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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한마음산악회 정기산행 |
산행일자 ; 3월 17일(화요일) 8시 구시청 출발 산 행 지 ; 우두산,고래산 소 재 지 ; 여주시 북내면 산행코스 ; 1코스) 고달사지~우두산~고래산~옥녀봉~상교리~고달사지 주차장 2코스) 고달사지~우두산~국사령~고달사지 주차장 산행시간 ; 1코스) 3시간30분 2코스) 2시간 ***산행후 여주 신륵사탐방 예정(입장료 ; 2200원제공 *불교신도증 무료)*** 산행경비 ; 20,000원 버스노선 ; 07시 10분 ; 입암 현대아파트 07시 18분 ; 입암 6주공아파트(콩나물공장) 07시 20분 ; 4,5주공아파트(하나웨딩홀쪽) 07시 25분 ; 송정 한신아파트 07시 28분 ; 가월가물치앞 07시 30분 ; 통신공사건너 정류소 07시 35분 ; 3,6,5 갈비탕건너 정류소 07시 37분 ; 아나병원건너 정류소 07시 42분 ; 구 터미널 08시 ; 구시청(임영관,칠사당) 출발 준 비 물 ; 간식,식수,상비약,우의,보온자켓,스틱,장갑,아이젠,스페치...기타 연 락 처 ; 회 장 ; 010-8878-7652 산 대 장 ; 010-9142-1778 총무(남) ; 010-8977-4647 기 사 ; 010-7175-0848 *한마음산악회는 비영리 단체로 산행 안내만 할뿐 산행중 발생하는 모든 사고는 본인의 책임으로 민,형사상 및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즐겁고 안전한 산행을 위하여 적극적인 협조 바랍니다
상 기 와 같 이 공 지 함
한 마 음 산 악 회 회 장 임 영 해 |
우두산(489m) , 고래산(543m)
우두산은 혜목산(慧目山)으로 불리기도 하며, 정상석은 489m로 되어 있으나 국립지리원의 지형도엔 473m로 되어있고, 산자락에는 고달사지가 있으며, 1998년부터 진행되는 발굴조사는 향후 발굴조사를 더 한후 정비사업을 진행할 계획이라 한다
고래산(高崍山:543m)은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과 여주군 북내면의 경계에 있고, 남서쪽 능선 상에 우두산(牛頭山:489m), 남동쪽 능선 상에는 옥녀봉(玉女峰:419.3m)이 있으며 국사령 근처에 국사봉(470m)이 있다.
고래산은 고달산(高達山) 또는 고려장 설화의 배경이 되어 고려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금동마을 뒤쪽으로 고려장 굴이 있어 옛날의 고려장 관습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산이다.
고달사지는 사적 제382호이며 전신은 봉황암(鳳凰庵)으로 경덕왕23년(764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대가람으로 왕실의 비호를 받았으며 광종1년(950년) 원감(圓鑑)국사가 중건했다. 고려초에 국가가 관장하는 3대 선원 가운데 하나로서 975년에 세워진 원종대사 비문에 의하면 당시에는 고달원 또는 고달선원으로 불렸다하며, 희양원(曦陽院),도봉원(道峰院)과 더불어 삼원(三院)의 하나인 대찰이었다. 희양원은 경북 문경의 봉암사를, 도봉원은 도봉산 도봉서원 자리의 영국사를 일컬었다고 한다. 고종20년(1233년) 혜진(慧眞)대사가 주지로 취임했으며 원종1년(1260년) 절을 크게 확장하고 중건했다
1530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 고달사가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초 까지는 번창했으나, 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에 폐사된 것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은 것으로 전해온다. 중요 문화재로는 고달사지부도(국보제4호),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보물제7호),고달사지석불좌(보물제8호),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및 이수(보물제6호)가 절터에 남아있고 고달사쌍사자석등(보물제282호)은 현재 국립박물관에 안치돼 있다.(by 브리태니커 등)
고달사에는 고달과 그의 부인 달여에 얽힌 슬픈 전설이 서려있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신을 다 바쳤고, 기다리다 못한 부인 달여와 딸 유달이 고향 함흥에서 여주까지 찾아 왔으나 만날 수가 없어 돌아가던 중 굶어 죽었다고 한다.
마을로 들어서기 전 길가에 곧은 소나무가 가득한 봉우리(?)가 있는데 ‛신털이봉’이다. 그 옛날 불도들이 절에 들어설 때 흙을 턴 신발의 흙이 쌓여서 생겼다하여 생긴 이름이라 했다고 한다.
고달사지에서 대신면 쪽으로 이어지는 88번상의 고개에는 옛날 힘든 일이 싫어서 여자들이 이 고개를 넘어 뺑소니를 쳤다고 해서 ‛뺑치고개’라 부른다고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절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미륵(彌勒) 또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웠으므로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절이름을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다층전탑이 있는데, 이 탑 전체를 벽돌[塼]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절이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나옹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入寂)하였기 때문이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 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龍)이 호상(護喪: 초상 치르는 모든 일을 주장하여 보살피는 것)을 했던 일들이 그것이다. 3개월 뒤인 1376년(우왕 2) 8월 15일에 절의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함께 이루어졌다.
이때 대전(大殿)·조당(祖堂)·승당(僧堂)·선당(禪堂)·종루(鐘樓)·동익당(東翼堂)·서익당(西翼堂)·남행랑(南行廊)·향적당(香積堂) 등의 많은 건물이 신축되거나 중수되었다. 그리고 나옹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선각진당(禪覺眞堂)도 건립되었다.
또, 1382년에는 2층으로 된 대장각(大藏閣)이 건립되면서 간행한 대장경 1부를 봉안하였다. 대장경 불사(佛事)를 발원한 것은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이색이 그 뜻을 계승하여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간행하였다. 신륵사의 승려 무급(無及)과 수봉(琇峯)이 중심이 되고 그 제자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시주를 모았는데, 200여 명이 이 불사에 참여하였다.
*****시간이 허락하면 여주 영릉 참배 *****
영릉(英 꽃부리영 陵) ;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합장능
영릉(寧 편안할영 陵) ; 효종대왕과 인성왕후 분리능
첫댓글 우두산 및 고려산 산행지 잘보고 갑니다
항상 감사 합니다
다음주에는 고래사냥 길에 함께 하겠습니다.
대포님,대굴령님!! 선배님들이 곁에 계셔서 저는 항상 즐겁고 든든합니다
산행공지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