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노드〔5〕 _평화의전당 박동진 사무처장】 「Ⅵ. 문규현 신부 순례이야기」
길고긴 여정을 순례이야기로 담는 것은 회상[AnaMNesis]을 위한 것이다. 회상[AnaMNesis]은 단순한 기억[Memory]이 아니다.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불멸의 영혼에 대한 오랜 과거에 대한 회상이다. 그리보면 우리는 모두 이데아[Idea] 세계에 대한 기억을 망각한 채, 모두가 다 치매이면서도 마치 가까운 과거를 잊은 사람들을 치매로 부르며 혀를 차는 오십보백보의 삶을 사는지도 모른다. 회상[AnaMNesis]이 무의식[Id]의 세계임을 보여주는 것은 의학의 영역 안에서이기도 하다. 심박동기나 제세동기가 멈춘 심장을 다시 움직이게 하듯, 의식과는 상관없이 심장을 움직이게 하는 이력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회상[AnaMNesis]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미사와 우리의 미사에 의해서이다. "나를 기억해서 이를 행하여라."는 예수의 만찬, 성체성사의 원형[ArcheType]은 예수의 미사가 우리의 미사가 되게 한다. 성체와 성혈의 나눔, 희생과 죽음의 십자 등의 회상이면서 이를 휠씬 넘어선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실체변화[TranSubstantiation]를 루터교에서의 공동변화[ConSubstantiation]나 칼빈교에서의 추억기억[Memory]와 구분하는 것이다. 성체와 성혈의 나눔, 희생과 죽음의 십자 등의 회상은 플라톤이 말한 불멸의 영혼에 초대 영역인 것이다. 천주교의 본향을 생각하는 노래인 사향가[思鄕歌]가 어쩌면 가장 걸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인의 바람에 따른 초월함[Transcendental]이 절대의 원의에 의한 초월됨[Transcendent]에 이르러야 완성되는. 문규현신부의 순례이야기는 그런 회상[AnamNesis]이 담긴 순례이야기이다. 한 인생의 나서부터 죽음까지 이르는 동안의 기억이 본향으로 일관된 예수의 원형[ArcheType]을 따르는 전형[ProtoType]에 녹여내는 까닭이다.
문규현신부의 순례이야기는 황등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 영육의 뿌리는 수류, 그리고 더 멀게는 순교자들과 신앙인들의 후손이라는 꼬리표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쨌든 태어난 곳으로 치자면 황등인데 인심 좋기로 잘 알려진 함열이 바로 옆에 있다. 아픈 사람들의 곁에 다가가는 것은 그런 토양과 풍습서 자란 까닭일 수도 있다. 황등 하면 알러진 것이 황등석, 비빔밥, 그리고 아가페 등등일 것이다. 황등석은 전국 어느 곳에든 쉽게 접할 수 있고, 대표적으로 국회의사당과 독립기념관에 가면 볼 수 있는 품격있는 밝은 화강암이다. 조각상도 아마 전국 성당과 사찰의 성상과 불상은 거의 황등석일 것이라는 순례자의 말처럼, 그렇게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기차가 서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비빔밥도 전주비빔밥, 진주비빔밥, 안동비빔밥, 평양비빔밥 못지않게 유명한데, 특색이 있다면, 이미 비벼서 나온다는 것이다. 어떤 연유로 나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겠지만, 그래도 은근히 한 이야기에 힘을 보탠다. 황등석이 유명한 황등에는 전국에서 가난한 이들이 몰려들었다. 돌을 깨고서 다듬는 일은 무척 고되고 힘드는 일이지만 먹고 살 수는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과 망치, 그리고 손이 하나되어 벌어지는 극한직업 안에서 두드림의 울림들은 서로에게 전달돼 가장 약한 손을 으스러뜨린다. 돌을 빚는 사람들의 손이 성하지 않은 까닭이다. 휘고 굽은 손에 접힌 옷소매에서는 금방이라도 돌가루들이 쏟아져나올 것만 같은 돌쟁이들이 덜덜 떨면서 비비는 것을 보던 비빔밥 아낙이 눈물을 훔치며, "거 밥도 하나 못비비는 거셔."라며 비벼주다가 나중에는 아예 비벼서 나왔다는 것이다. 정설이 아닌 속설일 수도, 그리고 낭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이야기보다 순례자의 마음에 와닿는 것은 이야기가 그려지는 까닭일 것이다.
또 하나의 이름이 아가페인데,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요양원일 것이다. 그 중에 압권은 메타세콰이어. 구릉과 논밭인 주변에 키다리아저씨의 비밀화원이라 할 정도의 정원은 치유를 담아내기에 넉넉하다. 불교도 그렇지만 천주교 안에서도 나무와 연관된 이야기들은 풍성하다. 성경의 선악과와 생명수도, 떨기나무, 십자나무 등도 모두 나무로 사람이 하늘과 맞닿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나무를 심는 사람들인 프랑스의 부피에, 인도신의 사다만,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든지, 내몽골의 이지팡, 인위전, 왕텐창, 그리고 두 다리 없이도 나무를 심은 마산샹 등의 일화를 떠올릴 수 있다. 가까이에는 축령산 편백공원 임종국[바오로], 제주도 한림공원 송봉규[이시돌], 전라도 아가페원 서정수[알렉스] 등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어쩌면 나무를 심는데 평생을 다한 것도 그렇지만, 지독한 자린고비였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구두쇠라는 것이 아니라, 근검절약이 몸에 담겼다. 황등서 전주를 가기 위해서도 걷고또걷고, 갈아타고서 이르렀다는 서정수신부의 일화는 '그 아낀 돈으로 나무를 심은 까닭은 무엇일까' 하는 물음을 낳게 한다. 미래에 건네는 선물들. 해답은 남프랑스의 아키텐에서 어쩌면 찾을 수 있다. 풍요로운 포도주의 고장인 보르도와 달리 나무지팡이신발[Échassiers]을 신어야 할 정도의 진흙벌밭에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아키텐. 근대에 이르러 너나 할 것 없이 소나무를 심었다. 자신들의 시대에는 누리지 못할 것이 분명한데도 미래세대만큼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몇 세대를 거치면서 나무는 황무지를 옥토지로, 나무는 불모지를 별장지로 바꿔놓았다. 나무를 팔아 먹고도 살며. 황등에서도 그런 나무들을 품고 자란 문규현신부가 순례길에 놓인 나무 하나에도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무이야기가 나왔으니, 순례의 뒷얘기에나 나올법한 팽나무를 떠올린다. 제주도 오름들과 백록담에 이르는 동안 많은 퐁낭, 그것이 팽나무인데 아름다운순례길에도 새만금하제마을에도 있는 주름잡힌 나무이다. 안도현시인과 박남준시인이 문규현신부와 아름다운순례길을 할 때의 일이다. 천호로부터 나바위까지 이르는 둑가와 길가의 왕버들도 탄성을 자아내게 하지만 여름땡볕의 팽나무 그늘은 누구나에게 숨을 돌릴 틈을 줬다. 그 때 시인들은 아니었던 것 같고 누군가가 팽나무에 얽힌 지어진 얘기를 꺼냈다. 사고만 치던 아들이 범죄에 휘말렸는데 엄마의 심장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래서 심장을 꺼내들고 무서움에 정신없이 허겁지겁 뛰어가는데 그만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져 심장을 떨어뜨릴뻔 했다. 간신히 심장은 놓치지 않았지만 심장이 하는 말, "아가야. 너는 다치지 않았냐." 그리고는 일어나서 아름드리 나무를 보니 팽나무였고, 주름진 나무줄기를 잡고 엉엉 울었다는 얘기다. 지어낸 얘기겠지만 마음에 곱씹어진다. 새만금하제마을은 황석영작가의 [[할매]]로 두루 알려졌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미군정시기, 새만금간척 등을 본 할매 팽나무를 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더 헤집어보면 그 팽나무를 지키려는 문정현신부와 문규현신부의 순례, 그리고 숱한 이들의 노력 등이 거기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다하우의 포플러, 난징의 플라타너스, 전주의 회화나무, 제주의 동백나무처럼, 나무는 기억한다. 아팠던 시절의 억울한 이들을. 더러는 나무줄기를 부둥켜안고 울었을 것이고, 더러는 나무줄기에 어머니라고 새겼을 것이고. 그래서 바람이 잦아들었을 때도 잎끼리 부딪히며 바스라바스락 영혼의 기억을 되새기는지도 모른다. 순례의 문규현신부가 그 [[할매]]의 팽나무다. 심박동기와 제세동기는 아픔과 떨림의 순간에 이력을 남기기에.
심박동기와 제세동기를 단 문규현신부의 이력은 앞선 회상[AnaMMesis]의 이력처럼 의학의 영역에서 알아차린다. 성모병원에 심박동기와 제세동기를 확인하러 가면, 그때만큼은 더더욱 의사 앞에서 순한 양이 되는 문규현신부에게 묻는다. "몇월며칠옃시즈음 시위를 하셨나요." 그때가 밀양이건 군산이건 제주이건, 그것이 어디선가 누구인가 무엇인가, 아픔의 노지에서 천막에서 사지에서, 더불어 부대끼고 얼싸안고 울부짖는. 그런 현장을 순례하던 것임을 심박동기와 제세동기가 기억하는 까닭이다. 의사의 다음 말이 가관이다. 현장에 가면 아픈 무언가와 항께 하기에 심박동기와 제세동기가 작동하고, 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