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세의 생을 역사에 뿌리다.
심훈의 상록수 주인공 "최용신"
최용신(崔容信, 1909-1935)은 26세의 짧은 삶을 산 농촌계몽 운동가였다. 심훈(沈熏, 1901-1936)의 소설『상록수(常綠樹)』의 주인공 채영신(蔡永信)의 실제 모델이었다. 최용신은 농촌의 문맹 퇴치를 위해 헌신했다. 당시 소련에서 브나로도 운동이란 문맹 퇴치운동이 펼쳐졌고 국내에서도 문맹퇴치운동을 할 때였다. 교계에서는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안에 농촌부를 두고 배민수 목사를 중심으로 애국혼을 심고 ‘농민생활’이란 월간잡지를 간행하며 활동했다. YMCA에서도 문맹퇴치에 나섰다. 전 국민의 10%정도 밖에 한글을 읽을 줄 모르던 때였다.
최용신은 1909년 8월 12일 함경남도(咸鏡南道) 덕원군(德源郡) 현면(縣面) 두남리(斗南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최창희(崔昌熙)의 2남 3녀의 5남매 중 넷째였다. 1909년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이 무너져가던 시기로서, 1909년 10월 26일에는 조선의군 참모중장 안중근(安重根, 1879-1910)장군이 일본의 심장과 같은 여러차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총살한 일도 있었다.
최용신의 조부는 개화에 앞장서 덕원에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웠다. 그 집안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었다. 최용신은 가난했던 삶이 훗날 여학교 시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연민의 정을 갖게 되었고 “살 길은 농촌계몽에 있다.”는 신념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천 연두(天然痘)에 걸려 아픔을 겪었다. ‘마마’라고 불리던 이 질병에 걸리면 얼굴에 상처가 덧나 매우 보기 흉한 흔적이 평생 남게 되는데 흔히 이런 얼굴을 ‘곰보’라고 불렀다. 물론 지석영(池錫永, 1855-1935)의 선구적인 노력과 에비슨(Oliver R. Avison, 魚丕信, 1869-1956)이 제중원(濟衆院)과 세브란스(Severance) 병원에서 전개한 노력으로 천연두는 점차 사라져 가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현대의 의술전파가 늦었던 지방에서는 1920년대까지도 흔하게 발병한 질병이었다.
최용신은 9살이던 1918년 봄부터 두남리에 있던 두남학교에 다니다가 보다 나은 교육을 받기 위해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루씨여자보통학교(樓氏Lucy 女子普通學校)로 전학을 하였다. 졸업한 후에는 같은 계열인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사실상 근대 교육의 측면에서는 오지라고 할 정도로 열악한 지역이 함경도였다. 하지만 1896년에 감리교회가 세워진 이래, 1903년 11월 19일 여선교사 갈월(A. Carroll) 양과 놀스(Mary Knowles) 양이 원산 산제동(山祭洞)의 초가집에서 15명의 학생을 데리고 서양식교육을 시작하였다. 차츰 인근 지역에 교육의 우수성에 대한 소문이 나면서 1907년에는 학생이 70명으로 늘어났다. 1909년 제1회 졸업생도 배출되었다. 보다 근대적인 설비를 갖추기 위해 선교사들이 노력한 결과 마침내 1913년에 미국의 독지가 루씨(Lucy Cuninggim)의 후원으로 4층 양옥 규모의 교사가 신축되었다. 1921년 4년제의 고등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23년에는 사립 루씨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1925년 봄에는 고등과(高等科) 제1회 졸업생도 배출되었는데, 졸업생 15명 중 12명은 교사가 되었고, 1명은 이화전문학교(梨花專門學校), 1명은 이화유치원 사범과, 그리고 1명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京城女子高等普通學校) 사범과에 입학할 정도로 원산 지방에서는 최고의 학교로 자리잡았다.
최용신은 바로 이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탁월한 성적을 얻었다. 루씨학교에서 교목역할을 보조하였다. 20년 동안 신앙을 지도한 전희균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최용신 양은 루씨학교 재학 중에 성서 시험에서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만점을 받았는데, 자기 평생에 이같은 예를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최용신은 당시 많은이들 처럼 점심을 굶어가며 공부하였고, 등록금을 내지 못해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하였다.
또한 이 시기, 즉 1925년 최용신은 같은 고향 후배인 김학준(金學俊, 1912-1975)과 약혼을 하게 된다. 김학준은 최용신과 함께 교회 학생회를 이끌며 회장의 역할을 하였고, 이 때 최용신은 부회장직을 맡아 친숙하게 되고 사랑이 싹텄다. 양가 모두 약혼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두 사람의 뜻을 이해하고 약혼에 동의하게 되었다. 다만 김학준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관계로 결혼식은 후일로 미루었다. 바로 김학준이『상록수』의 남자주인공 박동혁(朴東赫)이다.
마침내 최용신은 1928년 봄,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
"나는 농촌에서 자라난 고로 현 농촌의 상황을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다. 농촌 여성의 향상은 우리들의 책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 생활만 꿈꾸어야 옳은 것인가?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퇴치에 노력해야 옳을 것인가? 말하노니 우리는 손을 서로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
최용신은 황에스더 선생에게 깊은 감화를 받았다. 평소 자신의 이상인 농촌운동을 실현해야겠다는 의지로 불타오르게 되었다. 황에스더 여사는 미국의 한 독지가로부터 받은 100달러를 가지고 농촌운동을 할 대상지를 찾던 중, 같은 감리교의 안경록 목사(安慶祿, 1882-?)부터 황해도(黃海道)의 용현리(龍峴里)라는 두메산골을 추천받았다. 용현리는 당시 40가구에 주민 300여 명이 살고 있었지만 대부분이 한글조차 모르는 상황이었다.
한편 최용신이 천곡에 부임한 1931년은 농촌운동에 있어서도 하나의 계기가 되던 해였다.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4회에 걸쳐 전국적인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제3회까지 이 운동은 '브나로드(v narod)'라고 불렸으나 제4회부터는 계몽운동으로 바뀌었다. 본래 브나로드는 '민중 속으로'라는 뜻의 러시아말로 러시아 말기에 지식인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면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구호이다. 이 구호를 앞세우고 1874년에 수많은 러시아 학생들이 농촌으로 가서 계몽운동을 벌였는데, 그 뒤부터 이 말이 계몽운동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국내의 계몽운동은 1920년대 초 서울의 학생과 문화단체, 도쿄[東京]의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다. 심훈이 최용신을 대상으로 쓴 소설 『상록수』는 바로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소설 현상에 당선된 작품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경멸을 무릅쓰고 예수의 사랑을 전하며, 학교를 개설하여 한글과 실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가르치는 최용신의 노력은 점차 안정을 찾았다. 그리하여 부임 후 3개월이 지나자 장소가 좁아질 정도로 인원이 모이게 되어 본격적으로 교육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학원인가를 시도하였는데, 암초에 부딪히게 되었다. 왜냐하면 독립운동가인 황에스더 여사를 매우 껄끄러워한 일본 경찰의 방해가 집요했기 때문인데, 마을 유지들의 도움으로 다행히 1932년 5월에 정식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최용신 혼자서 60여 명의 학생을 3부제로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던 황종우 선생이 동역자로 부임하여 상황이 조금 나아지게 되었다. 그는 군포공립보통학교(軍浦公立普通學校)를 합격하고도 집안 사정상 입학하지 못하자 18개월간 최용신 을 도우러 온 것이다. 황종우 선생은 이후 일본의 의과대학을 나와 부산에서 의사로 개업하였고, 교회에서도 장로로 봉사하였다.
날로 학생들이 늘어나고 교육의 효과가 나타나자 제대로 된 학교를 만들자는 최용신의 제안에 주민들이 호응하기 시작하였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선생의 믿음에 모두 감동받았다. 주민들의 헌금에 더해 둔대교회(芚垈敎會)의 설립자인 박용덕(朴容德)씨의 토지 기부에 힘입어 마침내 1933년 1월 15일 낙성식이 거행되었다. 바로 이 낙성식 날 참석한 사람들이 낸 기부금으로 그간 부족한 건축비를 모두 갚을 수 있었으니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110여명이나 되는 학생들을 일제는 60명 이상은 수용할 수 없다고 못 밖아 50여명을 눈물을 흘리며 돌려 보내야하는 일이 일어났다. 선생도 울고 학생도 울며 헤어지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 거기에다가 최용신 선생이 담임하는 천곡학교 때문에 일제의 공립보통학교의 정원이 미달되자 일제의 억압은 더욱 거세졌다. 더군다나 일본 경찰은 천곡학원에서 성경과 조선어를 가르친다고 더 강경한 자세로 압박하였다.
한편 최용신은 평소 이전에 마치지 못한 학업에 대한 미련이 있었는데, 이에 더해 선생의 가족으로 일본에서 사업을 하던 오빠의 이혼문제가 대두하고 약혼자인 김학준으로부터 연락이 줄어들자 마침내 1934년 3월 일본의 고베신학교(神戶神學校)로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다행히 일본에서 그간의 인간적인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었지만, 막상 공부를 하려 하니 최용신 선생의 눈에는 천곡 마을의 어린이들의 모습이 밟혀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에 더해 최용신은 각기병(脚氣病)이 걸려 병석에 눕게 되었다. 때마침 천곡마을에서는 끊임없이 그의 귀환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약혼자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학업 중이었기에 최용신은 끝내 혼자 귀국하게 되었다.
최용신은 학생, 그리고 주민들과 감격의 해후를 천곡학원에서 하고 나날이 더 열심히 사역하였다. 그러나 YWCA로부터 월 20원의 지원금이 끊기게 되자 경제적으로 매우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가난한 농민 학부모들과 주민들이 낼 수 있는 돈으로는 도저히 학원 운영이 될 수 없었다. 최용신은 1934년 10월 30일 『여론(女論)』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하였다.
최용신의 눈물의 기도로 류달영(柳達永, 1911-?)이 도움을 주어 천곡학원은 운영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간 최용신이 겪은 마음의 고생이 너무 커서일까. 그렇지 않아도 육체적으로 약해 병고에 자주 시달리던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소변조차 볼 수 없는 중병에 걸리고 말았다. 1935년 1월 20일에는 화농성(化膿性) 복막염(腹膜炎)으로 더 병이 악화되었다. 최용신은 마지막까지 학원만은 잘 살려서 운영해 줄 것과 약혼자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교회와 친지들에게 받은 큰 은혜를 갚지 못하고 먼저 가니 죄송하다는 말을 남겼다. 1935년 1월 23일 오전 0시 20분 최용신은 25년 6개월의 불꽃같은 삶을 마치고 하나님 곁으로 떠났다.
"겨레의 사람들아
위대한 사람이 되는데 네 가지 요소가 있나니
첫째는 가난의 훈련이요
둘째는 어진 어머니의 교육이요
셋째는 청소년 시절에 받은 큰 감동이요
넷째는 위인의 전기를 많이 읽고 분발함이라."
최용신이 사랑해 마지 않던 약혼자 김학준은 귀국 후 결혼하고 성균관 대학교(成均館大學校)와 조선대학교(朝鮮大學校) 교수를 지냈지만 1975년 3월 11일 임종 후 미망인 길금복(吉金福) 여사의 양해로 천곡마을에 있는 최용신 선생의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최용신의 희생적인 농촌 사랑의 삶에 대해 대한민국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001년 2월 문화관공부가 선정한 문학인물로 지정되었으며 2002년 경기도를 빛낸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