로네세 -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
파올로 베로네세 / 성 안토니오의 유혹
Paolo Veronese, Temptation of St Anthony
1552-53, Oil on canvas, 198 x 151 cm
Musée des Beaux-Arts, Caen
Paolo Veronese 1528~1588. 4. 9.이탈리아의 화가.
본명(本名)은 파울로 칼리아리(Paolo Caliari)
이탈리아 북부 아디제강(江)(Adige River) 연안의 베네치아 공화국(Serenissima Repubblica di Venezia, 697~1797) 베로나(Verona)에서 태어났으며, 북동부 베네토(Veneto)주의 주도(州都) 베네치아[Venezia, 영어로는 베니스(Venice)]에서 죽었다.
‘베로네세’는 고향 베로나에서 유래한 것이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석공(石工)이 될 생각으로 석공의 도제(徒弟) 생활을 하였지만, 그림에 각별한 흥미를 보였기 때문에 14세 때 베로나의 바딜레(Antonio Badile, 1518~1560, 이탈리아 화가)의 제자가 되었다.
나중에 스승 바딜레의 딸 엘레나(Elena)와 결혼하였다. 바딜레에게 그림의 기본기를 충실히 배웠을 뿐 아니라 인간과 건축물을 하나로 융합시킨 그림에 대한 열정도 물려받았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작품 가운데 최초의 작품인 [베빌라쿠아 라치세 제단화(祭壇畫)(Bevilacqua–Lazise Altarpiece)]의 화풍(畫風)은 바딜레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1544년쯤 베네치아로 이사하였는데, 이 무렵부터 그의 독특하고 화려한 채색법이 엿보였다. 이 무렵 베네치아파(派)(Scuola Veneziana)의 화가 티치아노(1012)를 알게 되어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환혹적(幻惑的)인 공간 구성을 가진 화려한 양식을 확립하였다.
또한 브루사소르치(Domenico Brusasorci, 1516~1567, 이탈리아의 화가)⋅첼로티(Giambattista Zelotti, 1526~1578, 이탈리아의 화가)⋅파리나티(1017) 등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마니에리스모(manierismo) 양식이 매혹되어 라파엘로(206)⋅로마노(255)⋅미켈란젤로(436)⋅파르미자니노(1016)의 작품을 연구하였다.
1551년에 트레빌레(Treville)의 빌라 소란차(Villa Soranza)에 그린 프레스코(fresco, 소석회에 모래를 섞은 모르타르를 벽면에 바르고 물기가 있는 동안 채색하여 완성하는 그림)[지금은 카스텔프란코(Castelfranco)의 산리베랄레(St. Liberale) 교회에 있다.]의 단편에서 볼 수 있는 우아하고 장식적인 인물은 이미 새로운 화풍을 암시해 준다.
1552년에 만토바 성당(Cathedral of Mantova)에 그린 웅장하고 화려한 [성(聖) 안토니우스의 유혹(The Temptation of St. Anthony)]에는 미켈란젤로의 영향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1553년에 베네치아에 가서 ‘팔라초[palazzo, 중세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 시대에 세워진 정청(政廳)이나 귀족의 저택] 두칼레(Ducale)’의 여러 부분을 장식하는 일과 관련하여 베네치아의 대가(大家)들과 오랫동안 함께 일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의뢰받아 완성한 살라 델 콘실리오 데이 디에치[Sala del Consiglio dei Dieci, 10인 위원회 회의실(Hall of the Council of Ten)]의 천장화는 원숙기에 이른 화풍을 보여 준다. 그림을 보는 사람의 머리 위에서 인물이 실제로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교묘한 단축법(短縮法, foreshortening, 그림에서 어떤 물체가 비스듬히 놓였을 때 그 물체는 실제의 길이보다도 짧게 보이는데, 그러한 현상을 2차원의 평면으로 옮기는 회화 기법)과 화려한 색채 및 그늘진 부분에도 색채로 명암을 구사(驅使)하는 밝은 화면이 두드러진다.
1555년에 베네치아의 산세바스티아노(Sansebastiano) 수도원 원장의 의뢰를 받아 교회 장식에 착수하였는데, 그는 나중에 이 교회에 묻혔다. 이전에 팔라초 두칼레에서는 주로 첼로티와 협력하여 일하였지만 산세바스티아노 수도원에서 혼자 일하였다. 천장에 그린 [에스테르 이야기(Story of Esther)]에는 건축물의 번쩍이는 테두리 안에 단축법으로 묘사된 인물을 배열하는 엄격한 구도, 밝은 터치 몇 개로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한 전면과 후면이 거의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인물들을 나란히 배열하는 장식적인 취미가 처음으로 나타나 있다. 이 수도원에 그린 우아한 프레스코(1558년)에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3세기쯤 로마의 그리스도교 순교자이며 성인)의 일생을 묘사하였다.
베네치아 북쪽 2km의 무라노(Murano)섬에 있는 트레비소(Treviso) 집안의 아름다운 침실을 비롯하여 베네치아 귀족들의 저택과 궁전을 장식하였다. 오르간의 뚜껑 2개를 장식할 때(1559년)에는 극단적인 단축법을 구사하여 환상적(幻想的)인 공간 표현과 율동적인 구성 솜씨를 다시 보여 주었다.
산세바스티아노 수도원을 장식하고 있는 동안에도 제단화와 예배용 그림을 그려 달라는 주문을 수없이 받았으며, [만찬(晩餐, Suppers)]을 그려 달라는 주문도 여러 번 받았다.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 열린 잔치(Feast in the House of the Pharisee)]와 [엠마오의 순례자(The Pilgrims of Emmaus)] 같은 그림에서 묘사한 ‘만찬’이라는 주제는 그로 하여금 복잡한 르네상스 시대 건축물을 배경으로 많은 인물들을 그려 넣을 수 있게 해 주었는데, 점점 더 복잡해지는 배경의 건축물은 그가 산미켈리(Michele Sanmicheli, 1484~1559, 이탈리아의 건축가)⋅산소비노(Jacopo Sansovino, 1486~1570, 이탈리아의 조각가이며 건축가)⋅팔라디오(Andrea Palladio, 1508~1580, 이탈리아의 건축가) 같은 16세기 베네치아 건축가들의 작품에 대하여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증명해 준다.
1560년쯤에 자기 양식을 완성하고, 1561년 팔라디오가 비트루비우스[Vitruvius, 기원전 1세기쯤 로마의 건축가이며 건축 이론가. 본명은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Marcus Vitruvius Pollio)]의 작품을 연구하는 학자이며 번역가 형제인 다니엘레(Daniele Barbaro, 1513~1570)와 마르칸토니오(Marcantonio Barbaro, 1518~1595)를 위하여 지은 마세르(Maser)의 저택 빌라 바르바로(Villa Barbaro, 지금의 빌라 자코메리)을 장식하였는데, 여기에 그린 장식 프레스코는 명랑한 색채와 경묘한 필치로, 그의 예술적 특질이 잘 나타나 있다.
아우 베네데토(Benedetto)의 도움을 받아 그림의 배경이 되는 건축물을 그리면서 벽을 환상적인 풍경화로 채우고 천장에는 고대 신화(神話)에 나오는 인물들을 그려 넣고 푸른 하늘과 연결시킴으로써 그 저택의 팔라디오식 건축 양식이 가진 리듬과 훌륭하게 조화시켰다.
마니에리스모 대신 등장한 조화로운 리듬과 뛰어난 색채 처리는 그의 프레스코(인간의 쾌락을 예찬하는 신화적 장면, 바르바로의 아내가 아이들과 유모와 함께 있는 장면, 고대 유적의 환상적인 원근법으로 섬세하게 묘사한 풍경화)에 훈훈한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것은 베로네세 자신의 예술적 발전만이 아니라 베네치아 회화의 발전 과정에서도 매우 중요한 단계를 이루었다.
또한 마세르의 고전적인 그림에 뒤이어 위풍당당함과 장식적인 화려함에 대한 애착을 보여 주는 그림을 그렸는데, 1562~1563년 산조르조 마조레 교회(Ghiesa di San Giorgio Maggiore)의 식당에 그린 [가나의 결혼식(The Marriage at Cana)](1562년, 파리 루브르 미술관)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평면이 여러 개로 늘어났고 공간이 넓어졌으며 모인 사람들은 복잡하지만 질서 있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알렉산드로스 앞에 있는 다리우스 가족(The Family of Darius Before Alexander)]과 쿠치나가(Cuccina家)를 위하여 그린 훌륭한 초상화 [성모(聖母) 앞의 쿠티나가 가족](1572년쯤, 드레스덴 국립 미술관)를 비롯한 [성(聖) 그레고리오의 향연(饗宴)](비첸차 몽테페리코 성당) 등은 엄숙하고 위풍당당하며, 보다 유기적인 구성을 보여 준다.
모두가 장대한 건축 공간을 배경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차림을 한 고관(高官)⋅병사(兵士)⋅음악가 등 여러 종류의 많은 인상군(人像群)에 동물을 배치한 일대 풍속화첩과도 같은 것으로, 난숙한 16세기 베네치아의 호사한 생활 풍속이 그의 붓에 의하여 충실하게 반영되고 있다.
1573년에 베네치아 산조반니에파올로 교회(Church San Giovanni e Paolo)의 주문을 받아 그린 [최후의 만찬(Last Supper)]은 기발하고 참신한 이야기의 세부 묘사가 풍부한 것이 특징인데, 이 때문에 종교 재판소 이단자(異端者) 심문소의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이단자 심문소는 그를 소환하여 그 그림에 대하여 변호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그 그림이 앵무새를 안고 있는 어릿광대나 개 또는 코피를 흘리는 하인 등, ‘최후의 만찬’이라는 성스러운 주제에 전혀 걸맞지 않은 부적절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 그림을 비난하였다. ‘우리 화가들은 시인이나 미치광이가 누리는 것과 똑같은 자유를 갖는다.’고 대답하여, 상상이 자유에 대한 화가의 권리를 능숙하고 확고하게 옹호하였다.
이단자 심문소는 아마 민사(民事) 당국자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그림의 주제를 [레비가(家)의 잔치(Feast in the House of Levi)](1573년,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로 바꾸라고 제의함으로써 이 문제를 재치 있게 해결하였다.
한편 이 해에 [왕들의 경배(Adoration of the Kings)](1573년, 런던 국립 미술관)를 그렸다. 베네토주 비첸차(Vicenza)의 산타코로나 교회(Church of Sta. Corona)에 있는 [동방 박사들의 경배(Adoration of the Magi)]에서 볼 수 있듯이 밤 풍경의 색조는 그의 특징인 풍부한 색채를 보여 주면서 섬세하고 정확한 붓놀림으로 새로운 친밀감을 그림에 부여하고 있다. 이런 붓놀림은 종교화와 세속적인 그림을 막론하고 당시 그려진 소규모 그림에 자주 사용되었다. 이 그림은 마지막 15년 동안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믿을 만한 진품에 속한다.
이 시기에 [베네치아의 찬미(讚美)(Apotheosis of Venice)]⋅[에우로파의 겁탈(Rape of Europa)] 등 팔라초 두칼레를 장식한 대작(大作)에서는 베로네세보다는 오히려 그의 작업실에서 함께 일한 아우 베네데토와 아들 카를로(Carlo) 및 가브리엘레(Gabriele), 조카 알비세 달프리소(Alvise dal Friso, 1544쯤~1609)를 비롯한 다른 화가들이 더 많이 참여한 사실이 뚜렷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1588년에 열병에 걸려 며칠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우와 두 아들은 그를 산세바스티아노 수도원에 묻고 그의 무덤 위에 흉상(胸像)을 세웠다. 두 아들은 아버지가 하던 작업을 계속하였고, 완성된 작품에는 ‘파올로의 후계자(haeredes Pauli<Paul’s heirs>)’라고 서명(署名)하였다. 그들은 아버지가 남긴 많은 훌륭한 스케치와 밑그림을 활용할 수 있었다.
마지막 작품 중에는 루돌프 2세(Rudolf Ⅱ, 1552~1612, 합스부르크가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재위 1576~1612)를 위하여 그린 연작(聯作) [지혜와 힘의 우의(寓意)(Allegory of Wisdom and Strength)](뉴욕 프릭 컬렉션)와 [헤라클레스의 선택(The Choice of Hercules)] 등을 비롯한 우의화가 있으며, 그 밖에도 등장 인물이 조화로운 리듬에 따라 서로 묶여 있는 [사랑으로 결합된 마르스와 비너스(Mars and Venus United by Love)](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가 있다.
또한 흔들리는 듯한 우울한 풍경을 배경으로 성서(聖書)에 나오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빈 미술사 박물관)도 있다. 비애감으로 가득 찬 소규모 제단화 [병든 소년을 고치는 성 판탈레오(St. Pantaleon Healing a Sick Boy)]와 [피에타(Pietà)]는 그의 작품에서는 보기 드문 극적인 특성과 명상적(冥想的)인 분위기를 보여 준다.
만년(晩年) 작품인 [베네치아의 승리](1583년, 베네치아 팔라초 두칼레 대평의원회실 천장화)는 베네치아파 회화의 총결산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으로, 더할 나위 없이 장려하다.
그가 당대(當代)뿐 아니라 후세에도 몇백 년 동안 사랑을 받은 이유는 화려한 색채와 빛으로 인물과 순수한 건축 구조물에 생동감을 부여한 또다른 특성인 차분함에 있다. 17세기의 여러 화가들이 그에게 영감(靈感)을 얻었고 세바스티아노 리치(Sebastiano Ricci, 1659~1734, 이탈리아의 화가이며 도안사)와 티에폴로(1010)는 베네치아의 장식화에 나타난 활력이 넘치는 채색 화법(畫法)을 되살리면서 역시 베로네세를 중요한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
들라크루아(182)에서 세잔(626)에 이르는 19세기 프랑스 화가들도 베로네세에게 영감을 얻어 풍부한 색채를 표현하였을 뿐 아니라 색채로 입체감을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