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이 한양에 들어와 서강패를 도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군왕의 무도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삼한에서 제일 가는 호걸이라 자신을 호칭하던 군왕은 당대의 호걸인지는 몰랐으나 알아 주는 시인이기는 했다.
그는 재위 중에 2백여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 속에 일견 주옥 같은 여러 시편을 남기기도 했다.
그 중에서 블랙 유머를 즐기던 성품을 잘 들어내 온 조정의 신하들을 공포에 떨게 한 시를 지은 것도 이 때쯤이다.
내 성품 어리석어 잘못 모르고
신하들과 즐겨 마셔 위엄 잃었네.
궁중 비밀 발설하는 자 있으면
풍상 맞은 역적 신세 면치 못하리.
ㅡ 연산군ㅡ
군왕은 자신의 정사를 비판하거나 충고하는 모든 간관(諫官)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 조정이 텅빌 지경이었다. 군왕은 간관의 씨를 말리다 못해 아예 사간원 홍문관 양사를 폐쇄하고 사헌부의 지평마저 없애 언로를 완전히 막아버렸다.
그리고 군왕은 잔인한 형벌을 즐겼다.
손바닥 뚫기. 담근질. 절흉(切胸)이라는 가슴 뻐개기. 산채로 뼈 발르기. 마디마디 자르기(寸斬). 죽여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을 개발하여 전국에 널리 보급하여 신하들과 백성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유가 없었다.
그저 그날 기분에 따라 신하들은 죽거나 장타를 당하거나 원지로 부처되는 실정임에 신하들은 군왕을 만나는 자체를 두려워 했다. 한 달에 한번 있는 조회날이 오면 신하들의 좌불안석은 극에 달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맑지 못하다 하여 정3품 당상관이 온 신하들 앞에서 장을 맞는 실정이었다.
기방에서 돌아온 미륵은 백호를 불러내 초명에 대한 탐문을 들었다. 어느새 새벽이 다가 오고 있었다.
"초명은 양반 가문의 소생입니다."
"그래? 자세히 얘기해 봐."
"네. 지난 무오사화 때 떼거지로 죽은 대신들 중 참의를 지낸 윤무식의 여식입니다. 가산을 몰수 당하고 남자들은 모두 참수당해 대가 끊겼죠. 그 집안에서 살아남은 자는 초명과 그의 여동생 이렇게 단 둘입니다. 모친은 사고가 난 날 충격으로 죽어버린 모양입니다."
"그런 일이..."
"그리고 초명은 북촌 기방에서 오포장을 조방 삼아 기생짓을 하다가 어쩐 일인지 당취패에 넘겨져 가슴을 도려내는 흉사를 당하고 인천부로 내려갔답니다."
미륵은 갑자기 숨이 멎는 충격을 받았다. 초명의 내력이 범상치 않음은 알아 보았으나 정통 사대부의 자손이란 사실은 놀랄만한 것이었다.
동시에 오포장이 그녀의 조방이었다는 것과 불한당 당취에 넘겨져 가슴을 도려내지는 흉사를 당 했다는 것은 또 한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오포장이 다시 초명을 찾는다는 겁니다."
"뭐야?"
"인천부로 사람을 내려보낸 모양입니다. 데려오라고 말이죠."
"호! 여자의 가슴을 도려내는 학대를 가해 내치고 다시 부른다...?"
미륵은 잔인하고 교활하기 그지 없는 오포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동시에 방금전 오포장을 만나고 온 것이 신기했다.
"알았다. 그만 가서 쉬거라."
미륵은 백호를 집안으로 먼저 들여보내고 다림방 밖에 외롭게 서 있는 나무 아래를 서성였다. 한 쪽 가슴이 없는 여자... 미륵은 초명의 처지가 한 없이 가엽게만 느껴졌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횡포였다. 군왕은 신하들을 그렇게 대했고 신하는 백성을 그렇게 대했다. 무자비했다. 세상의 도는 이미 땅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
미륵이 다림방 사립문을 나오는 두 사람을 보고 주춤했다. 비호가 초명을 따라나오다 미륵을 보고 인사를 했다.
"이 새벽에 어디를 가시려 하슈?"
"남산에요. 다녀온 후 연유를 말씀 드리죠."
초명이 풀기 없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는 새벽을 밟고 사라졌다.
ㅡ아, 여전히 아름답구나.
미륵은 독백을 하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뒤로 벌렁 누웠다. 천장 위로 초명이 방실방실 웃었다. 방글이가 따로 없었다.
"오포장이 문제군! 보통 인사가 아닌데..."
미륵은 오포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오직 기찰(譏察)을 위해 태어난 인간이었다. 교활하고 잔인하며 매서웠다. 그만큼 기찰 능력이 탁월했고 포청의 좌사와 우사를 통털어 제일가는 포장이었다.
"그 놈도 아예 접어버려...?"
미륵의 머리속이 복잡했다. 순전히 초명을 알고 나서 생긴 고민이었다. 미륵은 잠자리가 불편하지 않은 데도 이리저리 뒤척였다. 여명이 창살을 비집고 들어올 즈음 미륵은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비가 내렸다.
뜨거운 비였다. 장우(長雨)였다. 장대비가 하늘이 뚫린 듯 쏟아져 내렸다.
미륵은 어느 초가의 마당에 있는 평상 위에 누워 한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 ... !'
여자의 숨결이 뜨거웠다. 빗물이 땅을 튀겨 평상 위로 올라왔다. 마당 위에는 용오름이 나타나는 듯했다.
후두득.
후두득.
비 떨어지는 소리가 우박이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여자가 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미륵은 허리를 꺾어 여자의 호흡에 조응했다.
여자의 얼굴이 구별되지 않았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도 도무지 떠오르지를 않았다.
뜨거운 비가 여자의 등 위로 떨어졌다가 낙수가 되어 미륵의 얼굴로 떨어져 눈물이 되었다.
" 초명..."
미륵은 초명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여자는 말이 없었다.
" 이런!"
미륵이 순식간에 몸을 날려 벽쪽에 붙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단검이 들려 있었다. 단검은 여명을 등 뒤에 받고 서 있는 사내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유령과 같은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고 비시시 웃었다. 귀신의 웃음 소리가 따로 없었다.
3. 검계
" 니놈은...?"
" 감히 포장에게 욕을 하는 인사가 있네요. 호호..."
놀랍게도 방안에 들어 와 있는 자는 오포장이었다. 기방에서부터 뒤를 밟아온 모양이었다.
" 아무리 포장이라 해도 이렇게 무단 침입을 해도 되는 거외까?"
" 호호, 그리 놀랐다면 사과를 하죠. 그건 그렇고 미륵씨...?"
오포장은 예의 빈정거림과 조소를 한데 섞은 듯한 어법으로 말을 이었다.
" 나에게 달리 할 말이 있는 모양이신데, 어디 장국집이라도 가서 해장을 합시다. 속 쓰리지 않으시유?"
"호호, 내 말이 바로 그거라니까요. 그리고 나는 오늘 임자에게 궁금한 게 하나 있고요. 아니 두 껀이네.. 호호."
오포장이 미륵의 뒤를 따라 나서며 말했다. 그가 미륵의 뒤를 밟아왔다면 초명을 보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미륵은 그것보다도 자신을 감쪽 같이 따라온 미행술이 놀라왔다.
오포장이란 사내는 과연 강적이었다.
장국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자 마자 오포장의 질문 공세가 시작 되었다.
미륵은 그의 질문이 당황스러웠다. 오포장은 엉뚱하게도 평성군을 묻고 있었다.
" 평성군댁에 자주 가는 이유를 말해 보세요? 왜 왈자가 군관 나부랭이들과 몰려다니며 평성군의 집을 출입하는지를요? 아, 나는 있죠. 진실이 아닌 대답은 아주 싫어하거든요. 알죠? 호호."
" 그건...?'
"호호, 그건요...?"
오포장은 박영문과 미륵 자신이 박원종의 집을 출입했던 이유를 묻고 있었다. 박원종이 오포장의 기찰을 받고 있는 것인가.
" 그냥 그저..."
미륵이 주저거렸다. 순간적으로 합당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내기 순장을 위해 갔었노라는 말을 하기도 힘들었다. 모든 도박은 국법으로 엄금하고 있는 사항이었다.
오포장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질문을 계속했다. 눈알이 독사의 눈처럼 반짝거렸다. 간지러운 목소리는 뱀의 혀처럼 니글거렸다.
" 평성군을 어찌 나같은 왈자패가 만만하게 보겠수? 경을 치려고..."
미륵이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 호호, 재미있군요. 그렇게 평성군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 그의 집에서 노름을 하다 소란을 떤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 ... ...!"
미륵은 오포장의 그 말에 망치로 정수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박원종이 오포장의 기찰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군왕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는 박원종을 기찰하고 있는 오포장이 새삼 놀라웠다.
" 서강패의 육손이와 한판 작패를 놓았다면서요? 호호, 아주 볼만했을 듯한데."
오포장이 미륵을 주시했다. 그의 눈빛은 아예 미륵의 안중을 뚫고 들어 와 영혼을 핥을 태세였다.
" 한판, 재미를 보려던 차에 그놈이 끼어 들어 와 판이 깨졌수."
" 육손이와 감정이 많겠군요? 그래서 요즈음 종도들을 단조리하여 서강패를 도모할 시비를 만들고 있나요? 그런거예요?"
"뭐라고 하셨수? 지금...?"
"호호, 임자, 내가 좌우 포도청의 국체 사건을 총괄 하는 포장임을 잊었나요. 한성안과 한저백리(漢低百里) 안의 모든 기찰이 나에게 모아진다는 거 말에요. 그리고 이 시래비 같은 년들아! 장국 시킨 지가 언젠데 아직도 한무 소식인게야?"
오포장이 화살을 느닷없이 주모와 일손을 돕는 그 집 며느리에게 돌렸다. 여차하면 한대 올라갈 판이었다.
" 죄송합니다. 밥이 뜸이 들... 악!"
오포장이 순식간에 주막집 며느리의 귀를 잡아 물어 뜯어 버렸다. 변태가 따로 없었다.
" 호호! 쌍년들, 임자, 대화 중에 미안해요. 나는 토를 다는 년들을 보면 왠지 다 죽이고 싶더라고요. "
" ... ...!"
" 그래서 종도들을 몰아 서강패와 전쟁이라도 하려고요?"
"그게 저..."
미륵은 오포장의 질문에 쩔쩔맸다. 핵심을 찌르고 들어오는 곳에 방비가 없었다. 그토록 은밀
하게 일을 진행시켜 왔어도 포청의 기찰은 한 수 위였다.
" 호호, 신경 안써요. 그깟 왈자패들의 다툼에 신경 쓸게 뭐 있나요? 호호. 안그래요?"
오포장이 한 자락을 깔고 들어왔다. 경우에 따라서는 왈자패들의 전쟁을 눈감아 줄 수도 있다는 뜻 같았다.
" 사실이지 그렇소. 육손과의 감정도 있고 또 당취라는 놈이 계속 시비를 삼고 있어 내 판가름을 생각하고 있소이다. 오포장께서 한 번 살펴 주오?"
"호호, 살펴 달라? 무엇을 살펴 주나요? 내가..."
" 그렇게만 해 준다면 오포장의 은덕을 잊지 않으리다. 그리고 서강패가 바치던 용체도 두 배로 올려드리고."
" 호호, 두 배라... 참 듣기 좋은 말이네요. 대신 나도 임자에게 하나 청이 있거든요."
오포장이 자신의 속내를 말했다. 그것은 미륵이 망원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반용간(反用間) 즉 이중간첩의 역할을 주문하는 것이었다.
" 호호, 달리 심각하게 생각은 마세요. 나는 평성군의 머리속이 궁금할 뿐이거든요."
" 머리속이라니 거 뭔 말이요?"
" 평성군은 도무지 멈출 줄을 모르는 인사란 말이에요. 도총관에 지중추부사를 겸하고 수백명의 노비 수천결의 전답... 그런데도 군관들을 불러모아 순장에 궁술에... 임자 내게 그 얘기를 들려 줄수 있죠? 그렇지 않다면 서강패 도모는 꿈도 꾸지 마세요. "
오포장이 자신의 말을 다한 후 장국밥을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저쪽 뒤편에 주모가 며느리의 다친 귀를 헝겁으로 감싸주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항의는 바로 포청행이었고 포청행은 바로 죽음이었다. 조정은 포청을 통해 한양 식민의 기강을 잡았다. 철권이 따로 없었다.
미륵은 밥맛이 없었다. 꼼작없이 오포장의 정보원으로 엮이고 있는 자신이 기가 막혔다. 그 순간 오포장이 질문 하나를 또 던졌다.
" 참, 잊어 먹을 뻔했네, 초명말이죠. 그 계집을 왜 한양까지 데리고 온거죠?"
오포장이 김치를 집어 입에 넣던 나무 젓가락을 탁자 위에 부러져라 내동댕이를 쳤다. 또 다시 그의 눈빛이 반짝거리다 아예 용암처럼 불타 올랐다. 가늘고 긴 입술에는 경련이 일어나는 듯했다.
" 그 여자는 나의 적소 근방의 기방에서 본 여자요. 한양에 일이 있다 하기에 내 며칠간 신원을 사주고 데리고 온거고... 뭐 잘못된 거라도 있소?"
미륵이 오포장에게 항의하듯 말했다. 오포장의 비인간적 작태를 따지고 싶었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 호호. 아뇨, 기생년을 돈 주고 끼고 다니는데 뭔 하자가 있겠어요? 내 질문은 그 계집의 맛이 어떻던가요?"
오포장이 예의 능글맞은 자세로 나왔다. 아직 그의 용건은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4. 슬픈 바다
이제 남은 것은 잃는 것뿐이라 해도
한번 해보자
우리의 사랑은 화장(火葬)용 나무더미니...
ㅡ도어즈.
수사본부가 해체되었다.
장안동에 대한 탐문은 아무런 소득 없이 끝이 났다. 기약 없는 탐문수사였지만 수사를 진행시켜 나갈 아무런 단서 없이 수사 본부를 폐쇄한다는 것은 형사반뿐만 아니라 경찰서 자체에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ㅡ 인사조치. 경위 노준호. 청문 감사관실.
서장은 사건 수사의 미진을 들어 담당 반장이던 노반장을 청문 감사관실로 인사조치를 하고 사건을 장기 미제 체제로 가져가기로 했다. 사건 발발 20일째였다. 그동안 관내에서는 또 한건의 살인 사건과 여러 건의 강도 사건이 발생해 더이상 진척 없는 사건에 매달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 노반장, 섭하게 생각지 말아."
보직 변경 신고를 하러 들어온 노경위에게 서장이 담배를 한 개비 권하며 말했다.
" 아닙니다. 시급하게 해결하지 못한 저의 책임입니다."
" 기강을 위해서 부득이 한 조치였네. 그리고 자네를 청문실에 두어 내가 가깝게 데리고 있는 이유를 아나?"
서장이 한숨을 내 쉬며 말했다. 초임 서장 발령지에서 연속으로 터지는 강력 사건 앞에서 그의 자신만만하던 패기도 한 풀 꺾인 듯했다.
" 무슨 말씀이신지?"
" 청문실이 하는 일이 뭐가 있나? 자체 감사라는 것이 다 그런 거 아냐. 한마디로 한직이지. 자네이곳에서 남일수 사건을 계속 수사하게."
"네에...?"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잖아? 지켜보니 자네는 아주 유능한 형사야. 아무 업무도 맡기지 않을 테니 이 사건 자네가 계속 수사를 해."
서장이 뜻밖의 임무를 맡겨왔다. 단독으로 비밀 수사를 하라는 지시인거다.
" 내 지시가 불합리한가?"
서장이 노경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서장의 얼굴에 사건에 임하는 지휘자의 각오가 뚜렸했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지휘자였다.
" 아닙니다. 저도 내심 안타까웠는데 이렇게까지 해 주시니...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 지금부터 나가 일을 보게. 대신 수사 정보 외는 인력을 도와 줄 수는 없네. 자, 자네 권총일세. 서에 안들어 와도 좋네. 무조건 사건을 해결해."
서장이 회수했던 노경위의 권총을 되돌려 주며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 주었다. 노경위는 비록 반장의 보직은 잃었지만 수사관 신분은 다시 회복한 것이었다.
노경위는 그 길로 집으로 와 소영을 차에 태우고 인천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월미도였다.
" 아빠, 어디 가는데...?"
" 을왕리 가보고 싶다 했지?"
" 아, 영종도 거기 바닷가. 해수욕장? 아빠 거기 가는 거야?"
소영이 믿기지 않는 듯 두번씩이나 반복해서 물었다. 노경위가 모는 98년식 소나타가 성수대교를 건너 경인가도로 접어들고 있었다.
"소영아, 오늘 바다에 갔다오면 아빠 한동안 집에 못 들어 오거든..."
" 밤 늦게라도? 소영이 잠든 것도 못보겠네?"
" 응. 사건이 하나 있거든 그걸 아빠 혼자서 해결을 하라는 서장님의 지시거든."
" 아빠 혼자서...? 피~ 그런게 어딨어? 무서운 사건을 어떻게 혼자서 한데...?"
" 글쎄말야. 소영이 혼자서도 잘 할 수있지? 병원 가는 날은 아빠가 데리러 올께."
" 이럴 때 밍키라도 있으면..."
" 밍키?"
" 아냐. 아빠."
소영이 노경위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 아냐, 이따 오는 길에 밍키하고 똑같은 강아지 한 마리 사자."
" 정말?"
" 그래. 이번에는 잘 키워봐. 아프지 않게 알았지?"
소영은 강아지를 사 주겠다는 말에 얼굴에 화색을 띠며 기뻐했다. 혼자만의 절대 고독 속에서 자신을 다져온 아이기에 강아지의 작은 숨결마저도 저리 그리운 것인가.
" 이름을 뭐라 할까? 아빠?''
'' 밍키라고 하지 그래."
'' 아냐, 이따 강아지를 보고 내가 지을거야. 음...뭐라 지을까?"
소영이 차창을 통해 부천 부평을 지나 인천으로 들어가는 도로변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이 많고 사색이 깊은 아이였다. 차가 인천 시내를 지나 하인천 해역사를 지나자 바로 바다가 보였다. 고속도로가 나 있는데도 노경위가 일부러 택해 온 길이었다. 소영이 옛날 왔던 그 기억을 떠올리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소영은 길에 대한 기억은 없는 듯했다.
" 저기 바다다!"
노경위가 월미도 선착장에 차를 멈추고 소영을 내려주었다. 바다 내음이 코를 찔렀다.
소영이 횟집이 죽 늘어선 방파제 옆을 걸어 바다를 감상했다.
소영이 두 손을 들었다 놓으며 한손으로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쓸기도 하면서 방파제 끝으로 끝없이 갔다.
" 소영아...!"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타고 내려 목젖까지 내려왔다. 노경위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소영이와의 마지막날이 저럴까.
소영은 긴 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바다로 갈 것이다. 노경위는 그 날이 오면 소영을 바다로 보내리라는 결심이 있었다.
이별이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고 노경위는 푸른 가슴으로 그것을 준비해 오고 있었다.
" 아빠, 나는 아무래도 바다에서 태어났나 봐?"
방파제 끝으로 따라간 노경위에게 소영이 말했다. 멀리 커다란 상선이 신호하는 기적이 처량하고도 구슬펐다.
" 그래, 소영이 너의 엄마는 바다야."
" 맞아, 아빠? 나 있지. 나중에 죽거든 바다에 뿌려줘. 알았지? 아빠 손으로 한 손 한 손... 아마 나는 행복할꺼야."
"... ...!!"
소영은 한가지 꿈이 있었다. 바다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란 믿음이었다. 바다가 어미기에 바다로 간다는 것이었다.
눈물은 붉다.
해당화 붉은 색감에
소녀는 바다로 오라.
너 붉은 눈물로
한 바다에 와
태양빛의 알을 낳거라.
4. 슬픈 바다
ㅡ 한강물은 통진(通津) 서쪽에 와서 남쪽으로 굽이쳐 갑곳 나루가 되었다가 다시 남쪽으로 흘러 마니산 뒷쪽 움푹 꺼진 곳에 이른다. 여기서 석맥이 물속으로 가로 뻗쳐 문턱 같이 되고 한 복판이 조금 우묵한 곳이 있는 데 이곳이 바로 손돌목(頂)이다.
바다는 바로 그 남쪽이며 이를 강화 바다라 한다. 삼남에서 올라온 큰 세곡선들이 손돌목 밖에 와서 만조를 기다렸다가 목을 지나 서쪽으로 곧장 흐르는 양화진을 거슬러 오르면 문수산을 지나 서강(西江)에 이른다. <택리지>
을왕리 바다를 돌아본 노경위는 내친 걸음에 소영을 데리고 강화도를 찾는다. 어려서 절집에 함께 가면 유난히 좋아하던 소영이의 기분 전환을 위해 하루를 모두 바치기로 했다.
"전등사... 아빠 처마밑에 무서운 얼굴로 벌서고 있는 나부상 그거 아직도 있을까?"
"나부상이라니...?"
"대웅전 처마 말야. 거기 조각상 있잖아."
"아, 그것이 나부상이야?"
노경위가 그때서야 전등사의 명물인 조각상을 기억하고 말했다.
"남편을 배반한 죄로 부처님의 벌을 받아 그 무거운 대웅전을 이고 있는 벌을 받은거래. 그러고 보면 울 엄마도 나빠."
" ... ..."
노경위가 소영의 넉두리를 들으며 차창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오래전 집을 나간 아내가 떠올랐다. 사치와 허영심이 있던 아내였다. 애초 경찰관의 여자로는 맞지 않는 여자였다. 노경위는 아내를 그렇게 이해하고 또 용서한 지 오래였다.
그러나 딸 소영은 어미를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워 하면서도 용서는 안되는 모양이었다.
"아빠, 여기서부터 걸어가야 돼?"
차가 전등사 아래의 커다란 주차장으로 들어서자 소영이 말했다.
"왜 걷기 싫어?"
"아냐, 나 걷고 싶어. 바람도 쐬고."
"소영이 안 힘들겠어. 집에 가서 아픈 거 아니지?''
노경위가 차를 세우고 소영을 차에서 내려 주며 말했다. 바람이 시원했고 햇살은 아직도 따뜻했다. 조금 있으면 저녁 노을이 아름다울 시간이었다.
식당에서 소영은 비빔밥을 한그릇 다 비우고 누른밥까지 몇 술 떴다.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전등사는 가을을 얘기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등사의 가을을 구경하기 위해 절집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아빠, 부처님은 진짜 계실까?"
소영이 전등사의 경내를 구경하다가 노경위에게 물었다. 소영의 핏기 없는 얼굴 위에 붉은 단풍이 투영되어 제법 홍조가 띄었다.
"소영이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나는 부처님은 없는 거라 생각해.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마찬가지로 그냥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믿음이라 생각해."
"왜 그런 생각을 하지?"
" 그냥... 몸이 아프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아빠, 부처님이 그런 생각을 한다고 미워할까?"
소영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대웅전으로 가 한 쪽 처마를 이고 있는 나부상을 바라보았다.
노경위는 대웅전 아래 편에 있는 작은 요사채의 마루에 앉아 소영의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남일수 사건의 핵심은 아이를 찾는 일이다. 남일수가 어떤 시설에 맡겼다는 아이를 찾아야 그 다음을 추적할 수 있는거다."
노경위는 독백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절집의 한 쪽 구석에 있는 약수터에서 물을 한컵 받아 마셨다. 돌틈에서 나오는 석수가 차고 독했다.
'아이를 찾고...'
노경위의 머리속은 온통 남일수 사건뿐이었다. 신원불상의 사체와 미륵이라는 글씨가 조각된 칼 하나 외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사건, 이 사건은 그야말로 과학 수사와 지능 수사의 만개를 꿈꾸는 현대의 경찰력을 비웃고 있었다.
가. 시체가 발견되었다.
나. 칼에 의한 직접 사망, 살인 사건이다.
다. 죽은자의 신원이 불명이다.
라. 조명인과의 만남을 유 할 때 살해자가 한국인이며 바둑의 고수임은 분명하다.
마. 살해자가 아이를 시설에 맡겨 놨다는 말을 했다.
노경위는 사건을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기 시작한다. 사건의 키는 아이였다. 그 아이를 찾지 못하면 조명인의 진술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한다.
"이제껏 너무 조명인의 진술을 너무 신봉한 것일까...?"
노경위는 모든 것을 다 의심한다는 수사의 원칙을 새삼 떠올렸다.
"따님과 함께 오셨습니까?"
"아, 네..."
노경위가 자신의 앞에 합장을 하고 서 있는 스님을 보고 예의를 표했다. 30대의 눈푸른 납자였다.
"아이의 얼굴이 밝지를 않습니다. 어디 아픈 곳이라도...?"
"스님, 아이를 한번 일별하고 아이의 아픔이 보이십니까?"
"아닙니다. 저는 그런 도통은 없지요. 다만 아이와 아빠의 모습이 그리 보였습니다. 힘드시면 이곳을 찾으십시요. 전등사는 일체고를 묻지 않고 일체고를 아파할 뿐입니다. 나무 관세음..."
젊은 스님이 알듯 모를 듯한 소리를 하고 법당을 벗어나 선방쪽으로 갔다. 소영이 법당 안에 있었다.
"... ...!"
만다라의 꽃밭이 법당 안에 피어 있었다. 만다라는 붉고 푸르고 노란 색감의 번짐과 상호 교류로 수만 수억 개의 꽃을 피워 눈부신 아름다움과 짙은 향으로 이승의 소식을 저승으로 보내고 있었다.
ㅡ 나무 관세음 나무 관세음...
어디선가 천수경의 독송이 들려 왔다. 법당 안에서 나는 독송은 아니었다. 소영이 만다라의 화원 속에 앉아 있었다. 소영의 얼굴은 편안했고 눈가에는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노경위는 만다라의 온갖 형상속에서 부검실에 누워 있던 남일수의 사체를 보았다. 그의 죽음을 처음 본 현장에 소주 한병을 쏟아붓고 억울한 죽엄을 위로는 했으나 아직...그는 억울한 신원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소영아 이제 그만 가야지?"
노경위가 일어설 줄을 모르는 소영이를 보고 귀가를 재촉했다.
"어머! 아빠 내가 여기 많이 앉아 있었나 보다."
소영이 자리를 일어서며 말했다. 소영의 몸에서 향내가 났다.
"응, 소영이 여기서 살아도 되겠다. 법당 안이 안 무서워?"
"아니... 나는 아빠, 법당 안에 있는 색상있지. 붉고 푸르고 노랗고...나는 그 색들이 좋더라.
꽃비 있지 아빠, 착한 사람이 죽으면 꽃비가 온다면서 아빠, 나도 죽으면 꽃비가 올까?"
" ... ...!"
소영은 아직은 어리고 철이 없는 아이였다. 아빠의 찢어지는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고 있지 않은가.
그때 노경위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력반의 윤형사였다. 아이를 보호하고 있는 시설에서 연락이 왔다는 것이었다. 남일수가 맡겨 놓은 아이였다.
4. 슬픈 바다
노경위가 윤형사의 전화를 받고 서울로 도착한 것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소영이는 차의 뒷자리에 엎드려 잠이 들어 있었다.
"자식하고는..."
노경위는 차안에 걸어 놓았던 가을 잠바로 소영을 덮어주고 자명사(慈明寺)로 들어갔다.
자명사는 행당동에 있는 작은 절이었다.
"이렇게 늦게 죄송합니다."
노경위의 전화를 받고 기다리고 있던 스님이 노경위를 맞으며 집안으로 안내를 했다. 초로의 스님은 자신의 법명을 윤명이라 했다.
자명사는 대처승이 운영하는 사찰이라 가정집이 절과 함께 붙어 있었다. 그러나 작은 법당과 선방이 오랜 역사를 가진 덕분에 전통 사찰로 등재되어 당국의 관리를 받고 있어 절집의 풍광이 고풍스러웠다.
"소승의 불찰이외다. 남거사의 흉거를 모르고 있다가... 이 전단도 아까서야 보았지 뭡니까?''
윤명 스님이 남일수를 찾는 전단을 내 보이며 말했다.
윤명 스님이 안내한 곳은 서재였다. 거실과 서재안이 온통 탱화들로 가득했다.
"이 사람이 확실합니까?"
노경위가 남일수의 사진을 꺼내 윤명 스님에게 다시 확인을 시켰다.
"맞습니다. 이사람이 자신의 아이를 며칠 간 만 맡아 달라 했지요. 그러더니..."
윤명 스님이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모습은 도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일체고를 묻지 않고 일체고를 아파한다던 전등사의 스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골치 아픈 사건이 자신 앞에 던져진 것이 고민인 모양이었다.
"남거사라 하셨습니까?''
"네, 남일수라 했습니다. 두 달전인가 이 친구가 열 살된 자기 딸을 데리고 절을 찾아왔습니다."
"평소에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고요?"
"아닙니다. 처음 법당에와 기도를 하고 제법 많은 시주를 하고 부처님에 대한 사랑이 많아 보여 제가 방을 하나 내 주었죠. 달리 갈 곳도 마땅치 않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곳에 얼마나 있었습니까?"
노경위가 수첩에 차곡차곡 메모를 하며 물었다.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남일수의 비밀을 엿볼 수 있을까 하는 흥분이 형사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거의 두 달여를 있었습니다만 밥을 먹은 건 보름도 안될겁니다."
"일종의 하숙을 한 셈이군요?"
"사실, 저의 절에 고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몇 명 있기도 합니다. 열악한 절인 탓에 보탬이 좀 되죠."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까?''
"뭐 달리...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었습니다. 말을 못하는 딸을 데리고 있는 탓인지 모든 행동을 극히 조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가 말을 못합니까?"
"네. 예쁘고 총명한 아이인데 말을 못합니다."
''다른 사항은 없습니까? 남일수를 찾아온 사람이라던지? 아니면 함께 이곳을 온 사람이라던지?"
노경위가 침을 꿀꺾 삼키며 물었다. 윤명 스님은 노경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별다른 내용이 없는 말만을 늘어 놓았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디서 걸려온 전화도 없었고요. 다만 남처사가 한번 외출을 해 며칠 만에 돌아오는 것을 빼면..."
윤명 스님은 결국 남일수에게는 하숙집 주인이었다. 노경위는 그에게서 하숙생과 주인 사이의 거래 내역외에는 더이상 알아낼 것이 없었다.
"남일수가 쓰던 방이 어디입니까? 사용하던 물건들은 있나요?"
"네 저방입니다. 지금 아이가 혼자 자고 있습니다."
윤명 스님이 노경위를 집밖으로 데리고 나가 절집 마당 한쪽에 길다랗게 지어 놓은 막집으로 갔다. 방이 대여섯개가 죽 늘어서 있었다.
"이 방입니다."
"오...!"
노경위는 방안을 보고 작은 신음을 토해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방안에 홑겹 이불을 덮고 조용히 누워 자고 있는 한 아이의 모습이 소영을 너무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아이입니까?"
"다래라고 부르더군요.''
"다래요? 다래...남다래..."
노경위는 방안으로 들어서며 다시 한번 아이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긴머리 곱상한 얼굴이 영낙없는 어린날 소영의 모습이었다. 머리를 감고 갈래를 따주며 끔직하게 위하던 딸 소영이 거기 누워 있는 듯했다.
"이게 남일수의 짐입니까?''
노경위는 방안 책상 위에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작은 가방 두 개를 보며 말했다. 가방 안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어른바지 한벌과 아이의 옷 몇가지가 전부였다. 노경위는 다시 한번 방안을 살폈다. 윤명 스님은 마당에서 서성거리며 노경위의 일처리를 지켜 보고 있었다.
"크응!"
"...?"
아이가 갑자기 눈을 떴다. 검고 맑은 눈이 노경위를 먹물로 물들일 듯 깊고 깊었다.
기다리셨죠.
천상에서 못 피운 꽃.
다시 피워 볼래요.
"... ...!"
"니가 다래냐?"
노경위가 잠에서 깨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있는 다래에게 물었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엉망이었다. 아이의 긴머리를 누가 있어 만져 주었을까. 노경위는 그 아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잘 다듬어 줘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이 껴안았다. 아마 노경위가 먼저 양손을 내밀었을 것이고 아이가 그 품에 안겼을 것이다.
바람이 불었다. 따뜻하고 뜨거운 바람이었다. 아이의 눈물이 차가웠다. 노경위는 또 하나의 버려진 꽃을 보듬고 있었다.
노경위는 먼저 아이를 집으로 데려다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은 남일수가 말한 시설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함께 떠돌던 아버지가 죽고 아이에겐 아무것도 남겨진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아이는 말을 못하는 장애자이기도 했다. 사건은 점입가경이었다.
아,
가을은 깊고 꿈은 푸르기만 했다.
4. 슬픈 바다
다래에 대한 신원 조치를 서와 구청에 보고 하고 노경위는 서장의 부름을 받고 그의 앞에 섰다.
"노경위, 어떻게 할까? 중요 단서가 나온게 아냐? 사람을 붙여 줘?"
서장이 숨돌릴 사이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먼저 아이를 안정시키고 서서히 연원을 찾아야겠습니다. 아이가 너무 어리고 더구나 말까지 못하는 장애인인지라 특별한 단서를 찾기가 힘듭니다."
"선천성 장애던가?"
"그것도 아직은 좀더 지켜보아야겠습니다."
"아이가 충격을 받으면 그럴 수도 있을거야. 그런데 아이는 당분간 자네가 데리고 있겠다했
다면서?''
"네, 구청과 경무과장에게도 그리 말했습니다."
"힘 안들겠나? 자네 딸 아이 데리고 혼자 살고 있다면서..."
서장이 노경위를 위로라도 하듯 말했다. 노경위는 더이상 그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나가봐. 특별한 상황 변화가 있으면 즉시 보고하고..."
노경위가 서장실을 나와 한국기원으로 갔다. 조명인과 약속이 되어 있었다. 조명인은 한국기원에서 열리고 있는 전국 아마바둑 최강자전의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가슴에 꽃을 달고 있는 조명인이 노경위를 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직 식전입니까?"
"아닙니다. 끝나고 잠시 후에 식사 자리가 있습니다. 이런 아직도 꽃을 달고 있군."
조명인이 가슴에 달고 있던 꽃을 떼어내며 기원 안의 특별대국실로 노경위를 안내했다.
"그래, 더 묻고 싶은 게 뭡니까?''
"아이를 찾았습니다."
"오! 그래요. 그거 참 잘 되었군요. 경찰이 그 일로 애를 많이 쓰는 것 같던데요."
"다 명인님의 덕분입니다. 자칫 헛트로 넘겨 버리면 그만인 사안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셔 수사가 진척을 보고 있는 겁니다."
노경위가 조명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다음 질문을 했다.
"명인님?"
"네, 말씀 하시죠."
"남일수가 보고자 했던 바둑판에 대해 좀더 아는 게 없습니까?''
"바둑판요? 글쎄요... 내가 지난번 말한 그 정도 외엔 원하면 판을 보여 드릴 테니 직접 한번 보시죠."
조명인이 바둑판을 직접 살펴봐도 좋다는 말을 했다. 그의 얼굴은 편안했고 여유가 넘쳤다.
그때 기원의 한 여직원이 두 잔의 차를 내왔다. 조명인은 한국기원 안에서도 스타였다.
"고마워요. 자 차를 듭시다."
" ... ...!"
노경위는 차를 마시며 더이상 조명인을 탐문한다는 것은 요령 부득임을 느꼈다. 바둑판 외에는 더이상 그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인가.
노경위는 조명인에게 바둑판을 보여줄 날짜를 약속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소영이 입이 퉁퉁 불어 있었다.
"어? 아빠..."
"왜? 아빠가 안 반가운거야?"
"아냐, 아빠 바쁠 거라고 했잖아. "
소영이 손에 털이개를 들고 있다가 말했다. 방안의 먼지를 청소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소영이 왜 입이 불은거야? 화나는 일이라도 있었어?"
"아빠, 다래 있지. 다래 어디 아픈가봐.그래서 속상해서..."
"다래가 아프다고?"
노경위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다래를 보고 다가가 이마에 손을 대 보았다. 다래는 눈을 감고 잠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마가 뜨겁지는 않았다.
노경위는 다래의 얼굴을 한 손으로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다래는 벌써 열다섯 시간 이상을 자고 있었다.
"아빠, 다래 우리집에서 살면 안될까?"
소영이 다래의 작은 손을 잡고 물었다. 다래에 대한 관심과 동정이 어느새 소영의 마음 속에 자리 하고 있었다.
노경위는 다래 옆에 잠시 누웠다. 지난밤 한 숨도 못 잔 피로가 몰려왔다. 비몽사몽 꿈이 찾아왔다.
한 고풍스런 한옥이었다.
지붕에는 청태가 끼고 용마루 위에는 커다란 구렁이가 또아리를 틀고 가을을 호흡하고 있었다. 대청 삼간에 두 사내가 순장판을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구렁이가 용마루에서 대청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스멀
스멀.
구렁이의 움직임은 조용하고 노련했다. 구렁이가 혀를 내밀었다. 그 혀가 노반장의 얼굴을 핥으려 덤볐다.
"헉!"
노반장은 잠에서 펄쩍 깨어 자리에 앉았다. 그때서야 다래의 손이 자신의 얼굴을 만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다래야...!"
"아부!"
"... ... !"
다래가 뭐라는지 입안에서 우물거리는 소리를 했다. 아버지라는 듯도 했고 아빠라는 소리 같기도 했다.
노경위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사적으로 다래를 안아 화장실로 갔다. 아이를 키워본 경험으로 얻은 자산이었다. 다래는 소변이 마려운 모양이었다.
"... ...!"
다래가 두 손으로 노경위의 양팔에 매달려 소변을 보았다. 두 손의 힘이 무척이나 강했다. 그 힘은 오히려 소영의 힘보다 강한 듯했다.
4. 슬픈 바다
노경위의 고독한 수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남일수의 유일한 혈육인 다래를 찾아 실타래 같은 단서를 잡기는 했으나 다래는 생각 이상으로 아무런 정보를 주지 못했다. 아니 정보를 주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수사에 혼란을 던지고 있었다.
"아무런 단서가 못 되고 있다. 다래는 그저 남일수의 어린 딸일 뿐이다. 남일수는 말 못하는 어린 딸을 데리고 다니며 무엇을 한 것일까? 직업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서 생활을 한 것일까? 왜 주민등록도 못하고 산 것일까? 그리고 그에게 있어 바둑은 또 뭘까?"
노경위는 위와 같은 의문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모든 궁금함이 쉽게 해소될 사항들이 아니었다. 하나 같이 너무도 막연한 사항들이었다.
조명인의 집에서 확인하고 수십 장 사진까지 찍어온 바둑판도 별다른 특이 사항이 없었다.
그냥 명반(名盤)이라는 인식 외엔 달리 생각할 만한 아무런 의문점이 없었다.
노경위는 다시 자명사를 찾았다. 자명사는 남일수의 생전의 모습을 기억하는 거의 유일한 곳이었다. 그가 그 곳에 하숙을 하고 있었고 딸을 맡겨 놓고 있었으며 초라한 것일망정 그의 유품이 몇가지 남아있던 곳이다.
"아이는 어찌 처리하셨는지요?"
윤명 스님이 노경위를 보고 다래를 물었다. 아이의 신병 처리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구청 사회 복지과를 통해 다래의 신병 방향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저의 집에 데리고 있기로 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애를 많이 쓰시는군요."
윤명 스님이 입에 발린 소리를 했다. 다래 때문에 신경을 쓰던 자신이 멋적은 모양이었다.
"스님, 이 절이 오래된 절이라면서요?"
"그렇죠. 문화재청의 관리를 받는 전통 사찰입니다."
윤명 스님이 자신의 절을 자랑 할 수 있는 기회라는 듯 한껏 신명을 냈다.
"얼마나 오래된 절입니까?"
"이리 와 보시죠. 절의 뒷마당에 부도가 하나 있습니다. 거기에 기록이 있지요."
윤명 스님은 절의 뒷마당으로 노경위를 안내했다. 제대로 손을 보지 않은 잡초 속에 어린 아이 키 정도의 부도(浮禱)가 놓여 있었다.
ㅡ청심원력 초명보살.
부도에는 초명 보살의 원으로 자명사가 건립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초명이라는 여자의 시주로 절이 지어졌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연대는 구체적으로 안 나와 있지 않습니까?"
노경위가 부도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부도의 석재가 오랜 연륜을 말해 주고 있었으나 기록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지난 1986년, 이 절을 전통 사찰로 지정할 때 이 부도를 해체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부도 속에서 비단에 적힌 시주자와 시주자의 원(願)이 적힌 비망기가 나왔습니다. 중종 15년이었죠. 지금부터 450년 전입니다."
"비망기가 적힌 비단은 여기 보관 되어 있나요?"
"아뇨. 당시 부도를 해체하고 검토한 대학에서 보관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동국대죠 아마..."
"비망기 내용은 알 수 있습니까?"
"별다른 내용은 없습니다. 초명 보살이 절을 세우며 명을 빌었던 몇몇의 이름과 축원 한 줄이 전부니까요. 복사한 내용을 한 장 드릴까요?"
윤명 스님이 자신의 방으로 가 작은 종이 한 장을 가져왔다. 자명사를 알리는 일종의 홍보 자료인 셈이었다. 사찰의 빈한함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ㅡ가없는 바다에 꽃이 되어지이다.
미륵 당래 용호 막장대 나무 미륵존자 나무 관세음.
"미륵...?"
노경위는 자료를 본 순간 심장이 얼어 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마치 얼음물을 머리 위로 덮어쓴 느낌이었다.
"왜? 뭐가 이상합니까?"
"여기 있는 미륵이 사람 이름입니까?"
"그렇지요. 옛날에는 이런 이름이 흔했던 모양입니다. 불가에서 보면 불경스럽기 그지 없는 일이나 이때만 해도 불가를 극심하게 탄압하던 시기인지라 상놈들의 이름에 미륵이니 석탑이니 하며 마구 붙여 주던 때이죠."
"... ...!"
노경위는 경내를 찬찬히 돌아보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미륵은 사람의 이름이 분명했다.
남일수의 등에 꽂혔던 비수에 새겨져 있던 미륵의 의문이 자명사의 부도 속에서 풀리고 있었다. 그러나 노경위는 고개를 흔들었다.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정리가 아닌가.
"참...나도 딱하군. 이런 황당한 내용에 혹 하다니..."
노경위는 스스로 입맛을 다시며 부도 주위를 맴돌았다. 옛날 초명이라는 한 불심 깊은 보살이 있었다. 그는 거금을 내어 자명사를 짓고 미륵 당래 막장대 용호라는 사람들의 명복을 빌었다.
어떻게 보면 초명이란 여자는 이들 네 사람을 위해 자명사를 지은 것이었다. 가없는 바다에 꽃이
되어지이다. 이 문장은 결코 평범한 문장이 아니다. 이 문장 속에는 어떤 사연과 연원이 담겨 있을 듯했다.
"동국대라 하셨습니까?"
노경위가 윤명 스님에게 물었다. 대학으로 찾아가 볼 심산이었다.
"네 맞습니다. 가 보실려고요?"
"다음에 다시 뵙죠. 자꾸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노경위가 인사를 하고 절을 나와 무작정 동국대 박물관으로 향했다. 수사는 무지막지한 발품이 정석이고 왕도였다.
대학 캠퍼스엔 가을이 와 자리를 깔고 누워 있었다. 마로니에 잎새가 교정을 어지럽히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낭만적으로 보였다. 대학 박물관은 학교 안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다.
"응...?"
박물관 앞에 커다란 안내판이 눈길을 끌었다. '박윤님 미륵 탱화전'이란 입간판이었다.
노경위는 박물관을 방문하기 전에 먼저 미륵 탱화전이 열리고 있는 미술관을 찾았다. 박물관과 지척의 거리였다.
미술관 안에는 꽃이 피어 있었다. 가없는 바다에 꽃이 되어지이다. 라는 자명사 건립 비망기의 문장이 떠올랐다.
4. 슬픈 바다
법증(法證)이라 했던가. 인간이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마음으로 새겨 향(香)으로 뒤돌려 천지간에 가교를 이루는 것이 단청이라 했다.
미술관 안은 온통 붉고 푸른 화원이었다.
ㅡ어디서 화원<花園>을 찾는다는 말이뇨.
너의 마음속에
화개(花開) 만발한 꽃밭 있나니.
<대장경>
탱화의 오색 색감이 화려 장엄했다. 화폭을 그야말로 극 밀도로 채워 놓은 안료의 질감은 총 천연색으로 꾸는 꿈의 표현이자 하늘에 걸린 오색 무지개 같았다.
금어(金魚)의 진중하고 내밀한 손놀림 속에 미륵 보살이 화폭에 생명을 얻고 있었다. 여자이기에 불모(佛母)라 부르는 화가가 전시관의 한쪽에 마련된 장소에 앉아 탱화 그리기를 시연하고 있었다.
불모의 손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미륵 보살은 인자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전시장으로 들어서는 중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시장 입구에는 미륵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미륵에 대한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관세음 보살 응험기의 내용이었다. 미륵 보살에 대한 설명이 있는 고기(古記) 바로 그것이다.
ㅡ 미래에 이 땅에 계두성이 있을 것인데 땅은 기름지고 백성은 번성한다. 사람들은 질병을 모르고 장수하며 한 마음으로 화합하고 사랑한다. 계두성을 다스리는 왕이 전륜성왕이다. 그 전륜성왕의 신하들의 가정에서 미륵이 태어난다. 그가 오는 곳이 도솔천이다.
그는 8만 4천 년을 살것이고 그의 법(法)은 8만 4천 년을 갈것이니 오직 그의 나라를 보려거든 부지런히 정진하고 배우라.
노경위는 미륵에 대한 안내문을 자세하게 읽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술관을 나와 박물관으로 갔다. 칼의 표식과 종교적 미륵의 어떤 연관성은 떠오르지 않았다. 대학 박물관의 관장은 서남석 교수였다. 그는 역사학자로 자명사 조사시 참여한 담당자였다.
"뭐가 궁금 하십니까?"
서교수는 형사의 방문을 받고 놀라움과 함께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자신의 영역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 궁금한 듯했다.
"자명사의 내력이 알고 싶습니다."
"자명사의 내력이라면...?"
"자명사가 초명이란 시주자의 힘으로 세워진 절이라면서요? 부도에서 나왔다는 미륵이니 당래니 하는 내용도 궁금합니다."
"형사가 그런 것이 왜 궁금하죠? 수사에 필요한 것은 아닐 테고요?"
서교수가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수사는 모든 것을 필요로 합니다. 오죽하면 실낱이라도 잡으려 하겠습니까?"
"네, 그렇군요. 그런데 형사님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시네요. 자명사의 부도를 해체 조사하는 과정에서 비망기가 나왔죠. 초명이란 여자가 미륵 당래 막장대 용호라는 사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절이라는..."
"그리고요?"
"그게 전부입니다. 다만 미륵이니 당래니 하는 사람들은 중종 반정기에 거사에 참여했던 인물들 입니다. 미륵 당래 이 두 사람은 실록에도 기록이 나오는 사람이죠. 두 사람은 형제인데 인천 김포를 무대로 활동하던 일종의 암흑가의 보스들이죠."
"네에?"
노경위는 일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중존 반정이란 연산군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권을 세웠던 정변 아닌가. 그 옛날의 혁명에 암흑가의 인사들이 끼어 들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더구나 역사학자의 입으로 듣는 암흑가라는 말이 신선하기까지 했다.
"왜 놀라십니까? 수갑이라도 들고 가 체포라도 할 태세군요? 하하하."
서교수가 유쾌하게 웃었다. 외성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
"암흑가라는 말이 충격적이군요. 조선시대에도 암흑가라 부를 만한 조직이 있었나 보군요?"
노경위가 관심을 보이며 질문을 하자 서교수는 기다렸다는 듯 설명을 했다. 그의 전공이 '조선시대 사회사' 였다.
"형사시니 조직 폭력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실겁니다. 종로패니 명동패니 하며 한국 근대의 암흑가를 구성하던 조직 폭력은 사실 조선시대가 정점입니다. 조선은 절대 군주제여서 법률이 강하고 가혹했습니다. 그것은 사회 질서가 단단하지 못했다는 반증이죠."
서교수가 물을 한컵 노경위에게 따라 주며 말을 이었다.
"조선 최대의 폭력단은 서강단(西江團)입니다."
"서강단요?"
노경위가 메모를 하다 고개를 들고 서교수를 바라보았다. 서강단이란 말이 검경의 '조직 폭력 관리 시스템'을 적용받고 있는 삼대 패밀리의 한 조직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서강 나루를 무대로 한양의 밤의 세계를 수백 년 간 주름잡았던 조직이죠. 왕조실록이나 승정원 일기 형조 문초 등의 기록에 수 없이 나오는 그들의 기록은 한마디로 밤의 제국사를 연상시키죠. 조정의 관리를 벗어나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지 않았나 의심이 들 정도로 그들은 막강했죠. 서강의 상권, 고급 관리들의 정치적 청부, 대외 무역의 지분 개입 등 한마디로 미국 마피아의 원조격인 조직이었죠."
"그 정도까지입니까?"
"미륵, 당래가그 전형입니다. 그들은 인천 김포의 암흑가 출신으로 조직을 이끌고 반정에 참여, 원종공신의 반열에 들었던 사람들이니까요."
"공신이라면...?"
"혁명 공신입니다. 정권을 바꾼 일등 공신이란 말이죠. 왕조시대의 공신이란 한마디로 귀족 중의 귀족을 말합니다. 서강단뿐만이 아닙니다. 평양에는 폐사군단이라는 조직이 있었죠. 의주에는 만단(彎團) 그리고 채단 북단 등 거의 전국적으로 조직들이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 ...!"
노경위는 마치 경찰청 수사 간부 연수소에서 강의를 듣는 착각을 했다. 그만큼 서교수가 풀어 놓는 조선시대의 암흑가는 수사관으로 꼭 배워 둘만한 얘기였다.
4. 슬픈 바다
" 조선의 건달들은 왈자라 했고 또한 그들의 세계는 검계라 칭했죠."
" 검계라고요?"
노경위는 서교수의 말에 반문을 했다. 검계라는 말은 처음 접하는 말이었다.
" 네 무도한 집단이라는 의미의 말입니다. 검계의 사람들은 한마디로 세상을 거꾸로 살아가는 부류들이었죠. 맑은 날 나막신이요, 비오는 날 가죽신이란 말도 바로 이들에게서 연유한 말입니다.
서교수는 이왕 내친걸음에 아예 조선시대의 왈자 개론을 펼쳐 놓았다. 조선의 검계는 다음과 같은 철칙이 있었다.
1. 왈자의 몸엔 칼자국이 있어야 한다.
2. 낮에는 자고 밤에 활동한다.
3. 맑은 날은 나막신을 신고
4. 비오는 날은 가죽신을 신는다.
" 그게 왈자들의 좌우명입니까?"
" 그렇습니다. 이를 지키지 못할 바엔 아예 왈자를 참칭하지 못하는 겁니다."
" 하하,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은 문신을 하는 요즘의 건달들과 통하는 말이군요. 밤 낮을 바꾸어 사는 것도 비슷하구요. "
노경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과거와 현대의 건달들의 생리가 너무도 비슷 했다. 서교수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며 좀더 자세하게 설명을 했다.
" 여기서 우리는, 비오는 날 가죽신을 고집하던 대목을 주목해야 합니다. 습기와 상극인 가죽신을 신는다는 것은 왈자들의 행태가 세상을 거꾸로 산다는 저항의 표시임과 동시에 그들의 풍족한 경제적 여건을 말하는 겁니다."
" ... ...!"
" 왈자들은 바로 이런 행태로 세상과 자신들의 삶을 구별지으며 색주가와 투전판 상단 등의 상권에 끼어 들어 기생하던 조직입니다."
" 맑은 날 나막신 또한, 비오는 날 신어야 맞는 말이군요. 모든걸 거꾸로 사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 다는 말이군요. 하하 세상에 참..."
노경위가 서교수의 설명을 듣고 혀를 차며 말했다. 조직폭력의 역사가 수사 간부 연구소에서 들었던 이론을 뛰어넘어 실로 가공할 정도의 연원(緣原)에 기반을 대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 서 교수님, 자명사는 어떤 절입니까?"
노경위가 서교수에게 자명사에 대해 물었다. 그와 함께 자연스럽게 화제가 바뀌었다.
" 어떤 절이냐고요?"
" 네, 부도에서 나온 내용 말고 다른 것은 없느냐 그 말이죠?"
" 자명사는 중종 15년, 그러니까 1521년에 지어진 절입니다. 초명이란 여인이 미륵 당래라는 검계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절인거죠.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한마디로 이들의 관계속에 엄청난 '비하인드'가 있었을 겁니다."
" 비하인드라면?''
" 미륵과 당래가 누굽니까? 이들은 장길산이나 임꺽정보다도 영향력이 더하던 무리배입니다."
" 장길산이나 임꺽정보다도요?"
" 장길산과 임꺽정은 좋은 작가들을 만나 세상에 나온 인물들입니다. 미륵 당래는 결코 그들보
다 못 하지 않음에도 아직 눈 밝은 선자를 못 만나 방치된 인물이죠. 그런데 오늘 형사분의 면전에서 그들의 얘기를 하는군요."
노경위는 물로 입을 축이며 다음을 물었다.
" 그 외 다른 것은 없나요?"
" 자명사는 개인 사찰입니다. 당 시대의 고승이나 특정 종단의 원력으로 세워진 절이 아니라 그 말이죠. 이런 절의 경우 유물이나 기록 등이 부실하기 마련입니다. 후대에 물려 내려오면서 체계적인 관리가 안되기 때문이죠."
" ... ... ."
노경위는 더이상 서교수에게서 얻어낼 것이 없음을 알고 다시 자명사로 향했다.
수사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노경위는 자명사로부터 남일수의 죽음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경위는 자명사의 경내로 돌아와 부도 옆을 서성거렸다. 절은 텅비어 있었다. 하숙생들도 절을 지키는 스님도 외출 중인 모양이었다. 노경위의 뇌리 속엔 복잡한 방정식이 펼쳐졌다. 칠판과 분필은 없었다.
-살인이다.
-남일수 40대 중반의 사내다.
-피살자의 미륵이란 표식이 있는 칼이 꽂혀 있었다.
-그의 신원이 불명이다.
-바둑의 고수였다.
-바둑 실력은 당대의 프로 정상급과 견주어 손색이 없었다.
-10살 내외의 딸 다래가 자명사에서 발견되었다.
-자명사는 조선 중종 15년에 세워진 절이다.
-그 곳 자명사에서 미륵이란 칼의 표식과 같은 이름을 발견했다.
수사의 진로는 철벽 앞에 가로막힌 꼴이었다. 모든 것이 오리무중이었다. 최대 난관은 역시 남일수의 신원 파악이었다.
남일수의 신원을 알아낸 후에야 원한, 치정, 금품, 우발적 살인, 기타 목적 등의 수사 유추가 가능 해지는 것이었다.
" 끄응!"
노경위는 신음을 토해냈다. 어느새 대웅전 위로 저녁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오색 단청에 투영된 노을이 자명사를 덮고 있는 나뭇잎을 겁탈하며 찾아온 가을을 더욱 실감나게 했다.
노경위는 다시 한숨을 내 쉬었다.
바람이 차가웠다. 조만간 가을의 목을 비틀어 어느 쓰레기통에 쑤셔 박아버릴 북풍이 시작될 것이다.
바람이 자명사의 경내를 쓸고 지나갔다. 낙엽이 바람에 등을 떠밀려 한 쪽으로 몰리다 흩어졌다. 어디선가 군마(軍馬)의 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발굽 소리는 부도를 넘어 저쪽 어디선가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 ... ...?"
노경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명(耳鳴) 현상인가.
두두둑.
두두둑!.
호마의 말발굽 위로 일단의 기치(旗幟) 창검이 보이는 듯했다. 창 칼 군기가 짙은 안개를 헤치고 앞으로 앞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5. 서강(西江)
바람처럼 빠르게 태산처럼 진중하게
<손자>
유령의 움직임이었다.
기도비닉을 유지한 일단의 사내들이 다리 없는 유령처럼 안개의 강을 헤치고 동으로 동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물안개가 피어 올랐다. 새벽의 안개를 엄폐 삼아 배를 띄운 황단의 종도들이 서강에 도착한 시간은 땅거미가 짙게 드리운 밤이었다.
세 척의 세곡선에 나눠 타고 온 백여 명의 종도들은 나루에 내려 이미 약속된 행군 대형으로 서강패의 적소(赤所)로 소리 없이 전진했다.
선두는 당래였다.
거친 구렛나루와 이마부터 아래 턱까지 길게 칼자국이 나 있는 역발산인 그는 미륵의 친동생이자 김포와 강화도의 백정의 두령이자 황단의 중요 전력이었다.
" 드디어 우리가 한양에 입성을 하는구먼. 아이고 감개가 무량하구먼. 암!"
당래가 들고 있던 부월(斧鉞)을 고쳐 들고는 자신을 따르는 40여 명의 부하들의 얼굴을 살펴 보았다. 하나같이 비장함과 단단한 각오가 묻어 있었다.
" 빨리가자!"
당래가 구렛나루를 씰룩거리며 쇳소리를 내뱉었다. 그의 음성이 어둠을 뚫고 선두 대형을 이끌었다.
원래 용호가 선두에 서기로 되어 있었다. 미륵과 친동생임을 감안한 막장대의 작전이었으나 당래의 물불 안 가리는 자원으로 선봉을 맡은 처지라 당래의 각오가 비장했다.
당래의 부대가 서강패의 적소의 정문에 다가서자 용호와 막장대가 이끄는 본대 60여 명이 적소의 뒷담을 넘기 시작했다.
기습 작전은 속전속결이 원칙이었다. 황단이 사전에 얻은 첩보는 유용했다. 당취를 중심으로 한 서강패 백여 명이 적소에 모여 미륵과 당취의 작패를 기다리고 있다는 첩보였다.
병력은 1 대 1이었다. 수백을 헤아리는 서강패는 그 정도 병력으로도 능히 황단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전면전을 상상하지 못하던 서강패에 대한 황단의 전격 도발은 막장대가 부는 호각 소리를 신호로 시작되었다.
" 휘이익!"
호각 소리에 서강패의 적소에 나 있는 커다란 나무 속에 살던 새가 놀라 하늘로 날아 올랐다. 검고 커다란 새였다.
" 오잇!."
당래의 부월이 천지간에 성호를 긋자 농투성이 왈자의 머리 하나가 땅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선혈이 사방에 뿌려졌다.
마른 먼지를 덮어 쓴 몸통 잃은 머리통이 눈알을 꿈벅거렸다. 목에서는 노천 온천처럼 뜨거운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 뭐야?"
" 뭐긴 이놈아!"
" 아악!"
정문을 지키던 또 한명의 서강패의 왈자의 가슴에 창이 꽂혔다. 창끝이 가슴을 뚫고 들어가다 뼈에 걸렸는지 창을 들이밀던 종도의 몸이 움찔했다.
" 쳐라!"
당래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부월을 흔들며 서강패의 본거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적소 안의 넓은 마당에는 서강패의 왈자들이 질서 없이 앉아 있다 혼비백산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전혀 엉뚱한 방법의 공격인 셈이었다.
" 와 아!"
황단의 종도들이 우뢰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밀려 들어갔다. 마치 둑방이 무너진 거대한 물길이 집안으로 쏠려 들어오는 듯했다.
동시에 용호와 막장대의 부대가 뒤에서 서강패를 포위하며 몰려들었다. 어둠 속에서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 우욱!"
"악!"
단발마의 비명이 들렸다. 하늘을 날아오르던 새도 놀라 까악까악 짖었다.
요도에 잘린 팔뚝 하나가 마당을 펄쩍펄쩍 뛰었다. 접전 중 잘린 손목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밤 하늘에는 달도 떠 있지 않았다. 서강의 그믐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내가 당취다. 미륵 나와라!"
붉은 비단 자락에 가죽신을 신은 당취가 한 손에 검을 든 채 속절 없이 죽어 넘어지는 부하들을 바라보며 미친 듯 소리를 쳤다. 서강을 중심 삼고 한양의 암흑가를 주름잡아 오던 서강패도 조직적이고 정교하게 기습을 가해온 황단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 당취, 니놈의 목은 내가 거두어 준다."
용호가 검을 겨누며 당취에게 다가갔다. 순식간에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기세가 꺾인 서강패의 왈자들이 당취의 뒤로 몰려들었다. 그들 중 태반이 병장기를 놓치고 있었다.
" 미륵 나오라 했다. 미륵?"
당취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소리를 쳤다. 거의 발악이었다.
" 내가 너를 상대한다. 자, 덤벼라."
용호가 검을 비스듬하게 세우며 발검 자세를 취했다. 그때 막장대의 최후 공격 명력이 떨어졌다.
" 뭐하나? 저놈들을 모조리 절단을 내라!"
누구랄 것도 없었다. 황단과 서강패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기왕 죽는 길이라면 피할 수 없는 열명길이라면 한 명 길벗을 데려간다는 원칙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기호승천세(起虎勝天勢).
하늘로 뛰어오른 호랑이가 지상으로 내려 꽂히며 먹이의 목을 무는 형세로 당취가 검을 내려 뻗어 왔다.
" 와!"
" 우욱...!"
삶과 죽음이 교차했다.
용호는 호랑이 같은 당취의 검세를 막아내며 사방에 가득한 죽음을 보았다 .
누군가의 발목이 떨어져 마루장 위에 구르고 어떤 머리통은 요강 단지 위에 떨어져 부산을 떨고 있었다.
주먹만한 눈알이 나뒹굴고 그것을 누군가 밟아 오징어가 내뿜은 먹물 같은 시꺼먼 물이 흥건했다. 어둠 속에서 검이 빛을 내며 울었다. 그것은 암놈을 그리워 하며 우는 깊은 산속의 들짐승의 울부짖음이었다.
짱!
짜앙!
병장기가 상교(相交)를 하며 순간 순간 생명이 접히고 꺾이는 소리가 판소리의 추임새로 들렸다. 그믐밤은 길고도 무더웠다. 땀과 피와 눈물로 범벅된 당래 막장대 용호의 얼굴 위로 가늘고 미세한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악마의 미소가 저럴까.
당래가 입으로 흘러드는 피를 뱉어내며 담을 넘어 도주하는 왈자의 등에 부월을 꽂았다. 부월이 사내의 등에서 오르가즘을 느끼며 부르르 떨었다.