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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다운받았습니다. 원작자는 누구인지 모릅니다. 2008년 9월=>오타를 수정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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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바이블
Version 5.0 /2006年版
목차
서론/ 나는 왜 성경을 우롱하는가?
제1장/ 근본주의 교리에 대한 고찰
▶ 참을수 없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가벼움
▶ 믿음이 우선인가? 사랑이 우선인가?
▶ 기독교는 불가지론을 주장할 자격이 없다
▶ 죄를 포맷(Format) 하기를 반복하는 기독교인
제2장/ 지옥에서 올라온 여호와
▶ 여호와 산신령의 어원과 기원
▶ 복수와 저주의 신 여호와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의 여호와
▶ 여호와는 유일신이 아니었다
제3장/ 엽기적인 성경
▶ 여호와가 내려준 사악한 율법
▶ 여성인권 유린하는 성경
▶ 성경속에서의 근친상간
▶ 삼손에게 씌인 여호와 귀신
▶ 성기껍질을 전리품으로 챙긴 다윗
▶ 마누라를 상납한 아브라함
▶ 모세는 폭군인가?
▶ 기독교인이 모르는 두번째 십계명
▶ 에로틱 경전 아가서
▶ 쓰레기 더미(율법)속에서 발견한 왕거니(십일조)
제4장/ 허구의 구약사
▶ 청동기 시대에 태어난 최초의 인류 아담
▶ 유대민족의 기원
▶ 엑소더스는 허구였다
▶ 성경의 출애굽 경로는 허구이다.
▶ 모세의 만나와 메추라기 기적의 허구성
▶ 가나안 정복설
▶ 같은 사건에 대해서 일치하지 않는 성경
▶ 솔로몬 왕국은 허구였다.
제5장/ 주변국의 문화에 영향 받은 구약
▶ 구약의 천지창조와 바빌론의 신화 비교
▶ 홍수신화의 원조
▶ 비슷한 신화가 오히려 성경 신화의 실존을 증명해 주는가?
▶ 모세 탄생 신화의 원조
▶ 구약의 율법과 함무라비 법전
▶ 지혜문학서에 영향받은 잠언
▶ 가나안의 신 케루빔
▶ 조로아스터교에서 받은 영향
▶ 기타 구약 신화의 이해
제6장/ 성경의 비과학
▶ 천지창조의 비과학
▶ 카인을 협박하는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 노아의 방주의 허구성
▶ 성경속에서의 우주관
▶ 기타 비과학적인 점들
제7장/ 허구속의 예수
▶ 혼돈의 유대땅
▶ 시대상황과 무관한 복음서
▶ 복음서안에서 엇갈리는 예수의 행적
▶ 억지로 끼워맞춘 예수신화
▶ 요세푸스 증언과 빌라도 보고서
▶ 신화를 벗겨낸 예수의 정체?
▶ 잃어버린 원시복음?
제8장/ 예수신화
▶ 유대사회에 뿌리내린 이방사상
▶ 조로아스터교에서 예언된 메시아
▶ 예수보다 150년 앞선 에세네파의 메시아
▶ 초대교회의 강력한 라이벌, 미트라교!
▶ 물고기좌의 시대
▶ 마리아 여신!
▶ 예수 그리스도 酒님
▶ 영지주의를 내포한 신약성경
▶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의 기원
▶ 태양신의 기호(symbol), 십자가
▶ 환상속의 예수
제9장/ 삼위일체설의 허구성
▶삼위일체의 배경
▶ 성부와 성자는 동등하지 않다.
▶ 성령과 다른 위격은 동등하지 않다
▶ 기독교계의 옹색한 변명
제10장/ 기독교 형성사
▶ 디아스포라
▶ 초대 교회의 분열
▶ 베드로와 바울의 교권 다툼
▶ 콘스탄티누스는 미트라의 숭배자였다
▶ 종교회의
▶ 십자군에 의해 벌어진 동방교회의 비극
제11장/ 묵시문학의 정체
▶ 묵시문학의 태동
▶ 후대에 조작된 구약의 예언
▶ 이사야서의 저자는 3명 이상이다
▶ 요한계시록에 영향을 준 다니엘서의 숫자
▶ 다니엘서에는 예수가 예언되지 않았다
▶ 요한계시록과 요한복음의 저자는 다른사람이다
▶ 요한계시록 분석
▶ 묵시문학은 아무것도 예언하지 못했다
제12장/ 성경의 문서적 고찰
▶ 같은 사건을 두고 엇갈리는 오경의 내용
▶ 오경을 구성하고 있는 4갈래의 전승
▶ 서기관들의 오류
▶ 본문비평에 쓰이는 구약의 사본들
▶ 구약이 유대교의 경전으로 공인받기 까지
▶ 구약은 성경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 구약성경을 제거하자!
▶ 신약성경의 등장
▶ 본문비평에 쓰이는 신약의 사본
▶ 킹제임스 성경 이외에는 사탄이 변개한 성경?
맺음말/ 기독교는 성경의 오류를 안고 자폭할 것인가?
서론 / 나는 왜 성경을 우롱하는가?
한국의 개신교는 카톨릭의 교황제도를 비난한다.
그러나 필자가 단언하건데 교황은 저 머나먼 땅 이탈리아의 바티칸에만 살아 숨 쉬고 있는 게 아니다.
바로 대한민국 이 땅에서도 수많은 교황들이 서로 난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황들도 십자군을 선동하여 끊임없이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을 선동한다.
한국의 교황들도 면죄부를 팔아서 천국장사를 한다.
한국의 교황들도 성모 마리아상과 성화(=기복신앙과 미신행위)로 어리석은 우민들을 현혹한다.
한국의 교황들도 창조과학회를 조직하고 지원하여 갈릴레이의 후계자들을 어떻게 하든
종교재판소로 끌고 오고 싶어한다.
한국의 교황들은 최고급 양복에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여신도와 유부녀를 능욕한다.
그리고 한국의 교황들은 마치 민법 몇 조 몇 항처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성경구절을 요리조리 끄집어내어
쉴 세 없이 외친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요한계시록 2장 10절]
목사는 교인들에게 절대 복종, 절대순종을 강요하는데 문제는 복종해야 할 대상이 애매모호하다는 점이다.
예수도 여호와도 이 세상에 없다. 이 세상에 충성해야 할 대상이 사실상 목사와 교회밖에 없다.
이러한 충성심을 밑바탕으로 한국의 목사들은 스스로 교황이 되었다.
진보 기독교인들이 물러가라고 소리쳐도 교황은 성경구절로 맞받아친다!
한 가정, 아니 수많은 가정이 파탄 나도 교황은 성경구절을 끄집어내며 절대로 물러가지 않는다!
여자가 목사를 하겠다고 하니 이번에도 교황은 성경구절로 맞받아친다!
교황은 계속해서 성경구절을 요리조리 끄집어내어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을 선동하고 다닌다.
교황은 자신의 입맛에 따라 성경구절을 요리조리 끄집어내어 수많은 종류의 면죄부를 만들었다.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자신의 마음에 안드는 자들을
공격하기 위해....목사들은 성경구절을 능수능란하게 끄집어내며 교인들을 능욕하고 있다.
성경이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아가페적인 사랑을 실천하자고 성경을 찾아보면 그런 내용이 있으며, 이교도들을 싹쓸이 죽여 버리자고
성경을 찾아보면 그런 내용이 있으며, 귀신들림에 의해 병이 걸린다는 미신(베뢰아 귀신론)을 옹호하기 위해
성경을 찾아보면 그런 내용이 있다.
성경이 진리라고 성직자들은 귀가 아프게 말한다. 진리는 이렇게 구호형이 아니어도 진리이다.
독재자가 민주주의를 더 크게 외치듯 성경도 외친다. 오직 성경만이 진리라고 말이다.
수차례의 개정을 통해 수세기에 걸쳐 왜곡과 첨가와 누락과 변형이 가해져 오늘에 이른 성경이
우주를 창조한 자의 말씀이고 진리인가? 성경을 누가 만들었는가?
성경이 만들어진 역사를 보라. 그리고 성경에 속했다가 버려진 외경들을 찾아 비교해 보라.
가장 오래된 사본들과 오늘날의 성경을 비교해보라. 성경에 원본은 없다. 사본(寫本)들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수천 종류를 넘는 사본들은 역시 모사를 거듭한 모사본(模寫本)인데다가
내용 또한 똑같은 것이 단 한 가지도 없다.
지금, 여러분의 손에 쥐어진 성경은 신학자들이 수많은 사본들을 비교하고 검토해서 만든 것이다.
어떤 사본을 토대로 번역을 했느냐에 따라서 성경의 내용이 약간 틀리기도 하는데, 일부 과격한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보는 성경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사탄이 변개한 것이라고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구약성경을 보라! 당신은 결코 구원이 아니라 율법으로 저주를 퍼붓는 중동지방의 한 종족의 신을
추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구약속의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추잡하고 저질스러운
저주를 퍼붓는 고대 이스라엘의 추잡한 잡신일 뿐이다.
또한 성경속의 신화는 철저히 주변국들의 신화를 모방한 것들뿐이다.
천지창조, 노아의 방주, 바벨탑, 아브라함, 모세의 출생, 욥기, 잠언, 등등등 모두다 바빌론의 유수때
유대인들이 수메르신화와 주변국들의 신화를 모방했을 뿐이다.
성경 속에서 바라보는 윤리는 어떠한가?
근친상간과, 여성비하, 장애인비하, 이방인들에 대한 저주 등 온갖 추잡한 것들로 얼룩져 있다.
성경속의 사건들은 전부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있는가?
아니다! 바빌론 유수이전에 존재했던 다윗과 솔로몬 왕국을 포함해서 그 이전의 사실은 모두 신화요 허구이다.
오히려 역사는 성경 속의 사실이 허구임을 증명하고 있다.
예수 역시 그와 너무도 비슷한 행적을 보이는, 또 다른 메시아들이 로마제국시대에 예수보다 먼저 등장했었다.
성경은 과학적인가? 아니다. 성경은 철저히 고대 관념적이다.
지구를 만들고 난 후에, 태양과 달, 별을 만들었다고 말하는 고대인의 관점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낡은 책일 뿐이다. 갈릴레이를 종교재판에서 무릎 꿇게 만든 것도 바로 성경이었다.
그리고도 성경이 진리라고 말하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세뇌당한 성경의 창세기를 과학으로 증명해 보이겠다고 창조과학회까지 조직했다.
성경자체가 비과학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거니와, 성경의 기초적 신학적 지식이 전무한 광신자들의 추태라고
할 수 있겠다.
목사들은 이 사람들에게 신학교에서 배운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고 오히려 부추기고 지원을 한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멀게 만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성경의 문자 속에서 자유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는 분명히 오류가 있다. 여러분이 성경의 오류를 인정하지 못하고 성경의 문자 속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한다면, 성경구절을 끄집어내는 성직자들의 비합리적이고 몰상식한 짓에 언제까지고 질질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가련한 영적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은 서구인들이 버린 중세기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에서 허우적거리며 빠져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사실상 오늘날의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야기시키는 배타성은 목사들이 솔직하게 신학교에서 배운 진실을
신자들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자신의 종교가 완벽하고, 성경이 무오하다고 철썩같이 세뇌당한
기독교인들에게 다른 종교는 전부 우상숭배요, 미신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법이 무서운지도 모르고, 단군상을 파괴하고, 불상을 때려 부수고, 절에 불을 지르고,
지하철에서 고성방가를 하는 기독교인들이 끊임없이 사회문제를 야기시킨다.
물리적인 배타행위 뿐만이 아니라 마귀, 사단, 사탄, 이단, 가라지 등의 아름다운(?) 용어들을 사용해서
끊임없이 타종교와 사상을 짓밟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런 기독교인들에게 대의명분으로 주어지는 것은 다름 아닌 성경이다.
이방신의 우상을 불살라 버리고, 낫으로 찍어버리고, 제단을 파괴하라고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의 배타성은 바로 성경과 기독교의 교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약속에서의 이방인들에 대한 저주는 도를 벗어난다.
이방인들은 갓난아기까지 죽이고 임산부의 배까지 갈라 씨를 말려 버리라고 여호와가 명령하며,
이방인 남자들은 칼날로 쳐 죽이고, 이방인 여자들은 강간하고, 이방인들에게 평화를 약속하고 쳐들어가서
노예로 삼으라는 구절까지 나온다.
구약속의 여호와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비기독교인들을 잔혹하게 죽인다 하더라도 성경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단군에 대해서 그의 역사적 실체를 부정하는 교수들 역시 기독교인들이다.
그러나 이미 서구에서는 예수 자체가 허구의 인물이라는 학설이 힘을 얻고 있는 마당이다.
구약의 역사는 말할 필요도 없다.
단군의 실체를 부정하면서, 정작 서구에서는 예수가 신화적 허구의 인물이라는 설이 힘을 얻어간다는 것은
어찌 모르는가?
성경을 맹신하고 오류라고는 전혀 없는 신의 영감을 받아 쓰여진 책이라고 철썩같이 믿도록 쇠뇌당한
한국의 개신교도들은 성경속의 배타적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광신도화 되어 버렸다.
즉, 성경이 개신교인들의 배타적 교리를 형성하고 있는 근원적인 뿌리인 셈인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단순한 종교경전으로 취급하지 않고, 오류라고는 전혀 없는 무오함의 책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있는 한 그들의 배타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여기저기 칼을 휘둘러 대는 것일까?
기독교는 어쩌다가 이다지도 악착같은 전투자세로 이웃종교를 맞아야만 하게 되었는가?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가? 무엇 때문에 시선을 돌려 넓은 세상을 보려하지 않고
그 좁은 성경과 인색한 여호와라는 울타리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려고 하는 것인가?
의심하는 정신, 그것은 인간으로써, 그리고 민주시민으로써 당연히 거쳐 가야 할 과정이다.
그 과정을 무시하고 억제시킨 결과는 우매한 광신자를 만들뿐이며, 민주주의의 다원성도 인정하지 않는
꽉 막힌 배타적 인간만을 양산할 뿐이다. 더우기 과학마저도 부정하면서 인간이 걸어가야 할 발전을 퇴보시킨다.
의문을 갖는 것은 본능적인 인간의 본성이지만 기독교에서는 그 본성을 억압한다.
사단이니 마귀니 시험에 든다느니 죄악시 한다.
어째서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지적 호기심을 원천봉쇄하는 것인가?
왜 기독교의 신은 자신을 의심하지 말라고 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오히려 어떤 종교는 끊임없이 회의하고 물음을 찾으라고도 한다.
기독교의 신은 무지몽매한 인간들만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
기독교의 출발부터 오류에서 비롯된 때문은 아닌가?
기독교는 결코 보이고 싶지 많은 비밀을 숨겨두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기독교 내에서 믿음과 의심은 정녕 병립할 수 없는 것인가?
특히 한국 개신교의 문제는 무조건적인 믿음의 강요와, 믿지 않는 자에 대한 무시와 비난, 의심과 회의를
원천 봉쇄함으로서 인간을 바보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이다.
이런 것들의 폐해는 필연적으로 무지한 기독교와, 허약한 신앙과, 배타적 신앙을 낳게 된다.
회유와 협박, 불안과 공포, 물질적 축복의 갈구 등을 통해 기독교에 입문한 사람들은(어쩌면 거의 대다수이지만),
진리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자신의 부족분을 채우는 것으로만 만족하기 쉽다.
불안한 사람은 평화로우면 그만이고, 몸이 아픈 사람은 마음의 위안을 얻으면 그만이고, 빈궁한 자신의 신에게
부를 가져다 달라고 기도를 드리며 위안을 얻으면서 더 이상 진전이 없는 상태로 거기에서 안주하고 마는 것이다.
안주하고 만족하는 순간, 치열한 과정을 통해 진리를 깨달음으로 인해 의심이 해소된 것이 아니라,
의심 자체가 불필요한 상태에 머물게 되어버린다. 이건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의심하지 않는 신앙, 의심 없는 믿음! 언뜻 강고한 신앙인의 자세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은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복제품일 따름이다.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져보아도 도대체 의심 없이 믿음이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맹신이 아니지 않는가!
한참 지적인 활동이 왕성할 청소년들에게 반복적인 찬양을 시키면서,
사고하고 의심할 능력을 마비시키는 것이 한국 기독교의 교회교육이다.
사회를 개혁하고 이웃을 섬기는 복잡하고 불편한 과정으로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회의해야 할
성인들에게, 단순하기 짝이 없는 교회 포스터 쪼가리 따위로 "그대는 구원받았다!"며 마취시키는 것이
한국 기독교의 기본 패턴인것이다.
신학대학의 많은 학생들 뿐 아니라 일반 교회의 많은 신자들도 조금만 자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처음 기독교를 접하고 당연히 회의를 갖지 않는가?
그런데 그들이 종래 어떻게 변해 가는가?
기독교가 지난 2천년 동안 회의하는 지성과 자의식을 잠재웠다.
그래서 의구심, 회의, 지적 호기심을 죄악시 하기 위해 "성령을 의심하지 마라"라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자신들이 믿는 신의 전지전능이 부족해 결국 마귀나 사탄까지 동원하면서 말이다.
이것은 거의 세뇌의 기술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반복적인 행위와 반복적인 억압, 동류의식 그리고 죄의식의 주입해서 말이다.
기독교인들은 흔히 "신의 뜻은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으니 그냥 믿어 버려라"라는 주장을 흔히 한다.
정녕 믿음이 그런 것인가? 답이 나오지 않은 것을 일단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인 것인가?
그것이 확신인가? 그것이 신앙인가? 믿음으로 얻는 진리, 그것이 무슨 구구단인가?
그렇다면, 무당이 섬기는 신도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으니 그냥 믿어버리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과연 치열하고 처절한 의심의 터널에서 헤매보지 않고서 쉽사리 얻을 수 있는 진리 따위가 있겠는가?
있다 한들, 혹시 광신자의 싸구려 진리가 아니겠는가?
종교와 학문을 착각하는 것 아니냐고 물으실 분도 계시겠지만, 철저하게 믿음의 복종만 강요하는 한국 기독교는
비난받아야만 한다. 기독교에 뭐 대단한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사기만 치지 말라는 거다.
목사들 자신역시 신학교에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딴판인 신학을 배웠다.
기독교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이 죄악이라면, 신학 따위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왜 신학생들은 목사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워야 하는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눈으로 기독교라는 종교를 보기 위함이다.
만약 목사의 조건으로 믿음이 우선이라면 광신자를 목사로 세우는 것이 낫다.
그러나 그런 광신자의 관점으로는 신자들을 올바르게 이끌어 낼 수가 없다.
그런데, 목사들은 신학교에서 제대로 된 신학을 배우고서는, 주일날 강단에 서서는 신도들에게
엉뚱한 설교를 하는 것이다.
한국의 목사들은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신학을 배우고서도 신자들에게 맹신과 광신을 요구하고 있다.
제발 거짓을 가르치지 말자.
믿기지 않아도 믿으면 알 수 있다고 사기 치면서 사람 바보 만들지 말라.
그리고 의심하는 자에게 질문을 허락하라!
손 붙잡고 시험에 들었다는 둥, 기도하자는 둥, 의심을 가지게 된 사람을 자신과 똑같은 바보로 끌어내리지 마라.
기독교인 되기 쉽다고 한다. 일단 믿으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무조건 믿는 자세, 즉 맹신하는 믿음은 어린이들의 태도에 불과 할뿐이다.
하기야 기독교인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최고로 평가한다. 이러니 말이 통하는가?
어쨌든, 그 믿음, 혹은 믿는다는 착각, 혹은 진실에 대한 외면 속에서 스스로 도취되어가고
자기방어 집단 합리화와 끊임없는 동어반복! 신은 인간을 로봇으로 만든 적이 없다.
상식과 지식과 몸과 영혼을 모두 내던져 부딪히면서 치열하게 자연에게 도전하면서
삶의 난제들에 대한 숨은 해답을 찾아가는, 그런 의심 많은 진정한 인간으로 다시 거듭나길 기대한다.
필자는 그러한 점에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재조명해 보도록 자료를 올린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에서 조금의 의구심이라도 생긴다면 필자는 그것으로 만족하겠다.
그러나 성경의 모순을 이야기 하고자 하면 읽기 전부터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
끝까지 읽지 못하고 중도에서 내팽개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관념은 그 벽이 두터워 깨뜨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관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를 꽁꽁 얽어매어 버리기 때문에 꼼짝달싹도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관념을 깨뜨리고 나면 우물 속에서만 살던 개구리가 지상으로 뛰어 나오듯이
지금까지 살아온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세상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세상은 지혜로운 세계이며 무지에서 해방되어 인간 본연의 권위를 되찾는 세계이다.
관념을 헐고 타성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누리도록 하라.
만약 지금까지 지녀온 관념을 소중하게 여기어 관념을 깨뜨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을 끝까지 독파하고 난 후에도 여전히 그 관념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독파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내 팽개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필시 패배자 이거나 낙오자일 뿐이지 결코 승리자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합리적인 이성 앞에 무릎을 꿇은 맹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흔히 감성(느낌 또는 영감)으로 읽어야 한다고 기독교인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진리는 만인이 공유할 수 있어야만 진리일수 있는 것이다.
성경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성경은 더욱 더 감성으로 읽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성경을 감성으로 읽어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기독교는 2천년간이나 기반을 닦은 종교라고 한다. 그러나 2천년간 철학과 사색을 통해 기반이 닦인 종교가
기독교라고는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기독교 치하에서 정상적인 비판이 용인되기 시작한 것이 언제 부터인가?
긴 탄압의 터널을 지난 기독교 역사는 서구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다. 짧은 역사를 가진 한국에서만 판을 칠뿐이다.
물론 성경에는 고린도 전서13장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같이 훌륭한 구절도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의 한쪽 편에는 여성을 비하하는 구절도 함께 공존한다.
성경에는 훌륭한 말씀과 함께, 한쪽 구석에는 배타성과 인종차별, 성차별등과 수많은 사악한 것들이
함께 공존한다. 목사들은 그중에서 그럴듯한 구절들만을 끄집어내서 설교를 할뿐이다.
기독교인들의 배타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성경을 파헤치지 않는 한 그들의 광신행위는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광신자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성경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에서는 아직까지도 모세오경이 모세에 의해 쓰여졌다고 가르쳐주는 마당이니,
우리가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어야만 한다.
이제, 기독교인들에게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 함께 손잡고 공존할 수 있는 여유, 오류를 개선할 용기,
진실을 구별할 줄 아는 지식과, 진실 아님을 고발할 배짱이 요구되고 있다.
이제부터 언급할 사실들은 기독교인들을 시험하는 악마의 속삭임도 아니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성경을 보라. 객관적인 시각에서 여러분의 신을 보라.
그리고 기독교와 성경이 형성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냉담히 보라.
여러분의 마음속에 의심이 생겼다면, 그것은 한명의 진정한 인간으로 가기위한 위대한 첫걸음이다.
성직자들은 성경으로 교인들을 우롱한다. 자신의 노예로 삼기위해.....
그러나 이제부터 필자는 성경을 우롱할 것이다.
여러분들을 성경의 문자 속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여러분은 성경의 문자에서 자유로워져라!
2001년 4월25일. 첫 번째 판 배포
2006년 4월27일. 다섯 번 째 개정증보판 배포
적 그리스도
일러두기 : 본 서에서는 개역한글판 성경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개역한 글판의 뜻이 난해하거나 뜻이 잘 전달이 안될 경우에는 공동번역판을 추가로 사용하였다.
인용한 서적에 관해서는 []안에 표기 해두었다.
제1장 / 근본주의 교리에 대한 고찰
필자는 우선 성경의 내용 비판보다는 우리나라에서 판을 치고 있는 기독교 근본주의 교리에 대해
지적하고 넘어갈까 한다.
이점을 가장 먼저 다루는 이유는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점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근본주의자들의 유치찬란한 교리가 기독교가 보여주는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는 의심 없는 믿음, 즉 맹신을 신자들에게 강요하면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 있는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고린도전서 1장 19절]
"그리스도 주 예수를 아는 지식 이외의 모든 지식은 배설물과 같다." [빌립보서 3장 8절]
지식에 대해 무지한 자만이 용감할 수 있다.
성경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만이 더욱 독실한 신앙을 가질 수 있고 고집을 부린다.
기독교, 그리고 성경자체가 여러분께 맹신을 강요하고 있으며 합리성을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그것이 과연 올바른 삶일까?
▶ 참을 수 없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가벼움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자식을 낳고 죽어갔다.
기독교가, 그리고 여호와가 모든 인류와 대 우주를 창조한 절대신이라면
이 존재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절대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믿음의 기회가 공평해지는 것이다.
아주 쉽게 예를 들어서, 예수가 뭔지도 모르고 살다가 죽은 고려시대의 사람이
최후의 심판 때 예수 안 믿었다고 지옥에 간다면 이것은 과연 타당한 말일까?
이 말대로 라면, 우리의 조상들은 모두 다 지옥에 가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보라! 여호와(야훼)라는 신은 오로지 유대인만이 믿는 민족신일 뿐이었고,
여호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주변국 사람들 밖에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신명기에는 모압사람과 암몬사람의 자손들의 십대는 물론, 영원히 여호와의 성전에 올수 없다고
규정해 놓았다.
이래가지고서야 모든 인류를 권장하는 세계신 이라고나 할 수가 있을까?
여호와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태반이었으니 믿음의 기회는
오로지 유대인들에게만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나머지 사람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구약을 보라! 이방인들에게 추악한 저주를 내뿜는 추악한 이스라엘의 고대잡신 여호와의 모습을!
그 문제 때문에 예수가 이 땅에 왔었다고 말할 것인가?
그러나 예수가 등장한 이후, 기독교가 전 세계 곳곳에 전파된 역사는 얼마나 되는가? 기껏해야 100년 남짓?
그렇다면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중국인들은, 인도인들은 ,우리나라의 조상들은..........
이들은 예수가 뭔지도 십자가가 뭔지도 모르고 한평생을 살다갔다.
역시 믿음의 기회라고는 털끝만큼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카톨릭 신자들은 예수를 알기 이전에 세상을 등진 과거인들은 양심의 행사 정도에 따라서
여호와가 심판한다고 주장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예정설(豫定說) 내지는 소명설(召命說)에 의해서 예수를 몰랐다는 자체가
신의 선택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교리해석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단테의 신곡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여호와를 몰랐다는 이유만으로 지옥에서 고통 받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는 중세 1000년 동안 카톨릭의 기본교리였고 개신교 근본주의자 대부분이 받아들이는 입장이기도 하다.
즉, 여호와를 몰랐거나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은 건 전적으로 인간 개인의 의지 때문이라기보다는
신의 생득(生得)적인 의지가 작용해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의인이라고 불리는 노아는 대 홍수 때 자기 가족들만 홍수에서 구했다.
그가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대목은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다.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학살 때 한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전 재산을 모두 쏟아 부은 쉰들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감독이 원래 처음 생각한 제목은 '쉰들러의 방주'였다고 한다.
쉰들러에 비해 노아가 참으로 초라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노아가 과연 의인이라고 불릴만한 인물일까?
현재 자신들만의 신이 유일신이고 다른 신은 모두 거짓이라서 믿어봤자 모두 지옥이라는 종교는
기독교 계열밖에 없다. (물론 최근에 등장한 일부 사이비 신흥종교가 비슷한 주장을 한다.)
이슬람교, 불교, 천도교...등등 다른 종교는 기독교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지 않으며,
타종교에게도 구원, 영생, 좋은 환생 등을 받는다고 했지만 오로지 기독교 계열만이
자신들의 신을 안 믿으면 지옥이라고 규정해 놓았다.
개신교도들이 말하는 지옥이라는 곳에는 단군부터 시작해서, 이순신, 세종대왕, 최영, 율곡, 등등등....
예수가 뭔지도 몰랐던 우리의 조상들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지옥에 계실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자신들의 주장을 주장하려면 위의 모순점을 반드시 해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필자는 이러한 질문을 목사에게 던진 적이 있었는데 그는 내 질문을 초보적인 것이라고 말하며 회피 해버렸다.
초보적? 하지만, 동시에 이 질문은 인간으로서 기독교에 던지는 가장 원초적인 질문인 것이다.
기독교가 스스로 주장하듯이, 기독교만이 오직 유일한 진리이고, 인간이 모두 죄인이라서
예수 믿지 않으면 모두 지옥이라고 주장하려면 위의 의문을 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여태껏 기독교가 주장하는 모든 주장은 거짓이고,
기독교의 교리는 수 천 년 동안 사람들을 괴롭히던 궤변(詭辯)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와 기독교를 알고는 있었지만 다른 종교를 믿거나 아무 종교도 믿지 않는 무종교인 중에도
정말로 착하고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기독교에서는 무신론자나 이교도는 모조리 지옥행이 예정되어 있으며,
이는 한치의 오류도 있을 수 없으며 신이 미리 예정하여 둔 일이라고 주장한다.
도덕주의자, 철학자, 자선사업가 등등을 막론하고 어떤 선행으로도 지옥행은 피할 수가 없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原罪)를 짊어지고 태어났으므로 어떠한 선행으로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을 면할 길이 없다고 개신교인들은 주장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4장 12절]
그러나 필자는 진심으로 여러분께 묻고 싶다. 지하철로에서 쓰려져있는 취객을 구하려고 머나먼 이국땅 일본에서
살신성인의 덕을 보여준 불교도 고 이수현 청년, 그리고 힌두교를 믿으며 기독교를 믿는 영국에 대항하여 인도의
독립을 이루어낸 마하트마 간디 같은분 들도 정녕 지옥에 가야만 하는가?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추앙해 마지않는 대형교회 목사들을 보라.
그들은 지키지도 못할 구약의 율법 중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십일조 조항이나 끄집어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십일조나 걷어가고 있다. 이들 중에 과연 누가 신의 뜻에 가깝게 사는 걸까?
더욱 웃기는 일은 유대인도 예수를 안 믿는다는 점이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이 모두 유대인들인데,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아직도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 하지 않는다.
개신교인들의 싸구려 교리대로 라면 예수를 부정하는 유대인들이야말로 지옥에 가야할 판국이다.
여호와에게 선택받았다는 유대 민족이 예수 안 믿었다는 이유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점에
모순을 느끼지 않는가?
"샬롬"이라는 유대인의 인사를 남발하는 기독교인들은 이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개신교의 천국에는 누가 가는가?
물론 손양원 목사님이나 주기철 목사님 같으신 존경할 만한 분들도 당연히 천국가시겠지만,
단순히 살아생전 예수 믿었다는 그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속물근성의 지저분한 마음으로 가득 찬 기독교인들과,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가 마지막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함께 천국행이 될 것이다.
교도소에서 제일 인기 있는 종교가 기독교라고 한다.
불교는 윤회설과 후생에 전생의 업을 이어간다는 믿음 때문에 인기가 별로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교리가 워낙 단순 한데다, 무슨 죄를 져도 예수만 믿으면 무조건 천국이 보장된다는 논리로
최고의 인기를 차지한다.
따라서 사형수가 사형 당하기전에 가장 많이 개종하는 종교역시 기독교라고 한다.
필자는 인터넷의 안티기독교 사이트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만났다.
그중엔, 다른 기독교인이 저지른 배타행위를 대신 사죄하면서 자신에게 대신 욕을 하라는 높은 인격을 지니고
있는 참기독교인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많은 수를 차지한건 욕설과 반말 지껄이에다
"너희는 지옥에 가서 이를 갈게 된다"는 등의 온갖 저주를 퍼붓는 기독교인들이었다.
예수만 믿었지 인간성의 됨됨이는 되먹지 못한 이런 인간들이 살아생전 단순히 예수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천국 간다면, 나는 차라리 지옥에 가서 세종대왕님이나 이순신 장군님들을 만나 뵙고 불장난이나 하련다.
그런 인간들의 영혼이 잔뜩 모여 있는 곳이 과연 천국일까 아니면 지옥일까?
도대체 여호와라는 신은 사람이 이승에서 한 짓은 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어떻게 떠받들었는지 만으로
평가하는 편협한 쓰레기 잡신이란 말인가?
필자는 기독교인 여러분에게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상식이하의 싸구려 교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 믿음이 우선인가? 사랑이 우선인가?
기독교 근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믿음과 사랑 중에서 믿음에 치중한다는 점이다.
기독교인들은 불신자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주장하며 다가온다.
그리고 그 증거로서 고린도전서의 사랑 장을 내세운다.
그러나 성경전반에서 중요시하고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믿음이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맹신(盲信)을 요구하고 있다.
목사들이 믿음의 시험에 대해서 설교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성경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시험과, 욥의 시험이다.
두 가지 시험 모두 여호와는 믿음의 대가로 피를 원하고 있다.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방법으로 양이나 닭, 염소, 소 등의 가축을 잡아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떤 형태이든 생물의 피와 육을 드림으로써 자신의 죄가 사해진다고 생각했다.
아브라함에게 여호와는 노경에 간신히 얻은 자식인 이삭을 손수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자는 여호와의 명령에 아들을 제단위에 올려놓고 칼로 찔러 죽이려고 했다.
참으로 끔직한 일이다. 결국, 여호와는 그만두라는 말과 함께 모든 것이 믿음의 시험이었음을 알려주지만,
이미 아브라함의 마음은 여호와의 명령이라면 자식까지 죽여 버릴 수 있는 독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사사기의 입다는 자신의 딸을 여호와에게 제물로 바치기도 한다)
믿음에 대해서 설교할 때 항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시험에 대해서 설교하는 한국의 목사들이여!
그대들은 여호와의 명령이라면 자식까지도 죽여 버릴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제대로 된 신이라면 그런 요구 따위는 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런 요구를 하는것 자체가 아주 유치한 짓이다.
이 세상의 어느 독재자도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하기 위해
자기 손으로 직접 자식을 죽이라는 시험을 내리지 않는다.
만약 어떤 신이 당신에게 나타나 그런 요구를 한다면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이 숭배했던 신이
사탄이었음을 알고는 숭배행위를 그만 두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의 충격적인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은 "그런 명령은 따를 수 없읍니다."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었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올바른 믿음이고 제대로 된 믿음이다.
그렇지 않고 명령대로 실행하려는 것은 광신자의 미친 짓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명령대로 자식을 죽이려고 했다.
사사기의 입다는 자기딸을 죽여서 여호와의 제물로 바쳤다.
성경은 그들을 칭찬한다. 목사들도 그들의 믿음이 본받을 만한 믿음이라고 추켜세운다.
성경에서는 인륜과 도덕을 가차 없이 내동댕이 친 패륜마저도 거룩한 믿음으로 칭송되고 있다.
고린도전서 13장에는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고린도 전서의 그 구절을 제외하고 보면 성경 전반에서 강요하는 신앙자가
제일로 우선해야할 사항은 신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다.
우리나라 목사들의 설교 역시 사랑 보다는 믿음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나라의 개신교가 근본주의에 찌들어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잘 나타내는 것이다.
그들은 일단 불신자들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로 다가가서 교인으로 만들고 나면 사랑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목사들은 아브라함의 일화를 들어 믿음의 신앙을 강요하는 설교를 자주 한다.
그 성경구절을 내세우는 이유는 아주 당연하다.
소중한 아들까지도 여호와에게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 아브라함처럼,
기독교 신자들도 전 재산까지도 바칠 수 있는 강한 믿음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목사들이여! 이제 믿음이 아니라 사랑에 대해서 설교해야하지 옳지 않을까?
한국의 목사들이 하는 설교의 주제는 대부분 믿음에 대한 것뿐이다.
그래서야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계속해서 믿음을 강조하는 설교만을 앞세운다면 한국의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헌금만을 강요한다고 밖에는 볼수 없다.
▶ 기독교는 불가지론을 주장할 자격이 없다
사도행전17장에서 바울은 알 수 없는 신의 제단 앞에 서서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설명한다.
불가지론이라는 것은 인간은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교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가지론을 내세우면서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것부터가 모순일 수밖에 없다.
불가지론이라고 한다면 사물의 본질이나 실재(實在)를 비롯하여
인간의 경험을 초월하는 문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을 내세우면서 신(神)이 어떤 존재인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기독교를 전파 하려고 한다.
진정 불가지론을 내세울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세상에 무신론자(無神論者) 뿐일 것이다.
인간의 경험을 초월하는 알지 못하기에 무신론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불가지론으로 종교를 설파하려는 것 자체가 모순된 행동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게다가 신에게 이름까지 붙여놓은 종교가 불가지론을 내세우는 것은 더욱 어처구니없다.
어처구니없게도 오늘날의 기독교인들도 자신의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
사도행전의 바울과 같이 불가지론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이 우주의 만물이 우연히 존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유명한 과학자들의 말을 근거로 제시하거나,
"인간의 생각으론 절대자의 위대한 뜻을 알지 못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 기독교인들은 학교에서 논리공부나 제대로 했는지 의심이 간다.
이 우주의 만물이 우연히 존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과학자의 말은 상당히 타당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유신론을 직접적으로 증명하지를 못한다.
또한, 유신론을 완벽하게 증거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우주만물의 법칙을 조정하는 절대자
즉 신이 기독교의 여호와라는 점에도 절대 근거가 될 수가 없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아주 흔하게 저지르고 있는 순환논리의 오류이다.
순환논리의 오류라는 것은 논증되어야 하거나, 논증되지 못한 것을 논증의 근거로 하였을 때 뒤따르는 모순이다.
그것을 주장하려면 창조신이 어떻게 기독교의 신, 여호와로 귀결되느냐는 것을 논증하거나 검증해야만 한다.
만약 필자가, "이 세상은 우연히 존재할 확률이 낮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옥황상제께서 창조하셨읍니다."라고
주장한다면 뭐라고 대꾸하겠는가?
성경이란 책 이외에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근거를 가정도 아닌 진실인양 받아드리고 난후,
그 위에 모든 사물의 원리를 펴 나가는 것은 치명적인 순환논리의 오류를 발생시킨다.
(제발, 우리나라의 밝은 앞날을 위해 교회에서는 학생들에게 이런 엉터리 논증을 교육시키지 말라.
한창 생각하고 사고하면서 머리를 회전시켜야 할 학생들의 머리를 굳어버리게 만들까 겁난다.)
어느 민족을 보나, 그 나름대로 절대주의 이름이 있고, 그 나름대로 체계적 이론이 있다.
그 절대자가 조물주는 안 되는가? 천지신명은 어떻고? 또 서아프리카의 우남보테 는 왜 안 되는가?
기독교인들은 그 수많은 세계의 창조주들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는 여호와를 안 믿으면
모조리 지옥이라고 생떼를 쓰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절대 주는 기독교의 여호와다" 라고 주장을 하려면, 그것을 보조할 객관적인 이론이 성립되어야
할 것이며, 기독교를 믿을 믿음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죽어버린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해명해내야만
할 것이다.
"기독교에 들어가 보았더니 그곳에 절대주가 있더라","기독교의 여호와를 믿지 않으면 모두 지옥에 가야만 한다"
라고 주장하려면 위의 모순점에 대해서 반드시 해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구한말,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가 우리나라의 유학자들에 의해 번역된 적이 있다.
그 책의 서문에는 "천주(天主)가 전 세계에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려면 얼마나 바쁘겠는가?
또 복음이 들어오기 전의 우리민족에게는 하나님이 없었겠는가?" 라고 유학자들이 언급했다고 한다.
그렇다. 그 말이 바로 정답인 것이다. 하나님, 또는 진리는 어느 민족, 어느 종교에게나 있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기독교의 신만이 진리이고, 다른 종교는 우상숭배요, 기독교를 안 믿으면 모조리 지옥이라는
여러분의 사고방식은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를 싸구려 종교집단으로 타락시켜 버렸다.
▶ 죄를 포맷(Format) 하기를 반복하는 기독교인
인간에 대해서 생각할 때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성선설과,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성악설로 대표되는 논리가 있다.
기독교는 철저히 성악설에 근거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한복음 8장 44절]
위의 구절에서 예수는 인간 자체가 마귀의 후손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여자가 잉태를 하는 것 자체를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레위기 12장에서는 여성의 임신 자체를 부정하다고 선포하고 있다.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다."[시편 51장 5절]라고 탄식하는 구절에서 아주 잘 나타난다.
그렇다면 그 원죄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창세기 3장 3절~5절]
선악과에 대한 부분에서 여호와는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다.
여호와는 선악과를 먹으면 죽게 된다고 말했으나 뱀은 진실 되게 선악과를 먹어도 안 죽는다고 가르쳐 주었다.
만약 뱀의 말을 안 들었으면 인간은 지금도 축생과 같은 미물처럼살고 있을 것이다.
여호와가 인간을 만든 원래 목적은 바로 아무것도 모르는 짐승을 만들었던 것인가?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것에 대한 여호와의 신경질적 반응은 지식과 신앙은
결코 양립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인가? 그냥 여호와를 맹신만 하라는 것인가?
어쨌든 간에 피조물인 인간이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사탄(뱀)의 말을 믿고 따랐으므로
죄를 지은 것이 되었고, 대대손손으로 유전되는 이 죄를 기독교인들은 원죄(original sin)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원죄는 인간이 아니라 신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여호와야 말로 쓸데없이 금기를 만들어 놓고 그걸 깼다고
가혹한 연좌제(緣坐制)의 형벌을 내린 죄의식을 느껴야 한다.
애초에 선악과를 만들 때 인간이 그걸 따먹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걸 전능한 신이 몰랐을까?
전통적인 신학의 대답으로는,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자유의지를 악용한 인간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렇게 주장한다.
"책임을 찾는 모든 곳엔 복수의 본능이 있었다. 이 복수본능이 수 천 년 동안 인간의 주인이 됐다....(중략)
..의지에 관한 이론, 이 치명적인 거짓말은 처벌을 위해 발명된 것이다."
[우상의 황혼 / 반그리스도(니체전집 9) / 송무 역 / 청하]
자유의 지론은 열등한 복수 본능이 만들어낸 허구라는 이야기다.
또한 사람이 따먹을 것을 미리 알지 못하고 그것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전지(全知)에 문제가 있고,
또 따먹는 것을 따먹지 못하도록 하지 못한 것은 전능(全能)에 문제가 있다.
반대로 이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 선악과를 만들고 따먹도록 내버려두었다면
위에서 니체가 주장한 것처럼 여호와의 도덕성에 크나큰 문제가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더욱이 따먹는 것에 대한 대가가 보통의 것이 대대손손 원죄로 이어진다고 한다면
선악과를 만들지 말거나 그러한 명령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가정에서도 칼을 아무데나 놓아서 아이들이 손을 베었다면 아이들이 야단을 맞기도 하지만
그렇게 칼을 조심 없이 놓아둔 어머니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물며 전지전능하다는 신이라는 작자가 사람이 따먹을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
선악과를 만들었다는 것은 여호와는 사랑의 하나님일수가 없고, 흉폭한 우주의 절대 독재자 밖에 될 수 없다.
그런데 사실, 기독교가 등장하기 전의 유대교에서는 원죄라는 개념이 제대로 정립된 적이 없었다.
예를 들어 욥기를 보면 그것을 알 수가 있다.
여호와는 '동방에서 가장 큰 자'라는 욥에게 믿음의 시험을 내린다.
욥은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모든 종들을 죽어버리고, 그의 자녀 10남매(아들7, 딸3)까지도 일시에 몰살시키는
비극을 당한다. 게다가 그의 몸까지 옴으로 썩어든다.
(믿음의 시험치고는 정말 대단하다. 아들딸 종들까지 죽여 버렸으니.....)
그를 위로하러 온 친구들은 그러한 욥을 꾸짖으며 죄를 지었기에 벌은 받은 것이라며 여호와에게 용서를 빌라고
간곡히 충고한다. 그러나 욥기 31절에서 욥은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무엇을 자복하며 무슨 용서를 빌라는
말이냐고 항변한다.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욥기 32장 1절]
개역한글판의 구절이 애매모호하여 공동번역판의 동 구절을 다시 올린다.
"이렇듯이 욥이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자 세 친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욥기 32장 1절 / 공동번역판]
욥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지었을 수 있는 죄는 고사하고 원죄 따위까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것이다.
요새 교인이나 목사들은 그를 교만하며 불순종한자라고 힐난하며 저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의 친구들과 엘리후는 욥에게 죄를 사죄하고 용서를 빌라고 계속해서 다그친다.
그런데 여호와는 욥을 의롭다 하고 여호와에게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빌라고 충고한 그의 친구들에게는
위선자라 엄하게 꾸짖으며 속죄제를 바치라고 요구한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욥기 42장 7~8절
원죄론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터툴리안(terturian AD 155~230)이라는 카르타고 태생의 사람이다.
원래 그의 양친은 이교도였고 그 또한 법률가로서 40세에 기독교로 개종을 한 로마인 이었다.
터툴리안이 사제였다는 주장도 있기는 하나 객관적인 사료들 중 어느 무엇도 그 사람이 사제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의 주장은 곧 잊혀 졌고, 다시 원죄론이 나오게 된 것은
고백록(Confessions :참회록이라고도 함)으로 알려진 어거스틴(Augustinus)에 의해서이다.
그는 354년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의 도읍에서 태어났으며 모친은 기독교인이었으나
그의 부친은 이교도인으로 알려져 있다.
어거스틴 이전의 교부들은 인간 밖에서 악(惡)을 찾으려고 했지만,
어거스틴은 인간의 내면에서 찾으려고 했다.
즉 인간의 의지의 왜곡을 악으로 본 것이다.
또한 어거스틴은 젊었을 때 방종의 삶을 살고 사생아까지 가졌던 경험을 통해
성(SEX)을 지극히 죄악시했으며, 인간이 가진 성욕이 '원죄'라고 규정했다.
그는 자신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던 펠라기우스(Pelagius)라는 성직자를 논쟁 끝에 이단의 죄를 씌워,
결국 430년경 에베소 교회에서 정죄 당하게 만들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원죄는 자손에게도 이어지고 세례 등을 통해 구원 받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구속만이 유일한 죄 씼음이고, 아담은 원죄로 인해 죽었다"는 논리를 편 반면,
펠라기우스는 "아담은 처음부터 죽을 사람이었고 새로 출생한 인간은 죄를 짓기 이전의 아담과 같다.
또 율법(10계명)을 지키는 것으로도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논리는 많은 지지자들을 등에 업은 어거스틴에게 밀릴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 그는 단죄 당했다.
결국 이런 배경 속에서 등장한 원죄론은 신에 대한 의문 없는 믿음을 강요했고,
그 결과 피지배 계층에게는 절대적인 굴레인 원죄를 씌워 그들의 삶과 의지를 구속해버렸다.
그리고 원죄론을 믿는 기독교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참으로 절망적이고 비관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미, 노아의 방주에서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들이 전부 멸망해 버렸다고 하면서도,
성경의 마지막 요한계시록은 종말론으로 결론을 맺는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원죄란 도대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세기 8장 21절]
사람이 어려서부터 악하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공동번역판에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마련"이라고 되어 있는데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하게 태어난다는 이야기 인가?
노아의 홍수로 다 쓸어버리고 의인이라는 노아의 가족만 살려줘 놓고서는 한다는 말이 어려서부터 악하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에서나 아말렉족 대학살에서처럼 죄도 짓지 않은 갓난아이들까지도 가리지 않고
다 죽이는 것인가?
또한, 성경의 마지막 요한계시록에는 종말이 예언되어 있지만,
정작 노아의 홍수 이후에 여호와는 다시는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고 창세기에 분명히 말해놓았다.
여호와는 변덕장이 신인가?
선택받은 노아의 자손인 우리도 타락하여 또 다시 종말을 피할수 없다는 논리는 무엇인가?
또,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때도 여호와에게 선택받은 의인 롯과 그의 두 딸만 구하고 성 안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은 타락했다는 이유로 불로 심판을 내린다.
그런데 정작 의인이라며 선택받은 롯과 두 딸이 동침해서 자손을 낳는 엽기적인 짓을 저지른 것은
뭐라고 말해야 하나?
선택받은 의인인 노아와 롯이 그러할 진데, 인류의 종말에서 구원받을 기독교인이
언제 또 타락을 저지르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닌가?
인간은 신의 인형이 아니다.
스스로의 자유 의지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 십계명의 제2계명에 의하면 아비의 죄는 아들 3~4대까지만 이른다고 한다
아무리 무거운 죄도 3~4대만 지나면 그 후에는 아버지의 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원죄가 셀 수도 없는 후손에게도 이어지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을 해야 할까?
그리고 또 다시 타락한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해 보내어진 자가 예수라고 한다.
그러나 그가 무슨 증거로 우리의 죄를 대속 했는가?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기에 도덕적 결함들을 안고 산다. 그걸 원죄라 부른다면 좋다.
그런데, 불완전한 우리가 그러한 한계점을 갖고 살아가는 것과 그걸 용서하는 게 여호와이고 예수라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기독교인들의 논거는 이러하다.
"인간은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다 - (중간 생략) -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
과연 예수가 무엇이길래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것인가? 그가 신의 아들이라는 증거는 있는가?
그리고 그의 죽음이 인간의 죄를 대속했다는 것은 무엇으로 증거한단 말인가?
자그마한 유대 땅에서 나타난 어느 종교가의 탄생과 죽음에 우리민족이 혹은 아메리카의 인디언이,
중국인들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기독교인의 삼단논법에서는 중간부분이 빠져있다.
그대들은 가운데를 채워 볼 자신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함부로 원죄론을 떠들고 다니라 마라!
기독교는 오로지 이분법적인 흑백논리에 치우쳐져 있다.
예수 믿으면 천국이요 안 믿으면 지옥이고, 성악설이 진리요 성선설은 잘못되었다고 보는 이분법적인 흑백논리다.
그 이분법적인 흑백논리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하고, 마녀와 이단으로 몰려 처참하게 죽음을 당했는가?
기독교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하는 흑백논리에 빠져 있다.
어찌 인간의 마음속에 선, 또는 악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인가?
기독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책감을 적나라하게 자극한다.
그리고는 예수가 우리의 죄를 사해준다고 한다.
마치 병 주고 약 주듯이, 사람들은 이런 챗 바퀴에서 심적으로 점점 매이게 된다.
자신의 죄책감을 포맷(format) 해준다는 믿음에서 떠날 래야 떠날 수가 없다.
계속적인 범죄함과 포맷함(회계) 속에 익숙해져 버려서 때론 죄를 짓는 다는 것에 대해서 둔감해지게 된다.
그렇다! 범죄함에 대해서 둔감해지게 만든다.
불교에서는 그 모든 것을 업으로 돌린다.
현생에 악덕한 업을 쌓았으면 후생에 그것이 업이 되어 그를 괴롭힌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러한 것이 전혀 없다. (필자는 예를 든것일 뿐, 불교신자가 절대 아니니 오해마시길.)
예수가 말한 포도나무밭 일꾼 우화(마태 20:1~16)에서 늦게 온 일꾼도 같은 보상을 받듯이,
어떠한 죄를 짓더라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사해 진다고 한다.
교도소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종교는 단연코 기독교이다.
온갖 짐승 같은 짓을 저지르고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도 사형당하기 전에 기독교로 개종하면
모든 죄가 씻기어 천국을 보장받는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짐승 같은 짓을 저지른 사람이 회개해봤자 그의 마음이 어떤 수준이라는 것인가는 뻔한 것이다.
말하자면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잘못을 저질러도 교회 가서 기도하면 그만이다. 기도라는 것은 참으로 값싼 것이다.
노력도 안 드는 것일뿐더러, 그저 입으로만 중얼거리면 된다.
기독교인들이 타 종교인에 비해 인격적으로 신뢰받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이 잘못된 마음을 품었다는 걸 깨달았으면 피해 입은 사람에게 사죄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 중요하지,
예수에게 백번 천번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해도 그 사람의 기본적인 마음이 틀이 변화하지 않으면
다 헛된 일이 아닌가?
그 사람의 기본적인 마음 자체는 조금도 변화하지 않았는데 예수에게 죄를 사함을 받았다고
착각 속에 빠져 사는 기독교인들을 보면 정말 어처구니없다.
예수에게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해보기 전에 스스로의 마음이 과연 변화했는지에 대해
한번 뒤돌아보도록 권한다.
기독교를 믿게 되면 인간이 죄인으로 밖에는 안 보인다.
기독교의 전도방식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따뜻하고 선한마음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자체를 죄인으로 몰아붙이며 신에 의지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끝없이 범죄하고 회개하는 현상을 계속 거듭하게 만든다.
기독교는 원죄론을 들먹이며 인간을 죄인으로 몰아붙이며 전도하기보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아름답고 선한 마음을 끄집어내는 것으로 전도방법이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성악설이라는 흑백논리가 아닌, 인간의 마음에는 두 가지가 함께 공존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라"가 아니라, "선한 마음을 품어라"라고 전도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